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서준석 님의 스토리• 1일 •
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종학당 뒤편 언덕에 오르면 정수루(淨水樓)가 나온다. 누각에 서면 병사저수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저수지 주변으로 산자락이 이어지고, 그곳에 파평 윤씨 가문의 묘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맨 아래쪽에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1596~1668)의 묘가 있다.
종학당은 조선시대 파평 윤씨 집안 자제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글과 예절을 배우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세운 윤순거의 삶을 들여다보면 종학당 못지않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기록으로 남긴 일이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인기를 끌면서 단종과 그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흐른 뒤, 흩어진 기록을 모아 그의 죽음과 충신들의 행적을 책으로 엮은 인물이 바로 논산 출신 윤순거다.
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종학당에서 멀지 않은 선영에는 윤순거의 신도비가 서 있다. 비석에는 '동토선생신도비명(童土先生神道碑銘)'이라는 제목 아래 그의 생애와 행적을 전하는 한문 글씨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삶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 앞에서 윤순거의 생애를 되짚다 보면 이야기는 논산에서 강원도 영월로 이어진다.
윤순거가 영월군수로 부임한 것은 1660년이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03년이 지난 때였다.
단종은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1455년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됐고, 1457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정식 왕릉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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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거가 영월에서 마주한 것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역사였다. 단종의 묘소와 사당을 둘러본 뒤 관아에 보관돼 있던 「노릉록」을 살펴봤지만 중요한 사건들이 빠져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도 적지 않았다. 오래전 기록은 화재로 상당 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흩어진 기록을 찾아 나섰다. 「추강집」과 「육선생유고」, 「순흥야사」 등 40여 종의 문헌을 살피며 서로 다른 기록을 비교했다. 다른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료를 구하기도 했다.
1661년 7월 16일 쓴 편지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 영월에서는 옛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어 단종의 사적이 사라질까 걱정스럽다며 관련 문헌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잊혀 가는 역사를 붙잡으려는 그의 마음은 편지 곳곳에 드러난다.
그렇게 3년 동안 모은 기록이 1663년 세상에 나온 「노릉지(魯陵志)」다. '노릉'은 당시 단종의 무덤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단종의 무덤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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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2권으로 구성된 「노릉지」 제1권에는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돼 영월에서 죽음을 맞기까지의 과정과 무덤·사당·제사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 제2권에는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 김시습과 남효온 등 생육신을 비롯해 단종과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실었다.
윤순거는 특히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긴 과정에 주목했다. 당시 공식 기록과 민간에 전해 오던 이야기를 비교하며 사건의 경위가 사실대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훗날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자신이 모은 자료를 살펴 진실을 가려내기를 바란다는 뜻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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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관심은 책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단종의 무덤을 지키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단종의 묘역은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었다. 땔감을 구하거나 나무를 베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산불 위험이 컸지만 묘역을 지키는 인원은 부족했다. 윤순거는 무덤 인근의 노릉암을 다시 짓기로 했다. 승려들이 머물며 산불과 벌목을 막고 묘역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사는 1662년 시작해 이듬해 마무리됐다. 윤순거는 자신의 녹봉까지 보태 공사비를 마련했다. 새로 지은 암자에는 지덕암(旨德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완성한 「노릉지」 한 부도 이곳에 보관하도록 했다.
책으로 단종의 역사를 남기고, 암자로는 그 무덤을 지키려 한 것이다.
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윤순거는 지덕암 중건기에 단종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남겼다. 정당하게 왕위를 이은 단종이 불행한 일을 겪었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백성들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단종을 다시 왕으로 예우해야 한다는 뜻도 밝혔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생전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3년 만인 1691년, 숙종은 사육신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7년 뒤인 1698년에는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무덤도 장릉(莊陵)으로 높였다. 윤순거가 「노릉지」를 펴낸 지 35년 만이었다. 「노릉지」는 이후 단종과 충신들의 행적을 살피는 자료로 활용됐다. 1703년 숙종이 신하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명한 사실도 전해진다.
윤순거의 삶을 다시 논산으로 돌려보면 종학당이 새롭게 보인다.
그는 조선 중기 문신 팔송 윤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윤수의 양자가 됐다. 동생은 미촌 윤선거(1610~1669)다. 윤선거의 아들이 조선 후기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명재 윤증(1629~1714)이다. 논산 노성의 명재고택으로 잘 알려진 윤증에게 윤순거는 큰아버지가 된다.
종학당의 기틀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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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순거는 1627년 병사리의 집에 문중 자제들을 가르치는 종학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백록당과 정수루를 세웠다. 이후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학칙을 마련하면서 종학당의 기틀을 다졌다. 동생 윤선거도 교육 규범을 마련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을 보탰다.
종학당은 글만 가르치는 서당이 아니었다. 문중 자제들이 함께 생활하며 예절을 익히고 학문을 닦는 교육기관이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성과는 과거 급제자 수에서도 드러난다. 노성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문과 급제자 46명이 나왔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종학당에서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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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 급제는 쉽지 않았다.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열렸고, 전국에서 최종 합격하는 사람은 33명뿐이었다. 특별시험이 별도로 열리기도 했지만 한 가문에서 46명의 문과 급제자가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다.
윤순거는 학문만 중시한 인물도 아니었다. 1645년에는 곡식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의창을 설립했다. 1658년 금구현령으로 재직할 때는 스승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경험을 기록한 「간양록」을 간행했다. 현령은 종5품의 지방관으로, 오늘날의 군수와 비슷하게 고을의 행정과 재판 등을 맡았다.
최근 윤흥식 논산향토문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열풍과 노릉지」라는 연구 글을 통해 윤순거의 생애와 「노릉지」의 역사적 가치를 살폈다. 윤 연구위원은 이 책이 단종과 사육신·생육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종학당 앞편 산자락에 있는 윤순거의 묘소로 발길을 옮겼다. 묘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가 세운 종학당이 눈에 들어온다.
살아서는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먼 영월에서는 잊혀 가던 어린 임금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자신의 봉급을 털어 단종의 무덤을 지켰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도 힘을 보탰다.
녹봉까지 보태 단종의 무덤 지킨 논산 선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8년. 종학당에서는 더 이상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종학당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죽어서도 멀리서 후학을 지켜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