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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시대별로 팝 음악의 지형도를 알아보는 시간. 각 시기마다 어떤 음악들이 존재했고, 어떤 가수들이 그 음악흐름을 주도했는지, 그리고 어떤 아티스트들과 노래들이 빌보드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1950년대의 팝 음악에 대해서 알아본다. 1950년대부터 출발하는 첫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이전시기의 음악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들어가기로 한다.
1950년 이전의 서양 대중 음악
우리가 현재 팝 음악이라 부르는 서양 대중 음악은 미국에서 처음 탄생했다. 19세기 중, 후반 흑인 분장을 한 민스트럴(Minstrel) 쇼가 노래와 춤, 독자적인 희극의 형태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전해졌다(이후에도 계속해서 재즈와 블루스, 로큰롤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전파되었다). 1910년대 이후에 그 음악은 레코드 산업, 소비자, 미디어와 결합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었다.
20세기 팝 음악의 중심은 언제나 흑인 음악이었다. 백인 음악은 늘 그 흑인 음악을 토대로 성장해왔다. 흑인은 백인사회와 전혀 동떨어져 있었고 사회적 위치나 경제수준이 형편 없이 낮았지만 그들 자신의 표현방식을 발명해갔다. 그들은 블루스와 재즈, 가스펠을 노래했다. 재즈와 블루스가 십대의 로맨스 같은 세속적인 미덕을 위해 헌신했다면 가스펠은 구원적 메시지의 종교적 성격을 이어나갔다. 또한 대공황기였던 1929년부터 1940년까지는 흑인 댄스 뮤직인 스윙이 붐을 이루며 그 시대의 주류 음악이 되었다. 더 빠르고, 부드럽고, 힘있었던 빅 밴드 스윙은 춤추기 좋은 음악을 요구했던 대중들을 만족시키면서 거대한 시장을 이끌었다.
반면 백인 음악은 유럽의 전통을 계승했다. 미국 동남부 지방과 특히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산간 지방에 살던 영국, 스코틀랜드 이주민의 자손들은 유럽에서 가져온 사회적, 종교적 전통 틀을 유지했다. 그들은 개척자들의 고향인 유럽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음악에 담아 피들과 밴조로 연주했다. 그것이 바로 ‘백인의 블루스’라는 컨트리 음악이었다. 한편 엘리트 작곡가들이었던 조지 거쉰, 어빙 벌린, 콜 포터에 의해 클래식 전통을 기반으로 한 틴 팬 앨리(Tin Pan Alley) 음악의 전형이 마련되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프랭크 시내트라, 페리 코모 등의 스탠더드 팝과 브릴 빌딩의 10대 팝, 그리고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의 주도하에 정치 지향적인 포크 음악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어찌 보면 40년대 중반 이전까지 백인음악과 흑인음악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민중성이라는 특징을 가졌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했다. 실제로 초창기 블루스나 포크 음악을 하나씩 들어보면 비음 섞인 보컬 음색이나 음악적으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태도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백인 음악은 여전히 보수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반면, 흑인 음악은 더욱 공격적이었고 거침없는 성 표현을 담아냈다. 당시까지 컨트리 등 대부분의 백인 음악은 그러한 노골적인 성적 취향을 결코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50년대부터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흑인 음악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백인 젊은이들은 블루스와 스윙, 나아가 로큰롤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흑인 음악이 프랭크 시내트라로 대변되는 스탠더드 팝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관능을 마음껏 표현한다는 점도 이끌렸다. 록 비평가 사이먼 프리스에 의하면, 흑인 음악은 백인 십대들을 위한 정상적이고 개인적인 관능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재즈에서 레게에 이르기까지 흑인 음악이 적어도 네 세대 동안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배경 음악이 되었다.
