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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잡으신 주님(마 14:22~33)
파스칼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도 믿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때로는 고난이라는 은혜와 축복의 수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려는 사람에게 고난의 바람을 불게 해서 그 사람을 흔들어서 믿음의 중심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가 알아보시고 두들겨 보시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17세에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꾼 이후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형들의 배신으로 노예생활을 했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꿈을 이루시고자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을 늘 형통케 하셨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고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보디발에게까지 인정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사람의 끝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 인생이 끝이 나야 하나님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요셉에게 닥친 고난은 요셉의 꿈을 이루는 수단이요 도구였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어떻게 섬기면 살아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인지를 알았고 한 가정의 가정총무가 되어서 작은 가정을 다스리면서 리더십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나라의 중요 요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애급의 상황을 잘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고난을 원망과 불평으로 대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나로 하여금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며, 감사하면서 잘 감당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물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그의 작은 믿음은 의심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의 소유자는 1)처음에는 믿음이 있는 사람 같으나 곧 바로 식어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2)문제를 만나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3)의심하는 사람입니다. 물속으로 빠져가면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베드로는 소리를 듣고 주님은 손을 내밀어 구원하셨습니다. 적은 믿음의 소유자라도 베드로 같이 주님께 기도하고 맡기면 오늘도 주님은 우리들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지지 마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믿고 간구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내 손을 잡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 손을 붙잡힌 사람은?
▣ 주님께 보호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나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 보호를 하신다면 그 분에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요10:27~29, 히6:13). 또한 그 분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부탁해도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창18:14, 사9:6, 렘32:17, 마19:26, 막9:23, 눅1:37).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시는 그분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그 손에서 보호받는 사람을 그 누구도 하나도 빼앗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언제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출애굽 이후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았기에 적들의 침입에서도 배고픔도 다 이기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복을 받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 주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됩니다
훈련이 없는 성공은 없으며, 훈련이 없는 위대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 눈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결국 세상의 물결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생생하게 삶의 현장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에게도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살면 어느 때든지 세상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눈으로 세상에 빠지더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여 부르짖으면 주님은 그 큰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지금의 상황에서부터 우리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의 큰 손에 자신을 맡기면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손을 잡으시는 이유는 바로 나로 하여금 주님의 일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을 잡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께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꼭 가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수많은 고생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풍파와 싸워야 하고 자신과도 싸워야 하고 마귀의 유혹과도 싸워야 합니다. 이같은 싸움에서 이기려면 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을 잡고 있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그리고 이기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나아가면 우리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시107:28~30).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내 손 잡으신 주님께 나를 맡기고 나아가므로 주님의 보호를 받고,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행 3:1~1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일순간에 위험과 고통으로 다가왔고 죽음의 위협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고, 주님은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한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부탁하시면서 성령의 권능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들은 나가서 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120명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바람같이 불의 혀같이 임하였고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1:8).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이름을 들고 나가서 담대하게 전하기를 시작하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역사는 반드시 믿음으로 행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맡겨준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난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겉모습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의심과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속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찼습니다.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어떤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으며, 저주받은 삶을 구원시킬 수 있으며, 구걸하는 삶을 주는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시간에도 앉은뱅이같이 주저앉아 있는 우리들을 일으켜 주셔서 주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사용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일으켜 세울 수가 있습니까?
▣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늘 습관을 가지고 기도에 힘썼습니다(행3:1). 기도의 습관은 가장 좋은 습관입니다. 기도의 습관은 나에게 가장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부어주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니엘과 같이 어떠한 세상의 위협에도 비겁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단6:10). 또한 유대인들은 전통과 습관을 따라 하루 세 번의 기도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시55:17). 구약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 같이 오늘에는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능력을 나타냅니다 성전이 가장 좋은 기도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주님의 몸이라고 하셨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체험한 것과 같이 오늘 날에도 교회에 모여서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능력을 공급 받아 놀라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 문제의 사람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 그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앉은뱅이를 성령님이 임하자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40년이나 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보게 하였습니다(행3:2).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행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나면서부터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앉은뱅이와 같이 나면서부터 죄의 저주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았습니다. 성전 밖에서 성전만을 바라보고 기도와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자신의 필요한 것을 채우는 도구로만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던 물질, 남편, 자녀, 상사의 눈치를 보아왔습니다. 이제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함으로 그들의 관점과 삶의 눈이 하나님께로 그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 저주의 삶, 구걸의 삶에서 이제는 축복의 삶으로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은 늘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우리들도 나가서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로 모이는 일에 함께해야 합니다.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자요 스스로 헤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마12:30).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단호히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구경꾼 같은 성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유익만을 위하여 살던 성도들이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들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이며 성령 충만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외침이 40년의 긴 터널에서 고통당하면서 쓰임 받지 못하던 다리에 힘을 얻게 하였고, 그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이같은 기적은!
1) 사람을 통해서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일을 행하시는데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행3:7). 구약에서도 수많은 선지자들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셨고, 사도 바울도 손을 내밀어 병자들을 고쳐주었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습니다. 이같은 일은 오늘도 변함없이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십니다. 기도의 응답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바로 나의 옛 사람 즉 죄 된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장사되었고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오늘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일어납니다.
3)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일을 행하고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행3:8~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외침은 바로 우리들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놀라운 일들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의 삶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별을 보고 왔노라(마 2:1~12)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동방에서부터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큰 별을 보고 그 별의 신기함에 반해서 그 별을 따라 주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계시며 그 예언들은 그대로 응답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24장 17절에서 한 별이나 한 규는 병행으로 놓았습니다. 즉 그 나라의 임금을 별로 표현하고 가장 높은 곳을 별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규는 왕권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야곱의 후손에서 왕이 나옴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정확한 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6절 말씀으로 이는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데 별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하나의 도구로 여겨졌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대망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볼 때 동방에 떠오른 큰 별은 그야말로 이상한 별 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요 몇 천 년을 기다려온 메시야 탄생의 비밀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것입니다. 적어도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연구한 사람들이고 그 메시야가 오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별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별로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별은 빛을 나타냅니다
유진 피터슨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한 요한복음 1장4절을 메시지에서 “존재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삶을 유지하는 빛이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생명에게 삶을 유지하게 하는 빛에는 두 가지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빛을 발하여 밝게 비추어 어둠을 물리칩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을 말하고 있습니다(요1:5, 9~10). 바울은 우리들의 싸움은 바로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들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기를 바라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공중권세 잡은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엡6:12). 악한 어두움의 세력을 대적하여 이기려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오셔서 어두움을 대적하고, 물리치며, 정복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요12:46). 주님께서는 별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어두운 밤에도 두렵지 않게 하시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악한 어두움의 영들과 싸움에서 이기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어두움에 거하여 살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또한 빛은 생명을 주어 성장하게 합니다. 빛이 비추는 곳이라야 빛의 생명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둠의 죽음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시56:13, 요8:12, 3:16). 빛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기에 언제나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성장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둠을 물리치고 마귀의 권세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고 언제나 성장하여 예수님을 닮아 살게 하시려고 어두운 밤에 별과 같이 이 땅에 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별은 안내자가 됩니다
별은 밤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나 어두운 밤에 항해하는 배들에게 갈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온전한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갈 때 참된 인생의 가치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진리의 말씀이 되시고 생명을 주시는 길이 되시는 길을 만드시는 자요 그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인도자가 되십니다(요14:6).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은 주님과 같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냥 교회를 다니는 교인입니다. 둘째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이 세상을 마쳤을 때에는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에서 이제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예수 안에서 참 평안을 얻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별은 희망입니다
믿음은 희망이 넘치게 하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합니다(롬15:13). 동방박사들은 예언의 말씀을 알고 믿었으며 그 믿음을 가지고 별을 따라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별을 보고 베들레헴까지 온 것입니다. 희망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은 무엇인가 소중하고 특별한 기대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자신들이 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자신들이 보게 될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따라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볼 것에 대해 믿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면서도 메시야 사상을 믿었고 별만 보고 왕의 나심을 믿었고, 초라한 마구간의 아기 예수를 보고도 구세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를 찾아오는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믿음은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늘 살아가는 것입니다. 2012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주간입니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별을 따라 동방에서 베들레헴을 찾아온 동방 박사들과 같이 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인내하면서 잘 이기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신 별은 빛을 비추고, 안내하며, 희망을 줍니다. 그 별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지지 않으며, 항상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시며,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항상 도와주심을 믿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걸음을 정하신 하나님(시 37:23~26)
2012년 한 해 동안 정말 어렵고 힘들었고 견디기 고통스러웠던 일들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늘 주의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고, 마음과 뜻을 우리 가운데 향하여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저주와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궁핍 속에 살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잘되기를 원하시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며 평강과 소망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뜻과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이 언제 지나갔는지 알지도 못하게 지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때에도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렇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도 ‘사도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자신이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수고하고 열심히 한 것인데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고전15:9~10, 갈2:20).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이 누려보지 못한 부귀와 영화를 다 누려보고 살았던 솔로몬은 시편 127편 1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가능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바울을 인도하셨듯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도 죽을 때까지 항상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을 지키셔서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우리들의 출입을 영원히 지키십니다(시121:7~8). 그러므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의 가는 길을 정해놓으시고 보고 계시며, 그 정해 놓으신 길을 따라 순종하여 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시37:23).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을 아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내 뜻은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시고, 그 가는 길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가는 인생에게는?
