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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나오는 나팔은 크게 두가지로 뿔나팔과 은나팔이다. 뿔나팔은 쿠두뿔로 만든 쇼파르와 양뿔로 만든 양각나팔등이 있다. 이러한 나팔들은 언제 어떤 의미로 불었는지 알아보자! 성경에 나오는 나팔은 이 세가지를 포함한다.
1 때를 알리는 제사장, 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나팔은 첫째 회중을 소집할 때와 출발할 때를 알린다. 예를 들어 회중을 소집할 때는 나팔을 작게 분다. 모이는 때를 알리는 나팔수는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어야 하며 이는 영원한 율례이다. 이방에 있는 교회들은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 부는 나팔의 때와 함께가야 한다. 또한 대적을 치러 나갈 때 즉, 전쟁하러 나갈때는 나팔을 크게 분다. 이것을 통해 여호와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대적에게서 구원해주실 것이다.
회중을 소집할 때 나팔 소리를 크게 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소리가 너무 크면 귀가 예민한 사람들은 소집하는 것이 아니라더욱 멀리 떨어지고 싶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할 때는 오히려 큰 소리가 용기를 북돋아주고 두려움을 이기고 뛰어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게 나팔을 부는 지혜와 배려가 필요하다. 여호와께서는 자세하게 소리의 크기까지 말씀하고 계시다.
그리고 전쟁시에 나팔을 불면 여호와께서 듣고 기억하여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소집을 할 때는 작게 불어 사람들에게 때를 알리지만 전쟁시에 부는 큰 나팔 소리는 사람에게 용기와 경고를 주는 동시에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희락의 날, 정한 절기, 초하루(월삭)에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면서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나팔은 쇼파르를 포함한다.(시81:3) 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때 여호와께서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당시 제물은 번제와 화목제로써 잠깐의 시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시간 전체가 예배였다. 다만 오늘날에는 현금으로 예물을 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나팔을 부는 것은 큰 의미가 있으며 여호와의 날에 빈손으로 가지 않고 예물을 드리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은 성전이 존재할 수 있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다.(민10:1-10)
그러면 예슈아께서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한 번 살펴보자.
2 왜 기억하지 못하시는가?
천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변론할 것이다. 예슈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예슈아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예슈아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 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사역을 통해 예슈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렸고 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 이러한 사역을 한 이유는 예슈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이들에게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이유는 그들이 불법을 행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율법을 어기면서도 충분히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예언이 가능하며 능력도 행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더 두려운 일인가? 굳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을 향해 예슈아께서는 그날에 모른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사역에 스스로 속을 수 있다. 위대한 일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아서 이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느냐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린 죽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죽어서 진짜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이다. 율법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기꾼같은 사람은 제외한다. 오직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준행하는 자가 수많은 사역을 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예언의 능력보다 준행하는 것이 진짜이고 축사와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준행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앞에서 분명 여호와의 날에 예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때 우리를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날을 준행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율법이다. 이러한 특별한 날에 대한 준행이 없이 수많은 기적을 행한다면 동일한 책망을 듣게 될 거라는 것이 예슈아의 경고이다. 지금은 모에드(정해진 절기)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제는 회복의 때이다. 예전에는 이 부분을 묻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회복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율법을 삶으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무슬림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덜 요구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전쟁의 위기가 있으나 예배의 자유가 있고 핍박이 없는 이 땅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고 우린 드릴 수 있다. 온 세상에서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중 하나가 아닐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 만큼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자. 그것이 마땅할 것이다. 많은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시고 적게 받은 자에게 적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또한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먼저 말씀하신 것은 나쁜 열매와 아름다운 열매이다. 과연 어떻게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을까? 분명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지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열매가 무엇일까? 능력있는 설교? 능력있는 예언, 축사, 능력행함이 결코 그 나무의 어떠함을 말해줄 수 없다. 그렇다면 열매는 무엇인가? 그렇다. 어떤 사람은 천국을 얻고 어떤 사람은 쫒겨 난다. 그 열매를 가르는 기준은 율법 준행이다. 어쩌면 인생이 다윗처럼 도망다니는 신세일 수도 있고 욥처럼 괴로울 수도 있고 수많은 선지자들처럼 인정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누가봐도 하나님께서 버리신거 같은 삶일 지라도 그가 율법을 준행하고 있다면 그 나무는 영생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는 준행하며 사느냐 불법하며 사느냐이고 그것으로 나무가 어떠함을 알 수 있다. 외모를 보지 말아야 그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마7:18-23)
3 예배의 시작과 마치기 까지 나팔을 분다
히스기야 왕이 번제를 드리기 시작할 때 제사장이 나팔을 불고 온 회중이 제사를 마치기 까지 시로 노래하고 나팔불고 악기들을 연주하며 여호와를 경배하였다. 예배의 시작은 물론이고 예배를 마치기까지 모든 악기와 목소리로 경배한다.(대하29:26-29)
물론 성전에서는 제사장만이 나팔을 분다. 그러나 일반 예배장소에서는 구별된 사람들이 나팔을 분다. 기드온의 300용사도 제사장은 아니었지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모두 쇼파르를 불었다.
