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그림을 그려 상주문을 만들다
귀이낭은 말했다.
[우리가 언제 오삼계를 도와준다고 말했어요?]
유대홍은 말했다.
[두 분은 오 역적을 도와주려는 뜻은 없으나 이 일이 만약 성공한다면 오 역적이 기세를 크게 떨치게 되어 다시는 그를 제압할 수 없게 되 오.]
귀신수는 나직이 말했다.
[비키시오!]
그는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유대홍이 두 팔을 벌리고 문 앞을 가로 막고 섰다. 귀신수는 왼손을 앞으로 뻗쳐 그의 가슴팍을 움켜잡으려 했 다. 유대홍이 손을 뻗쳐 이를 막았다.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손바닥이 서로 맞닥뜨리게 되었는데.유대홍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얼굴 이 창백하게 변했다. 귀신수는 말했다.
[나는 그저 오 할의 힘을 썼을 뿐이오.]
오립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온 힘을 다 써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사 형제들을 모두 죽이도 록 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귀종이 이렇게 말한 후 두 손을 들더니 한 손은 움츠리고 다른 한 손은 뻗쳐 내었다. 오립신은 팔을 뻗쳐 이를 막으려 하였다. 귀종이 두 손을 다시 움츠리자 오립신은 허공을 막는 셈이 되었다. 귀종은 그의 두 팔 이 움츠러들었을 때 번개와 같이 두 손을 뻗쳐 그의 가슴팍 요혈을 움 켜잡았다. 진근남이 달려들면서 권했다.
[모두 다 절친한 친구이니 무공은 사용하지 말도록 합시다.]
위소보가 말했다.
[서로 다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이렇게 하지요.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귀 나으리께서 이긴다면 우리들 은 세 분이 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이 후배가 궁 안의 사정을 두 분에게 자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귀이낭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이긴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일을 잠시 연기하는 거지요. 오삼계가 죽은 후에 우 리가 다시 황제를 노리고 손을 써도 될 것입니다.]
위소보의 말을 듣고 귀이낭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우리 편 사람들끼리 먼저 싸우게 된다면 목씨 집안에서는 십중팔 구 오랑캐 황제에게 전갈을 할 것이니 이 일은 해내기 어려워질 것이 다. 차라리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남편에게 물었다.
[둘째 나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귀신수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네가 졌을 때 억지를 써서는 안 돼!]
위소보는 웃었다.
[사내 대장부가 한마디 말을 내뱉으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뒤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랑캐의 소황제가 저의 애비도 아 닌데 어째서 그를 감싸고 돌겠습니까? 하지만 이기려면 영웅답게 이겨 야 하고 지더라도 솔직담백해야지요.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감정을 상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진근남은 고의 최후의 한 마디가 퍽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말했 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하여 우리가 대업을 이루는 데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실로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점을 쳐서 결단을 내린다 고 했으니, 우리가 주사위를 한번 던져 보는 것도 뜻이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두 다투지 말고 하늘의 뜻에 따라 이 일을 진행하도록 하 십시다.]
귀이낭이 귀종을 보며 말했다.
[얘야, 손을 놓아라.] [안 놓겠어요.] [저분 소형제가 주사위를 던지며 놀잔다.]
귀종은 크게 기뻐서 즉시 손을 풀었으며 오립신의 가슴팍을 잡고 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오립신은 가슴팍이 시큰거리고 아픈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한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아 끊임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귀 도련님, 주사위를 꺼내도록 하시오. 그대의 것을 사용하도록 합시 다.]
귀종은 말했다.
[주사위? 나는 없는데? 너에게도 없니?]
위소보는 말했다.
[나도 없소. 어느 분께서 주사위를 가지고 계시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노름꾼도 아닌데 주사위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 가?) 귀이낭이 말했다.
[주사위가 없다면 동전을 던져 판가름하는 것이 좋겠군.]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공평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친위병 가운데 는 주사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제가 물어 보도록 하지 요.]
그는 빗장을 뽑고 문을 열더니 대청에서 나갔다. 동쪽의 대청에서 나와 다른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그것은 그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법보(法寶)였다. 하지만 당장 품속에서 꺼내면 귀씨 부부가 반드시 의심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대청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동쪽 대청으로 되돌아가서 웃으며 말했다.
[주사위를 찾았습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어떻게 하시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 노름에 대해서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귀 도련님, 그대는 어떻게 내기를 하는 것이 좋겠소?]
