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시나노의 최대 세력이었던 가쓰라오성의 성주.
신겐의 교전사를 승패로 분석해보면.. 72전 49승 3패 20무라고 합니다.
그 중의 3패를 모두 이 요시키요란 인물이 선사했다죠.
켄신과 함께, 신겐의 숙적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투면에선.. 어쩌면, 켄신보다 더 신겐을 괴롭히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무라카미가는 세이와 겐지 계열(제56대 세이와 천황 아들들의 분류)이었지만,
남북조 시대 때,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편에 가담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나노 수호 오가사와라씨와 그 위세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오가사와라씨와 충돌을 하게 되죠.
에이쿄 9년(1437년),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때,
무라카미 요리키요(賴淸)는 아시카가가에 종사하면서,오가사와라씨와의 항쟁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가키쓰 2년(1442년), 오가사와라가에 내분이 빈발한 틈을 타,
가독을 계승한, 무라카미 마사아키(政淸)는 자가의 세력을 확대하는 기회를 얻습니다.
요시키요는, 그런 마사아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요시키요가 당주였을 때, 무라카미가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데,
사쿠,지사가타(小縣),시라시나(更級),하니시나(埴科),다카이(高井),마노치(水內)의
각군을 지배하면서, 시나노 북동부에서 최대의 세력을 가지게 됩니다.
천문 10년(1541년)엔, 카이의 다케타 노부토라와 동맹을 맺고,
지사가타군의 운노씨와 사나다 유키타카를 코우즈케(上野)로 추방시키면서 위세를 떨칩니다.
그리고, 천문 17년(1548년)..
신겐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전투인 우에다원의 교전이 일어납니다.
전세의 초반은,다케타군이 우세했지만, 무라카미군의 승리로 일단 끝이 납니다.
이때, 신겐은 부상을 당하고, 그런 신겐을 후방으로 옮기던 중..
중신이었던, 우익의 노부카타가 무라카미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채 전사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신겐은, 노부카타 말고도 도라야스도 잃게 되죠.
그리고, 당시까지 다케타군의 무력에 압도되어 몸을 사리던,
오가사와라씨, 니시나씨, 후지사와씨 등이 신겐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덤비죠.
천문 19년(1550), 다케타가는, 드디어 오가사와라씨를 시나노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 후,
무라카미가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북시나노로 진공합니다.
1차 도이시성 전투가 벌어진 거죠. 하지만, 신겐은 이 전투에서도 패하고 맙니다.
거기다, 본대의 퇴각을 돕던 다카마쓰(우에다원에서 전사했다고도 하죠.)군이
쇄도하는 무라카미군에게 포위되어 전사하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다케타군의 본대가 퇴각할 수 있도록,
무라카미군을 저지한 후방의 다케타군 전사자는.. 천명을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천문 20년(1551), 2차 도이시성 전투에선, 사나다 유키타카의 모략으로 도이시성을 쉽게 낙성시켜 버립니다.
같은 해, 아즈미의 고이와 가쿠조 공성전에서 또 한번 신겐에게 패배를 선사하지만..
도이시성 함락을 분기점으로, 무라카미가는 쇠퇴하게 되죠.
천문 22년(1553), 진격해오는 다케타군은 가쓰라오성으로 쇄도하고 싸우지도 않고 낙성시켜 버립니다.
다케타군의 침입에 동요하던 북시나노의 호족들은,다케타세에 쉽게 종속하고, 요시키요는 북으로 달아나..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같은 해에, 나가오가의 원군을 지원받아, 가쓰라오성을 탈환하지만,
주변이 모두 다케타가의 세력하였기에, 염전성까지 물러나게 되죠.
다케타군의 공세로 결국, 염전성은 함락되고 가게토라에게 다시 의탁하게 됩니다.
그 후에, 켄신을 도와서 4차 가와나카지마 합전에 참여하지만, 예전의 찬란함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덴쇼 원년(1573), 요시키요는 연고지로의 환주를 못 이룬 채..
에치고의 근지성의 성주로써 병사했습니다.
아들인 구니쿄(國淸)는 아버지와 같이,나가오(후에 우에스기)가에 속했지만,
구니쿄가 야마우라(山浦)씨를 칭했기 때문에,무라카미가의 대는 끊어집니다.
구니쿄는.. 우에스기 카게가쓰 때, 많은 활약을 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후손들은 세키가하라 합전 이후, 에도막부가 들어서자
우에스기가를 떠나 재야가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