A Time To Rock
1950년대는 ‘록의 시대’였다. 당시 모든 음악은 모두 록으로 귀결되었다. 록 음악은 스탠더드 팝 정도만이 있었던 50년대에 엄청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틴 팬 앨리에서 로큰롤로의 이행하기까지의 과정. 그렇다면 이제 록에 초점을 맞추면서 당시 대중들에게 사랑 받았던 음악들은 무엇이며, 또 로큰롤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자. 그 음악 이야기들과 더불어 사회, 정치적 상황, 즉 컨텍스트(context)도 함께 들여다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은 교외로 대거 이주했다. 특히 남부인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갑자기 늘어난 교외의 백인들과 남부의 흑인들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동시에 각각 컨트리와 블루스라는 자신들의 문화(이 두 음악은 로큰롤의 토대가 된다)를 지니고 있었던 백인과 흑인은 도시에 많은 청중들을 몰고 왔다. 처음엔 도회지 백인들의 음악이 압도적으로 우세였다.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틴 팬 앨리 음악만을 계속해서 틀어주었기 때문이다. 흑인 음악가들은 백인들이 절대로 출입하지 않는, 술집들과 사교 파티장, 댄스홀에서만 연주했다. 즉 로큰롤 이전의 대중음악의 주류는 틴 팬 앨리 팝 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조그만 레코드 가게들에서 흑인 음악과 컨트리 레코드를 함께 팔기 시작했다.
도시 풍의 백인 대중음악은 여전히 발라드 타입의 틴 팬 앨리 전통에 의존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참신한 움직임과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흑인 음악 근처는 가지도 않던 백인 가수들이 흑인들의 보컬 스타일, 즉 좀더 거칠고 귀에 거슬리고 격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창법을 따라 하고 나섰다. 그 중 1951년 경 여성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백인 가수 조니 레이(Johnny Ray)는 댄스홀에서 ‘Cry’라는 곡을 부르며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온몸을 구르는 등 인상적인 무대 매너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 시기의 토니 베넷, 프랭크 시내트라, 페리 코모, 냇 킹 콜 등이 주도했던 유럽 스타일의 부드러운 크루닝(crooning) 창법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것들은 이젠 낡은 소리였다.
또 다른 참신한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블루스와 컨트리 음악이 다른 음악들과 섞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설적인 흑인 블루스 가수 리드벨리(Leadbelly)에 의해 작곡된 1936년도 블루스 곡 ‘Goodnight Irene’이 백인 포크 그룹 위버스(Weavers)에 의해 1950년에 레코드로 녹음되었다. 이처럼 흑인의 블루스 곡을 백인이 가사를 각색해 취입한 음반들을 가리켜 ‘커버 레코드’라고 부르며, 이러한 커버 레코드들은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컨트리 음악 역시 이질적일 것 같은 스탠더드 팝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컨트리의 아버지’ 행크 윌리엄스의 ‘Cold, Cold Heart’는 1951년 토니 베넷에 의해 다시 불려졌다. 이러한 곡들은 여전히 현악 오케스트라나 틴 팬 앨리 특유의 19세기 풍 전통방식을 담고 있었지만 좀 더 다른 패턴으로 열려진 가능성을 보여준 예들이었다.
로큰롤의 탄생
록 음악이 언제 탄생했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은 빌 헤일리 앤 더 코미츠의 ‘Rock Around The Clock’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1955년 하반기를 그 시작점으로 꼽곤 한다. 로큰롤이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음악이 널리 인기를 얻기 시작한 1955년은 팝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1954년 녹음되었으나 영화 [폭력교실]에 쓰이면서 비로소 로큰롤 신화가 된 ‘Rock Around The Clock’은 당시 처음엔 모든 미국 땅에 울려 퍼졌고 얼마 후에는 그 놀라운 기세가 바다 건너 유럽까지 집어 삼켰다.