귀종은 주사위를 들고 말했다.
[내 그대와 정확함을 겨루도록 하지.]
그는 손가락으로 주사위를 툉겼다. 그러자 쨍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알의 주사위가 날아가더니 두 자루의 촛불을 끄고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사위가 판자 벽에 박혔다. 군웅들은 이를 보고 일제히 칭찬을 했다.
[휼륭한 재간이군!]
위소보는 말했다.
[주사위를 던질 때는 점수의 높고 낮은 것을 겨루지, 암기의 재간으로 겨루는 것은 아닙니다.]
귀이낭은 말했다.
[그렇지, 그대들 두 꼬마가 한 번씩 던지되 점수가 높은 사람이 이긴 것으로 하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번만 던졌다가는 그가 운수가 좋아 단번에 삼십육 점을 낼지도 모 르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우리가 각기 세 번을 던져 삼판양승제로 하지요.]
귀종은 던지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쁜 일인지라 말했다.
[우리는 똑같이 삼백 번을 던져 이백 번을 이긴 사람이 이긴 것으로 하 는 게 좋지 않을까?]
귀이낭은 말했다.
[그렇게 귀찮게 할 게 뭐람. 각자 세 번만 던지면 돼.]
서천천은 판자벽에 박혀 있던 두 알의 주사위를 파내어 탁자 위에 놓았 다. 위소보는 말했다.
[귀 도련님, 그대가 먼저 던지십시오.]
귀종이 주사위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주사위를 던지려 하는 순간 귀 이낭이 말했다.
[잠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목검성과 유대홍에게 물었다.
[이번 내기에서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목왕부는 이를 인정하겠소?]
유대홍은 귀신수에게 일 장을 얻어맞아 가슴속의 기혈이 끓어올랐었는 데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상대방이 그저 오 할의 힘만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선배 영 웅이라 결코 헛소리는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가 정말 황궁 으로 들어가 황제를 찔러 죽이려 한다면 목왕부의 사람이 어떻게 그를 저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고개를 끄 덕였다. 목검성은 말했다.
[하늘의 뜻이 어떠한지 두 분이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할 수밖에 없겠소 이다.]
귀이낭은 말했다.
[좋소!]
그는 귀종에게 말했다.
[던져라! 점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귀종은 여섯 알의 주사위를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가장 높은 것이 육 점이고 가장 낮은 것은 이 점이군. 그리고 커다랗 게 움푹 꺼진 구멍도 있네?]
귀이낭은 말했다.
[커다랗게 움푹 꺼진 그 구멍이 일 점이란다.]
귀종이 말했다.
[이상하다. 사 점은 붉은 색깔이네.]
그는 오른손을 쳐들었다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쳤다. 여섯 알의 주사위가 모두 탁자 위에 박혔는데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여 섯 점짜리였다. 그는 손바닥 위에다가 주사위를 얹어놓고는 여섯 알의 주사위의 일 점들이 모조리 위로 향하도록 한 이후 후딱 뒤집어 내려쳤 으니 자연히 육 점짜리가 위로 향하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폐병쟁이 같은 녀석이 보기 에는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데 내력이 이토록 심후한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를 그 따위로 던지는 것을 보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이낭은 말했다.
[얘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탁자를 툭 쳤다. 그러자 여섯 알의 주사위가 툭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귀이낭은 주사위를 들고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굴리며 말했다.
[굴려서 나와야 그것이 바른 점수이다.] [그랬군요.]
귀종은 어머니의 흉내를 내서 주사위를 들고 가볍게 탁자 위에 던졌다. 주사위가 떼구루루 구르다가 멈추었는데 합쳐서 이십 점이었다. 여섯 알의 주사위가 이십 점을 냈다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약간 높은 편 이었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들고 새끼손가락으로 몇 번 두들겨서 암암 리에 수작을 부리고서는 부르짖었다.
[다 먹었다!]
그는 주사위를 던졌다. 다섯 알의 주사위가 굴러서 십칠 점을 내었고 마지막 한 알은 계속하여 구르고 있었다. 그가 수작을 부린 수법에 의 한다면 이 주사위는 반드시 육 점이 나와 이십삼 점이 되어 첫번째 판 을 이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 주사위는 굴러가더니 갑자기 탁자 위의 조그만 구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바로 귀종이 조금 전 주사 위를 쳐서 낸 구멍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주사위는 갑자기 멈추었는데 하늘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일 점이었으니 모두 합쳐 십팔 점으로 위 소보가 지고 말았다.
