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9
1월3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bt9c587IX4 (박원재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하느님이 여기 우리 곁에 계십니다!>
돈보스코께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위대한 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장소는 이탈리아 토리노시 외곽 발도코라는 장소입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요셉 코톨렌고 성인이 시작한 피콜라 카사(Piccola Casa)라는 대단위 종합사회복지시설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기에, 산책삼아 종종 들렀습니다.
시설 이름이 지닌 의미는 ‘작은 집’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부랑인들, 중증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 정신질환자들 등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수용되어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 와있는 환자들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 시끌벅적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가끔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동시에 환자들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천정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정기적으로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입니다. 따뜻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듣는 모든 사람의 긴장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줍니다.
“하느님이 여기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이 대명제는 이론이나 희망 사항이 절대 아닙니다. 명확한 실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권능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도 확고한 하느님 현존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큰 목소리로 확신을 갖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29절)
만일 세례자 요한이 꾸준히 깨어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면, 맨날 먹고 마시고 흥청대면서 세상 것이 잔뜩 몰입되어 있었더라면, 엉뚱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메시아라고 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깊은 광야 속으로 들어가 내공을 충분히 닦았기에, 몸에 밴 극단적 청빈 생활을 기반으로 한 맑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때가 차자 등장하신 메시아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덕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실 주님을 위한 보잘것없는 작은 도구요 이정표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속적 겸손의 덕은 어디에 주님이 계시는가를 살펴보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일이라기에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사회복지사업 운동을 일으킨 요셉 코톨렌고 성인이었지만, 그 역시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 남긴 말입니다.
“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저는 제가 누군지도 어떻게 돼 먹은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 작은 집’ 사업은 분명하게 제 일입니다. 이 단체를 지원하는 일이 제 일입니다. 자, 주님 안에서 나아갑시다.”
요셉 코톨렌고 성인은 자신이 모시고 있던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앞에서 그는 항상 자신을 ‘천주 섭리의 일꾼’이라고 불렀습니다.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2)아름다운 뒷모습>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식당을 먼저 개업했습니다. 좋은 장소도 찾았고, 손님들을 많이 끌기 위해 식당 홍보도 제대로 했습니다.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 특별한 메뉴도 계발했습니다. 백방의 노력을 다 한 결과 유명한 식당이 되었습니다. 구름처럼 손님들이 몰려왔고, 점심식사 시간에는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식당 바로 옆에 누군가가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은 얄밉게도 우리 식당 메뉴와 똑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식당 한 모퉁이에 ‘원조’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우리 식당으로만 향하던 손님들의 발길에 점점 저쪽 식당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특별 이벤트다, 경품이다, 하며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면서 결국 우리 식당은 파리만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시작한 식당 주인의 심기는 엄청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늦게 시작한 식당 사장을 찾아가서 왜 하필 여기 와서 이러느냐, 왜 남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느냐며 따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은 정말 잘나갔습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면 백성들은 숨죽여가며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성을 터트렸습니다.
저 같았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떠받들어주고 나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인간인지라 우쭐하는 마음에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보다 더 탁월한, 나보다 더 잘나가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린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빈정이 많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메시아가 아니며, 단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이정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쪽을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감동적인 회개의 설교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당연히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 즉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저 분이시다고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Ag1T-isHn0
++++++++++++++++++
<겪어보면 보이고 사랑하면 제대로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입니다.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공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드러내 보이셨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려고 하는 이들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보라고 하는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말합니다. 보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체를 보면서도 아직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해서이고, 겪어봐도 오해하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예전에 합천 우체국 택배 배달이 시작되면 이런 문자가 옵니다. “누구님이 보낸 택배 배달 예정. 합천 우체국 오세용.”
많은 사람이 왜 오라 가라 하느냐고 항의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자를 보내는 분이 우체국 직원 오세용 씨입니다. 이렇게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제대로 보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컬투쇼에 나왔던 사연입니다. 집 근처 주유소에 알바 하는 남자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눈도장도 찍을 겸 매일 휘발유 1리터씩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연쇄 방화 사건이 터지고 경찰들이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주유소 알바생은 그 여학생이 유력하다고 증언해 1차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했다면 그렇게 용의자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겪어봐야 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겪어본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겪어 ‘본다’라고 하듯, 머문다는 말은 ‘본다’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요한은 묻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그리고 믿음이 생긴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야 머무는 힘을 줍니다.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 희망이 그들을 성전에서 평생 머물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였습니다. 바라면 머물게 되고 머물면 보게 되고 보면 믿게 됩니다.