▣ 하나님의 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시37:24). 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손에 붙들려야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인 사울을 붙들어 주셔서 왕으로 세워 쓰셨으며, 부모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 다윗을 붙들어 주셔서 위대한 성군이 되고 통일을 이루는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붙들어 주셔서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치료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이 닿으면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손으로 우리들을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면 하나님께서는 놓지 않으시고 우리들이 넘어져서 자빠지려고 해도 우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들의 걸음을 정해 놓으시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를 붙들고 계셔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실 줄로 믿고 항상 나를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 버림받거나 가난하게 살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해놓으신 길로 믿고 나아가는 사람을 버리거나 그 사람이 가난하게 살지 않게 하십니다(시37:25).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호수아에게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떠나지 않고 그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자로 만드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여 나아갔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였으며 분배를 받았으며, 그들의 후손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만이 아시니 그 길을 따라서 늘 순종하여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은혜를 베풀며 복을 받으면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살았던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그들의 일생이 남에게 은혜를 베풀며 남에게 꾸어주며 복 있는 사람이라고 증거를 받았습니다(시37:26). 요셉을 보십시오. 실패한 인생 같았던 요셉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아비지와 형들이 그의 손에 의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 길이 험하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마시고 끝까지 순종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게 하며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에게 놀라운 복으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2012년도 가만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께서 나를 붙드셨고, 버리지 않으셨으며 가난하게도 아니하시고 항상 은혜롭게 살게 했으며 복을 받고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길을 이미 다 정하시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 이미 하나님께 정하신 우리 각자의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에 그 길을 걸으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신실하게 걷게 하시고자 환난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더욱더 견고케 하실 것입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본받아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믿음으로 기뻐하는 믿음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흥하는 교회(엡 2:21~22)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로는 2013년은 표어와도 같이 “제2의 도약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도약'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맥가브란과 피터 와그너의 이론을 중심으로 교회부흥을 살피면 크게 네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적성장(Internal Growth)인데 믿음의 사람이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양적(외적) 성장 (Expansion, External Growth)인데 양적성장은 그 교회가 사역하는 지역 내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여서 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양적성장은 맥가브란에 의하면 다시 생물학적 성장(Biological Growth)과 이동성장(Transfer Growth)그리고 회심성장(Conversion Growth)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심성장이야말로 바람직한 교회의 양적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확장 성장(Extention Growth)으로 일반적으로 지역 안에서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지교회가 설립되고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선교성장(Mission Growth)으로 선교 성장은 다른 문화권에서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들이 섬기는 지역교회도 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부흥은 초대교회를 통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일으키는 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준 신앙생활을 본받고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하는 초대교회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여서 함께 뜻을 합해서 온 힘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행1:14). 또한 흩어지면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이는데 뜨거웠습니다. 성전을 사모하여 모이고, 은혜를 사모하여 모이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여 모이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입니다(행2:46, 마18:20). 오늘 날에도 교회 부흥의 비결은 열심히 모이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부흥하는 교회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연합되어 목장교회를 이루고 한 목장 한 목장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 된 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명도 일차적으로는 내가 몸담고 있는 하늘꿈교회라는 이 지역교회 안에서 주어지고 수행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하늘꿈교회를 사랑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연합이 점차 성장하여 완전하게 되어 갑니다(엡2:22). 하늘꿈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이 하늘꿈교회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헌신하여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때 우리 하늘꿈교회는 부흥하고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의 부흥에 관심을 갖고 그 일에 헌신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교회부흥의 비결은?
▣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어주셨습니다(마10:1). 이같이 하나님의 교회도 성령님의 권능을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님의 권능이 임하여서 우리의 생활과 환경 속에, 가정 속에, 한 인간 속에 묻혀 있는 어둠이나, 슬픔이나, 질병이나, 저주나, 가난을 몰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민간에게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행5:12).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는 성령님의 권능이 나타나며,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아지고 믿음이 생기며. 마음이 시원해지고 마음에 도전감이 생기고, 용기와 담대함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며, 마귀와 싸워 이기는 증거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언제든지 성령 충만한 성도로 변화되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며, 부흥의 역군들로 사용되어 지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 되어 연합해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133:1, 요15:4, 엡4:3). 하나가 될 때 열매를 맺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꿈교회가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며, 하나 되어 모든 세상의 사람들에게 선하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예배가 살아있고 기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사56:7). 하나님께 예배 나오기를 기뻐하는 자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주위에서 생기게 되며 기쁨이 넘쳐 모든 일에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배를 잘 참석하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은혜를 받게 되고, 봉사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가 잘 이루어지고, 또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기쁨을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누리게 하시며, 우리들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시고 우리들의 삶을 만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건강한 성도가 되고, 그런 성도들이 하나 되어 모여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간절히 기도에 깨어 있을 때 교회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자연히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3년은 우리 하늘꿈교회는 더욱더 부흥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온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고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깨어서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고, 스스로 앞장서서 영혼구원을 위해 힘쓰며, 내가 먼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먼저 구원 받은 성도답게 구별되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늘꿈 공동체가 더 크게 부흥하고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입은 신앙-노아(창 6:8~22)
2013년 전반기 24주 동안은 ‘믿음의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 시대 속에 우리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구원받고, 승리하고, 축복을 받고, 능력 있게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 온 식구를 구원하였으며, 노아의 믿음의 행위는 믿지 않는 악한 세계와 믿는 올바른 세계와 구분을 짓게 하였습니다(히11:7). 지금 우리는 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37). 말씀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말세를 사는 우리도 노아와 같은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은 노아와 같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그렇다면 노아가 살던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1)죄악이 가득하고 악한 시대였습니다(창6:5). 본문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 계통의 사람들로서 경건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 계통의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딸들입니다. 사람들이 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서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통혼하여 교제하면서 불신자와 신자가 모든 의와 선과 진리를 헐어 버리고 악과 타협하고, 악에 빠지는 시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됨이 없이 혼합되고, 성도의 구별함, 거룩함이 없는 이 세대가 되어 교회와 성도가 타락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2)성적으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노아 시대는 쾌락만을 추구하던 시대였습니다(마24:38~39).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것은 세상의 쾌락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쾌락만을 위하여 살아가며, 심각한 성적타락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3)힘을 앞세운 폭력이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본문 4절에서 네피림이란 불법자, 폭행자, 깡패를 말합니다. 노아 당시에 불법자, 힘센 자가 활동하여 땅에 포악이 가득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창6:11, 13). 그런 시대가 더 시간을 지나면 하나님의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4)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부패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서는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썩어서 냄새를 낸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조용히 생각하여 볼 때에 이 세대가 그 당시보다 더 악하고 죄악이 관영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이 같은 시대의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다가 결국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창6:6~7).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고, 마음에 근심하시면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창6:13).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을 정하시고 120년 후에는 멸망시킬 것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창6:3).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서는 그 날이 가까워 오는데도 정신없이 쾌락, 죄악, 폭력에 도취되어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노아의 믿음을 본받아서 지금이 어떤 때이지를 깊이 묵상하고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철저한 주님 중심의 믿음으로 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멸망의 때에 노아의 신앙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쏙 들은 신앙을 가졌습니다(창6:8). 본문 8절에서 ‘입었더라’는 히브리어는 “마짜”인데 그 뜻은 “발견하다, 도달하다, 얻다. 찾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은혜를 입었더라.’는 문구에 “베아인네”가 빠져 있습니다. 그 뜻은 ‘~의 두 눈 안에, ~의 두 샘 안에’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번역하면 “그러나 노아만은 여호와의 두 눈에 들어 은혜를 입었다.”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들었을 만큼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펴보시다가 때가 되니 눈에 들은 노아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눈에 쏙 들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창6:9). 노아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그처럼 나쁜 환경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본문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의인’이란 “온전하게 행하는 자”를 말하며(잠20:7), ‘완전한’ 사람이란 ‘흠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믿음에 진실한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인정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말세의 구원받는 성도인 것입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창6:9). '믿음이 왜 필요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환경을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는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한테 순수한 믿음을 지켜 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에트-엘로힘’은 ‘에트’라는 단어의 뜻은 “가까이, 안에서, 함께”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 안에 사는 것 그것이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멸하실 계획을 세우신 노아의 시대는 주변 환경이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에 최악의 여건이었습니다. 이런 최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에 예속하여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4)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창6:22).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었고, 재력과 기술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구원을 받고, 그리고 순종하므로 손해를 본 것보다 더 많은 물질과 은혜와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순종의 결국은 가장 큰 축복인 구원과 상급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똑 같고, 롯의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눅17:26~30). 진리와 비 진리가 타협하고 죄악이 가득하고, 쾌락과 음란과 강폭이 가득하여 네피림이 권세를 잡고 사는 이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고 세상은 불타서 멸망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노아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완전하게 살기를 노력하며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준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날이 언제 이르러도 우리는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신앙-아브라함(창 12:1~9)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해 죄와 타락을 가져오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역사는 갖가지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두 가지의 사건이 있는데, 첫 번째 사건은 노아 시대의 ‘홍수로 말미암은 심판’의 사건입니다. 이 심판의 시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노아의 여덟 식구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기를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창11:4). 하나님께서는 문명의 교만함을 나타내 보이는 탑을 보시고 심판을 통해서 그들을 흩어 놓으셨습니다(창11:6~8). 그래서 바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본문 1절인데, 이 말씀을 킹 제임스 영어 성경에 보면 “Now the LORD had said to Abram.”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제부터(지금부터)라는 뜻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에 대하여 화제를 바꾸거나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야 또는 시간이 되었기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기에 아브람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바벨의 시대와 별 차이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좀 잘 되면 으쓱거리고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은 없어도 된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세상은 한낱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작은 티끌에 불과 한 것입니다(사40:15, 17). 오직 모든 세계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벨의 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를 들어 쓰셨습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름 받은 사람의 삶입니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이란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1) 아브라함에게도 우리와 같이 많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부름 받고 나서 많은 실수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자기가 살겠다고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작은 부인으로 들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같은 허물과 결점을 가진 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도 믿음의 삶속에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조카 롯과의 재산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이스마엘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으로 마음고생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다 갈등을 겪고 문제에 봉착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삶의 변화의 기회로 삼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로 삼을 것인가 입니다.