[탁자 위의 구멍이 있으니 이것은 계산에 넣을 수가 없소.]
위소보는 주사위를 들어 다시 던지려고 했다. 진근남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니 첫번째는 네가 졌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도 두 번 남았으니 반드시 내 너를 이기고 말 테다.) 그는 주사위를 귀종에게 내밀었다. 귀종은 의기양양해서 던졌는데 이번 에는 구 점빡에 나오지 않았다. 목씨 집안의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이 기게 되었다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위소보는 네모난 탁자의 한 모 퉁이로 가서 탁자 위에 난 여섯 개의 구멍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사위 를 던졌는데 놀랍게도 네 알이 육 점이고 두 알은 오 점으로 삼십사 점 이 나왔다. 두 알의 주사위 숫자만 친다 하더라도 이긴 셈이니 그야말 로 싱겁기 짝이 없는 승리였다. 쌍방이 각기 한 번씩 승리를 했으니 세 번째는 결승전이었다. 귀종이 대뜸 주사위를 던졌는데 주사위는 한참 동안 돌다가 삼십일점이 나왔 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무척 높은 점수였다. 목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며 속으로 삼십일 점을 이기려면 정말로 높 은 점수가 나와야 한다고 걱정했다.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삼십사 점을 낸다면 너를 이길 수 있다.) 위소보는 새끼손가락을 손바닥에 갖다대고서 몰래 주사위의 위치를 제 대로 가늠한 후에 가볍게 굴렸다. 그러자 여섯 알의 주사위가 탁자 위 에서 하나하나 돌아가더니 멈추어 섰다. 육 점, 오 점, 오점, 육 점, 네 알이 이렇게 모두 높은 점수가 나와 이미 이십이 점이나 되었다. 다 섯 번째 알이 다시 육 점이 나와 이십팔 점이 되었다. 최후의 한 알은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만약 삼 점이 나오면 쌍방은 무승부가 되어서 한 번을 더 던져야 했다. 그러나 일 점이나 이 점이 나오면 지 는 것이고, 사 오 육 점이 나오면 이기는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이길 가능성이 더 큰 셈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사 삼 점이 나와 무승부가 된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던진다면 너는 반드시 재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주사위가 빙글빙글 돌며 바로 육 점에서 멈추려고 하는 것을 보고 부르짖었다.
[좋아! 멈춰라!]
그런데 갑자기 주사위가 더욱 빨리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누가 수작을 부렸다.]
힐끗 보니 귀신수가 주사위를 향해 미미하게 입바람을 불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때 그 주사위는 멈춰서 움직이지 않게 되고 움푹 꺼진 구멍이 하늘을 향하게 되었는데 바로 일 점이 나왔다. 위소보는 놀랍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주사위를 던져 수작을 부리는 사람은 무수히 보았지만 숨을 내쉬어 주사위를 돌리는 사람은 오늘 처음 보았 던 것이다. 이 늙은이의 내력은 고강하기 이를 데 없어 기를 모아 입바람이 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한 알의 주사위가 육 점에서 일 점으로 돌아 가도록 불어 젖혔는데 조금 전 귀종이 삼십일 점을 내었을 때도 운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옆에서 입김을 불어 도와준 것이 틀림 없을 것 같았다. 위소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큰소리로 말했다.
[귀 나으리, 그대는....그대는....휙, 휙, 휙!]
그는 입술을 모으고 숨을 내뿜는 시늉을 하였다. 귀신수가 말했다.
[이십구 점, 네가 졌다!]
그는 손을 뻗쳐서 그 여섯 알의 주사위를 들고 엄지손가락과 중지 사이 에 끼우더니 콱 눌렀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주사위가 깨지 더니 적지 않은 수은이 흘러나와 탁자 위에 흩어졌는데 수은은 수백 수 천 알의 가늘고 둥근 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굴렀다. 귀종은 손뼉을 치 며 웃었다.
[그거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게 무엇이지요? 물 같기도 하고 은같기도 하네.]
위소보는 그가 주사위에 수은을 넣은 사실을 눈치채고 이를 폭로하는 것을 보자 그가 숨을 불어 주사위를 굴렸던 것을 따질 수 없었다. 그는 일부러 깜짝 놀란 척하며 말했다.