이처럼 로큰롤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빌 헤일리는 원래 컨트리 뮤지션으로 50년대 초반부터 흑인 리듬 앤 블루스 곡들과 백인의 컨트리 웨스턴 풍의 음악들을 섞기 시작했다. 기타와 더블 베이스, 드럼으로 연주하는 그의 음악은 재즈나 블루스보다는 백인 컨트리 음악이 더 우세했고, 목소리는 약간 거슬렸지만 비트는 왠만한 흑인 음악보다 강력했다. 메시지적으로는 흑인 리듬 앤 블루스의 근간인 노골적인 성 표현과 우울함을 거세하고 낙관적이고 십대들에게 전혀 무해한 단순한 음악으로 변형시켰다. 그의 마음씨 좋아보이는 포동포동 살찐 외모와 신나는 스윙 음악은 십대 청소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이 로큰롤의 시작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실은 그 몇 년 전부터 이미 그와 비슷한 음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53, 1954년 발표되었던 빌 헤일리 앤 더 코미츠의 ‘Crazy Man Crazy’와 ‘Dim Dim’, 더 크로우스(The Crows)의 ‘Gee’, 조 터너(Joe Turner)의 ‘Shake, Rattle, And Roll’, 더 코즈(The Chords)의 ‘Sh-Boom’ 같은 곡들이 모두 그와 유사한 스타일이었다. 유독 빌 헤일리의 음악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고발하는 내용의 영화 [폭력교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극장 대형 화면과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Rock Around The Clock’을 듣고 청소년들은 즉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들의 억누를 수 없는 욕구를 그 새로운 음악을 통해 분출했다.
이처럼 그 몇 년 사이 패츠 도미노(Fats Domino), 레이 찰스(Ray Charles) 등이 흑인 청중들을 위해 연주했던 음악이 갑자기 국가적인 화제로 떠올랐다. 그 중 몇몇 곡은 로큰롤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로큰롤이라는 단어를 처음 말한 사람은 앨런 프리드(Alan Freed)라는 디제이였다. 프리드는 일찍이 백인 젊은 층이 흑인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알아챘다. 그는 2년 동안 [Moondog’s Rock’N’Roll Party]라는 라디오 쇼를 진행하면서 백인 젊은이들에게 로큰롤을 들려주었다. 앨런 프리드는 흑인의 음악을 인종적 낙인에서부터 구원해 로큰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궁극적으로 로큰롤의 보급자 역할을 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와 레코드를 통해 흑인 음악을 들었으며, 이에 따라 메이저 레이블들도 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애틀랜틱]처럼 흑인 음악에 종사하는 인디 레코드 회사들도 이 즈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거꾸로 흑인이 백인 음악을 하는 가수들도 있었다. 거의 백인에 가깝게 완벽한 틴 팬 앨리 팝을 들려준 냇 킹 콜(Nat King Cole)은 당시까지의 그 어떤 흑인보다도 거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앨런 프리드와 빌 헤일리, 그리고 다른 뮤지션들이 로큰롤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로큰롤의 이미지는 젊음과 아름다움, 반항, 낭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를 반항적이고 외설적인 측면으로만 본 미국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에 대항하여 싸웠다. 십대들은 아직 완전히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유행을 쫓고 돈을 낭비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는 듯 보였지만 정작 본심은 부모님과 그들의 안정된 가치를 사랑했다. 로큰롤은 아직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처럼 불안한 행보를 내딛던 로큰롤이 이후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흑백을 대표했던 두 명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Chuck Berry) 때문이었다.
흑백이 하나된 로큰롤 시대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마디로 ‘흑인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백인’이었다.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는 만약 흑인 음악을 하는 잘 생긴 백인 청년이 있다면 그는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그 말은 바로 엘비스를 두고 하는 얘기가 되었다. 그는 흑인 블루스맨들의 노래를 듣고 자란 시골 소년이었다. 그래서 백인이면서도 흑인의 감성을 간접적으로 습득했다. 엘비스는 기본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와 컨트리를 조화시켜 빠르고 강력한 로큰롤을 구한다는 점에서 빌 헤일리와 같지만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폭발적인 가창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무대 위에서의 흥분된 에너지와 성적인 뉘앙스를 암시하는 몸짓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매력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엉덩이 흔드는 제스처 때문에 그는 ‘펠비스(The Pelvis, 골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데뷔앨범 앞면에 리듬 앤 블루스, 뒷면에 컨트리를 실어 흑백을 통합했다. 1954년 7월 엘비스가 처음 녹음한 곡도 바로 흑인 블루스 뮤지션인 아서 크루덥(Arthur Crudup)이 지은 ‘That’s All Right’이었다. 1956년에 발표한 ‘Heartbreak Hotel’은 백인들은 물론 흑인 청중들에게도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그는 차례로 ‘Hound Dog’, ‘Jailhouse Rock’, ‘Don’t’, ‘It’s Now Or Never’ 등 엄청난 수의 넘버원 싱글들을 배출해냈다. 포마드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 하와이 풍의 셔츠, 점차 가늘어지는 바지는 진정한 50년대 로큰롤의 이미지였다.