3) 아브라함도 자주 약해지고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상황이 답답하면 믿음을 잃고 신앙의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롯을 구하고 나서 주변의 왕들이 다시 자신을 쳐들어 올 것에 대해 두려워했고, 후계자가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창15:1).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입니다(창20:3). 하나님께서 여러 번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으면 이제는 담대해질 만도한데 아브라함은 아직도 약한 믿음이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평범하고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 어떻게 해서 불러주신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4절). 믿음 생활에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굳게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근거로 살았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창12:1).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자’는 사라의 말대로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창21:14).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두 말 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창22:2). 아브라함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고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하는 말씀 중심의 신앙적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2) 어디를 가나 먼저 예배가 중심이 되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7~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비결은 모든 하나님과의 만남의 일을 예배로 해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까지도 예배로 이해하였습니다(창22:5). 여호와 이레의 축복의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은 그를 축복의 조상임을 증명해준 일입니다. 지금은 내가 번제물로 드려져야 할 예배가 필요할 때입니다. 교회생활과 예배생활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제자 훈련, 봉사, 전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예배입니다. 올 한 해는 예배에 아브라함과 같이 승리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낳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3) 항상 기도를 힘쓰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8절 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기도생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도의 사람으로 세워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12:8). 그 중에서도 중보기도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멸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여섯 번이나 간절히 강청하며 중보기도를 올렸습니다(창18:22~33).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쓰시며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전진해가는 우리들에게 복을 받는 믿음의 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갈3:7~9, 14).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성령의 약속된 믿음으로 확고하게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깨어져 축복받은 신앙-야곱(창 32:13~32)
야곱은 이삭의 가정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 중 동생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리브가가 해산할 때,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 후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결국 형을 피해서 도망을 가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만나주심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만듭니다(창28장).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야곱은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인생은 시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고달픈 ‘나그네살이’를 시작하게 되고,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생 훈련 과정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한 번도 양을 쳐 본 적이 없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목자로 훈련받기 시작했습니다. 목자의 훈련은 섬김의 훈련입니다. 야곱이 삼촌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는 장면에서 “섬기다(아바드)”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창29:15, 18, 20, 25, 27). 20년의 이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축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라반을 통해서 장자의 축복, 벧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는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되돌아보고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두 아내에게 고백합니다(창31:7~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서 훈련을 마친 야곱을 다시 고향으로 인도해 들이십니다(창31:11-13,24). 그리고 아직도 깨지지 않는 자신의 고집과 꾀를 깨트리시고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본문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홀로 남은 고독의 시간에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
야곱이가 고향을 등지고 도망갈 때만 해도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외삼촌 집에 눌러 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돌베개를 베고 잠시 눈을 붙인 시간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이삭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도움을 받고 피할 곳이 있을 때는 절실하게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야곱이 20년이 지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복수의 칼을 갈았던 에서는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나온 것입니다.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지도 몰랐고, 더 이상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다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에게 고독의 시간을 줍니까? 야곱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중심적 사고, 자기 고집을 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깨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혼자 남도록 하는 것입니다.
▣ 외로운 밤에 찾아오신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
야곱은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고독함과 쓸쓸함의 깊은 밤을 맞고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그 밤에 알 수 없는 사람이 야곱을 찾아왔을 때, 그는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야곱이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씨름할 때에 그 사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함을 알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합니다(창32:25).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깨지 않으면 축복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무리 도망하려고 해도 도망 할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방법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야곱은 완전하게 깨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완전하게 깨져야 합니다.
▣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야곱
하나님에 의해 야곱은 완전하게 깨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빨리 가야 한다는 하나님께 끈질기게 매달리는 야곱입니다(창32:26).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완전히 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질 때 분명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까지 끈기를 가지고 부르짖어 매달려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창32:27~28).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결과를 보십시오. 이제까지 자기중심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깨지고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이후 야곱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창33:3). 야곱은 깨어짐을 통하여 가족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가장이 되어 고향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형과 화목하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창33:4).
▣ 나그네 인생길에서 본향을 사모하면서 축복으로 세상을 살다간 야곱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 때,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야곱을 벧엘로 부르셔서 복을 약속하시고 그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아버지 이삭이 180세로 죽는 아픔도 당합니다. 그 후 야곱은 우여곡절 끝에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74명의 가족이 애굽의 고센 땅에 머물게 됩니다. 애굽의 바로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합니다(창47:9). 자신이 나그네임을 아는 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어떤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감사한 것뿐이며, 본향에 대한 소망 중에 지금의 고난을 감수하며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세인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시간을 야곱은 험악한 세월로 표현하고, 모세는 수고와 슬픔의 세월로(시90:10), 다윗은 희망 없는 그림자 같은 세월로(대상29:15), 야고보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약4:14)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험악함과, 수고로움, 슬픔, 그리고 희망 없는 그림자 같고 안개 같은 세월을 사는 것이 오히려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천국을 더욱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나그네 인생임을 인정하고 영혼을 거슬리는 육체의 정욕을 잘 제어하면서 야곱과 같이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벧전2:11). 야곱은 마지막에 손자들과 12아들을 축복을 하면서 인생을 참으로 멋지게 마감하였습니다. 야곱을 축복의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만드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도망하지 말고, 피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만나서 나 자신이 깨어지고 낮아지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한 것처럼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깨어진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전화위복의 신앙-요셉(창 50:15~21)
인생은 누구나 아쉬움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을 원망하고, 환경만을 불평하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7세의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인해서 갑자기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들을 수 도 없었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롭고 힘겨운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생을 이겨내고 30세가 되는 젊은 나이에 마침내 큰 나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자신의 꿈을 성취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온실에서 자라난 화초보다도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찬 이슬을 맞고 자라난 야생화가 더욱 진한 향기를 내뿜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환난과 고초 가운데서 더욱 성숙해 지고 굳게 서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닫고 살아야 할 것은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자신의 꿈을 이루고 인생을 전화위복의 인생으로 만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애굽에 들어온 지 17년 만에 죽었습니다. 야곱을 장사지내고 돌아왔을 때,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했습니다(창50:15). 그래서 결국 동생에게 아버지 야곱이 형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유언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맙니다(창50:17). 형들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빌 때에, 요셉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라고 말하며 용서하였습니다(창50:18~19). 자기의 능력으로 여기 앉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진정한 신앙이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자기나 남의 일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단정을 하거나, 결론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판단하고 이해하였습니다. 요셉은 성공했을 때에도 형들 앞에서 거드름피우거나 우쭐거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온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한 신앙이 바로 요셉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신앙인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뭘 조금 안다고 말끝마다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던 베드로도 성령 세례를 받고 나서는 입을 닫았습니다. 두 손 들고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할 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벧전5:5~6).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이라는 그릇에만 담기는 것입니다(잠3:34).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려면 요셉과 같이 내 교만한 마음을 겸손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 내 인생의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주권자가 되심을 믿고 확신함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창50:20, 45:5).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요셉의 주권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요셉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으며(시105:17), 스데반도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총리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증거 합니다(행7:9~10).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끊임없이 고난과 역경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했다는 얘기는 읽어 볼 수 없습니다. 요셉이 이처럼 완전히 깨어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끝까지 이길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창45:8).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책임져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사십니까?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든든한 후원자, 더 큰 인맥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 자기에게 해를 주고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 선으로 갚은 사람입니다