[주사위 안에는 수은이 들어 있군요. 귀 나으리, 그대는 정말 이 후배 에게 하나의 경험을 쌓도록 하셨습니다. 주사위는 소뼈로 만드는 것인 데, 오늘에서야 저는 수은이 소뼈다귀 안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알게 되 었습니다. 이전에는 은에 물을 섞어 배합을 하는 것으로 알았지요. 황 소가 밭을 갈 뿐만 아니라 수은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니, 정말 대단합 니다.]
귀이낭은 그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 다.
[모두들 더 할말이 없겠지요? 위 형제, 그대는 황궁 안의 사정을 아무 쪼록 자세히 이야기해 줘야 해요.]
위소보는 눈을 들어 사부를 바라보았다. 진근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하늘의 뜻이 그럴진대 너는 두 분 선배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드리도록 해라.]
그는 위소보가 무척 교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말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나름대로 결정 한 바가 있어 말했다.
[노름빛을 안 갚겠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요. 사내대장부가 남의 것을 빼앗거나 속이는 것은 벌 상관이 없지만 노름빛만은 갚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황궁에는 집들이 너무 많으니 말을 해 보았자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도를 그리겠습니다. 서형과 전 형, 그대들은 손님들을 모시고 계시구려. 저는 그림을 그리겠소.]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고는 몸을 돌려 객청에서 나 와 서재로 갔다. 이 백작부는 강친왕이 선물한 것이라 서재에는 도서들 이 잔뜩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벼루와 붓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위 소보는 노름 운이 나빠지게 될까 봐 이 서재에는 평소 한걸음도 들어가 지 않았다. 중국말의 음으로는 책 서(書) 자와 밑질 수(輸) 자가 같은 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탁자 앞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 렀다.
[먹을 갈아라!]
그러자 하인이 와서 시중을 들었다. 백작대인은 한번도 붓을 들고 글을 쓰지 않았다. 하인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얼굴에 탄복했 다는 표정을 지으며 즉시 정신을 차리고 과거 왕희지가 사용했다는 반 룡자석(蟠龍紫石)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벼루에 맑은 물을 붓고, 저수량 (楮遂良)이 쓰다 남긴 당나라 시대의 송연향묵(松烟香墨)을 쥐고 손가 락에 힘을 주어 숨을 죽이고 짙게 먹을 갈았다. 필통에서 조맹부(趙孟 頓)가 맞추었다는 호주의 은양반죽(銀鑛斑竹)에 양모털이 박힌 붓을 한 자루 꺼내 먹물에 적셨다. 그리고 송나라 휘종(徽宗)이 만들었다는 금 화옥판전(金花王版箋)을 꺼내 펼치고 위 부인이 글을 쓸 때 피웠다는 용뇌온사향(龍腦溫麝香)을 피워서 백작대인이 휘호(揮毫)하기를 공손히 기다렸다. 드디어 위소보는 붓을 잡았는데 그 모습은 정년 서예의 대가 다운 풍모였다. 위소보는 손을 호랑이 발톱처럼 하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무엇을 잡을 것처럼 한 다음에 냉큼 붓대를 쥐었다. 그리고는 듬뿍 먹을 찍었다. 갑 자기 탁, 하는 경미한 소리가 났다. 커다란 먹물 방울이 붓 끝에서 떨 어져 대뜸 한 장의 금화옥판전을 버려놓았다. 하인은 생각했다. (백작대인께서는 글씨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묵화를 그리려고 하시는가 보구나.) 위소보는 그 먹물 방울의 왼쪽에다가 붓을 쭉 내려그어 구불구불한 나 뭇가지를 한 가닥 그려 놓았다. 그 나뭇가지의 왼쪽에다 한 점을 찍었 다. 마치 북종(北宗) 이사훈(李思訓)의 부벽준(斧劈=俊-人+皮) 같기도 하고, 남종(南宗) 왕마힐(王摩詰)의 피마준(披痲=俊-人+皮) 같기도 했 는데, 실로 남북 이종의 장점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인 은 서재에서 종종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뱃속에는 어느 정도 먹물이 들 어 있었던지라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위소보가 말했다.
[작은 소(小) 자를 썼는데 보기에 어떤가? 그럴싸한가?]
하인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위소보가 작을 소 자를 쓴다는 것을 알 고 재빨리 칭찬의 말을 했다.
[대인의 서법은 필순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니 정말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격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늘이 내리신 서예 의 기재이십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자네는 나가서 장 제독을 들어오시게 하게.]
