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권정숙 할머니께서 최고령자인 사실은 강의 초기에 거의 ㄱ자로 꺽어진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주변 분에게 여쭈었더니 알려주셔서 알았습니다. 최근 상현회 회보 편집위원이신 권석종님께서 권할머니의 인생역정을 담은 자필 수기를 정리한 파일을 보내 주시어 읽어 보았더니 충격과 함께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대표하는 인물을 직접 보게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방후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 비극적인 일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난 곳이 한반도 남북한입니다. 저(政山)는 20대부터 이와 관련한 역사와 문학을 접하고 한때 이 굴곡진 현대사에 빠져 세상을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실제 인물을 만나니 남다른 감회가 생겨 권할머니를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소식을 전합니다.
맨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 분이 권정숙 할머니
가운데가 권정숙 할머니 , 우측이 尙賢會 회보 편집위원 권석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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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없는 生日
權 丁 淑
아들 심장보(沈章輔. 62) 종합건축사
아침 일찍 전화 “엄마 오늘 아버지 생신날이지?”
아니, 23일 모래 토요일인데(?) 안부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착각을 했나? 긴가민가해서 靑松沈氏 大同世譜 下岳隱公派 二 에 찾아보았다.
재흠(載欽) 字 文汝 1927년 丁卯 9월 21일생으로 되어 있었다.
과연 맞았구나! 얼굴도 모르는 아들이 무슨 영감(靈感)에서 ....
너무나 고맙고 가슴 짜릿 했다.
1949년 그 시절은 사람들이 화합은커녕 이념의 시대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했으며 밤이 되면 이념분자들은 인명경시는 물론이고 안면 불고 참혹한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때라 빙상 일각에 한 걸음 한 걸음 자국마다 조심조심하든 때였다. 어른들의 지시대로 예천읍 백전동 보문통로 길갓집 앞마당에는 미나리깡 그이(남편)는 예천 일신당 약방에 근무하면서 그이의 생일날이 다가왔다.
아지라고 하는 생선 한 마리를 반 토막은 시동생 생일에, 반 토막은 그이의 생일에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평생에 마음 켕기고 미안한 심정을 추호나마 씻어볼까....
동리 앞 승강장에서 2시 반 버스를 타고 예천에 갔다.
닭 집, 고기 집, 어물전, 과일 마음 내키는 대로 사가지고 택시로 왔다.
임자 없는 생일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넋두리 하소연.
이 세상 어느 하늘 밑에 살고 있는지 60여년 숯덩이 가슴 애태우며 기다리는 이 심정 아는지 모르는지.....
거슬러 1950년
예천이란 곳도 믿기지 않아 좀 더 안전한곳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예 전세방을 구하고 청운의 꿈 보따리를 미처 다 풀기도 전에 뜻하지 않았던 6. 25동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니 갈 곳 없는 우리는 용산경찰서 옆 큰댁으로 갔다. 혼권(渾眷)이 무고하시니 다행이었고 밤 낮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강 도하작전 하는 것을 구경삼아 보기도 했다.
공중에 정찰기는 날마다 왱왱거리며 시민들 피난가라는 삐라만 뿌리던 어느 날, 대낮에 “꽝”하는 폭음과 함께 암흑천지. 혼비백산 정신을 잃었다. 집이 무너진 창문으로 겨우 빠져나가 근처 방공호로 갔다. 폭격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오열하는 말. ‘제 국민을 이렇게 하다니....’
한참 후에 집으로 갔다. 아수라장이 된 집에 도둑이 들어 가족이 먹어야 할 밥을 다 쏟아가고 밥솥은 비어 있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먹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폭격의 원인은 가까운 갈월동 병참기지 때문이라고 한다. 인명 피해도 많이 나서 새까맣게 불에 탄 어른과 아이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인 옆을 지나기도 했다.
문(남대문)안은 폭격을 않을 것이라 믿고 우리는 종로구 통의동 시누이집으로 갔다. 거기도 잠간, 어린아이 딸린 시누이와 연약한 여자들이 먼저 가서 자리 잡으면 밤에 식량 가지고 간다기에 약간의 피란 짐을 꾸려서 청량리를 거칠 때 비행기 기총소사를 피해 논두렁 밑에 엎드렸다가 다시 망우리 고개를 넘어 하루 종일 걸어서 양주 마석에 아름 있는 집으로 갔다.