페르시아전쟁 때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막대한 보물을 파묻어놓고 전사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테베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신전에 빌자 제우스가 말합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돌을 뒤집어보라.”
노력하지 않고 찾으려 하는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면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머물게 됩니다. 하루에 성경 5분도 안 읽고 기도 5분도 안 하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머문다고 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오래 같이 살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를 모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만, 혹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와서 평일 미사에서도 봉헌금을 걷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잘 알고 오랜 세월 알아 왔는데도 혹시 돈을 많이 걷어서 제가 어떤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성전도 최소한으로 지어야 하고 성당에서 걷은 돈은 다시 신자들과 선교를 위해 다 쓰여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그분은 제가 돈을 많이 걷어서 저의 영광을 위해 쓴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를 사랑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식의 도구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가득 차 있으면 어둠만 보이고 빛이 있으면 빛이 보입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그 안에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보려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보려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봅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봅니다.
요한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있기에 성령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려면 머물려야 합니다. 머무르되 사랑을 증가시키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볼 것이고 보면 증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으로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당신께서 성령으로 영적인 눈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도 볼 줄 안다고 말하면 죄인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을 읽는 것은 마치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기쁨입니다. 오늘은 지난 12월 25일자 신문에서 읽은 지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3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기도하지 않고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선교를 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위 두 가지를 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죄를 지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쓸모없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신앙인의 맛과 멋이 드러나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안희숙 엘리사벳 자매님께서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느낀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고국에 신앙이 전해진지 200년의 시간, 하느님을 가슴에 품어 안고 말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100년의 길었던 박해 동안 피를 뿌려 흘린, 흘러 적신 이 강산 골짜기 구석구석 돌아보니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그들의 힘겨운 발차취가 남겨져 있고 피로 증거한 삶의 터에 ‘교회’라는 신앙의 두 글자 남아 하느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게 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절절히 부르던 예수, 마리아! 그 모습 선연하고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사람 존재의 목적이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그들은 자기 존재 목적을 어찌 그리 명백히 알았을까요?
안 믿는다는 말 한마디면 족했을 텐데, 양반뿐 아니라 천민, 노비, 상인들의 비천한 신분으로도 하나뿐인 목숨을 신앙이랑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한지에 물 묻혀 얼굴에 덮어 씌워 질식해 죽어가고, 태형에 아사형, 산 목숨을 굴비 엮듯 엮어 물에 수장하고, 하천 모래구덩이에 선 채로 생매장, 숨져가면서도 아니 두 다리 붙잡혀서 도리개질, 태질을 당해도, 높은 곳에 목 잘려 참수를 당해도, 살아 못 섬길 천주를 죽음으로 섬긴 분들입니다. 임금께 받은 하해지택을 대역죄인, 능지처참으로 바꾼 황사영, 27세 젊은 목숨 천주께 바치고 그 아내 정난주 마리아가 걷던 긴 귀향길, 추자도에 떨군 갓난아기, 어미의 가슴에 박히운 대못은 몇 자 였을까요?
