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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토요일. - 아버지에게서, 아버지께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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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버지에게서, 아버지께로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일 승천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형태로
자기가 일생 한 일들을 자랑스럽게 또는 수다스럽게 펼치는데
우리는 한 생을 마칠 때 주님처럼
이렇게 한 줄로 인생을 정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것을 이들처럼 정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들처럼 얘기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될 것이라고
흔히 얘기하듯 우리에게도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들과 비교하면 그런 것들은 명함을 내밀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이들과 견줄 만큼 우리가 참으로 많은 업적을 이뤘을지라도,
그래서 책을 몇 권이라도 낼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이 한 줄, 곧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라고
우리는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일생을 아버지께로 가는 삶을 살아온 신앙인이라면
이 한마디 외에 다른 할 말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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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오늘 <복음>인 고별담화의 마지막 부분들은 이미 하신 말씀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다시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기도’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3-24)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란 말씀은 기도의 본질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성령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친교이다.”(2615항)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은 기도의 조건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기도함이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함이요, 예수님의 의화에 힘입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함을 말해줍니다. 곧 기도는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아들로서 드리는 ‘자녀의 기도’임을 밝혀줍니다.
셋째,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의 특권이 구하면 받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기쁨에 넘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호의로 우리에게 기쁨이 선사된다는 기도에 대한 약속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해본 적이 없다.”(요한 16,24)라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도 온갖 것을 다 장만하시고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 16,28)
이 말씀에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네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네 개의 동사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선재하셨으며, 하느님이시라는 것, 곧 자신이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세상에 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인간화(육화), 곧 강생은 ‘보내심을 받아’ 오시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셨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세상을 떠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원하여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음을 말해줍니다.
넷째,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은 구원의 역사가 마쳐졌다는 것이요, 하늘로 돌아가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시어 당신 백성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신다는 것이요(로마 8,34;히브 7,25), 당신 자신이 다시 오실 그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신의 기원과 목적지를 밝혀주심으로써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단지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인격을 통하여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심을 밝혀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염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드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6,27)
이 모든 것이 먼저 베푸신 당신의 하염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 하염없는 사랑에 우리도 하염없는 감사로 기도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하염없는 사랑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도록 자신을 하염없이 내어놓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
주님!
이제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제 힘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뜨거운 기도가 위태로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그 애틋한 기도가 있어, 휘청거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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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 믿음으로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는 다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기도라는 말에는 주님의 뜻에 맞는 청원이라는 뜻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다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 매달린다고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청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분과 일치하여 그 이름에 걸맞은 청을 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 겜피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면서 가난할지언정
주님을 떠나 부요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을지언정
주님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요,
주님을 떠난 그 자리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짖으며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외에 저를 도와줄 이 아무도 없습니다.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를 하되 믿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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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명제를 의심하면서 사유하였습니다. 그러다 의심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입니다. 지난번 성지순례를 갔다 오면서 늘 입고 다니던 옷이 낡아져서 더 이상 입기가 어려웠습니다. 해외여행 중에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권, 핸드폰, 지갑’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권’입니다. 여권이 없으면 함께 이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탑승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옷이 찢어지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권을 보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깨에 메는 가방에 보관합니다. 여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옷에 보관합니다. 주로 남자 분들이 그렇게 보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여권은 늘 입고 다니는 옷의 안 주머니에 보관하였습니다. 순례 중에도 여권을 보관하는 옷 생각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생각’이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입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애주가는 ‘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기뻐서 한잔, 우울해서 한잔, 비가 와서 한잔, 경치가 좋아서 한잔을 떠올립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거나 해결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은 고기에게는 더 이상 미끼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하고 결혼하면 사랑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생각이 덜나기 마련입니다. 저도 아마존에서 여행에 필요한 ‘옷’을 구매했습니다. 여권을 보관할 옷이 생겼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주가들도 어느 정도 술을 마시면 더 이상 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할 정도로 마시면 며칠 동안 술을 가까지 하지 않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가 있었고, 미사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와 생각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생각은 주체가 ‘나’라면 기도는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생각은 내가 해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나의 전구로, 타인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의 만족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희생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생각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생명을 살리는 ‘우유’가 됩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저도 그릇된 생각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죄’가 되기도 합니다. 순례 중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하였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해 주셨고, 모두가 건강하게 순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는 반항하던 유다인들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쪽 벽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흩어졌고, 1년에 한번 무너진 성전의 한 쪽 벽에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이 지나서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한지 7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유다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면 ‘하느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폴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번 순례의 여정에도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난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었고, 성가 봉사를 해 주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부축해 드렸습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도 필요하지만, 신앙인이라면 기도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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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 늦은 봄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재미있게 노는데, 한 친구가 “눈 온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덩어리인 우박이었습니다. 눈인 줄 알고 맞았다가 따끔하고 아파서 얼른 우박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금세 그쳤지만, 우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박으로 농산물 피해가 크고, 단단한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습니까? 그때 우박의 크기가 훨씬 컸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따끔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 봅니다. 눈 대신 매번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음이 정말로 다행스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불만 거리만 찾고 있으며, 이런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본당 신부를 하다 보니 완전히 초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의욕이 넘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형편없는 강론도 잘 들어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주일 미사에 충실히 나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성가를 힘차게 부르는 어린이들,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는 청소년들, 할 일이 많은데도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 세상의 힘듦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신자들…. 모두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본당 신부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감사할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고 감사할 일을 주시는 주님임을 받아들여야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주님께 청할 수 있고, 또 이런 믿음으로 청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이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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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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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쁨의 여정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
삼일간 계속되는 주제가 기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울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은 주님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공자의 논어의 시작이 참 멋집니다. 참 멋진 군자, 공자입니다. 예수님과 만났어도 곧 의기투합했을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으로 시작되는 논어의 시작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벗이 먼 지방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가 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의 군자삼락에 대한 자부심에 공감이 갑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그리스도교의 군자들인 우리 수도승들에게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군자삼락입니다. 정말 좋은 도반의 방문은 기쁩니다. 빈손으로 와도 그 존재자체가 반가움과 기쁨입니다. 과연 이런 도반이 있습니까?