4 여호와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나팔을 분다
여호와의 성전에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과 노래하는 자들과 모든 악기를 울리며 여호와를 찬송하였다.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임재의 구름으로 인해 서 있을수도 없었다. 이처럼 여호와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해 나팔은 꼭 필요한 예배도구이다. 나팔은 찬양할 때 함께 분다. 그러므로 이때 부는 나팔소리는 찬양 소리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소리여야 하며 너무 크거가 날카롭거나 둔탁하지 않은게 좋다. (대하5:12-14)
5 나팔은 만물과 함께 여호와를 찬송하는 악기이다
온 땅이 여호와께 즐겁게 소리를 내며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하고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께 소리를 내며 바다와 그 안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모든 사람이 다 외치며 바닷물이 박수를 치고 산악이 노래한다. 모든 창조물들은 여호와를 즐겁게 노래한다. 나팔도 다른 모든 악기들처럼 찬양하는 도구이다. 여기서 나팔은 은나팔 뿐 아니라 뿔나팔도 포함한다.(시98:4-8)
6 항상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분다
다윗은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게 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게 했으며 제사장을 세워 언약궤 앞에서 항상 나팔을 불게 하였다. 우리는 나팔을 통해 여호와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여호와께서 피로 언약하셨으며 어기는 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할 것이니라" 예슈아께서 이미 피로 갚았는가? 그러면 이제는 더이상 불법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죄성이 죽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죽으셨으니 불법을 행해도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슈아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것이다.(대상16:1-6)
7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언약궤를 가져왔다
여호와의 궤를 다윗이 가져올 때 일부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무리는 뿔나팔과 나팔을 불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였다. 또한 다윗 왕은 춤추며 뛰놀며 예배했다. (대상15:24)
8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한 아사왕
아사왕은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들었다. "행위에는 상급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여호와의 재단을 재건했다. 여호와께서 아사왕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자들이 왕의 통치에 들어왔다. 왕은 소 700마리와 양7000마리를 여호와께 재물로 드리고(노략한 물건이라해도 엄청난 양의 재물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기로 나팔을 불어 맹세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사왕은 그후 20년동안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20년 후에는 사람을 의지하여 망령되게 행함으로 다시 전쟁을 겪게 되었다. 사실 오뎃의 예언이 아니라도 행위에 상급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우리와 함께 하려 할 것이다. 이 예언은 계시록을 통해 요한이 우리에게 이미 예언하였다. 우리도 이 예언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아사왕과 같은 샴롬의 축복이 우리 삶에 있었을 것이다.(대하15:7-15)
9 아사왕은 일평생 마음이 온전했다
아사왕은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여호와를 찾기로 맹세했다. 그러면서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여호와를 찾지 않는 자는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남다른 왕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왕에게 아세라 목상을 세워 우상 숭배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태후로부터 폐하고 우상을 찍고 빻아 불살라버렸다. 하지만 이스라엘 중에 있는 산당은 없애지 않았다. 산당은 여호와께 예배도 하지만 우상에게도 제사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을 없애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누가 완전하게 말씀을 지킬 수 있느냐고 준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나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르다. 아사왕은 온전한(완전한)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온전은 히브리어로 '샬렘'이다. 뜻은 '평화로운 , 완전한, 조용한' 등이다. 즉, 하나님과 평화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샬롬을 얻게 된 것이다. 말씀을 준행하였더니 따라오는 샬롬과 안식의 축복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샬롬할 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이다.(대하15:13-17)
10 신뢰하라 형통하리라
야하시엘 선지자가 여호사밧 왕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너희와 함게 하시리라" 이 말을 듣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와께 경배하며 찬송하였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라고 외쳤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예언을 들었다면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지자들을 신뢰하는게 어렵겠는가? 전쟁이 코 앞에 있을 때 이런 격려의 말이야 말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줄 최고의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를 신뢰하여서인가? 승리한다는 예언을 들어서인가? 우리가 이러한 멋진 예언을 듣는다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이러한 예언을 듣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의 고생은 끝나고 행복의 시작이지 않을까? 