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냐민이 아비에게 어떤 아들임을 설명하다
창 44:14-24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창 44:14-24 /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요셉은 여전히 집에 있었다. 그들은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15) 그러자 요셉이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너희가 내게 이런 짓을 하였더란 말이냐? 너희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 내가 점을 쳐 이런 짓을 너희가 한 것을 못 알아낼 줄 알았더란 말이냐?' 16) 그러자 유다가 말하였다. `우리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무엇으로 증명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내시니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은잔을 가지고 있는 저 막내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17) 그러자 요셉은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또 나는 너희가 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내 은잔을 가져간 사람만 내 종이 되면 된다.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 부친에게 걱정을 끼쳐서는 안 될 것 아니냐?' 하고 말하였다. 18) [유다가 베냐민 때문에 빌다] 그러자 유다가 요셉에게 다가가서 애원하였다. `총리 각하, 부탁입니다. 총리 각하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드립니다. 총리 각하는 그 바로와도 같이 높으신 분 아니십니까? 19) 지난번에 우리가 이곳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왔을 때 총리 각하께서 물으셨지요 `너희 부친이 계시냐? 또 너희 아우도 있느냐?' 하고 말씀입니다. 20) 그래서 우리가 총리 각하께 말씀드렸지요 `예, 나이 드신 아버님이 고향 땅에 살고 계십니다. 또 막냇동생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부친께서 늘그막에 얻으신 아이이지요. 그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형이 하나 있었는데 죽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아버지 곁에 있는 그 아이가 그 어머니에게서 난 하나 남은 아이이지요. 그래서 부친께서 그 아이를 무척 애지중지하십니다.' 21) 그러자 총리 각하께서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아이를 꼭 봐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2) 그래서 우리가 총리 각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 아이를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게 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곧 돌아가실 거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이를 너무 아끼시기 때문이지요. 23) 이렇게 말씀드리자 총리 각하께서는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지 않으면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생각을 말라'고 준엄하게 경고하셨지요. 24) 우리는 다시 우리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총리 각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대로 우리 아버지께 다 말씀드렸지요
요셉은 잡혀온 형들을 보고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유다가 그 형제들을 대표하여 우리 모두가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할 때에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자만 자기의 종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잡혀온 그들을 꾸짖음(14-17) 형제들이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요셉은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15)고 다그칩니다. 요셉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꾸며 낸 말입니다. 그들이 은잔을 도적한 일이 점괘에 의하여 알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대표하여 유다가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16) 하나님이 죄악을 찾아내셨다는 것은 형제들이 오래 전에 요셉에게 행했던 악한 행동(37:18-28)을 하나님이 드러낸 것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곧 그들에게 일어난 이 불행은 오래 전에 범한 죄악에 대한 보응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회의 말로 이해됩니다(42:21). 요셉이 그들을 시험한 목적이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의 청지기는 그들의 자루에 들어있던 돈은 문제 삼지 않고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만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베냐민만 잡아 두고 다른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거리낌없이 곧장 가나안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변명과 필요하다면 거짓말까지 하면서 자신들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행위를 정당화시켜 아버지께 보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또한 요셉도 형들이 베냐민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사연을 진술함(18-24) 유다는 요셉의 진노가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어서 말했습니다. 요셉이 말한대로 베냐민만 남기고 형제들이 돌아갈 수가 없음을 설명합니다. 최근에 그의 집안에 있었던 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곡물을 사기 위해 처음 애굽을 찾았을 때 요셉이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았던 이야기와 두 번째 애굽을 찾은 여정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일이 복잡하게 꼬였고, 이제 요셉이 명한대로 베냐민만 남겨 종이 되고 다른 형제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죽음으로 빠뜨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는 이어서 아버지가 그토록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배경 설명을 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난 자식 요셉을 잃은 후 아우 베냐민까지 잃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 요셉에게 모든 사연을 진술하였습니다. 도저히 데려올 수 없는 입장의 아이였지만 아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총리의 얼굴을 못 본다 하므로 데려왔다 했습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결코 은혜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힘들게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적용: 성경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몫을 대신하겠다고 나선 일은 유다가 처음입니다. 나는 유다와 같이 형제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15:13)
마음이 새로워지면 믿음이 달라집니다. 이 세대는 현상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나타난 것은 현상일 뿐 실체가 아닙니다. 말씀이 실체라고 믿어질 때 현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풍랑은 현상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이 아니라 주님을 실체로 보았습니다. 주님이 명령하면 현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 설 교 >
희생하면 관계가 회복됩니다
창 44:14~34
■ 아마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만, 이솝우화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서 기르는 모든 동물들을 모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동물들에게 물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모든 동물들은 일제히 “대찬성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거위를 보며 말합니다. “아무래도 거위요리가 좋겠다.” 그러자 거위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저 수탉을 잡으시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수탉이 손을 저으며 말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을 알려줍니다. 저 양을 잡으시지요.” 이번에는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저는 따뜻한 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 말을 잡으시는 것이 어떤가요?” 라고 말하자, 말이 소를 가리키며 “주인님이 여행가실 때 누가 태워 줍니까? 암소고기가 최고지요.”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소가 고함을 칩니다.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동물들이 다 잔치는 원했지만, 희생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 이솝 이야기는 오늘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이익이 되는 일에는 앞 다투어 나서지만, 손해 보는 일에는 다 뒤꽁무니를 빼는 것이 요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당장에는 희생이 손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처음에는 희생이 실패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성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은 처음에는 실패처럼 보였습니다만,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희생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라든지, 관계의 문제라든지, 가정의 문제, 과거의 문제, 등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 ‘희생 =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희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아니라, 야곱의 아들 유다입니다. 