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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4장
출애굽기 4:1-9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야할 입장에 놓인다. 모세로서는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이러한 사명을 얼마나 이해할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가지 이적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 세가지 이적은 결코 모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할 일에 대한 계시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세가지 이적이란, 지팡이가 뱀으로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3-4절)과 손이 문둥병이 되었다가 다시 원상태로 되는 것(6-7절), 그리고 애굽의 하수를 취해서 육지에 부으면 피가 될 것(9절)이라는 이적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셨다가 꼬리를 잡게 함으로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셨다. 이는 애굽에 대한 심판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애굽은 옛날 에덴동산에서의 뱀과 같은 실체임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즉 애굽은 사탄의 세력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지시대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문둥병이 들었고 또다시 넣었다가 내어 보니 전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이며 그들에 대한 구원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문둥병과 같은 저주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이란, 단순히 이스라엘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차원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계시로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죄악에서의 건짐이다. 그 죄악의 실체가 세상인 것이다. 세상은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자기 힘으로 살아 나가고자 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도배된 심판의 땅에서 벗어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성도의 몸은 세상에 있지만 애굽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란 오직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자라야 한다.
하수가 피로 변하게 되는 이적은 10가지 재앙의 시작으로 남겨 두셨다.
출애굽기 4:10-17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이적들을 보고도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하지 못하다고 변명한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적은 결코 모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모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모세는 여기서 더 이상 발뺌하지 아니하고 애굽을 향해 달려갔어야 옳았다.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모세를 통해 행할 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십자가 사건에 집중되어 있다. 마태복음 8:17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인간의 병을 짊어지러 오신 분이지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었다. 질병이란 죄의 증상들이다. 죄로 말미암아 질병, 고통, 결핍, 가난 등이 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는 것은 자신의 사역이 사탄의 머리를 깨뜨림으로 친히 모든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모든 이적들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시는 것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오직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즉 십자가 사건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2:39-40; 16:4).
십자가 사건은 이 땅에 일어난 이적 중의 이적으로 최고의 이적이다. 신자란 바로 이러한 이적을 받아 누리는 존재다. 그러니 더 이상 다른 이적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른 이적들을 요구한다는 것자체는 아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 신비한 은사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 남들이 가지지 않은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해 보겠다는 것 등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10절)라고 했는데 이 말을 직역하면 “나는 말씀의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말이다. 그 이유를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것으로 변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11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단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이다. 출애굽이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친히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지 인간의 힘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고 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유창한 웅변술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대언자의 기능을 요구하실 뿐이었다. 할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의 가르침만 말하면 되지 모세 자신의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아이디어가 추가되거나 인간의 행위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탁월한 웅변술이나 특별한 말재주가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에게는 그런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주가 있는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재주까지도 빼앗아서 오직 자신의 능력만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는, 곧이 곧대로 그리고 융통성 없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즉 성경말씀 그대로 전하고 나타내는 삶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구체적인 계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절)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에 모세는 감격하여 곧장 애굽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이토록 거부하면서 자신은 할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통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공부한다. 그럴 때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노림수는,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고 무능함을 알면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는 계산까지 우리의 머리 속에 넣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는 앞뒤를 재면서 계산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이다(마 16:24).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그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야만 인간의 자랑이 드러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만 드러나기 때문이다(고전 1:29). 그렇다면 신자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면서 감사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드디어 노를 발하시면서 모세의 형 아론을 붙여주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16절)고 하셨다.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세 한 사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동역자를 주셨다는 차원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증거로 아론을 주시는 것이었다.
즉 아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자신의 믿음없음을 기억해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분명히 잡히는 것으로 믿음을 정의하려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믿음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예컨대,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것,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 등으로 믿음을 평가하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들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면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 믿음이다(히 11:1). 즉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주님으로 여기고, 보이는 않는 천국을 보이는 천국으로 여기고 그 천국의 삶을 사는 것어야 한다. 나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나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출애굽기 4:18-26
이제 모세는 비천한 목동의 지팡이를 들었다(20절). 그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하실 일을 보이신 지팡이였다. 그것으로 이적을 행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17절). 그리고 단촐한 가족들을 데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구출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장인 이드로의 집을 떠나 애굽으로 가게 된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시겠다고 하신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22절). 즉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으신 하나님과 애굽의 왕이 부권(父權)을 놓고 정면 충돌하는 싸움이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장자란 어떤 자를 말하는가?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 다급해진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 그러자 모세는 죽음을 모면했다. 십보라는 모세에게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25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고자 한 것은 모세가 받은 사명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모세의 사명은 아브라함의 언약인 할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십보라는 이를 소홀히 여기고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언약의 말씀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방 제사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살았기에 언약의 말씀을 제대로 드러내어 할례를 행하도록 하지 못한 모세에게도 잘못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돌칼을 든 십보라의 행위는 아브라함 언약과 관계된 이스라엘의 구출(창 15:13-14)에 대한 중요성을 일러주고 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 투입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이 사건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약계통에서 보자면 이미 인간의 장자는 장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할례 언약에서만 장자로 간주되는 것이다(창 17:13-14). 지금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행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 언약으로 오는 심판을 나타내는 데 있다. 그것을 바로 모세의 가정을 통해 밝히시는 것이다. 인간들의 혈통과 무관한 그런 아들이 하나님의 장자이다.
하나님의 장자는 할례에 의해서 인간 핏줄이 잘려져야 한다. 인간의 혈통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에 반드시 잘려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이는 것이 피요 또한 피 남편이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약속된 할례의 피와 모세의 피(목숨)를 맞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의 양피를 모세 앞에 던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에 방해되는 자들, 비록 이스라엘의 구출에 대한 사명을 받은 모세라고 할지라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애굽이 하나님의 아들을 놓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장자를 치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은 이미 애굽의 장자를 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결국 십보라 사건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 즉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애굽에서 살아나온 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인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23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로 삼으신 선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길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리고, 기도를 하며, 전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언약(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마 12:50)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기존의 인간 혈통에 의해서 가족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관계로 확정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이 땅에서의 가족관계를 다 끊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세상의 것을 초월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고전 7:29-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5월이면 “가정의 달”이라고 하여 어버이 주일, 어린이 주일을 빠뜨리지 아니함으로 세상에서의 가족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일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땅에서의 가족관계를 부정한다면 예배당에 오는 손님들이 싫어하면서 발을 끊어버리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는 세상을 포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자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하늘의 것을 찾는 자이기 때문이다(골 3:1-2). 인간의 것, 세상의 것을 고수하는 한 하나님의 아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4:27-3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났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소상하게 말한 후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나아갔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이란 통상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어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믿고 받아들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31절)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찍이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된다는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고난이 해소된다는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난이 해소되지 않고 더욱 가중되자 금방 모세와 아론을 향해 죽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5:21).
사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이 아닐까? 내 고통, 내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예수,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지금 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그분이 베푸신 긍휼만이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약 2:13) 믿고 그 긍휼을 받은 자로 날마다 자신이 죄인됨을 고백하는 자라면 참으로 복된 자이다.
나는 긍휼을 아는 죄인인가? 종교적인 경건으로 치장된 자신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통회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눅 18:14)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마 8:13).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