어떠한가? 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를 신뢰했기에 이런 예언을 들은 것인가? 아니면 이런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여호와를 신뢰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여호사밧왕은 여호와를 신뢰하였기에 여호와께서 몸소 전쟁해 주셨고 승리의 약속을 예언으로 얻은 것이다. 그 기쁨에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간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를 신뢰한 삶의 결과가 예언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미래는 오늘 나의 행위들의 결과물이다. 모든 행위에는 언약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예언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므로 좋은 예언을 받으려고 좆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선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여호와와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뢰는 '확실히 믿는 것'을 뜻하고 형통하다는 '번영하다, 돌진하다, 돌파하다'등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분을 믿는다면 돌파와 번성의 삶이 따라온다. 이 믿음의 산 증인이 여호사밧 왕인 것이다. (대하20:15-20)
11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전쟁하시는 하나님
여호사밧 왕은 전쟁을 위해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 이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대적을 치셨다. 우린 전쟁을 코 앞에 두고 찬송을 시작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전쟁 때문에 우는 자가 아니라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찬송할 때 그분은 전쟁하신다. 우리는 수많은 전쟁을 삶에서 치르고 있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고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음으로 여호와께서 전쟁하지 못하시며 그래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승리에 대한 예언을 들었어도 우리가 감사하며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전쟁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승리를 위한 무기이며 천사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승리하고 돌아온 여호사밧 왕은 비파와 수금과 나팔로 합주하며 성전으로 나아갔다. 이런 여호사밧의 승리로 이방 모든 나라들이 여호사밧을 두려워했고 유다는 사방에서 샬롬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샬롬(평안), 안식은 승리해야 따라오는 전유물과 같다.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뢰이고 감사이고 찬양이다. 만약 불면증이 있다면 그래서 안식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믿음)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대하20:12-30)
12 음란과 교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한다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은 음행하고 더러워졌다. 이러한 악행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하며 여호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인 토라(율법)가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음란한 마음이 있어서일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섬겼다면 더욱 아버지께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또한 음란한 마음은 교만함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은 우상 숭배로 음란이며 동시에 교만함이다. 이러한 교만함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러 가나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향해 나팔을 불어 경고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황폐함으로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팔은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심판을 경고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호5:3-9)
13 나의 생각을 버려라
그러므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불러야 한다. 찾는 것은 구하는 의미로 여호와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돈이나 명예나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간다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실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따를 때 교만한 것이고 자신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 같지만 그건 처음부터 불법한 자인 사단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음란한 것이다.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 옛남편이 죽지 않으면 음녀일 뿐이다. 왜 자신의 생각을 버려야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길이 여호와의 길(예슈아의 삶)과 달라서 결코 동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차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다. 우리의 생각이 땅에 있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다. 말씀으로 검증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버려라. 그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하는 미혹일 뿐이다.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더 늦기전에 여호와를 찾고 내 생각을 버리자.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실 것이다. (사55:6-9)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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