그는 사랑받지 못하던 야곱의 아내 레아의 4번째 아들로서, 쉽게 말하면 첩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보면 그의 가정이 복을 받았습니다. 유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도대체 유다가 어떻게 했길래, 그와 그의 후손들이 큰 복을 받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다의 희생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유다가 어떠한 희생을 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진정한 희생자 유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9년째 다스리고 있을 때, 온 세상에 흉년이 닥쳤습니다. 가나안에도 흉년이 닥쳐 양식이 부족하게 되자,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10명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 양식을 사오게 합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갔다가 돌아온 아들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지만, 시므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22년 만에 만난 형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동생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오도록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들들로부터 시므온이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고,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서 애굽의 총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들 베냐민을 절대로 애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 때 장자인 르우벤이 베냐민을 안전하게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을 합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창 42:37)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했지만, 야곱은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르우벤의 제안을 듣지 않자, 이번에는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 43:8-9) 여기 ‘죄를 지겠다’는 것은 자신도 죽겠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유다는 이미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조차 애굽에 붙들려 있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아들인 베냐민까지 잃을 것을 염려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르우벤과 유다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르우벤과 유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가는 것을 반대할 때, 르우벤은 무엇을 담보로 내걸었습니까? 자기 아들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아들이 아닌,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 놓았습니다. 이것이 유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유다는 두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었던 르우벤과 달리,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었습니다. 결국 유다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버지 야곱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야곱은 아들들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도록 허락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다의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가족을 위해, 형제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희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식을 사러 들어갔던 애굽에서도 유다의 희생은 계속됩니다.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다시 찾아온 형제들 틈에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한 요셉은 형들을 테스트합니다. 양식을 담아가기 위해 가져온 베냐민의 자루 안에 자신이 아끼는 ‘은잔’을 숨겨놓았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는 바람에 11명은 다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애굽의 총리가 아끼고 있는 은잔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베냐민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 앞에 나섰습니까? 장남인 르우벤이 나섰습니까? 아니면 둘째인 시므온이 나섰습니까? 아니면 셋째인 레위가 나섰습니까? 아닙니다. 다름 아닌 유다가 나섰습니다.
항상 앞장을 선 유다
이처럼 유다는 형제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2장 3절에 보면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라고 하면서 ‘요셉의 형 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창세기 44장 14절에 보면,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라고 하면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라고 바뀌어 집니다. 유다는 문제 앞에서 뒤로 숨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위기 때 앞장을 서는 리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앞에 나선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모두가 다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니까 베냐민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 아니라, 더불어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사람에게만 책임을 묻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때 다시 앞에 나선 사람 역시 유다입니다. 유다가 또 다시 나서서 요셉에게 2차로 탄원을 합니다. 그것이 18절부터 34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는 베냐민에 대해서 ’아우’, ‘소년’, ‘그’, ‘말째’, ‘아우’, ‘이’, ‘아이’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베냐민에 대한 애정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유다의 이 2차 탄원은 창세기에 나오는 발언 중에서도 제일 길며,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감동이 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구구절절 사람의 마음을 강동케 하는 탄원을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이 아이의 생명은 서로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아이를 애굽에 놓아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베냐민을 고향으로 데려가지 못하면 연로하신 아버지가 슬픔 가운데 돌아가실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약속하기를 ‘이 아이를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가지 못하면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다음 유다는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다같이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유다는 자기 자신이 베냐민 대신 희생하겠다고 합니다. 유다는 자기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대신, 동생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결국 유다는 앞장을 서서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유다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희생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다
희생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만듭니다. 물론 희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할 것이 없이 희생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희생 없이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무도 희생하지 않으면, 아무도 양보하지 않으면 절대로 깨어진 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서로 갈등하고 관계가 꼬여 있는 이유는 서로 쌍방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양보를 해야 충돌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한 사람이 희생을 해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엄청난 권력자였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 오늘이 제삿날일줄 아십시오.”하며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2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유다의 간곡한 호소와 자기를 희생시키는 그의 탄원을 듣고 그의 감정은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창세기 45장을 보면, 요셉은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요셉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어서 자신을 드러낸 후 겁에 질려있는 형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안정시킵니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아버지와 온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와서 5년이나 남은 흉년기간을 보내라고 제안을 합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까? 요셉의 마음이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22년 만에 만난 형들의 변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동생 베냐민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넷째 형 유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희생의 능력입니다.