요셉은 어떤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어떤 모진 시련과 고난도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자신을 이스마엘의 상인에게 팔 때 사정하고 울며 애원했음에도 매몰차게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던 그 형들이 자세를 낮추고는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면서 애처롭고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죽이려던 형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 그 아들들까지 책임지고 돌보아 주겠다고 말합니다(창50:21). 이것이 요셉의 신앙적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를 사랑함은 세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고통은 원수 때문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 못하는 내 안에 있는 마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형들을 용서하고, 선으로 갚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해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던지셨지만 그 해답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인류를 구원하는 대속의 은혜로 바꾸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느닷없이 다가온 고통일지라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악과 해가 선으로 바뀌는 전화위복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도자의 신앙-모세(출 3:1~1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너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서 400년간 남의 나라에 살면서 민족을 이루어 나오게 하겠다’는 말씀을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 주셨습니다(창15:13~14). 아브라함과 이삭을 지나서 야곱의 때에 그의 아들 요셉을 통해서 가족 74명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정착해 살면서 그 자손이 번성하여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애굽 왕 바로가 번성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아들을 낳는 즉시 강에 던져서 죽게 하였으며, 히브리인들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그 때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한 아이가 노예의 땅, 공포의 땅 애굽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부모님이 보기에도 잘 생긴 아이였기에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습니다(출2:2, 행7:20). 더 이상 아이를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역청을 바른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그 아이는 결국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물에서 건져내었다고 하여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으며, 모세는 그 때부터 40년 동안 공주의 이들로 왕궁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모세에게 있어서 나타난 일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감동의 역사인 것입니다. 갈대상자라는 표현의 의미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냥 내어던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품으로 띄워 보낸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홀로두지 않으시고 정확한 시간에 절묘한 만남을 통해 어머니 요게벳의 손에 모세를 기르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품에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모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40세의 나이에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을 통해 애굽인을 죽인 후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히11:24~2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임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고자 계속해서 간섭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광야로 이끄셔서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모세가 정해진 훈련 과정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십니다(출3:3). 그리고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출3:9~10). 모세의 80년의 길고 긴 인생 여정을 통해서 왕궁과 광야의 체험으로 닦여진 지도력은 훗날 날카로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도구로서 미래에 얼마나 크고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를 기억하면서 믿음 안에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지도자의 신앙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 지도자는 자기중심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 살았던 40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죽인 이후에 동족을 도우려는 자신을 향해 반기를 드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모세의 꿈은 순간 사라졌습니다. 이같이 지도자의 신앙은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섬기려 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보고 판단하기에 부정적이고 결국 자신을 실패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 지도자는 자기중심이 깨어지는 신앙을 체험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도망자로 만드셔서 광야로 인도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낮고 천한 목자의 삶을 통해 훈련을 받으면서 자기 교만,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방법 등 모든 것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보내면서 그리고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자기중심이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막8:34, 고전15:31).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모세의 광야 40년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 기간이었습니다(출3:11, 4:10). 이렇듯 마음을 비우는 신앙으로 무장된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출애굽의 ‘대 사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우고 낮아지고 부수어져야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를 통해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시련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훈련을 받으면 멋진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 지도자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80이 된 모세를 부르시고 위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순종하여 애굽으로 길을 떠납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지팡이를 그 손에 꽉 쥐고 나아갔습니다(출4:20). 평범한 지팡이, 아무 것도 아닌 지팡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홍해 앞에서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고,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출17:11), 십계명을 받을 때는 시내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신9:18). 또한 모세는 120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민12:3,7, 신34:7). 모세는 철저한 하나님의 중심의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120년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었습니다. 모세는 노쇠하여서 죽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의 죽음을 표현 할 때 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복된 죽음입니다. 부르심에 대답하여 120년을 살다간 모세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신앙을 가지고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진정 어떠하십니까?
사명자의 신앙-여호수아(수 1:1~9)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의 시대를 인도하였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후계자로 세웠습니다(민27:18~20, 신34:9).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세우시고 여호수아의 말에 복종하게 하셨으며,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수1:2, 6).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땅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지금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으며, 여호수아의 성품이 모험을 싫어하는 안전형이기 때문에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서 두 번이나 강조하신 것이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키면 네가 뜻한 바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겨 주실 때에는 그냥 맡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영력, 지력 그리고 담대함과 강한 체력을 다 준비해서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가나안의 정복을 이루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는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이었습니다. 사명과 약속을 받은 여호수아는 이제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야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신이나 사람, 환경을 보지 말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사명자로서 부름 받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사명자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이 시대 속에 부름 받은 여러분들도 늘 이기면서 세상을 정복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 사명자는 비전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자들은 항상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잠언 29장 18절에서 ‘묵시’라는 말은 곧 비전이요,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만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삶이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는 것이며, 그곳까지 다다르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비전을 제시하십니다(수1:3~4). 이제 여호수아가 할 일은 그 비전을 바라보고 비전이 성취되는 그날을 보면서 좌절하지 말고 열정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명을 받은 사명자의 신앙은 백성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 사명자는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제 사명을 받았으니 그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사명자의 신앙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버리지 않고 떠나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수1:5). 우리도 주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고 머뭇거리고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생각은 항상 신앙적인 생각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앞으로 힘차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사명자는 언제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1-5장까지는 전쟁의 준비, 6-12장까지는 정복전쟁, 13-19장까지는 기업분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20-24장까지는 도피성에 대한 것이며, 요단동편으로 돌아가는 지파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여호수아의 유언으로 마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서의 중심 주제는 결코 전쟁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주신 비전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순종해 가는 신앙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믿음의 공장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은 형통합니다. 성경에 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나갈 때 모든 문제는 다스려지고, 가나안이 펼쳐질 것입니다. 사명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거나 환경의 변화가 있어도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임무를 감당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사명자는 매사에 긍정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율법책을 떠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주고 우리의 삶에 놀라운 활력을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활력이 있어’라는 말씀은 ‘에네르게스’로서, 에너지(energy)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살아있고 활력이 있다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고,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면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 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으로 은혜 받고 위대한 책을 썼으며,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서 힘을 얻어서 종교개혁을 이루었고, 세계 선교에 앞장섰던 윌리암 캐리는 이사야 54장 2절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선교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매사에 긍정의 신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땅으로 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약속하신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14장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두려워서 가지 못했던 땅, 믿음이 없어서 차지하지 못했던 그 땅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세워야 할 것은 말씀을 굳게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고 싸워서 물리치고 점령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그러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며, 그분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고 힘차게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도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여호수아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승리하는 신앙-기드온(삿 6:33~4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뒤를 이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불러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족속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고통 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지도자를 세워 구원시키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기드온입니다(히11:32). 기드온이란 이름은 ‘베는 자, 벌채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비에셀의 므낫세 족속에 속하는 요하스의 아들이며, 여룹바알(삿6:32)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과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오브라에 살았으며, 하나님은 기드온을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해주기 위해 부르셔서 이스라엘 제5대 사사로 세우셨습니다(삿6:11). 사무엘은 3명의 사사와 본인을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삼상12:11). 이스라엘을 구원한 기드온은...
▣ 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 삶이 후회 없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삶에 대한 상급을 받게 되는데, 그 때에 상급 받고 칭찬 받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기드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을 알아보겠습니다.
1) 그의 삶은 ‘성실’ 했습니다. 가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을 화평하고 아름답게 꾸려나가는 것은 누구나의 책임인 것입니다. 기드온은 가정에서 성실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양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또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서 몰래 숨어서 밀을 타작했습니다(삿6:11). 그 만큼 성실하게 가정을 지키고 살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는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준이 없었기에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삿17:6). 삶에는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법칙과 기준과 의미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판단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고후10:12). 말씀을 통해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자신을 지키면서 왜 이같은 현실이 닥쳐왔는지를 판단하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삿6:12~13).
3) 그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실 때에 기드온은 약하고 작은 자이기에 못한다고 말하였고(삿6:15), 표징을 달라하였으며(삿6:17),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내어 하나님의 단을 쌓으라고 하였을 때도 두려워하여 밤에 행할 만큼 확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삿6:27). 이같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확신을 가지게 하셔서 믿음의 용사로 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믿음의 용사 기드온과 같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용사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 그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이런 삶의 바탕 위에서 세워진 기드온의 신앙은 어떠했기에 쓰셨습니까?