하인은 대답을 하고 나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백작대인께서는 아래에 무슨 글자를 쓰시려고 하실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자를 쓸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위소보는 소 자 아래에다 하나의 둥근 원을 그렸다. 둥근 원의 아래에 는 한 조각의 딱딱한 장작개비 같기도 하고 지게 막대기 같은 것을 가 로로 그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한 마리 지렁이가 그 지렛대를 뚫고 지 나가는 것 같은 모양을 그려 넣었다. 지렁이가 지렛대를 꿰뚫는 이 형 국은 바로 아들 자(子) 자였다. 이 석 자를 연결시키면 강희의 이름인 소현자가 되었다. 현(玄) 자는 쓸 줄 몰랐기 때문에 둥근 원을 그려 대 신한 것이다. 사실 그가 청량사에서 중이 되어 있을 때 강희가 그림을 그려서 성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위소보는 이를 매우 부러워하고 그때 감화를 받은 나머지 삼가 천자 황상께서 행하신 바를 받들어 행하고 싶 었었다. 그런데 오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그림을 그려서 상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소현자의 이름을 쓴 후에 검을 한 자루 그렸다. 검의 끝은 곧장 둥근 원을 찔러 들어가도록 그렸다. 이 한 자루의 칼 같은 물건을 그리는 데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장용이 도달했다. 위소보는 금화옥판전을 접어서 봉투 안에 집어넣고 밀봉한 후 장용에게 내밀며 나직이 말했다.
[장 제독, 이것은 긴급히 올리는 상주문이오. 그대는 즉시 궁으로 들어 가 황상께 이것을 바치시오. 내가 은밀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면 시위 나 태감들이 그대를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통보할 것이오.]
장용은 대답하고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막 품에 상주문을 넣으려 했다. 그때 서재 밖에서 두 명의 친위병이 일제히 호통치며 물었다.
[게 누구냐?]
갑자기 퍽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방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달려 들어 왔는데 바로 귀씨 부부와 귀종이었다. 귀이낭은 장용의 손에 들린 상주 문을 보자 대뜸 나꿔채더니 날카로운 어조로 위소보에게 물었다.
[너는 오랑캐 황제에게 밀고하려는 것이지?]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오....아닙니다....아닙니다....]
귀이낭은 봉투를 뜯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편지지 위에는 이상야릇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리둥절한 그녀는 귀신수에 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게 뭘까요?]
그녀는 다시 위소보에게 물었다.
[이것이 뭐냐?]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주방으로 가서....그....그 단자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 접하라고 당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단자를 만들지 말고 조그만 단자를 만들어 그 단자에는 꽃을 새기도록 했지요. 그가....그가 잘 모 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 준 것입니다.]
귀신수와 귀이낭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색이 대뜸 풀어졌다.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은 과연 칼을 사용해서 조그만 단자 위에 꽃을 새기는 모양 을 하고 있으니 결코 황제에게 밀고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위소보는 장용에게 손짓을 보냈다.
[빨리 가 보시오, 빨리 가 봐!]
장용은 몸을 돌려 서재를 나섰다. 위소보는 말했다.
[많이 준비하고 빨리 만들도록 하시오. 모두들 즉시 먹어야 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니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소.]
장용은 문 입구에서 대답했다.
[예.]
귀이낭은 말했다.
[간식 먹는 일은 서두를 것 없소. 위 형제, 그대는 황궁의 지도를 그렸 소?]
위소보는 한 장의 옥판전을 꺼내 탁자 위에 펼치고 붓을 귀이낭에게 건 네주며 말했다.
[아무리 이리 그리고 저리 그려도 좋지 않군요. 제가 말씀을 드릴 테니 그대가 받아 그리도록 하십시오.]
귀이낭이 붓을 받아 쥐며 말했다.