어제도 기쁨으로 가득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회의가 있어 서울에 들렸던 제주에서 은거(隱居)의 삶을 살고 있는 도반이 잠시 수도원에서 하루 묵어가면서 저에게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참 오랜만에 웃으며 유쾌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 집무실 앞 주님의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에서 혼자의 독사진도 찍어 드렸고, 함께도 찍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도반만이 아니라 고백성사차 집무실을 찾았던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집무실옆 힐링의 꽃길, 환대의 꽃길, 사랑의 꽃길, 기쁨의 꽃길, 평화의 꽃길에서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인 힐링의 선물, 기쁨의 선물을 드린 것입니다. 힐링과 기쁨,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고백성사의 근본 목표이기도 합니다. 새삼 서로를 즐겁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기쁨의 선물, 기쁨의 나눔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이미 어제 정했습니다. “기쁨의 여정-주님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으로 말입니다. 어제는 삼시경후 공동체 형제들이 모인 가운데 귀엽고 예쁜 새 승용예초기 축복식이 있었고 또 이것이 우리를 기쁘게 했습니다. 마치 귀여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가톨릭 축복 예식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사랑의 기쁨이듯 역시 아름다움의 기쁨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또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주님의 파스카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5월 신록과 파스카의 꽃들을 상징하는 무수한 꽃들의 아름다움이 또 우리를 감동케하고 기쁘게 합니다.
축복기도시 아름다웠던 독서와 축복기도를 나눕니다. 요즘 복음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요 계속되는 제1독서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역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지시한대로, 조용히 살도록 힘쓰며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바깥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처신할 수 있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1테살4,11-12)
백장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있듯이,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수도승의 노동 윤리의 기초가 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노동의 기쁨, 역시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합니다. 축복기도문도 참 아름답습니다.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성한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이 도구들을 봉헌하는
자녀들을 굽어보시어,
이들이 열심히 일하여
창조사업에 협력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인류발전에 공헌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도구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할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기도문이요 안전에 각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축복기도문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마지막 대목인 우리 주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삶의 모두가 됩니다.
아무리 영성을 강조해도 토마스 머튼이, 산티아고가, 렉시오 디비나가 우리 주 그리스도를 가려선 안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파스카 예수님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정말 하나의 소원을 청한다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뿐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기쁨도 날로 깊어지고 더해져 갈 것이니 그대로 기쁨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참으로 날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에 일치할수록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것이니, 바로 충만한 기쁨의 선물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기쁨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도 우리의 주님 사랑의 의욕을 붇돋습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이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와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담대히, 확고히 열정을 가지고 유다인들을 논박하는 아폴로! 기쁨과 활력으로 넘치는 모습입니다. 새삼 그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 예수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시며 더불어 날로 기쁨 충만한 기쁨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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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요. 밤이 먼저일까요? 낮이 먼저일까요. 사랑이 먼저일까요? 믿음이 먼저일까요.
우리가 이런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이 먼저이든 그것이 바뀌거나, 우리 곁은 떠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과 믿음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으면 사랑이 피어납니다.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즉 사랑과 믿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본적인 믿음이 없다면 교통사고를 염려하여 밖에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집은 괜찮을까요? 언제 가스가 폭발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폐를 입힐 수 있는데요. 잠을 잘 수는 있을까요? 한시도, 한숨도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하루는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 그 삶의 동력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나 믿음을 이용한 범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런 이들에게 더 엄한 벌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먼저인지 믿음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만큼 믿음도 커지고 믿음이 굳건해지는 만큼 사랑도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씨앗은 ‘감사’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안에 있는 사랑과 믿음은 자라날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
우리 인생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착’이라는 놈입니다.
집착이란 어디 한군데 마음을 놓고
그곳에서 마음을 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착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더 좋아할 거야.
이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거야.
이렇게 하면 나중에 너한테 고맙다고 할 거야.
지금은 이해 못할지라도….
그렇게 사람은 사람에게 집착합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집착합니다.
그렇게 부모는 부모 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인생을 즐기지 못합니다.
집착의 끝이 무언지 아십니까?
멀어짐 혹은 단절입니다.
죄의 결과 무언지 아십니까?
하느님과 멀어짐 혹은 단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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