10대의 우상이 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눈에 띄는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척 베리는 훨씬 창조적인 흑인 아티스트였다. 프레슬리는 남들이 쓴 곡만을 불렀지만 베리는 스스로 곡을 쓰고 기타를 연주한 훌륭한 기타리스트이자 싱어 송 라이터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초기 ‘로큰롤의 형식미’를 확립했다는 평을 듣는다. 베리의 음악은 언제나 컨트리의 근원과 시카고 블루스의 뿌리에 충실했다. 기타의 원기 왕성한 리듬을 바탕으로 한 익살스러운 보컬이 특징이다.
척 베리 음악의 또 다른 특징은 늘 50년대 십대의 모습을 관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연인에게 바치는 ‘Maybelline’, 자동차에 대한 찬가 ‘No Money Down’, 학교에서의 10대의 고뇌를 노래한 ‘School Days’, 팬들에 대한 곡인 ‘Sweet Little Sixteen’, 그 자신에 대한 노래 ‘Johnny B. Goode’, 음악을 위한 송가 ‘Roll Over Beethoven’, 미국에 대해 노래한 ‘Back In The USA’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인, 자동차, 학교, 음악, 자신, 그리고 미국…. 이는 팝 뿐 아니라 50년대 미국사를 요약하고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한편, 척 베리는 뛰어난 기타 연주로 비틀즈 멤버들, 그 중에서도 존 레논, 그리고 롤링 스톤즈 멤버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1955년 이후 5년 동안은 명백히 로큰롤의 전성기였다. 리틀 리처드, 보 디들리, 척 베리, 패츠 도미 등 최고의 흑인 가수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흑인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을 연주해나갔다. 폴 매카트니의 영웅이었던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는 가장 대담한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화려한 치장을 한 채 전보다 두 배나 빠른 점프 블루스(경쾌하고 리드미컬한 블루스) 음계를 노래했으며 샤우팅 창법으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발산했다. 보 디들리(Bo Diddley)는 원시 아프리카 음악에서 가져온 리듬을 선보였으며, 디스토션을 사용하면서 일렉트릭 기타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패츠 도미노는 자유로운 즉흥연주와 힘찬 박수가 특징인 피아노 연주를 통해 로큰롤 사운드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버디 홀리, 에벌리 브라더스, 빌 헤일리 등 백인 로큰롤 스타들도 모두 그들의 원류 컨트리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를 섞은 하이브리드 사운드를 정착시켰다. [선] 레코드 소속의 제리 리 루이스는 ‘Great Balls Of Fire’, ‘Whole Lotta Shankin’ Going On’ 등의 히트 곡을 통해 광란의 홍키통크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며 성욕과 격렬함을 이끌어냈다. 텍사스 남부 출신의 버디 홀리는 그의 보컬 그룹 크리켓츠(Crickets)와 함께 ‘Peggy Sue’, ‘That’ll Be The Day’, ‘Rip It Up’ 등의 멜로딕하면서도 서로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신선한 곡들을 배출했다. 형제 듀오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는 힘찬 사운드에 달콤한 하모니를 녹여냈다.