1) 기드온의 신앙은 ‘겸손한 신앙’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에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겸손한 믿음의 자세를 가질 때에 그 사람을 큰 용사로 위대한 일꾼으로 써 주십니다(삿6:12~16).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자기의 무능함과 약함과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기드온의 신앙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용기를 가진 신앙’ 입니다. 그는 겸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성령이 임하실 때에 뒤로 물러가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일어나서 싸운 믿음의 사람입니다(삿6:34). 그가 일어나 나팔 불면서 군사를 모집했을 때 3만 2천명이나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의 수가 많음으로 이긴 줄 알 것이기에 그 수를 줄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삿7:2,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면서 사방을 살피는 사람 3백 명을 구별하여 135,000명의 미디안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나갈 때 승리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3) 기드온의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 입니다.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둔 후에 백성들이 와서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말할 때에 그는 우쭐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삿8:22~23). 이것이 기드온의 또 한 가지 위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 승리하여 축복을 받고 부자가 된 뒤에도 교만하여 자기가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 그의 말년이 주는 인생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말년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를 못했습니다. 전쟁할 때에 도움을 요청할 때에 거절했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였으며, 전쟁에서 승리를 하자 기드온의 눈에 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삿8:24~26). 주님을 위해 깨끗하게 헌신하고 사람들의 존경 속에서 사라져간 사무엘에 비교하면 너무 달랐습니다. 성도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전도하는 재미를 붙여야 합니다. 성도가 집안 치장을 하는데 재미를 붙이면 그 때부터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여러 아내를 두었고 그 소생만도 아들이 70여명에 이르렀습니다(삿8:30~31). 그것도 모자라 세겜의 여인을 취하여 첩을 두었는데, 그 소생인 아비멜렉이란 자는 악을 행하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말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드온은 전쟁의 승리 이후 남은 인생을 충실히 살지를 못했습니다. 잠깐 반짝이는 믿음의 행보가 아니라 긴 여운을 남기는 그런 감동이 있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인간 중심의 삶은 수고와 눈물의 피곤함이고, 주님 중심의 삶은 절로 기쁨과 즐거움과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사람이 붙고 환경이 따라 주고 길이 열리고 장애물이 걷히고 환경이 발 아래로 밟히고 당당해지고.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불러서 세우시니까 각 지파들이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모여 오고 그의 수하에 거부 없이 복종하고 따르고 세워집니다. 기름부음이 그 자리를 지키게 하고 진행하게 하고, 기름부음이 열매와 승리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 엘리야, 아론, 기드온이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듯이 우리들의 생애도 주님이 우리들을 오른 손으로 강하게 붙잡으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사 쓰임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인생 교훈을 따라 삶의 유종의 미도 잘 거두는 하늘꿈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섬김의 신앙-룻(룻 1:15~18)
1930년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처참한 경제 공황이 몰아쳤던 때에 라스코는 뉴욕 맨해튼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지었습니다. 라스코에게는 어렵고 힘들고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불황의 시간에서도 그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지와 배짱이 있었습니다. 또한 한 여인이 관절염으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물건을 팔던 가게가 불에 타버렸을 때 “이 상점은 다 타버렸지만 우리의 희망은 결코 불타지 않았습니다. 내일 다시 문을 열겠습니다.”라고 써 붙였습니다. 절망을 행복으로 바꾼 구멍가게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사랑의 구멍가게가 되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을 바라보며 지금의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반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을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 현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룻기는 한 여인의 굽힘이 없는 섬김으로 슬픔과 고통, 절망을 이겨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룻기를 읽으면 희망이 솟아납니다. 인생 가운데 찾아온 절망을 어떻게 인내하며, 어떻게 승리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인생이 어떻게 복된 인생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들은 오늘 룻에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이루는 법과 승리하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 절망의 인생을 희망의 인생으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눈물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하지만 눈물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나오미는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서 자신들의 진실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룻1:8~9).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은 건강한 마음입니다. 애통을 통해서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깊이 회개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습니다(룻1:13). 진심으로 애통할 때 우리는 정말 자비로워지고,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영혼은 맑아지는 것입니다. 애통은 잘못된 욕망을 해독하는 해독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속에 보배를 담아 두셨습니다. 애통을 통해서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애통할 때 머지않아 애통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끝이 나고 희망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2) 선택의 결단을 잘 해야 합니다. 희망을 이루려면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희망이냐 절망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고, 두 며느리에게도 선택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때에 오르바는 자기 집을 선택하였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룻1:14). 한 순간의 선택으로 두 여인의 미래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말씀의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분별력은 지혜로서 오직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한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가기로 선택한 것은 자신의 백성과 모압의 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선택하기 위해서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합니다.
3) 만남을 잘 해야 합니다. 룻은 긍정적인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모든 것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갔습니다. 그러다가 베들레헴에 가장 유력한사람인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룻이 겸손한 마음으로 이삭을 주워야 연명하는 가난한 삶에 충실했더니, 축복의 창고를 가진 주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마음이 끌려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녀가 가진 내적인 성품과 신앙의 아름다운 매력 때문이었습니다(룻2:11~12, 3:11, 4:13). 룻의 인생은 역전되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도 쓰디쓴 마라의 인생에서 기쁨의 인생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떠하든지 서둘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내시기 전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희망을 이루는 법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할 줄 알아야 하고, 슬픔을 당한 자와 함께 울 줄 알아야 하고, 좋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방향을 잘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성품을 지녀야만 희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만남을 이루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 축복의 사람으로 만든 룻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모압 사람이며 가난한 과부인 룻은 세상적으로 초라한 여인이었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며,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룬 여인입니다. 룻이 이런 복을 받은 것은 그녀의 섬김의 신앙 때문입니다. 룻의 섬김의 신앙은 비록 나오미에게 한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한 것이며, 그 신앙의 내용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도 같고, 그 신앙의 결단은 아브라함의 결단과도 같았습니다.
1) 룻은 돌아서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서 ‘너희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룻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룻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같은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같이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며, 뒤돌아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축복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2) 룻은 함께 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성도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연합이요 일치이며 우리 신앙의 지향점이 되어야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 하겠다고 말합니다(룻1:16~17). 함께 할 때 신앙의 유익도 얻을 수 있고, 축복의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3) 룻은 죽기를 각오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룻이 모압 땅을 떠나는 것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두려움과 불확실함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부라고 고백하며 생명까지 내어놓았는데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방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 놓은 것이 당연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입니다. 환경에 따라서 요동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상황을 이겨내는 신앙이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인생은 반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룻과 같은 진정한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반응하여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축복의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신앙-사무엘(삼상 3:1~14)
사무엘은 고핫 자손으로 레위인인 아버지 엘가나와 어머니 한나 사이에 자식이 생기지 않았을 때, 한나가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서원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입니다(삼상1:11). 나실인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성별된 사람”으로 ‘독주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아야 하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고, 죽은 시체와 접촉을 피해야 하는’ 등 절대적인 순결을 요구하는 구별된 사람을 말합니다(민6:1~8).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얻은 한나는 서원한대로 사무엘이 젖을 뗀 후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 엘리 제사장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던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죽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므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삼상3:19~20). 사무엘은 선지자이며 선견자이고, 마지막 사사였습니다(대하35:18, 삼상9:9, 7:13,15). 그러나 사무엘이 나이가 들고 늙고 힘이 없음으로 두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웠지만, 그들의 행위는 사무엘과 같지 않았습니다(삼상8:3). 그러자 백성들은 그렇지 않아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수치를 당한 터라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구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림이여 나를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하시며 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삼상8:6~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삼상9:15~16). 이같이 사무엘은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난 사람이었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 중에 특출하게 신앙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사사시대 말기에서 왕정초기에 걸쳐 활약 했던 인물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렘15:1).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으로 나라를 구원한 선지자로 나타나 있습니다(히11:32~33).
▣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믿음을 인정한 것은 무엇입니까?
1) 사무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만을 섬기는 철저한 신앙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자기의 전부로 삼았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앞에서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삼상2:11,18).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은총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잠을 자면서 하나님과 가까운 생활을 했습니다(삼상2:26, 3:3). 사무엘이 철저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등,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려고 작정하실 정도였습니다(삼상2:17,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 사무엘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그에게 말씀으로 나타내 보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고, 엘리 제사장의 가문의 일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삼상3:11~14, 21).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잘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을 쓰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만을 자신의 전부로 삼고 자신의 주권자로 믿는 사람을 인정하고 쓰시는 것입니다.
