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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기도회
복음과상황 기자님께 ‘왜 이 일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받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말았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장 이상으로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멋져 보여서요!’ 지금부터 이 일이 멋있어 보였던 이유를 제 생각대로 말해볼까 합니다.
IMF 이후 급증한 비정규직 형태의 고용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냈습니다. 비정규 노동은 말 그대로 특정 계절이나 시기에 업무를 제한적으로 고용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퇴직급여나 복리후생 기준도 정규직과 달라서 정규직보다 급여가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비정규직은 보편적인 고용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에 한 번씩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은 물론이고 본사로부터 직접적인 업무 지시를 받는 불법 하청, 도급 형태의 계약이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정해놓은 기준 이하로 시급을 주지 말자는 최저임금 제도가 급여의 표본이 된 것처럼 비정규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고용 방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IMF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했다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임금 노동이 있었습니다. 물론 비정규직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년 이상 근무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보호법이 생겼지만, 현실에서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기보다 23개월 이하 계약직을 양산하는 법이 되어갔죠. 고용하기 쉽고 자르기도 쉬운 수많은 비정규직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언젠가부터 몇몇 기독교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회사의 부당한 해고와 갑질에 맞서 차린 농성 천막 앞에서 기도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 농성을 시작으로 삼표-동양시멘트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파인텍 등 장기 해고 농성장에 기독교인들이 찾아가기 시작한 거죠. 그들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찬양도 부르고 성찬과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분도 계시고 젊은 사람들도 있고 구호를 외치며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는 교회라니요! 주말에도 힘겨운 노동을 하느라 미처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분들도 참여할 수 있는 예배당이 길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예배당 안에서 정의와 평화,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도 외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가볍게 되뇌던 주기도문 한 구절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는 현장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길거리 기도회는 제게 매주 드리는 수요예배와 철야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멋져 보이는 일을 따라가다 보니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곳에서 일할 기회도 얻게 되었지요.
현장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
영등포산업선교회(이하 ‘산선’)는 1958년부터 영등포 지역 노동자와 더불어 활동했던 사회선교 기관입니다. 초기 사역은 공장에 가서 설교하고, 기숙사에서 성경 공부를 이끌고, 노동자를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이른바 ‘전도’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영등포 지역에 수많은 노동자가 몰려들었기 때문이지요. 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나오는 일은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전도 사업을 위해 공장 대표들을 상대로 평신도 신학과 성서의 노동관을 강의하고 체육회를 여는 등 산업전도 교육을 했습니다.
하지만 산선의 초대 총무를 역임했던 조지송 목사는 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 전도에 한계를 절감하고 그때부터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와 경제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 핵심에는 노동자 소그룹 운동을 통해 시작한 노동조합운동이 있었지요. 다음은 조지송 목사의 말입니다.
이후로 산업전도회는 산업선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극심한 탄압, 교회의 탄압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교회라니. 이런 놀라운 선언을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신학대학원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개인 전도에서 사회 구원에 이르기까지 색다른 교회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을 만나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출근 첫날 당산역 출구 위로 비치던 햇살을 보며 반갑게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서 멋져 보이는 일들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죠. 현장 기도회 준비는 물론이고 화장실 청소, 실무자 공동식당 관리, 각종 회의, 노동자를 위한 프로그램 준비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주어진 일을 신나게 했지만, 여전히 낯선 일들이 많았습니다. 현장에서 주로 부르는 ‘민중가요’는 어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군가처럼 강한 반주와 힘주어 부르는 목소리는 옛날 부흥회에서 반복해서 불러댔던 ‘마귀와 싸우는’ 노래처럼 들렸습니다. (부흥회에 처음 이끌려온 비기독교인 입장을 상상해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하고 극단적이어야만 했을까요. 소리치고 싸워야만 한다는 것이 제게는 힘겨운 일이었죠. 물론 그 역시도 멋있어 보였고 투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제 개인적 경험과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이질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기도회가 열리는 현장
누군가의 일상이 흘러가는 길거리에 앰프가 놓이고 별안간 벼락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흠칫 놀라 멀리 돌아 걸어가기도 합니다. 그 큰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기도 하지요. ‘팔뚝질’이라 불리는 몸짓도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합니다. 심지어 똑같은 자세를 계속 반복하면 팔꿈치가 아파져서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가며 하기도 했습니다.