로큰롤 이외의 다른 음악들
1950년대 로큰롤은 춤추기 위한 음악이었다. 파티, 클럽, 콘서트 어디에서건 젊은이들은 로큰롤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빠른 로큰롤이 십대를 사로잡았지만 나긋나긋한 발라드의 인기전선에는 이상이 없었다. 발라드는 여자 아이들을 유혹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발라드와 스탠더드 팝 분야에는 아무래도 백인들의 강세가 이어졌다. 프랭크 시내트라, 딘 마틴, 빙 크로스비 등 ‘스탠더드 빅3’를 비롯해 페리 코모, 토니 베넷, 앤디 윌리엄스 등의 40년대부터 활동해왔던 백인 가수들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들의 황금계보는 조니 마티스로 이어졌다. 조니 마티스의 히트 곡 ‘It’s Not For Me To Say’와 ‘Wonderful! Wonderful!’은 각각 39주 동안 싱글 차트에 머물며 오랜 사랑을 받았고, 딘 마틴의 ‘Memories Are Made Of This’는 6주간 빌보드 차트 1위의 자리를 지켰다.
여성 팝 가수들로는 코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 패티 페이지(Pattie Page), 로즈마리 클루니(Rosemary Clooney), 도리스 데이(Doris Day) 등이 활약했다. 스탠더드의 여왕 패티 페이지는 ‘Changing Partner’에서 ‘자유연애’의 은근한 뉘앙스를 남겼다. ‘Tennessee Waltz’, 재즈적 느낌이 물씬했던 로즈마리 클루니는 ‘Come On A My House’ 등의 노래를 통해 우아한 격조를 보여주었다. 배우 겸 가수였던 도리스 데이는 ‘Whatever Will Be, Will Be(Que Sera, Sera)’ 같은 곡에서 낙천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을 전했다. 피아노 주자였던 냇 킹 콜은 흑인으로는 거의 유일한 스탠더드 팝 가수였다. 냇 킹 콜은 거의 백인에 가까운 달콤한 크루닝 창법으로 백인들에게도 큰 호감을 샀다.
냇 킹 콜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발라드는 비단 백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940년대부터 ‘두~왑’이라는 목소리로 리듬을 맞추며 부르는 흑인 그룹들의 발라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를 들려준 여러 흑인 그룹들이 히트 퍼레이드 순위에 등장했다. ‘Yakety Yak’을 불렀던 코스터스(Coasters), ‘Stand By Me’라는 불멸의 히트 곡을 남긴 벤 E. 킹이 속해있었던 드리프터스(Drifters), 플래터스(Platters), 문글로스(Moonglows) 등이 대표적인 그룹들이다. 그 중 플래터스는 ‘Only You’, ‘Smoke Get In Your Eyes’, ‘The Great Pretenders’ 등의 명곡들을 발표하며 최고의 흑인 그룹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1957년경에는 또 다른 로큰롤 스타일이 등장했다. 바비 달린(Bobby Darin), 팻 분(Pat Boone), 디온(Dion), 폴 앵카(Paul Anka), 리키 넬슨(Ricky Nelson) 등 남부 출신이 아닌 백인들에 의한 로큰롤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배경은 로큰롤의 전례가 아니라 백인 도시 음악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로큰롤보다 좀더 매끄럽고 온화하게 노래했다. 분명히 로큰롤적인 리듬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기본은 틴 팬 앨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의 스타일은 거칠고 세속적인 로큰롤의 특성을 생략했다. 대신 현악기 중심의 스튜디오 오케스트라와 감성적이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담았다.
