추석 연휴를 맞아 인근 밀양 천경사를 찾았다. 천경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한 곳이었다. 절벽과 동굴을 품은 듯 들어앉은 절의 모습은 신비로웠고,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데크길에는 사람의 발길도 드물어 한적했다.
절터 언덕 위에는 망루처럼 잘 꾸며진 차담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강을 내려다보며 차 한잔을 마시니, 세상일도 잠시 내려놓는 듯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눈앞에 강과 산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데, 앞쪽에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밭이 그 풍경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한동안 대나무를 바라보며 ‘저 대나무 몇 그루만 베어내면 강이 훤히 보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던 순간, 문득 오래전 책에서 읽었던 한 고사가 떠올랐다. 중국 한나라의 개국공신이자 명재상이었던 소하(蕭何)와 한고조 유방(劉邦)의 이야기다. 유방이 천하를 얻기 전부터 그를 도왔던 소하는 훗날 한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유방이 제왕이 되기 전 어느 날 망루에 올라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마침 소하의 집 뒤편 대나무밭이 경치를 가리고 있었다. 유방은 대나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하는 그 모습을 보고 유방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하인에게 대나무를 베라고 일렀다. 그런데 소하는 베고 있던 하인을 다시 불러 세웠다.
“대나무를 베지 마라.” 하인이 의아해하자 소하가 말했다. “어제 유방께서 대나무를 베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그분이 제왕이 될 분인데, 내가 사람의 표정만 보고 뜻을 헤아려 먼저 행동한다면 훗날 분명히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하는 그렇게 대나무를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훗날 황제가 된 의심 많은 유방이 숙청을 하면서 이 일을 알고 소하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 네가 대나무를 베었다면 나는 너를 가장 먼저 죽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면 이 고사의 뜻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상대의 마음을 넘겨짚는 것은 다르다.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때로는 상대에게 부담이 되고, 영민함이라 여겼던 눈치가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말로 표현된 마음도 있지만, 말하지 않은 마음도 있다. 그 말하지 않은 마음을 알아채는 것이 언제나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필요하고, 보아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큰 배려가 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가족 사이도 그렇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서로의 마음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오해가 시작된다. 부모의 한마디에 서운함을 붙이고, 형제의 무심한 표정에 속뜻을 만들어내고, 오래전 지나간 말을 다시 꺼내며 ‘그때도 이런 뜻이었겠지’ 하고 짐작하다 보면, 결국 상대가 하지 않은 말까지 마음속에서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추석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웃으며 이야기해야 할 자리에서, 지나간 서운함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가족이란 서로의 모든 마음을 알아내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 때로는 모르는 채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사이인지 모른다.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묻지 않고,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냥 웃어넘기고, 상대가 말하지 않은 마음은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오래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혜일 것이다.
천경사에서 바라본 대나무밭은 끝내 그대로였다.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강물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길에는 그 풍경이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 대나무만 없으면 강이 훨씬 잘 보일 텐데’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대나무가 있었기에 오히려 강을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달라졌던 것 같다.
모든 것을 훤히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상대의 마음을 모두 들여다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짐작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대로 남겨두고,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은 대로 존중해 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람 사이에 필요한 작은 여백인지도 모른다.
모처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이번 추석에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 깊이 캐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의 속뜻을 굳이 찾아내려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마주 앉아 밥 한 끼 함께 먹고, 오래된 이야기에 웃고, 건강하다는 말 한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천경사 그 대나무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때로는 베지 않는 것이 지혜이고, 때로는 묻지 않는 것이 배려이며, 때로는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대나무를 베지 않았던 소하처럼.
우리도 이번 추석에는 서로의 마음에 작은 여백 하나쯤 남겨 두었으면 좋겠다. 그 여백에서 가족의 웃음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박원철(진영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