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창조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한국 自生風水論을 본다
1. 풍수계의 두 거목의 서거를 애도함.
2024.1,2월에 우리 풍수계의 큰 인물인 최장조(1950~2024)교수님과 유청림 선생님이 서거하였다.
최교수님은 서울대학 지리학교수를 역임했고 한국자생풍수론을 주창하여 한국풍수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공로가 있다. 교수님은 평생 음양택을 소점하거나 간산기를 작성한 일이 없으니 지사는 아니고 풍수학자이다.
유청림선생님은 유청림풍수기행을 저술하고 풍수카페를 열어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풍수기행은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라학천 등의 49개 비결지를 찾아보고 이기론에 입각하여 저술한 답사기인데 형기론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이다.
2. 한국자생풍수론을 보다.
가) 최교수님의 바램
최교수님이 한국풍수를 양지로 이끌어낼 때에는 풍수가 양지에서 활보하기를 바랐을 터인데 실정은 양지에 첫 발을 딛고는 주눅이 들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교수님 서거 후에는 자칫 자생풍수론이 잊혀질가 염려스럽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연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내 눈높이에서 자생풍수론을 짚어보기로 한다.(2014년 민음사 刊, 한국풍수인물사를 교재로 함)
나) 한국의 자생풍수란 ?
최교수는 한국풍수의 특징을 자생풍수라고 하고 대표적 인물로 도선국사와 무학대사를 들고 있다. 자생풍수라는 단어의 의미는 독자적으로 형성 또는 성장한 풍수라는 뜻인데 그 내용은 무엇인가 ? 최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지답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신라시대까지는 동물적 감각에 의하여 음양택을 선정하였고 이론을 배경으로 한 토지 선정은 없었다. 신라말 唐나라로부터 학술적 풍수설이 도입되어 널리 전파되었고 도선국사가 도입의 길목에 있었으나 중국학설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 풍수관을 전개하였으며 무학대사가 이를 승계한 풍수가 한국의 자생풍수이다. 그 특색은 중국풍수가 개인의 발복이라는 이기주의를 추구함에 대하여, 자생풍수는 사회와 백성을 위한 개벽(개혁을 뜻하는 듯?)을 꿈꾸는 풍수이다. 도선국사가 토지개량을 위하여 비보풍수를 주장하고 무학대사가 한양을 수도로 천거한 것, 이의신(1600년경)의 교화천도론(홍경래나 동학혁명이 풍수를 이용하려고 한 것도 같은 차원인가?)등은 자생풍수의 발현이다.
다) 한국의 자생풍수란 어떤 내용인가?
* 요약하자면 중국풍수는 개인이 발복을 추구하는 소승적(小乘的 최교수는 이기적이라 표현) 풍수임에 대하여 한국자생풍수는 사회개혁(최교수는 개벽이란 단어를 사용)을 지향하는 대승적(大乘的, 최교수는 大同的이라는 표현) 풍수라는 주장이다.
* 과연 그러한가? 도선국사가 토지개량을 위하여 비보설을 주장하고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도와서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李朝건국을 도운 사실은 있으나 특출난 몇 분의 업적이고 대승적 풍수를 요구하는 수요가 많지 않다. 백성들의 주류적 생각은 여전히 자기 집안의 발복을 풍수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訟事의 대부분이 묘지소송이고 명당결록이 유력 집안의 가보로 소장되어 온 사실을 보면 명백하다. 오늘날에도 천도론과 같이 대승적 풍수에 열성인 분도 있으나 주류는 여전히 개인의 발복론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최교수는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을 가려서 보고 전부를 본 것 처럼 이론을 전개하였다.
* 최교수의 다른 책은 읽어 보지 않았으나 이 책이 최근에 발간 된 것이므로 자생풍수를 오해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최교수가 지향한다는 본능 직관 사랑은 그의 風水觀이고 한국의 자생적 풍수와는 개념이 다르다.
* 그렇다면 우리 풍수는 이기적인 소승풍수에 그치고 마는가 ?
그렇지는 않고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이 우리의 자생풍수라고 생각한다.
첫째, 적덕선행(積德善行, 善人)을 권장한다.
도선국사와 일이승의 책은 물론이고 많은 설화에서 한결 같이 강조되는 점은 “적덕선인이어야 명혈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이다. 積德善人은 因果論을 바탕으로 삼아 이기심을 제어하고 남을 위한다는 대승적 자세를 요구하는 이념이다. 중국은 초기부터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 곽박276~324 장서 일명 금낭경)이라 하여 풍수제일주의를 표방하였는데 도선국사는 중국풍수설을 처음 도입하면서 이런 요행주의를 따르지 아니하고 적덕을 강조하고 비보풍수를 주장하였다. 송나라 때 채발父子가 쓴 발미론에 “땅이 좋다 한들 마음씨 좋은 것만 못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명당도에 수시로 선인을 강조하는 것에는 따라오지 못 한다. 또 중국은 땅이 광활하므로 비보풍수가 필요한 경우가 많지 않으나 우리는 비보를 해서라도 한 뼘 땅을 유용해야 된다.