■ 중국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 많은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준 유명한 윗치만 니(Wachman Nee)가 쓴 글에 보면 이러한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예수를 믿는 한 성도가 살았는데, 그의 논에는 항상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마침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밤새에 자기의 논에 고여 있던 물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에서 자기 논의 물을 밤새도록 빼내어 간 것입니다. 그 성도는 그 물이 자기 논에 고여 있던 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물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튿날 아침, 이웃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당신은 왜 나의 논에 고여 있던 내 물을 다 빼내어 갔습니까?” 이웃 사람은 사과를 하며 빼내어 갔던 물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들판에 나가보니 이웃집 논에 물이 가득하고 자기 논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웃을 찾아가 따졌더니 또 다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을 지나 아침이 되어 들판에 가보면 또 다시 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이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물을 다시 찾아왔는데도 마음이 도대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까?” 그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나는 네가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길 바란다.” “하나님! 그렇다면 도대체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너도 그 사람을 대하여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의미를 몰라 여러 번 계속 물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날 밤 그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웃사람이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미리 자기 논에 있는 물을 이웃의 논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고,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사람들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사실 깨어진 관계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따진다고 회복되지 않습니다. 심리학적인 처방이나 상담, 등으로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칠 뿐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깨어진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남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유다처럼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가정과 샘과 교회 안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교우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유다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축복을 불러 온다
희생은 축복을 불러옵니다. 요셉을 팔아 버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유다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제안함으로써 형제들 간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아버지의 잃었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요셉이야기의 전환점에 유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죽기 전에 자녀들을 불러놓고 한 사람씩 축복을 하는데, 그 때 유다는 다른 자녀들과 달리,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8~10)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너희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또한 가장 위대한 분이 너희 후손에서 태어나실 것인데, 만민이 그분에게 복종할 것이다.” 야곱이 예언하며 축복한 것처럼, 유다 족속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을 발한 족속이 됩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은 유다지파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을 때 유다 자손들이 계속 남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망한 후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앞장섰던 사람들도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도 유다의 후손입니다. 요즘 흔히 쓰는 ‘유대인’ 혹은 ‘유대교’란 말도 모두 유다의 이름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처럼 유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이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희생의 축복(Blessing of the sacrifice)‘이라고 합니다.
■ 100여 년 전 일본의 시부야 공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흔히 ‘시부야 공원 사건’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주 못된 인생을 사는 아버지와 착한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도둑에다 폭행, 강도짓을 일삼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은 아주 착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알아차린 딸은 자주 자주 간곡하게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제발 좀 그런 잘못된 일은 그만두세요.” 아버지는 눈물로 애원하는 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어두운 밤 시부야 공원에 젊은 아가씨가 예쁜 옷을 입고 매우 좋아 보이는 핸드백을 든 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으슥한 곳에 숨어있던 못된 아버지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 처녀를 칼로 찌르고 핸드백을 빼앗아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한 그는 핸드백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장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저는 정말로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의 영혼을 사랑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빠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어서 제 목숨을 아빠께 드려요. 아빠 사랑해요. 불효자식 드림” 그 아버지는 자기가 죽인 아가씨가 자기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회한과 후회와 함께 통곡을 하다가, 나중에는 경찰에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가운데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희생하라고 하면 “미쳤어? 내가 왜 희생해야 해? 왜 나만 손해 봐야 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마치 시부야 공원에서 아버지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던진 딸처럼, 예수님은 온 인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희생해야 축복이 임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나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내가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죽을 때, 우리 가정이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죽을 때, 우리 교회가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결 론
이제 박영희 시인이 쓴 <접기로 한다>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여기 ‘아내’라는 단어에 ‘남편’이나 ‘친구’나 ‘교우’라는 단어를 넣어도 좋을 것입니다. ‘요즘 OO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여러분, 많이도 말고 조금만 접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섭섭하기는 해도 조금만 희생한다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얻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괘씸하기는 해도 조금만 희생한다면,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희생에 따른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