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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하면 떠오르는 인간이 있다. 바로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2천만 명을 학살했다. 그 가운데 1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숙청이란 명목으로 죽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아들이 독일의 전쟁 포로로 잡히게 되었는데 이때 독일로부터 포로교환에 관한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야코프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좌절감과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수용소에서 돌발행동을 일으켜 독일군 총에 맞아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스탈린은 1932년 부인 네데즈다를 화가 치밀어 오르자 즉석에서 사살했다. 그는 또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있던 가장 절친한 친구를 직접 총을 쏘아 죽였다. 그는 정적이었던 트로츠키가 망명해 있던 멕시코에까지 자객을 보내 도끼로 찍어 살해했다.
그는 또 1930년대 자신의 주치의였던 플레트노브 박사가 다른 의사들과 공모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의사들의 ‘음모 사건’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953년에도 수명의 의사가 수상 살해 음모 죄목으로 기소되었다가 그가 죽자 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정신의학계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뇌 질환, 구체적으로 뇌동맥 경화를 가졌을 가능성 등도 제기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이미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 제기됐다.
그의 정신 질환은 집권 초기에 이미 그 양상이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졌다. 1927년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미하일로비치 벡테레브(Vladimir Bekhterev)는 수상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크렘린에 정중하게 초빙되었다. 벡테레브는 스탈린이 우울증 이외에 극심한 공포에 싸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의사의 양심에 따라 스탈린에게 중증의 '편집증(paranoia)'이란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크렘린 궁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다. 진단을
내린 날(1927년 12월24일) 벡테레브는 독살됐다. 그래서 정신병자 스탈린은 당시 소련에서 가장 유명했던 정신과 의사에 의해 적절하고
과학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던 기회를 영영 잃고 만 것이다
스탈린은 평생 암살을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별장에 똑 같은 방
네 개를 만들어 어느 방에서 자는지 알 수 없도록 별장을 요새화했다. 전등 버튼 또한 자신이 아니면 열리지 않도록 특수 설계를 했다. 그는
자신의 침실에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과잉보호 때문에 스탈린이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사흘이나 지나서야 참모에게
발견됐다.
그가 쓰러지던 날 의사가 하지 말라던 사우나를 한 것이 그를 죽게 만든 계기로 알려져 있다. 안전하게만 믿었던
자신만의 공간이 부메랑이 되어 목숨을 앗아갈 줄은 스탈린도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정신병자 스탈린은 그렇게
죽어갔다.
김정은의 행보도 스탈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모부를 가차없이 숙청하고, 당 간부의 처형에 총이 아닌 대포를
이용한다. 대단히 과격해 보이지만 결국 그 과격함은 지도자로서의 인정 욕구의 일종인 리더십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옮고 그름을 떠나 또는 그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가 아닌가를 떠나 당사자에게는 그런 표현이
일종의 방어방법인 셈이다.
이처럼 내적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클수록 정반대로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정치적인 수준까지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즉 공격적이면 공격적일 수록 그 내면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포효하는 사자를 보면서 그 이면에는 불안한 고양이가 사정없이 울고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경우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