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바람
- 최하림
바람이 새들을 하늘 높이 밀어올리고
백양나무 이파리들이 미치광이처럼
허옇게 머리를 들고 일어서는 날은
나는 빈 광주리 같은 가슴이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여기 그냥 이대로 서서 바람을
맞으며 그들이 잠시
우리 기억 속으로 들어와 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설(辭說)
무릇 살아있는 것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의 마음을 읽는다.
그러고 보면 삶을 한 꺼풀 더 깊이 들어가는 죽음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마치 개가 살아있어 바람을 보며 귀신에게 짖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람을 보려면 개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삶의 의도를 읽는다. 의도는 그러나 아직 드러내지 않은 첩첩의 갈피 속이다.
개는 바람을 짓는다. 그 개도 짚어내지 못하는 오늘의 삶 그 어제와 내일을 시인은 짚어낸다.
시인은 그것을 제 마음의 감광지에 인화하여 그 삶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시인은 놀라지 못한다.
기억하는 이는 살아있다.
기억은 현재에만 존재(存在)하는 부재(不在)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과장된 원근법 같은 기억은,
무용(無用)의 용(用)이다. 없음의 있음이다.
마음을 앞선 삼감이다.
그리하여 내가 바람 부는 저녁 강가에서
“어머니”하고 부르면 거기 갈대들에게 소름이 돋아 우우 풀어놓은 제 설음을 불러들이듯..
어떤 이에게는 남은 기억이 제 전부이기도 하다.
오호라, 누가 바람 불어 새들의 날개를 하늘 저 높이 밀어 올려놓는 저녁, 기억의 시간 속에 날갯짓을 펼치는가?
어쩌면 그 기억이 사자가 방생한 흰 날갯짓 그 증표가 아니겠는가?
시는 읽는 자의 축복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그 시대였으니
이곳에서 오늘 나는 그저 바람일 수밖에 없다.
바람을 만나려면 그곳에 가야한다.
최하림
1939년 3월 7일, 전남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 産
2010년 4월 22일, 향년 71세로 卒하여 펄럭이는 저녁 바람에 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