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ac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이 계속 생각나면서 지금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았을까요? 대부분 남을 통해 받습니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과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다르다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언제나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진정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지 못함 자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함께해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혼자라는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뀌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한 망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고독이 두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행복의 길로 연결해주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이지만, 직접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어린양을 돌보는 사랑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결국 남는 건 사랑이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정세랑).
성 필립보 네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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