2)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살던 모든 거민을 완전히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그들과 동맹을 체결함으로 그들이 섬기던 우상숭배 관습을 받아들이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방 나라들의 침략을 받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기간이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약 3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백성들이 고통 중에 울부짖을 때마다 사사를 일으켜서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일으켰고, 적군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도록 하셨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무엘이었으며, 사무엘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삼상7:5). 미스바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금식기도 하는 틈을 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였지만, 사무엘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사람들에게 우레를 발하여 패하게 하였습니다(삼상7:9~10). 그리고 백성들이 왕을 원할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삼상8:6), 자신 스스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길 정도로 열심히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2:23). 우리들도 자녀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키우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녀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한나같이 기도로 후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키운 자녀는 결코 잘못되거나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를 쉬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평생토록 영혼이 호흡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입니다. 이런 기도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같이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3) 사무엘은 철저하게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신 많은 일들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도리라고 말합니다(삼상12:24). 사무엘은 사울 왕이 범죄 함을 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충고하였습니다(삼상15:22). 또한 사무엘은 죽는 순간까지 철저히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까지 순종하였습니다. 내 손에 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쥘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순종하였더니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얻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먹고 죽을 것을 엘리야에게 대접을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3년 6개월 동안 마르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무엘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끝까지 붙들고 사용하셔서 깨끗하게 자신의 사명을 마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성도, 복 받는 성도, 훌륭하게 쓰임 받는 성도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 같이 나의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끊임없이 자신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끝까지 순종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신앙-다윗(행13:21~22)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다윗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마1:1).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역사에 위대한 왕이며 정치적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의 14대 손이며, 유다 지파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다윗이란 인물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고, 예수님의 족보상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메시야의 계보와 왕권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스러운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위 시간은 BC 1.000년부터 960년의 40년 동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쓰실 때에 충분히 준비를 시키셔서 때가 되면 쓰시는데, 하나는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삶의 환경을 통해서 준비시키십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의 곁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무엘, 아히멜렉, 갓, 아비아달, 나단, 사독 등과 같은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삶의 환경을 통해서 훈련 되었는데, 특별히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부터 사울 왕으로부터 쫓김을 받는 가운데서 10년 동안이나 숨고, 피하여 도망하면서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을 지나게 하시면서 하나님만이 나의 통치자임을 주권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쳐온 절박한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눈을 들었으며,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시18:2, 53:4). 다윗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밀려오는 고난과 역경들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훈련으로 해석하고, 최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닥친 시련과 역경들은 그의 리더십을 훈련하게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믿음의 훈련을 잘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13:22).
▣ 준비된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다윗의 아비 이새의 집에 보내시어 그 형제 중에서 한 아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시며 양을 치고 있었던 8번째 아들 다윗이 들어올 때에 기뻐하시며 기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삼상16:7~13). 다윗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에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서 기도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능을 잘 살려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미래를 결정하고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공의 작품이고 기적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사명과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철저한 준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고 다윗과도 같이 철저한 준비된 훈련된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의 믿음
다윗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 네 가지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다윗의 믿음은 하나님만 철저하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사울 왕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에베스 담밈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진영은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먹일 도시락을 싸서 엘라 골짜기 왔다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사울 왕에게 자신이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면서 빨리 달려서 물매로 골리앗을 향하여 던지니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 중간에 박혀 그를 땅에 쓰러트린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인 것입니다(삼상17:45~47).
2) 다윗의 믿음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용맹과 신망에 시기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두 번씩이나 사울왕의 목숨을 구했습니다(삼상24:6, 26:9).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않는 것은 진실한 다윗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3) 다윗의 믿음은 회개하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암몬 사람들과 싸울 때 어느 날 저녁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그를 데려다가 동침한 후 그의 남편까지 죽이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이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했을 때 다윗은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삼하12:7~13). 다윗은 시편에서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고 고백합니다(시6: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 왕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면서 마음에 들어 하신 것입니다.
4) 다윗의 믿음은 수욕을 참아내는 믿음입니다. 다윗 왕이 왕위를 압살롬에게 빼앗기고 도망 갈 때 시므이가 다윗의 일행을 저주할 때에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감찰하고 시므이의 저주로 말미암아 선으로 갚아주시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삼하16:5~12).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윗과 같이 어떤 사람에게 당하는 수욕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위대한 믿음은 우리들의 믿음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훈련에 대하여 진 에드워드는 “하나님은 광야생활, 도망자 생활을 통하여 다윗 안에 꿈틀 거리는 제2의 사울을 죽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말씀 앞에서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특별 방법으로 죽이십니다. 이것이 삶의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훈련의 목적입니다. 나의 모든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나를 성숙시켜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역자로 쓰시려는 계획임을 깨닫고 믿음의 눈이 열려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다니엘(단 6:10~15)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유다지파에 속하고 왕족의 가문으로 바벨론에 잡혀가서(BC 605년)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그리고 티그리스 강 기슭에서 마지막 환상을 본 고레스 3년(BC 536년)까지 약 70년 동안 활동을 하였습니다(단1:21).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단1:17). 그로인해 시기도 받았지만, 본문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다니엘의 믿음을 한 눈으로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용기 있는 믿음입니다
다니엘은 16세의 나이에 포로로 끌려가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래와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 지에 대한 예언을 받아 전하였고, 그의 예언대로 역사는 모두 이루어 졌습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불리울만큼 미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다니엘과 친구들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모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다니엘과 친구들의 흠을 잡기 위해 고소할 조건을 찾다가 왕의 조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의 타협하지 않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도 않고 하나님만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는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였습니다. 용기가 곧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먼저 다니엘은 그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을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원동력은 그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다니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삼고, 그분을 가장 크게 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기고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니엘이 왕의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강조합니다. 기도를 통해 앞으로 일어 날 미래의 사건을 알게 된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준비하였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였고, 기도하면서 쓰임을 받았으며, 기도를 통해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단6:10). 이는 사람의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술수를 부리면서 지금의 난관을 피해보려고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시기하던 자들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단6:13). 다니엘은 좋은 환경에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중단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가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귀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이 곧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권면하는 예수님과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눅18:1, 살전5:16~18). 우리가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특권이며,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기에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이고, 기도하기에 나를 깊이 돌아보는 통찰력과 깨달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하기에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기에 우리는 하늘의 문을 열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하기에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 역사 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기도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기도가 특권인 것을 알면서도 기도가 어려운 이유는 지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특권이며 의무이고, 어쩌면 우리 믿는 자에게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함께 가는 거룩한 부담인 것입니다. 다니엘과 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중단 없는 지속적인 기도의 생활을 통해서 모든 상황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철저히 하나님으로만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다니엘은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특징이 있습니다. 환경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긴장감이 가득하고 최고로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나라는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왔고, 위기의 순간을 맞은 현실입니다. 이런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 드린 기도의 응답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특권과 축복을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응답된 것들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단6:10). 그러나 어디에도 응답이 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즉, 다니엘의 감사는 상황 때문이 아니고, 현실 때문도 아니고, 응답을 결과로 감사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감사는 어떤 감사였을까요? 본문 10절에서 “그의 하나님께..”라는 말씀을 통해 그 중요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믿고 사랑하는 여호와 나의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원토록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하여, 그는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감사하는 신앙이었습니다(합3:17~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 현실, 응답이 아니더라도 오직 나의 하나님, 왕이신 나의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꿈의 모든 성도들도 다니엘과 같이 그리하지 아니하실 지라도 늘 하나님만을 섬기며, 어떠한 형편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으면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깨어서 기도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요 20:1~18)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영의 세계는 영원합니다. 우리들의 육은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로 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 두 가지가 다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님을 가져갔으면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들도 모르는 일이어서 같이 가 보았으나 무덤은 열렸고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천사의 음성이 들려오고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보게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부활은 희랍어로 ‘아나스타스’라고 하며, ‘일어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활은 우리들에게 다시 힘을 얻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 부활절 예배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불안에서 평안함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나는 은혜의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주일에 막달라 마리아가 만났던 부활의 주님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 슬픔과 불안을 기쁨과 평안으로 바꾸어 주신 소망의 주님 이십니다
마리아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려져 있었고, 그 빈 무덤을 보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요20:11). 마리아는 진정 주님을 사랑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무덤은 비어 있었고 주님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모함에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순간 그녀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였고, 불안했던 마음은 평안의 마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그녀의 발걸음은 힘이 들어 있었고, 회의적임 믿음은 구원의 확신 있는 믿음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만나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부활의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고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은 광채가 났다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신앙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이 부활의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주님 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살아서 부활을 체험한다고 말씀합니다(요11:25~26, 14:1).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부활을 믿으면 지금의 현실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부활의 첫 열매로서 우리들의 앞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명을 명쾌하기 해답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서도 천사들이 말하기를 왜 산 자를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느냐고 하였습니다. 바로 주님은 지금도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성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의 일이라 해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용기를 잃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다시 불러서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주님 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마28:7, 10). 왜 갈릴리로 부르셨습니까? 그 이유는 다시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주님을 처음 만나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처음 만났던 그 시간을 기억하고 그 때의 만나서 같이 가졌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을 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죄를 짓고 왕궁에서의 생활을 뒤로한 채 광야에서 40년을 양들을 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 40년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부여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외로움을 배웠고, 고독을 배웠고, 혼자서 결정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처리하는 법을 배웠고, 양들이 목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으며,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훈련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명이 있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도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명을 깨닫게 하려고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모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엠마오 도상에서 만났던 제자들과 같이 바울과 같이 다시 힘을 얻고 사명을 받아서 감당하듯이 우리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사명을 깨닫고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슬픔의 인생이 기쁨과 평안의 인생으로 바꾸어지기 때문이며, 죽음을 이기시고 일어나신 주님이시기에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죽음을 정복하고 살기 위해서이며, 우리들의 사명을 항상 깨닫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늘꿈의 모든 성도들이 이 시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의 신앙-욥(약 5:10~11)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다간 사람들 중에도 인내하지 못하고 급한 성격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흠을 남긴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참지 못하고 사람을 쳐 죽였으며, 아브라함은 참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고, 베드로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또한 야곱은 어떠했으며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이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경험하는 것은 나는 급한데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고 인내를 배웠기에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욥23:10). 사람은 결과만을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영적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욥의 인내를 통하여 고난 중에 인내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게 합니다. 야고보의 눈에 욥은 축복이 따르는 인내의 가장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욥은 고통 뒤편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한 가닥 신앙을 놓지 않았습니다(욥19:25~27). 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함으로써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내를 보시고 갑절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을 받는 비결은 인내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본문은 욥의 인내를 본받고 그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보았으니 우리들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약5:10~11). 그래서 우리들도 주님을 만나는 그날, 주께서 주시는 그 결말을 볼 때까지 우리는 참고 견디면서 믿음의 고지를 점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인내할 수 있었던 믿음은!