한편 성인 취향의 인스트루멘틀 팝(Instrumental Pop)도 5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다. ‘이지 리스닝’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45명에 이르는 악단이 연주하는 경음악(light music)이었는데, 주로 영화와 뮤지컬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 만토바니(Mantovani) 등이 대표적인 작곡가들이다. 특히 만토바니 악단은 45인조 악단 중 32명이 현악기를 담당할 정도로 스트링을 강조했다. 그의 ‘Around The World’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32주나 머물 정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같은 시기, 영국 음악가들은 미국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50년대에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요와 미국의 로큰롤을 융합해 스키플(skiffle)이란 음악을 탄생시켰다. 다분히 아마추어적이고 소박한 스타일의 음악이었는데, 이 스키플이 영국의 로커들에게 갖는 의미는 리듬 앤 블루스가 미국의 로커들에게 갖는 의미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롤링 스톤즈나 비틀즈가 모두 이 스키플 밴드에서 출발했다. 또 클리프 리처드는 밴드 섀도우스(Shadows)와 함께 영국적 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로큰롤의 죽음, 그러나 다가오는 부활의 빛
5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로큰롤이 점차 힘을 잃기 시작하더니 어느 틈인가 완전히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 첫 신호탄은 리틀 리처드가 기독교로 귀의한 것이었다. ‘A-Wop-Bop-Aloo-Bop-A-Lop-Bam-Boom’이라는 불멸의 가사를 남긴 그는 1957년 갑자기 로큰롤을 팽개치고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복무를 위해 음악계를 떠났다. 미군 이발사의 면도날에 의해 엘비스의 상징이던 구렛나루가 밀어지던 그날. 엘비스 프레슬리의 신화가 끝나는 순간이며, 그것은 존 레논에 의하면 ‘로큰롤의 죽음’이었다. 제리 리 루이스 역시 열세 살짜리 사촌 마이라와 결혼한 것이 영국 언론에 의해 집중포화를 당했고 결국 로큰롤을 포기해야 했다(그는 이후 예전에 했던 컨트리로 복귀했다). 게다가 로큰롤의 보급자였던 디제이 앨런 프리드는 페이올라 스캔들 때문에 방송국에서 해고되었다. 더 이상 라디오에서도 로큰롤을 틀지 않았다.
1959년은 로큰롤 역사에 있어서 최악의 해였다.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척 베리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미성년인 여자를 데리고 주경계선을 넘어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과 여자가 나이를 속였다는 점, 그리고 재판이 인종주의적인 이유로 날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랜 재판 끝에 결국 척 베리는 3년형을 선고 받았다(그러나 그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나중 복권되었다). 1960년 영국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던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의 택시가 화물 트럭과 충돌했다. 코크런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빈센트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여생을 장애로 고생해야 했다.
명백히 로큰롤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로큰롤의 위치는 위태로웠고 곧 사라질 듯 보였다. 로큰롤은 그러나 얼마 후 영국 록 밴드들에 의해 극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 주역들은 바로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였다. 이들은 영국인이면서도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을 찾아 들으며 성장했으며 그들이 10대 후반의 나이이던 50년대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로큰롤 밴드를 결성해 척 베리, 버디 홀리, 리틀 리처드 등의 음악을 커버하기 시작했다. 로큰롤의 죽음과 더불어 50년대는 저물지만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성장과 더불어 역동하는 60년대를 맞게 된다.
1950년대 미국과 영국의 사회, 문화
전후 새로운 세계의 강자는 미국이었다. 50년대 접어들면서 미국은 훨씬 더 부유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큰 차와 가전제품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아주 희망적인 미래관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청년 문화(Youth Culture)’도 태동했다. 미국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차별된 문화를 갖기 시작했다. 다른 취향과 태도를 지닌 신세대였다.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백인 어른 세계의 낡은 소리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타입의 음악들, 빌 헤일리(Bill Haley)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연주하는 로큰롤을 들었다. 점점 더 흑인 가수의 신선한 있는 사운드가 미국 십대들에게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그 미국의 새로운 음악을 수입했다.