또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가 겪던 아픔은요?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처절한 슬픔마저 느낍니다. 어찌 한 마디의 말, 느낌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금자를 가지고 우리 발자국을 재고 있습니다. 형제여, 힘을 내십시다.’라고 했던 최경환 성인이 있습니다.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그분이 손잡아 주시고 함께 해 주신 길, 제 신앙의 뿌리, 제게 전해진 신앙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 핏빛 내음인지 마음으로부터 아려오던 날들이었습니다. 인생은 만남이라지요, 만남은 은총이라고요. 제가 만난 하느님, 은총 중의 은총, 금총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터, 치명지, 무덤 앞에서 마음 안으로 숨어들던 생각들, 내 삶은 하느님을 살고 있는가?” 저도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진한 감동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2023년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온 신앙을 우리들 땀과 노력으로 이어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을 증언하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29절), 희생적인 구원자이시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32절)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33절) 으로 증언하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구체적으로 주님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늘 1요한 3,5에 근거해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하느님의 영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면서, 사람들이 더는 죄를 짓지 않도록 세례로 사람들에게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한다면, 요한의 증언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부터 해방해 주시고(5절), 죄 없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5절), 그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6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것은 전 인류의 죄를 의미하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없애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지우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시다. 요한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어린양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면서 29절 이하의 말씀에 대해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을 확대하고 있다. 즉 거룩하시고 먼저 계셨던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께서 당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탁월하게 구원의 선물 즉 성령을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예수께 대한 증언을 결론짓고 있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주신 분이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항상 일치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 안에 머물면서 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결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정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유다교에서는 파스카 준비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을 잡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를 향하여 가셨다고 말합니다(19,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19,36 참조). 이 말씀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을 피하고자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구워 먹어야 하였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치실 때 그 집을 지나가십니다. 이 사건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파스카의 어린양과 비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 사건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
[마리아회 김태오 티모테오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아니,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인 십자가의 희생을 예언하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날 계약을 맺을 때 먼저 서로의 동의가 확인된 다음 계약서에 서명 또는 도장을 찍는다. 이 서명 또는 도장은 서로 약속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유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고 동의한 것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고자 하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대방과 같이 특별한 예식을 행하였다.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로 둘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계약서 서명과 같았다. 피가 흐르는 제물 사이로 둘이 지나가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 피가 서로간의 동의를 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천주의 어린양을 되새겨 본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아멘.”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사는 게 죄지요!” 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범주는 윤리적인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모든 상태를 ‘죄’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며 하느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부르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가 없는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보면서 원죄 이전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의 모습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대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속죄의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전혀 없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완성형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곧 완덕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우리 안에 커다란 희망과 기쁨을 일으켜 줍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봄>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봄>
믿기에
믿음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믿음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희망하기에
희망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희망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사랑하기에
사랑을 본 사람은
홀로 봄에 머물지 않고
사랑함으로써만
닿을 수 있는
봄에로 초대하여
함께 봄을 이룹니다
+++++++++++++++++++
<(2)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몰랐지 만나를 아시는 분, 곱게 선하게 정의롭게 평화롭게 더불어 함께 살고픈 내게 내가 그렇게 살게끔 나를 이끄시려고 어느 날 낯설게 오신 분
그분과의 첫 만남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헤어짐 없는 만남의 이어짐 그리하여 그저 함께, 나를 당신처럼 만들려는 그분처럼 되고 싶어 나선 벅찬 여정에서 낯섦은 익숙함에 어색함은 편안함에 이미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가끔은 흐트러지는, 가끔은 홀로 가는, 가끔은 제멋대로인, 가끔은 곱지 않은, 가끔은 선하지 않은, 가끔은 정의롭지 않은, 가끔은 평화롭지 않은, 가끔은 함께하지 않는.
그리하여 여전히 순간순간 그분을 알지 못하는 그분을 알려고 하지 않는, 죄 많은 내게 여전히 순간순간 낯설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시는 분, 당신을 닮으라고 속삭이시는 분, 당신이 되라고 품에 안으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저의 약점 중의 하나는 한번 만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면 그제야 어디서 만난 분일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나를 알아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겉모양도 모르니 그 속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상대를 잘 알아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언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만이 그분을 알아 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도구로 선택하셨고 요한이 그분의 말씀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과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사랑하면 할수록 더 알게 되고 또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는 칭호는 그분의 운명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은 신앙의 큰 사건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어린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서 그 표가 된 집은 죽음의 천사들이 지나쳐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파스카’라고 하는데 ‘건너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서 건져지고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백성인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 놓으셨습니다. 어린양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하여 성체성사를 통한 음식으로 밥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보아야 하고 그 어린 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처럼 세상의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사제가 미사 때에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외칠 때마다 이제 내가 높이 달리어 또 하나의 어린양이 되고 그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 뵙고 만나는 은총이 모두에게 함께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1981년 미국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존 힝클리(John Warnock Hinckley Jr.)가 쏜 총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실려 가면서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병원에 도착해서 간호사가 지혈하기 위해 손을 몸에 대자, “아내 낸시에게는 허락받았나요?”라고 말했고, 수술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이 공화당원이면 좋겠네요.”라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사실 당사자인 레이건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도 여유를 보여줌으로 인해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83%의 높은 지지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지율이 30%로 떨어지자, “또 한 번 총 맞으면 되지, 뭘.”이라고 걱정하는 참모진에게 말한 것도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렇게 그는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유머를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주변을 배려하는 말을 통해 자신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고, 그것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자기 PR 시대라고 하면서 나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하지만,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을 드러내는 데만 최선을 다합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광야에 나가 메뚜기와 벌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만 베풀 뿐이었습니다. 좋은 옷과 좋은 음식 한 번도 취하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님께만 시선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1요한 3,6)라는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역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만을 증언하고 높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높이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증언해야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고 말한 세례자 요한이 오늘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제는 누구신지 알게 되었지만,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고, 모르다가 알게 되기까지 사이에 성령의 작용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그렇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도 그렇고,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성령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A.I(인공 지능)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을까? 우리 인간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잘 알고 있을까?