▣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사실 욥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산이 양 7천, 소 500겨리, 암나귀 500이나 되었고, 자식도 아들이 일곱 명, 딸이 세 명으로 유복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 욥을 시험하도록 요청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셔서 욥에게 큰 시련을 주었습니다. 양과 소와 암나귀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되었고, 아들, 딸들도 갑자기 불어온 대풍에 한꺼번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닥쳐온 이 모든 일로 인해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고 시험을 이겨내었습니다(욥1:21). 그러자 두 번째 시험이 찾아왔는데 그의 몸에 악창이 나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 시험도 결국은 잘 통과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욥42:10).
욥은 ‘주신이도 여호와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욥의 신앙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모든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도 욥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딤전6:7~8). 이런 신앙을 소유해야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나에게 이 만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 믿음 때문입니다
욥이 온 몸에 악창이 나는 고난을 당할 때 세 친구가 찾아와서 욥의 고난을 보고 하나님이 징계하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의롭다고 하면서 자기가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자비의 손을 내밀었다고 했습니다(29:12~13, 31:16~18). 그런데도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시험을 하는지 따져봐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31:14~15). 그러나 엘리후를 통하여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지적 받았을 때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42: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의는 인간 사이에서는 큰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모두다 무서운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깨달도록 하기 위하여 욥을 시범 케이스로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욥이 시험을 받는 원인이었습니다. 이 시험을 욥은 믿음으로 잘 이겨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보다는 모두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욥의 믿음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원수를 위해 복을 빌라는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혹독한 시련을 당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와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로 욥에게 정죄를 퍼 부었습니다. 욥은 이런 큰 시험을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 하소서’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바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욥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위하여 기도하시던 주님의 심정으로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욥의 고통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원수를 축복한 욥의 믿음은 시험을 이겨내었고 결국 갑절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욥42:8~10). 인간의 삶이란 고난의 숲과 늪을 헤쳐 가며 사는 여정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할 수도 있고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면 그 고난은 악마로 왔다가 천사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고난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도전이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여전히 꿈을 잊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도 잃지 말고 욥의 결말과 같이 복을 받으며 이 땅을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응답의 신앙 - 한나(삼상 1:9~18)
에브라임 지파에 엘가나라는 사람에게 부인이 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한나와 브닌나였습니다.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날에는 분깃을 브닌나 보다 두 배나 주면서 위로하였습니다. 이같은 엘가나의 행동을 본 브닌나가 한나를 질투하여 자식 못 낳는 것을 공격하였습니다. 참다못한 한나는 원통함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당시 대 제사장 엘리가 한나를 보고는 술 취한 여자인줄 알고 책망하였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술 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마음의 원통함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 중이라고 겸손히 고백했습니다. 엘리는 곧 바로 한나에게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축복했습니다. 한나는 곧 대답하기를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돌아가 그 후로 얼굴에 근심의 빛을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셔서 드디어 최고의 아들 사무엘을 주시고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 이후로 무려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기도를 통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한나의 기도하는 신앙을 통해서 우리들이 받을 은혜는 무엇입니까?
▣ 한나의 가정을 통해서 얻은 교훈
레위지파였던 엘가나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그 집안에서 떠나서 개인의 삶을 위하여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가나의 집안은 겉으로 볼 때는 믿는 집안으로 모두가 하나 되어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 같이 보이지만 그 가정을 보면 첩을 두고 살았고, 그 두 아내들의 사람의 모습에서 보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고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 단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아내는 시기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서 한나는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두 여인의 사이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보면 ‘적수(삼상1:6절)’, ‘격분(삼상1:6~7절)’ ‘괴로워 울며(삼상1:6~8)’라는 표현을 통해서 볼 때 평화로워 보이지 않고 싸우고 다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태의 문을 20년 동안 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삼상1:5~6). 하나님의 곁을 떠나면 무엇인가 잘 될 것 같아도 결국은 한나의 집안과 같은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한나의 이름의 의미는 “은혜의 여자”입니다. 은혜를 입은 여자가 어째서 은혜를 입지 못 하고 그렇게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브닌나의 이름의 뜻은 “진주”라는 뜻입니다. 진주같이 귀한 여자가 왜 한나를 그렇게 구박하였을 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엘가나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구별하고 믿음 생활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들도 물질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집을 구하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에 내가 구한 것은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키시려고 더 훈련을 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나에 대한 훈련이 끝나고 나자 하나님께서 막고 계셨던 태의 문을 여셨습니다(삼상1:19).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그런 불임의 고통을 주신 까닭은 한나로 하여금 위대한 사무엘을 낳는 축복을 받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한나는 고통을 통하여 위대한 아들 사무엘을 낳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에게 특별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의 낯을 피하여 많은 세월동안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심지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했을 때에는 미친 체하고 침을 수염에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삼상21:10~15). 그러나 바로 그런 고난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 중 왕이 되는 복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역경이 닥쳐 올 때 우리는 원망이나 불평만 하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특별한 복을 주시려는 뜻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힘든 일,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까? 한나처럼 인내하며 참고 믿고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엘가나 같이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준비하고 있다가 주실 것입니다.
▣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한나는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는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어찌할 수 없는 고통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십니다(마7:11). 한나는 기도한 것을 받은 줄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나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엘리 제사장이 보고 한나를 축복하였습니다(삼상1:17). 엘리 제사장의 축복의 말씀을 들은 한나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근심하지 않았습니다(삼상1:18).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문제를 맡기고 기도하였다면 당장에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될 줄로 믿고 전진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 믿음의 기도는 역사함이 크고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응답받는 기도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이 험악한 세대를 이기려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야 합니다. 뜨거워지는 방법은 바울처럼 항상 자기 부족을 인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한나의 그 애절하고 오래된 기도를 기억하며 지금의 모습에 좌절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함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우리가 되어가길 바랍니다. 한나와 같은 간절함이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 잡아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믿음이 늘 가득하길 바랍니다.
구원받은 신앙-요나(욘 1:1~3)
요나는 스불론 땅 가드헤벨 사람 선지자 아밋대의 아들이요,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주전 825년경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비둘기’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에 가서 그 죄악을 책망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다가 광풍을 만나 결국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이미 준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시므로 요나는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기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게 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3일간 회개하라고 선포할 때에, 니느웨의 왕과 백성이 금식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용서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초막을 짓고 니느웨를 멸망을 기다리는 중에 박 넝쿨이 나서 뜨거운 햇빛을 가리매 기뻐하더니 한 벌레가 박넝쿨을 시들게 할 때에 낙심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도성 니느웨의 12만 여명의 백성과 많은 육축을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욘4:10~11).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요나의 표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마12:38~39). 예수님의 부활을 요나의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건으로 설명하였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요나의 표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요나의 신앙, 즉, 하나님께 구원받는 신앙을 통해서 우리들도 이 세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서 지켜 행함으로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서 기쁨으로 맡겨준 일을 감당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니느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큰 성읍 니느웨는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세운 성으로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이며 그 주위가 3일 길이요, 인구가 60만 가량의 대도시로 알려져 있고, 그중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라 하였으니 큰 성이 틀림이 없습니다(창10:8~12, 욘3:3, 4:11). 니느웨는 성읍이 크고 발달한 도시로서 부유하고 사치가 심하고 죄악이 많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의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서 40일 후이면 망한다고 경고하게 하였습니다(욘3:4).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하면서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심판할 계획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욘3:10).
▣ 요나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고 사명을 감당한 신앙이 되었습니까?
1)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내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요나는 구원을 받은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희망으로 가득하고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욘2:1~9).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요나는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절망 중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놓지 않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역사하실 것입니다.