현장 기도회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시간에 열립니다. 문제를 일으킨 회사나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정부 부처 건물 앞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죠. 더 많은 사람에게 노동자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를 알리기 위해 주로 퇴근 시간에 맞춰 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어느 날은 길거리에 앉아 기도회를 하고 있으면 ‘현타’가 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오히려 사명감이라도 생기지만, 날씨 좋은 날 거리에 앉아 무심하게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현장 기도회가 당사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 기도회가 그저 우리의 신앙적 만족을 위한 요식행위는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의 불편한 눈빛을 계속해서 받는 일 역시 스트레스지요.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기도회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행동과 별개로 고민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나의 현장, 나의 노래
보통 하나의 현장에 집중하며, 그 현장의 기도회가 있을 때마다 참여합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여러 현장에서 동시에 기도회를 진행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죠. 부득이하게 날짜가 겹치면, 산선 실무자들은 각 현장에 흩어져 기도회에 참여합니다.
어느 날은 동양-삼표시멘트 현장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른 현장의 기도회와 긴급히 합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광화문 어느 빌딩 앞으로 모여달라는 요청이었지요. 현장에 가보니 빌딩 앞을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한 빌딩 옥상에 각기 다른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 6명이 고공 단식농성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양-삼표시멘트의 노동자 한 분도 빌딩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경찰이 빌딩을 둘러싸고 그 위로 물이나 이불 등 필요한 물품을 올리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농성이 길어지지 못하게 막으려는 행동이었지요. 고공농성도 위험한 일인데 단식까지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습니다.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앰프 등 기도회에 쓸 마땅한 장비도 미처 챙겨오지 못했고 급하게 시작한 기도회는 준비가 미흡하기만 했습니다. 인도자 한 분이 순서에 따라 진행했고, 투쟁가요 중 하나인 〈철의 노동자〉를 무반주로 함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득히 높은 빌딩 위에 올라간 노동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이들처럼, 벽처럼 둘러싼 경찰은 로마의 군대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목사님이 경찰을 향해 단호하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저들에게 물 한잔 줄 수 없냐고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십자가에 달린 목마른 예수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래에서 기도하는 이들은 마치 예수의 십자가형을 슬퍼하는 제자들 같았습니다. 글자로만 머물던 성서의 장면이 마치 제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낯설게 부르던 노래가 제게 새롭게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그동안 남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면, 처음으로 투쟁가요를 내 노래처럼 불렀습니다.
그날은 부활 이틀 전 성금요일이었습니다. 현장 기도회를 졸졸 따라다닌 지 몇 년이 넘어갔지만 이제야 내 노래, 내 현장을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현장과 나의 거리감이 십자가에 달려버린 듯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살고 외쳤던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서야,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 나서야,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라는 한 사람, 교회, 세계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수많은 시간과 사건, 그리고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중력’을 생각해봅니다.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고이기까지 필요한 시간, 마음이 모이기까지 쌓여야 하는 순간, 신앙이 피어나기까지 끊임없이 마음의 밭을 고르고 골라야 하는 기도가 바로 중력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제가 고등학생 때 학교로 가던 길 정부종합청사 근처를 지날 때 들려오던 그 노래, 야간 자율 학습을 시작할 무렵 창 너머로 들려오던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라는 가락이 성금요일을 기억하는 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천막만 보면 무서워 도망가던 한 사람, 신앙과 사회운동 사이의 접점을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한 사람이 기독교 사회선교 단체에서 일하게 된 힘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중력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며 만난 현장은 가장 아픈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처럼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고이는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마음이 이끄시는 곳이 어디인지 발견하는 자리였습니다.
농성 현장, 파업 현장, 가난한 이들이 쫓겨나는 현장, 장애인 이동권 투쟁 현장도 훌륭한 예배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현장으로 독자분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지면이 허락된다면 길거리 기도회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건들과 목소리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차원이 열렸던 이들처럼 오늘 길거리와 현장을 함께 걸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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