몇 년 전 인간의 지능과 인공 지능 간의 대결이 바둑을 통해 이뤄졌고,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진 것이 크나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으며 그때부터 바둑 해설을 할 때 인공 지능의 해설을 꼭 곁들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인공 지능이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그리고 많이 알까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공 지능이 더 잘 알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인공 지능의 증언에 의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만일 그런 것이고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믿음도 성령이 아니라 인공지능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학자들 안에서 인공 지능 시대의 신앙에 관한 토론이 활발하고, 그래서 과학과 신학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재의 저의 생각으로는 인공 지능이 신앙의 부분에 답할 수 없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와 같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공 지능이 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적인 앎이나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영역이기 때문이고,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다른 부분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안다고 까불다가 믿지 못하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다가 정작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조금 아는 것을 믿으면 난리 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나 자기 꼬라지를 아는 사람, 아니, 인간의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알고, 인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하느님임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고 하느님임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는 이 세상 너머의 것이니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모르지만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인聖人이 됩시다>
-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어제 ‘탄생’ 영화를 봤습니다. 전해 전주 월요일 성탄 다음 파공일 2022.12.26일 월요일 수도형제들은 ‘아바타’ 영화를 봤는데 저는 ‘탄생’인줄 알고 신청했다가 취소했는데 일주일후 월요일 어제 보게 됐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끝기도후 친교의 날에 수도형제들은 유익한 영화를 휴게실 TV 방에서, 다음날 목요일 기상 시간은 평소보다 1시간 늦은 5:30 기상이라 여유있게 보지만 저는 오후 8:30취침하기에 어김없이, 미련없이 도중에 나와 잠자리에 듭니다. 다음날 1시 전후로 일어나 강론 쓰는 중요성과 비교하게 되며 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기에 주저없이 일어나 침실로 갑니다.
그러나 어제 151분 영화관에서의 ‘성탄’관람은 예외였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안 이후로는 거의 관광觀光에 흥미를 잃어 관광 여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행후의 공허를 생각하면 추호도 생각이 없는 관광여행입니다.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순례巡禮여행입니다. 관광여행의 끝은 ‘텅빈 공허’지만 순례여행 끝은 ‘텅빈 충만의 기쁨’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탄생’ 영화 151분이 ‘피정 같았다는데 저는 성지순례한 것 같았습니다. 밤 12:30분 기상에도 불구하고 조는 일 없이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아마도 천주교 사제이기에 더 마음이 와 닿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인자한 관장의 취조시 김대건이 울자, “신부님도 웁니까?” 라는 안성기 배우의 물음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출했다니 감동입니다.
“아, 역사는 반복되는 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구나! 물론 잔인한 고문이나 쉽게 사람 죽이는 일은 없지만 형태만 교묘하게 바뀌었을뿐 계속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이구나!
민주화됐다지만 가부장적 수직적 권위 의식은 그대로구나! 결코 역사에 생략이나 도약은 없구나! 사람안에 내재한 잔인성, 공격성, 폭력성의 야만은 그대로이구나!
인간 무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가! 환경 탓할 것, 사람 탓할 것이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는 것이 유일한 답이구나! 그런데도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자 사랑임을 잊지 않는거다!”