2) 철저하게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해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 있음을 알고 회개기도 하였습니다. 요나는 그 가운데서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임을 알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신음 속에서 서원기도를 드리며 애원하고 회개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요나가 한 가지 잘한 일은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제비를 뽑게 되었을 때, 이 폭풍을 만난 것이 자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 값으로 오는 재앙에 대하여 책임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요나가 잘한 한 가지 일 때문에 큰 축복을 받았으며, 니느웨 성에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풍랑이 일어납니다. 어느 집단 속에 지도자 하나가 잘못하면 그 전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아야 하며 지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잘한 일 때문에 많은 니느웨 성 백성이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 한 사람이 회개하고, 우리 한 사람이 잘한 일이 다른 사람과 온 민족 속에 영향을 미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으며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이 신앙의 감격을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또 하나의 물고기를 예비하실 수 있습니다. 환난과 파도와 커다란 물고기로부터 삼킴을 당하기 전에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살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우리들은 누구나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 룻이 보아스를 만나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만난 우리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의 해답이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이 닥쳐와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 모든 환경을 초월하실 수 있으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언제나 새롭고 산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꾸는 신앙-베드로(눅 5:1~11)
베드로는 어부출신으로서 예수님의 12제자 중 수제자이며, 성격이 급하고 모험심이 강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고, 본명은 시몬이며, 주님께서 이름을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의 고향은 '고기 잡는 집'이란 의미를 지닌 갈릴리 벳세다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부 출신의 '요나' 혹은 ‘요한’ 이었으며(마16:17, 요21:15~17), 그의 동생은 안드레이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전문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빈 배로 돌아왔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다시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할 때에 주님께서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부르셨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된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후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은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일어서게 됐고 현재까지도 그 명성이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충실히 따르는 베드로의 열심은 누구보다도 대단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주님을 만난 믿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이 중요합니다. 윈스턴 처칠과 페니실린을 개발한 플레밍과의 만남처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는 수고를 했지만 잡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가장 깊이 고민할 때가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이고, 가장 어려운 순간이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때이기도 하며, 가장 괴로운 곳이 주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베드로가 체험한 기적은 오늘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는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큰 꿈을 안고 경험과 지식을 담보 삼아 얼마나 열심히 인생의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까?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경험이나 지식이 통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의 경우도 주님 만나기 전까지는 밤이 맞도록 수고를 했지만 대가 없는 빈 그물을 손에 쥐고 얼마나 허탈해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만남으로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모두 주님을 만남으로 빈 배가 가득 채워지는 축복을 받은 것처럼, 설레는 가슴을 안고 영의 눈을 크게 뜨고 갈릴리 해변의 바다를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만선의 기적을 체험한 것과 같이 여러분들도 이같은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피곤함을 이기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구약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멜렉의 공격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갑작스런 싸움을 하게 되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의 원인은 모세의 명령과 여호수아의 순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했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출17:9). 그 순종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야 하는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그러므로 “못합니다. 못갑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합니다. 갑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언제나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만히 있지 않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자신에게 주신 믿음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에,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피곤함을 이기고 계속 기도하여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아 피곤한 몸인데도 그 피곤함을 이기고 주님의 전하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다시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으니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실패의 그물과 실패의 고깃배가 채워져 풍성해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같이 피곤함을 이기고 순종하는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본문의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의 믿음이 바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순종을 통해 자신을 알고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이용규 선교사의 책 ‘내려놓음’에서 내려놓음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것을 얻습니다. 내려놓음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 방법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드리는 것이 내려놓음입니다. 하나님의 초점에 맞추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세 단어로 설명합니다. 지식과, 동의와, 신뢰입니다. 지식은 믿음의 첫 단계이지만 지식은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동의는 믿음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나 동의하는 것만 가지고 믿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신뢰는 생활에서 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내 힘을 빼는 것입니다. 내 힘을 빼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얻는 방법입니다. 본문의 베드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자신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체험한 일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쫓아갔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실패였다면 이 시간부터는 성공과 채워지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비결은 주님을 만나는 믿음을 가질 때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을 알고 믿음으로 여러분의 빈 배를 가득 채우고, 빈 배와 같은 가정도 하늘의 신령한 축복으로 가득 채우는 축복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앙-안드레(요 6:1~15)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는 수 없을 때,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믿음으로 역사할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해 물으실 때에 빌립과 안드레의 반응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요6:5~9). 주님은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 빌립과 안드레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뜻은?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 주라’고 말씀하실 때, 빌립과 안드레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빌립은 계산을 통해 뱃세다 광야에 있던 군중들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어린 소년의 도시락을 하나 찾아서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주님께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은 빌립은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서 계산을 하고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안 된다고 결정을 하고서는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일단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행동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해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도 믿지 못했고 안드레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일을 하려면 기도먼저 해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하는 이 일을 주께서 간섭해주시고 내 힘과 지혜로 할 수 없고, 분명한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무력한 나의 한계를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뤄주시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를 아는 사람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고 소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빌립과 안드레는 자신들의 한계를 알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산만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므로 둘 다 불신앙의 다른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 안에서 얼마든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십니다. 만일 빌립이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했다면,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져와서 무릎을 꿇고 이것을 사용해 달라고 간청했다면 주님은 흡족히 여기시며 더 기쁘게 기적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이같이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오늘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 바로 주님은 오늘도 칭찬받을 믿는 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눅7:7, 9). 이 고백에는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어 다스리시며, 인간의 모든 질병도 능히 고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그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보다는 여전히 사람의 계산과 방식으로 지금의 상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들과 똑같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는 분으로 제한해버리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출애굽 백성을 먹이신 기적과 비슷합니다. 시편 78편에는 그 사건의 정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빈정대는 말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시78:12~20). ‘광야에서 식탁을 마련할 수 있겠냐’며 빈정대고 불평만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른만 오천 명 쯤 되는 이 무리를 무슨 돈으로 먹이겠냐’며 불평만 늘어놓는 제자들, 그리고 그 죄인의 후손인 우리들도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표현하였으며,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드레를 통해서 온전한 믿음이 아니어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여 찾아 온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작은 헌신, 작은 믿음이라고 해도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난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서도 빌립과 안드레를 위시한 제자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신앙의 요소 중 결정적으로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하여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투덜대던 백성들 중에서도 기도한 자는 오직 모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과 안드레에게 기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께 맡기며 의지하기를 원하셨지만 계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산한 내용을 초월하는 문제가 되다보니 금방 포기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도 별 수 없으리란 생각으로 주님을 평가 절하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오직 예수님을 만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면서 맡기고 나가며 간절히 기도하는 칭찬할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사역 맡은 직분을 위해서만 하나님은 필요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인간관계의 문제, 진로와 진학, 직장과 사업,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의지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때때로 시험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해보라,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를 의지하라, 내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헌신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작은 헌신을 통해서 크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작은 헌신을 통해서 행할 때 크게 역사하시고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풍성한 결과를 이루시는 것을 깨닫고 실천함으로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신앙-백부장(마 8:5~13)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신자의 회심은 돈지갑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이것은 말뿐인 신앙, 공허한 관념의 신앙에서 깨어나 구체적인 헌신과 실천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의 장교 백부장을 만납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드리는 처소인 회당을 지어주는 등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눅7:5). 이같은 그의 행동으로 보면 그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음에 대한 증거는 자신의 종이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찾아서 그 종의 병을 고쳐주기를 소원하였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 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요일4:20~21). 백부장은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 백부장은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답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만 가지고 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문제해결 전문가인 예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흉악히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침 받으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마15장).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백부장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온 것입니다.
▣ 백부장은 무엇에든지 적극성을 지닌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결코 미지근하지 않습니다. 바디매오가 자신의 소원대로 눈을 뜨게 된 이유는 바로 적극성 때문이었습니다(막10장).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도 적극적으로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머뭇거림도 없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적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안 되는 이유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본문의 백부장은 남이 인정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하인의 병을 가지고 적극성을 가지고 주님께 고쳐주기를 바라면서 나아갔습니다.
▣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지만, 체험은 표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표준으로 해야 합니까? 말씀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의 신앙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하는 말씀의 신앙, 바로 그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성경 66권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귀한 신앙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 백부장은 자신의 삶에 믿음을 적용하는 믿음입니다
군인은 명령 계통에 죽고 삽니다. 백부장은 자기 직업의 경험을 통하여 천국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마8:9).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믿음에 잘 적용하여서 문제를 해결 받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 믿음을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살아 역사할 수 없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감탄하시고 인정하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마8:10).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여기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다우마조'인데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급장교로서 병든 종을 불쌍히 여김을 통해 그의 인격에 놀라시고 감탄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찾는 참 성도가 드문데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의 교훈을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았고, 5천명에게 떼어주시는 떡을 먹었지만 은 30냥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팔아먹었는데 백부장의 믿음의 행동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만한 믿음'은 '위대한 믿음, 엄청난 믿음, 큰 믿음'이라는 뜻이요, '네 믿음대로 되어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만한 믿음, 큰 믿음, 놀라운 믿음, 엄청난 믿음, 위대한 믿음, 상식을 뛰어 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주님 앞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 믿음이 없다고 책망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마14:26, 31).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아홉 제자들이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백부장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면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인정을 받아야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남편, 아내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크게 보고 남을 작게 보는 나쁜 습관이 습관입니다. 자기의 생각은 모두 옳고, 남의 생각은 모두 어리석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인정한다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믿음을 실천함으로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심으로 네 믿음대로 되라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늘꿈의 모든 성도들도 백부장과 같이 주님께 칭찬받고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이세상 모든 남성들이 요셉같다면 음란마귀들이 얼신도 못하겠죠
아내의 성격을 알만한 보디발이 아내의 말을 믿고. 믿었던 요셉을 의심하다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