미국은 모든 면에서 안정된 시기였다. 2차대전의 승리로 유일한 강대국이 된 미국은 1945년부터 역사상 전례 없이 길고 꾸준한 경제성장과 번영을 이룩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구매력의 증대와 베이비붐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출생률의 폭발적 증가는 전국에 걸쳐 쇼핑센터, 공장, 운동경기장이 새로 새워지는 건축붐을 일으켰다. 교외에 생겨나는 새로운 주거단지에서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미국의 경제적 번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그 혜택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에게만 돌아갔다. 미국정부는 빈민, 흑인, 유태인 등에게는 주택융자 혜택을 주지 않았다. 또한 도시 재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빈민굴을 소탕했지만 빈민굴이 있었던 곳에는 들어선 것은 저소득층의 주택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주차장, 쇼핑센터, 고층빌딩 등이었다. 흑인들은 여전히 소외당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는 가정과 모성애, 종교가 강조되었다. 반면 청소년들은 텔레비전 앞에만 있는 부모들과는 달리 영화관에 몰려들었다. 할리우드는 [이유 없는 반항], [폭력교실] 등 젊음에 대한 예찬과 숭배를 바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백인 가수들은 종전까지만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 카 스테레오가 대량 보급되면서 음악 수요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편 일부 문인들은 중산층과 교외 지역 생활의 획일적 사회를 거부하고 나섰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비트(beat)’ 시인들이었고, 그들은 마약을 복용하며 개방된 성생활을 과시했다. 비트 시인들은 미국의 청년들에게 부모들의 물질 만능주의와 당당한 자신감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영국의 경우도 미국보다는 덜 하지만 사회, 문화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보수당 정부 아래 복지 규정이 강화되었고 완전고용이 거국적 우선과제가 추진되고 있었다. 정치적 안정은 예술에서의 실험과 혁신에 큰 활동영역을 제공했다. 예술가들이 소설, 시, 음악 부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BBC]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의 문화적 선구자로 등장했다. 1946년 시작된 제3프로그램은 음악과 방송에 큰 자극이 되었다. 영화 또한 점차 예술적 실험의 수단이 되고 있었다. 영화는 싼 입장료와 격식 차리지 않는 분위기로 대중들을 이끌었다.
한편 인도, 파키스탄 등 대부분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획득하면서 제국시대가 무너졌다. 그러던 중 수에즈 위기가 발생했고 영국은 세계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대 후반 영국은 전후 가장 부유한 시기였다. 특이한 점은 미국과는 반대로 출생률이 저하되었으며, 이는 소규모의 보다 풍요로운 가족을 의미했다. 근로자들의 소득은 상승했고 노동일수는 감소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소유했고 싼 이자로 집을 살 수 있었다.
노동계급 또한 지중해 연안으로 단체여행을 갈 수 있었고 높은 임금과 단축된 작업시간이 가져다 준 자유를 만끽하며 술집, 클럽 등지에서 흥청거리며 놀았다. 이러한 생활방식과 확산되어 가는 대중문화와 더불어 노동계급 젊은이들은 예전과 매우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술과 마약이 자유롭게 사용되었고 스커트가 무척 짧아졌으며 성적인 규제가 훨씬 완화되었다. 사고는 더욱 자유분방해졌고, 군대 징집 폐지로 인해 젊은이들의 분위기는 활기가 넘쳤다.
연대별 주요 사건
1951년
카 라디오가 상용화됨.
빌 헤일리와 그의 밴드 새들멘(Saddlemen)이 ‘Rocket 88’을 녹음.
백인 10대들 사이에서 리듬 앤 블루스의 인기가 높아짐.
1952년
빌 헤일리의 새들멘이 코미츠(Comets)로 이름을 바꿈.
1953년
백인 포크 그룹 위버스(Weavers) 해체.
1954년
빌 헤일리 앤 더 코미츠가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
[RCA]와 [Mercury]에서 45회전 레코드가 78회전 레코드를 대체.
코즈(Chords)의 ‘Sh-Boom’이 팝 차트에 오름.
영화 산업이 영화 [The Wild One]에서 배우 말론 브란도를 반항적인 10대로 묘사.
엘비스 프레슬리가 [선(Sun)] 레코드사에서 녹음.
기타 제조 회사 [팬더(Fender)]에서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 출시.
1955년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ggle)], [이유 없는 반항] 개봉.
척 베리, [체스] 레이블과 계약.
플래터스, 팝 차트 히트 곡 배출.
엘비스 프레슬리, 처음으로 [토미 도시 쇼]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
스테레오 라디오 시대 개막.
제임스 딘 사망.
1956년
스카(ska)가 자메이카에서 시작됨.
프레슬리, 첫 [RCA] 음반이자 영화인 [Love Me Tender]에 출연.
칼 퍼킨스, 차 사고로 부상.
버디 홀리 앤 더 크리켓츠, 첫 녹음 계약.
1957년
리틀 리처드, 활동을 중단하고 목사의 길을 택함.
제리 리 루이스, 13살 짜리 친척과 결혼.
보스턴에서 에벌리 브라더스의 ‘Wake Up Little Susie’를 금지시킴.