밤에 온다던 처남 매부 두 사람이 그날 밤 자위대에 끌려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이가 있던 곳에 가 보았다. 문 밖에 하얀 운동화 방안엔 흰 런닝 하나만 쓸쓸히 있고 사람은 행방불명이다. 백방으로 찾은 결과 24세 젊은 청년 그이는 그날 밤 맨발에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미아리고개 넘어 북쪽으로 끌려갔다는데 그 형상,
처량하고 애통한 그 모습이 영화 스크린에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할 수 없이 피란처인 양주 마석으로 돌아갔다. 주인집에 명주 길쌈을 도와주고 베틀에 북, 바디집 날쌘 손놀림에 명주도 짜고 채소 나물반찬을 얻어 끼니도 해결하면서 70여일이 지날 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침내 9. 28수복이 되면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어둠이 내려앉아 도중에서 밤을 새고 집으로 돌아왔다.
메마른 서울 땅 마당에도 잡초가 무성해 있고 중앙청건물은 탈환 당시 치열했던 전투흔적이 비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군과 연합군 합세로 북진통일 승승장구하든 전세가 압록강을 앞에 두고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맥아더 장군이 본국으로 차출되고 워커장군이 전사하면서 또다시 서울이 소란해지고 눈 쌓인 엄동설한에 시민들 피란행렬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결국은 1.4후퇴 소개명령에 아는 집 트럭에 사람인지 보따리인지 빈틈없는 사이에 몸이 끼여 서울을 출발 마포의 폭파된 한강다리 옆 물위에 깔아놓은 임시 철판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 남쪽으로 평택, 조치원까지 가는 것도 가다가 길이 막히면 뒤 돌아 서고,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빈집에서 밤을 세고, 몇 며칠 만에 상주에서 은인들과 작별을 하고, 함창을 거쳐 산양다리 주막에서 밤을 새우고 하나뿐인 소중하고 미거한 주손 큰집 종질과 동행했기 때문에 책임의 중압감에 발걸음은 더 무거웠다.
사람도 돈도 다 잃어버린 22살 빈 털털이 젊은 여인이 무슨 염치로 시어른 품에 안길까? 시어머님이 ‘둘이 가서 왜 혼자 오느냐’고 통곡하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럼에도 자애가 풍부하신 시어른(준구씨)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감싸주시면서 모든 살림살이를 다 맡기시니 8남매 맏며느리라는 책임, 보이지 않는 올가미, 막중한 책임, 면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인가?
두 분의 시어머님, 미거한 시누이 두 사람, 이 모두 모시고 거느려야하기에 때로는 들에 나가 일하는 농부도 되고, 때로는 짐 실은 소를 몰고 시장에도 가고, 자살 궂은 남자들이 호미 들고 들에 간다고 놀리기도 하고 .... 파란 만장한 세월이 흘렀다.
평생을 같이 할 줄 알았던 시어른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니 가슴에 품은 어린 아들 공부를 위해 실패한 서울생활을 다시하게 되고 아들을 공부시켜 좋은 배필을 만나 귀여운 손자 손녀 삼남매의 든든한 가정, 매일같이 하는 전화. 몸 건강히 오래오래 축복전화. 이런 것이 인생의 행복인가.
다사다난했던 모든 일을 물려받고 효성이 지극하니 오히려 고맙고 미안 할 뿐이다. ‘시골가면 고생한다고 가지 말라’ 는 아들의 정성을 이해시키며 옷가지 몇 벌 챙긴 가방하나만 딸랑 들고 ‘내가 가서 실험해 보고 오리라’ 한 것이 이날까지 머물게 됐다.
예천교육청 공공도서관 평생교육 강의실 갈 곳이 있어 좋았어라. 예천 상현학회 정희융회장님은 하늘이 내리신 구새주이신가 미천하고 보잘 것 없이 늙은 노구를 가리지 않으시고 하해 같은 품으로 보듬어 주시니 그 은혜 백골이 진토 된들 잊으오리까? 상현학회 회원 여러분 모두가 아낌없이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희미하게 꺼져가는 체내에도 청정 감로수로 힐링을 한 듯이 솟구치는 에너지가 눈 · 비가 와서 어설퍼도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곳, 상현학회.