둘째, 穴象을 물형으로 표현한 결록과 산도를 작성하여 傳하였다.
산도가 있음으로 후세인은 보물찾기와 같은 호기심과 재미로 답산에 나서고 있다. 이런 재미 때문에 풍수인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지고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장사꾼도 가세하지만--) 중국은 대륙이니 전국적 결혈지 답사와 산도 작성이 어렵고 물형론이 발전할 환경이 아니다. 현대의 생지 답사기책을 보면 대부분이 명혈발복으로 큰 인물이 탄생해서 사회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저술목적이라 밝히고 있으나 풍수를 좋아 하는 열정에서 저술하는 것이 솔직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장사속도 있겠으나--)
셋째, 앞서 본 비보풍수이다.
넷째, 풍수제일주의이다. 이 점은 단점인데 명당에 쓰면 팔자를 고친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무런 인과없이 음택 하나만으로 팔자를 고친다면 그야말로 天道가 없는 것이고 인과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니 파멸의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음양택은 발복의 개연성을 높이는 요인일 뿐이고 인과의 궤도안에 있다.
다섯째, 절제없이 묘지를 조성한다. 이 점도 폐습인데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묘를 쓰고 放棄해버린다. 모든 산이 묘지로 흉하다. 요즈음은 화장이 대세이지만 10%가 매장을 한다고 치면 1년에 3만기가 조성된다. 몇십년이 지나면 엄청 날 것이다. 좋은 곳이라는 자신이 없으면 매장하지 말고 차라리 화장하고 매장을 할 경우에도 땅을 가리고 아껴 쓰며 방기된 묘는 파묘하여 재활용해야 된다. 이 문제는 근자에 생긴 것이 아니다. 옥룡자 경세록에 의하면, 당일행선사가 해동에 산수가 좋아 인물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황제와 상의하여 묘책을 마련했다. 신령스러움은 산의 기운만 한 것이 없고 추한 것은 人骨만 한 것이 없으니 만산에 인골을 묻으면 인재가 절로 없어질 것이다. 산에 혈처가 한 개씩 결혈된다는 청오자와 곽박의 책을 거두어 불사르고 만산에 혈처가 무수히 생긴다는 잡오행설을 만들어 옥룡자에게 전해 주었다. 옥룡자도 일시 속았다가 허실을 깨닫고 세상에 이런 사실을 경고한다는 내용이다. 위 책은 옥룡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묘지난발을 염려해 왔다는 증빙이다
라) 기타
이 책에 사실 관계가 틀린 부분이 있다. 최교수는 워낙 유명한 분이어서 영향력이 크므로 잘 못 인용되는 경우를 염려한다. 일이승 산도는 상당히 많이 읽히는 책인데 全南편을 보면 “경자년ㅇ월”이라는 형식으로 작성시기를 기재하였다. 이를 환산하면 임란후인 1660년경이 명백한데도 신채호선생의 글에 현혹되어 정조말(1800년 死)로 오해하였다. 그리고 증산교가 교전에 회문산오선위기 장성손룡 승달산호승예불등을 인용하여 풍수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실을 외면하였다. 아마도 증산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2024.8)
첫댓글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대견사 창건 유래.
당나라 문종이 절을 지을 곳을 찾는데, 하루는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떠놓은 물 위에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 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왕이 중국을 다 뒤져도 찾지 못하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찾아낸 곳이라 한다
이 터가 대국에서도 보였던 절터라고 해서 大見寺라 칭했다.
우리나라 산세가 중국과 많이 다른가 봅니다.
소점과 간산기가 없었다..지리학자이기때문에 풍수에 대해서 거리를 둔것일까? 하는 의문이
둡니다.. 분명 풍수지리는 학문과 간산.소점,실전을 통한 이론과 실전의 합치사상의 학문일진데
왜!! 풍수지리학의 자생풍수에 한정 학문적 의미를 세인들에게 각인 시켰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많은 족적을 남기신 면에서는 존경을 받으셔야 되겠지만 음.양택에대한 소점,건축한
경험이 전무하다면...고인돌(지석묘)의 자생풍수, 한양을 도읍지로 풍수설계를 한 조선 양기풍수
를 목도하면서 좀 이러면에도 실전과 경험의 족적을 겸 하셨다면 무학대사의 반열은 아니드라도
하남장용득선생. 청오 지창룡선생, 육관 손석우 선생과 같은 훌륭한 풍수학자가 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그리고 현재 풍수지리학계에도 주목 할만한 분들이 계시다는것을 잊지 말
아야 되겠지요...
저의 소견입니다..글 잘 보았읍니다. 늦었지만 극락왕생을 기원 합니다..
더운 날씨 건강들 하십시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