폴 매카트니, 리버풀에서 존 레논의 쿼리 멘에 가입.
1958년
엘비스 프레슬리 군에 입대.
첫번째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 개막.
엘피(LP)가 처음으로 출시됨.
1959년
버디 홀리, 현악 세션을 도입한 첫 록 레코드를 녹음.
디제이 앨런 프리드, 페이올라 스캔들 때문에 해고됨.
[모타운] 레코드, 디트로이트에서 시작.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남.
1960년
비틀즈, 함부르크에서 공연.
진 빈센트가 사고를 당함.
트위스트와 다른 춤들이 열광적으로 대 인기를 끔.
[모타운], 스티비 원더와 계약.
에디 코크란 사망.
1955~1959 : 빌보드 넘버 원 싱글 25 (괄호 안은 1위에 머문 기간)
1 Don’t Be Cruel / Hound Dog – Elvis Presley (11주)
2 Cherry Pink And Apple Blossoms White – Perez “Praz” Prado (10주)
3 Sincerely – The McGuire Sisters (10주)
4 Singing Blues – Guy Mitchell (10주)
5 Mack The Knife – Bobby Darin (9주)
6 All Shook Up – Elvis Presley (9주)
7 (We’re Gonna) Rock Around The Clock – Bill Haley & His Comets (9주)
8 The Wayward Wind – Gogi Grant (8주)
9 Sixteen Tons – “Tennessee” Ernie Ford (8주)
10 Heartbreak Hotel – Elvis Presley (8주)
11 Love Letters In The Sand – Pat Boone (7주)
12 Jailhouse Rock – Elvis Presley (7주)
13 (Let Me Be Your) Teddy Bear - Elvis Presley (7주)
14 At The Top – Danny & The Juniors (7주)
15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 Four Aces (6주)
16 Rock And Roll Waltz – Kay Starr (6주)
17 The Poor People Of Paris – Les Baxter (6주)
18 The Yellow Rose Of Texas – Mitch Miller (6주)
19 Memories Are Made Of This – Dean Martin (6주)
20 April Love – Pat Boone (6주)
21 The Battle Of New Orleans – Johnny Horton (6주)
22 Young Love – Tab Hunter (6주)
23 It’s All In The Game – Tammy Edwards (6주)
24 The Purple People Eater – Sheb Wooly (6주)
25 Tammy – Debby Reynolds (5주)
1955~1959 : 빌보드 차트에서 가장 장수한 싱글 8곡
1 Honk Tonk (Part 2) – Bill Doggett (39주)
2 Wonderful! Wonderful! – Johnny Mathis (39주)
3 So Rare – Jimmy Dorsey (38주)
4 Love Letters In The Sand – Pat Boone (34주)
5 It’s Not For Me To Say - Johnny Mathis (39주)
6 (Main Theme) Around The World – Victor Young (34주)
7 Around The World - Mantovani (32주)
8 Tammy – Debby Reynolds (31주)
1955~1959 주요 아티스트
남자
Elvis Presley
Pat Boone
Perry Como
Fats Domino
Nat King Cole
Frank Sinatra
Ricky Nelson
Johnny Mathis
Eddie Fisher
Jimmy Rodgers
Paul Anka
Chuck Berry
Little Richard
Frankie Avalon
Andy Williams
여자
Patti Page
Teresa Brewer
Connie Francis
Sarah Vaughan
Georgia Gibbs
Jaye P. Morgan
Gale Storm
Rosemary Clooney
Doris Day
Joni James
LaVern Baker
Kay Starr
Gogi Grant
Betty Johnson
Jo Stafford
그룹, 듀오, 오케스트라
The Platters
The McGuire Sisters
Bill Haley And His Comets
The Four Lads
The Everly Brothers
Four Aces
The Diamonds
The Armes Brothers
The Fontane Sisters
Billy Vaughan Orchestra
The Chordettes
Buddy Holly & The Crickets
The Coasters
David Seville & The Chipmunks
Mitch Miller Orchestra/Cho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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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시몽님...
나누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행복의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