등 깨달음을 가득 간직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사실 하루속히 ‘지구타이타닉호’의 경로를 바꾸어야 한다고, 모든 과학적 연구가 한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지만, 세계 어디에서도 본질적으로 유의미한 정치적 결단이나 변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세계의 붕괴와 함께 필연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과 이웃을 향한 원망과 분노, 적개심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형태의 폭력과 광란의 소비주의가 마치 시대의 특징인 양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탄생을 보고 김대건 사제에 감동한다고 하더라도 1회성으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억, 기념할 뿐 아니라 각자가 그 삶의 자리에서 부단한 영적혁명의 회개로 성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각성을 새로이 한, 꼭 성지순례 느낌의 영화 감상 시간이었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민주화운동이요 독립운동의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는 내전 상태 같은 남북南北의, 남남南南의 분열의 깊은 골을 어떻게 메꿔 평화의 공존공생의 길을 갈지가 참 엄중한 우리의 과제입니다. 방법은 단 하나 우리 하나하나가 불신의 늪, 전쟁의 늪에서 탈출하여 영적혁명의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 성인의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성탄에서 김대건 역을 한 윤시윤 배우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난 소감의 고백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머 감각도 너무 좋으시고,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다. 한국과 관련된 농담도 하시고 그랬다. 김대건이란 인물을 표현해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바티칸에 가면 성 베드로, 요한부터 압도적인 규모로 성인들의 동상이 있는데 비어있는 마지막 칸은 김대건의 자리라고 하더라.”
개신교 신자이면서 영화 ‘탄생’을 감독한 박흥식 형제님의 교황님 알현시 교황님에 관한 내용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교황님께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어요. 교황님이 ‘한국인은 고난 속에서도 미소짓는다’고 하셨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영화를 벌써 보셨나 싶었죠. 그날 교황은 ‘제가 여러분의 방문으로 영광을 받고 있다’며,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인간으로 아름다웠던 분의 삶에 관해 연구하고 공부한 건 여러분에게도 축복’이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순교전 교우들에게 쓴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회유 서한을 잊지 못합니다.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몸 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만25세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 직전 유언이라 놀라울 뿐입니다. 저는 무려 성인보다 세배를 살고 있으니 성덕은 “얼마나”의 햇수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의 사랑의 질에 달렸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해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복된 선종의 축복선물을 주셨습니다. 12월31일 독일어를 모르는 한 간호사가 한밤중에 교황님이 돌아가시기 전 이탈리어로 세 번쯤 하신 마지막 임종어를 분명히 들었다 합니다.
“Lord, I love you!”(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교황님의 전삶의 요약과도 같은, 정말 성인다운 임종어입니다. 탄생 영화의 가르침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을, 또 하느님의 우리 향한 간절한 바람을 단 하나로 요약하면 참사람의 진인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 응답하여 온맘과 온맘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는 자가 성인입니다.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가 있습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환경을,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성인이 되지 못함을 탓하며 날마다 평생 성인이 되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지는 만큼 세상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더디더라도 진정 이것이 역사의 진보입니다. 성인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 우리를 성인이 되라 격려하고 고무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은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진짜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그리스도처럼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알고 보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려 주님을 진면목을 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말한 분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눈이 열려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본 성 요한 세례자입니다. 그러니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처럼 늘 속으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고백할수록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
오늘 복음(요한1,29-34)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곧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그것도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때문에 인간 예수님을 또한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성자께서 거룩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저희와 똑같은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그 창조의 능력으로, 저희가 옛것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본기도)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1요한3,5-6)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봅시다!
그래서 죄가 없어진 모습인 깨끗하고 순결한 새사람이 되어 봅시다!
그런 기적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 봅시다!
배둔공동체는 2023년 한 해를 '말씀과 함께하는 해'로 정했습니다. 구체적인 하나의 방법으로, 신약성경 4복음서를 필사해서 새 성전에서 첫 번째로 드리는 주님성탄대축일 미사 때 아기 예수님께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올해 구약성경을 완필해서, 신구약성경 완필본을 아기 예수님께 봉헌하려고 합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보이는 것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습니다.
말씀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어 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rFB519Md8vM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과연 나는 보았다."(요한 1, 34)
주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주님의 삶과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의
복음으로 엮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소중한 만남입니다.
절실한 희망이
절실한 주님을
체험케 합니다.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은
우리 존재의
뜨거운 만남입니다.
뜨거운 만남은
오늘의 현실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믿는 만큼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실천입니다.
올바른
실천의 시작은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본다는 것은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참된 변화는
주님의 삶을
만나고
보는 것에서
변화는 일어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절실한 고백에서
뜨거운 사랑을
만납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찾아야 보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믿게 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은 생명이며
생명이란 주님을
믿는 힘입니다.
+++++++++++++++++++
(2)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더 나은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진정한 희망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당신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체험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체험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바치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사랑으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사랑의 진리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
몸소 보여주십니다.
어린 양의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어린 양을
따라갑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