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4 나해 주님의 세례 축일
창세 1:1-5 / 사도 19:1-7 / 마르 1:4-11
세례라는 예식 너머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에 와서 전례를 처음 접한 분들은 대부분 “전례가 참 아름다워요!”라는 소감을 말합니다. 우리 한옥성당에 오신 분들도 한옥이라는 전통건축물 안에서 벽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옛날 방식을 접하고서 다른 곳에선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전례에 흥미를 갖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공회 신자들은 “우리 전례는 아름답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단 중 성공회를 비롯해서 천주교, 정교회 등은 전례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여깁니다. 그래서 만일 교회건축물이 규모가 있어서 웅장하거나, 우리 한옥성당과 같이 독특하다면 그러한 건축물과 어우러진 예식과 찬송, 성찬은 그 감동이 배가 되기도 합니다.
전례 예식과 관련해서 저는 작년 우리 교회가 했던 두 가지 일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강화선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와 같은 년도에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 강화 교산교회와 함께 강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교환예배를 한 일입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두 방송사들이 취재할 정도로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은 귀중한 교회일치 성과였습니다. 그 결과, 서로 몰랐고 그래서 오해했던 부분들을 해소하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일부에선 감리교 예식이 우리와 달리 단조로워서 예배를 하고 나서도 좀 밋밋했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소감은 전례를 중시하는 교단에 속한 신자들이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국 성공회에서 만든 훌륭한 전도교육 프로그램인 알파코스를 활용하여 10주 이상 세례자 교육을 하였고, 마침내 성탄 밤에 했던 세례식입니다. 그 때 영세자들은 감동의 눈물의 흘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오래 전 미사 때 복사를 하며 세례와 견진 예식 때 몇몇 신자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전례의식을 통해 성령께서 그 사람들의 심령을 움직여 주신다는 것이 어떤 건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갓난아기 때 세례를 받은 저로서는 그런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억이 없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맞아 저는 아름다운 우리 전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전례가 아름답다는 것이 뭔가? 아름다움 외에 또 다른 요소는 무엇일까 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건물이 주는 분위기,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들의 복장과 행동, 성가대와 회중의 노래 그리고 잘 짜인 예식문 등 외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美)을 느낍니다. 이것은 우리 전례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이 전례의 전부는 아닙니다. 만일 아름다움만을 강조한다면, 세상에는 교회 전례 못지않게 아름다운 의식들이 참 많습니다. 예컨대, 작년에 영국 국왕 대관식은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한 의식이었습니다. 또한 공자제례와 같은 의식도 매우 절도 있고 위엄 있는 예식입니다. 심지어 예식장에서 하는 결혼식도 아름다운 의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세례의식의 원형인 예수님의 세례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례의식과 비교해 볼 때, 굉장히 단순하고 어떤 의미에선 지금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훨씬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교 세례의식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식이 세속의 예식과 구별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선적으로 성(聖)스러워야 합니다. 성스러움은 세상의 일반의전과 종교예식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통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를 느끼고, 이를 통해 신과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례에는 아름다운 외적모습을 넘어서 성스러움이 그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그 성스러움의 원천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본질, 즉 성령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사도 19:6)”는 말씀은 이 점을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기 위해선 우리는 우선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라고 선포하고, 회개했다는 표지로 물로 세례를 베푼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화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성찬례(Eucharist) 때 정심(淨心)기도와 죄의 고백을 제일 먼저 합니다. 또한 세례식 때 먼저 이마에 물을 부어 과거의 나를 씻어내고, 그리고 이마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성령의 인호를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전례는 성스러운 예식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전례는 진실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성스럽다는 것은 일종의 영적인 것과 관련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영도 있지만, 어둠으로 상징되는 영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예식이 세속예식과는 다른 영적인 차원이 있지만, 때론 이 영적인 종교예식이 우리를 올바른 세계, 참된 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세계, 진리와 동떨어진 죽음의 길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씩 이단종교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고, 인생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참됨(眞)은 종교예식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우리 예식에서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기준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향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 친히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시기로 한 겸허와 결연함을 이미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의 마음에 조응하여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르 1:11)” 이에 대하여 유명한 성공회 시인이자, 극작가인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는 “하늘에서, 땅에서, 그리고 지하에서 증언이 솟구치는 이야기다”라고 인상적인 평을 남겼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인생의 혼돈과 공허함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들은 창세기에 있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모습은 마치 창조되기 이전 목표와 형체도 없는 어둡고 황량한 그 무엇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러한 공허와 혼돈의 자리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자 그곳은 하느님의 창조가 시작되는 세계로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가 광야를 가로지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아들 예수 머리 위로 성령이 임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이리하여 그 세례는 진실되고, 거룩하며, 아름다운 의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러한 주님의 세례가 주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례를 통해 이 신비를 경축하고, 그 은총으로 혼돈과 공허함에서 창조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세례라는 의식, 감사성찬례라는 전례를 단지 신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 또는 매 주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세레모니(ceremony)로 전락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세례 축일을 기념하며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 우리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증언하는 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