집에서 금당실까지(3㎞) 유모차를 밀고 걸어가면 아침에 학회에 나갈 땐 40분이 걸리고 금당실에서 예천(8㎞)은 버스를 타는데 버스를 놓지는 날은 택시도 타고.... 같은 길인데도 오후에 집에 들어올 때는 삼거리 슈퍼 앞에 세워둔 나의 지팡이 유모차를 밀며, 한 시간이 걸리지만 나는 이름 그대로 백학이 구름을 타고 창공을 훨∼훨 전망도 무궁하다! 언제까지 일까?? 예천 상현학회 파이팅!!!
2017년 11월 9일 목요일(음 : 정유년 9월21일)
첫댓글 권정숙 할머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천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선생님이십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잘 읽었읍니다.
권정숙 할머니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공부하기 힘들다는 말은 사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드네요. 인터뷰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열씸이 노력하겠습니다
큰 마음 공부를 하였읍니다
감사합니다 ^^
권정숙 할머니의 삶을 통하여, 학문에 대한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감사 합니다.
권정숙 선배님!!!
당신은 이 시대 모든이에게 삶과 배움의 훌륭한 지표이십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부럽습니다. 저도 권정숙 도반처럼 늦은 나이까지 배울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기주셨어 고맙습니다. 강건하십시시오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한 몸으로 겪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분입니다.
제 주변에는 그 시대를 알고 있는 분이 모두 돌아가셔서 물어 볼 수 없는 처지지요.
권 할머니의 수기를 읽어니 가슴속에서 '그 무엇이' 꿈틀합니다.
관련 기관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겪은 恨 많은 역사를 육성으로 채집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건강하게 사시면서 후손들에게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150세 시대가 된다는데, 공부하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정숙 선생님의 청아하신 모습을 영상으로나마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향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천자문 대관 마지막 4권을 올해 안에 탈고하면 제주도에 한번 바람 씌러 가야 할 듯합니다. 요즘 家苑선생이 권할머니를 보시고는 이애란의 '백세인생' 노래와 가사를 흥미롭게 듣고 있습니다. -政山
고생 그 자체였을 인생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으시고
"배우는게 재미있다"고 말씀하시는 권정숙 할머니
이 시대의 저희 젊은이들에게 長장老로(유학과 불교의 용어) 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건강유지가 되어
원하시는 대로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書經 공부하러 다니면서 마침내 수료를 한 志淵님의 열정도 한 몫 했습니다.
다시한번 이자리를 빌어 축하드립니다.(政山)
다음은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려 가끔 이메일을 보내시는 울산의 김태조님 글입니다. 연관이 되기에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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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山 선생님 보내주신 책 택배로 잘 받았읍니다 고맙습니다. 기우입니다만 집필 과정에서 하나라도 빠짐없이 담아 내고자 하시는 家苑 선생님의 열정(?)으로 인한 과부하로 혹시나 건강이 나빠지시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두분 선생님의 건강을 빕니다. 진해에서 '끄트머리' 배상
가득하나 넘침이 없는 계절처럼 겸손하신 할머니 모습에 감동합니다.
저는 한국 근대사 한권을 읽은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평생을 정절을 지키며 살아내신 그 고뇌와 힘!
상상이지만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아마도 어르신의 삶이 이땅의 우리들 어머니 세대의 표상일겁니다.
不取外相 自心返照의 마음으로 틈틈히 좀더 배우고 익혀 저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그런 삶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새기게 합니다. 권 할머니 만수무강 하십시오.
두 분 선생님께서도 항상 강건하시길 합장합니다.
지난주 2023년 3월 22일 수(음력 윤2.1일) 무작정 서울 신설동에 있는 경연학당을 방문해서 가원, 정산 선생님 두분을 만나뵙고, 3월 24금요일 보내주신 책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주말 이틀동안 아주 천천히 책을 보았습니다.
오늘 카페에서 권정숙 어르신의 글을 읽고 눈시울을 붉히며 감동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르신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배움의 기쁨을 늘 함께 하시길 두손 모아 비옵니다. 권정숙 어르신 힘! 예천 상현학회 힘! 경연학당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