[좋소. 그대는 말하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이 일을 속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문(午 門)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금수교(金水橋)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꺾 어서는 홍의각(弘義閣), 태화(大和), 중화(中和), 보화(保和) 세 곳의 대전을 지나 다시 융종문(降宗門)에서 어선방(御膳房)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였다. 어선방은 위소보가 관장하던 곳이었고 그가 항상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건청문(乾淸門)을 지나 건청궁 (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어화원(御花園), 흠안전 (欽安殿)에 이르고 어선방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남고(南庫), 양심전 (養心殿), 영수궁(永壽宮), 익곤궁(翊坤宮), 체화전(體和殿), 저수궁 (儲秀宮), 여경헌(麗景軒), 수방제(漱芳齊), 중화궁(重華宮)이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함복궁(咸福宮), 장춘궁(長春宮), 체원전(體元 殿), 태극전(大極殿)이 있고 서쪽으로 나아가면 우화각(雨花閣), 보화 전(保華殿), 수안궁(壽安宮), 영화전(英華殿)이 있으며 재차 남쪽으로 가면 서삼소(西三所), 수강궁(壽康宮), 자녕궁(慈寧宮), 자녕화원(慈寧 花園), 무영전(武英殿)이 있고 무영문에서 다리를 지나 동쪽으로 나아 가 희화문(熙和門)을 지나면 다시 오문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자금성 (紫禁城)의 서반부(西半部)였다. 귀씨 부부는 그가 반나절을 설명한 것이 겨우 황궁의 서반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황궁의 궁전과 누각들을 기억할래야 기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만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이낭은 차례로 궁전 과 문호의 명칭을 기록했다. 위소보는 다시 황궁의 동반부 각처의 궁전과 문호를 이야기했다. 다행 히 그의 기억력은 무척 좋은 편이었고 평소 황궁의 곳곳에서 놀았기 때 문에 지극히 익숙했다. 귀이낭은 한참 지나서야 간신히 황궁의 내구당(內九堂) 마흔여덟곳의 위치를 다 그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붓을 놓고 휴, 하고 한숨을 내쉬 더니 미소했다.
[위 형제가 이토록 명백하게 기억하는 것이 가상하구려. 정말 고맙소.]
그녀는 위소보가 모든 궁전과 무호의 명칭과 위치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마치 자기 집안에 있는 보물을 헤아리듯 조금도 머뭇거리는 법이 없었 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가 거짓말로 날조한다 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귀 도련님이 주사위를 던져서 내기에 이긴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 소이다. 황궁의 어전시위는 평소 대부분 동화문(東華門) 옆의 난여위 (欄與衛) 일대에서 시중을 들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오삼계와 싸움을 하고 있는 터라 오랑캐 황제는 반드시 엄하게 경계할 것이오. 아마도 자금성 마흔여덟 곳 구석구석을 시위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한마디 덧붙여 놓아야, 소현자가 나의 밀보를 전해듣고 위사들 을 더욱 많이 파견한다 해도 이 세 마리의 자라들이 내가 전갈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귀이낭도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위소보는 말했다.
[궁 안에 시위는 무척 많으나 대단한 고수는 없지요. 그러나 만주 사람 들의 화살을 쏘는 재간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세 분은 물론 마음에 두 시지 않겠지요.]
귀이낭은 말했다.
[여러모로 가르쳐 줘서 고맙소. 우리들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세 분께서는 단자를 자신 후에 가셔야 일할 기운이 나실 것 아니겠습 니까?]
그는 문가에 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게 누구 없느냐? 간식을 좀 가져오너라.]
문 밖의 하인들이 소리 높여서 대답했다. 귀이낭은 말했다.
[부를 것 없소.]
그는 아들의 손을 잡더니 귀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재에서 나갔 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너는 그 꽃을 새긴 단자 가운데 십중팔구 무슨 수작을 부려 놓았을 것 이다. 단자에 꽃을 새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한번 속았으면 됐지 두 번 속을 줄 알고?) 그들 세 사람은 위소보의 부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맑은 차 한모금 마 시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들을 문 입구까지 전송하고 두 손을 모아 작 별을 고했다.
[이 후배는 기쁜 소식을 알려 올 사람을 목을 빼고 기다리겠습니다.]
귀신수는 손을 뻗쳐 대문의 돌사자 머리를 한 번 쳤다. 그러자 대뜸 돌 가루가 마구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냉소를 흘리더니 훵하니 떠났 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이 일 장을 만약 내 머리 위에 후려쳤다면 정말 참담한 맛이었겠구나. 그는 나에게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와 같은 일 장으로 내 머리통을 쳐서 박살을 내겠다는 것이겠 지.) 그도 역시 손을 뻗쳐 그 사자 머리를 후려쳤다. 순간 그는 악, 하는 비 명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손바닥 여기저기에 피멍이 맺혀 있었다. 돌사자의 머리는 원래 매끄러웠는데 조금 전에 귀신수가 일 장을 후려 쳐 많은 돌조각이 튀었기 때문에 울퉁불퉁해져 있었던 것이다. 손바닥 을 살펴보니 피멍만 들었을 뿐이지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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