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육군 보병 중사로 국가의 "명"을 받들어 월남전 맹호 혜산진 부대 제1대대3중대 1소대 선임하사관으로 배속되어 "푸엔성" "동수안군" "하쭝리"에 소재 하였든 월남국 독립 전쟁에서의 정예 프랑스군 1개 여단이 전멸함으로써의 월남국 독립전쟁에서의 승기를 잡았다라고 하는 악명 높은 킬러 계곡에 연하여 있었던 홍코산 중대 장기 매복 전투에서의 내몸같이 사랑하였든 "첨병하사 김 하사" 와 " 첨병이었던 김 상병' 그리고 "무전병 이였든 전 상병" 이 그 현장에서의 운명을 달리 하였음에도, 소대 선임 하사관으로 서의 사랑 하였던 소대원님 들의 시신도 수습하여 드리지 못하고 .
여섯 명의 전상 소대 원들과 같이 병원 헬기로 십자성 퀴논 106후송병원으로 후송되어 전신 다발성 파편창 과 우측다리 절단술을 받고,6일만에 깨어나...........
주월사령관"이세호 장군"과 주월사 "공병참모"님과, "맹호 정득만사령관님"의 문병을 받고 세분의 소대원님들의 소식을 전 하여 듣곤 혼절 하여 마약(데메론)에의 의지를 하면서 전상의 고통 과 세분 의 소대원님 들을 애통 해하면서................
얼마후 미군 수송기인 씨53후송기로 십자성 102후송병원 에서의 백마 전상 장병들을 같이 싫고 사이공 탄손누트 공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대한민국의 군의관님들과 제1회 항공 탑승 간호장교님 들에게 인계 되어. 대한민국의 수송기인 씨46후송기로 필립핀 클랔크 미 공군 병원을 거처 대한민국의 의무 사령부 병원인 대구 국군통합병원 을 거처 야간 병원후송 열차편으로 부산 국군 통합병원 정형외과 208병동으로 후송되어 재활치료와 사회 적응 훈련 및 직업 교육 을 받고1973년 1월31일부 "국""육" "명"(을 )5호(41-3)으로 면역 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상이군경회 의 일원이되면서..............,
6,25참전 상이군인 선배님들의 애처러운 사연을 전하여 듣곤 가슴아파한적이 있었다,
그 선배님들은 워낙 어려웠던 국가 경제와 혼란한 정치 여건등으로 어느 누구 하나 돌보아 주는 곳이 없어 팔다리를 잃고 두눈이 실명되고서도 그리웠던 부모형제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고향 으로의 귀향 을 하지 못하고 전국에 산재 하였던 "정양원"이라는곳에 불구에 몸을 의탁하고 전상의 고통과 국가와 정부 를 원망하면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구걸아닌 동냥 지꺼리와 대포집등에서 의 무전취식 과 깔꼬리 와 목발등 을 휘둘러 댐으로써 나라가 위란에 처하였을때의 몸받쳐 나라를 구하였다 라고 하는 구국의 영웅 이라는 명예와 긍지는 어느덧 간곳없고 상이군인 하면 오히려 행패나 부리는 이상한 왜곡된 집단으로 전락 하였다라고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하여 듣곤 가슴아파 한적이있었다,,,,,,,,,,,
그러던중 "육군 소장 박정희 장군"이 이끄시는 "5,16군사 혁명"이 성공 을 거둠 으로써 "박정희 장군" 은 제일먼저 정치권과의 연결되어 사회의 지탄 제1호이었던 정치 깡패 일당 들을 일망 소탕 하시면서 그들의 목에 명찰을 걸게 하시면서 시가를 행진 시키면서 그 우두머리 들은 신속한 "군사 혁명재판소"의 판결대로의 형장에 이슬로 처단하시면서,그졸개 들은 국토 개발단 이라고 하는 단체에 예속 시켜서 국가 재건에 임하게 하시면서,
병역 미필자 들을 공공 기관 과 각 기업체 에서 추방을 하시면서 권세가와 재벌들의 자식들은 "빨간" 도장을 찍어 별도로 관리를 하시면서 최 전방 보병사단으로 배치시켜 국방의 의무를 다 하게 하시면서.
보건사회부의 유명 무실하였든 "군사원호과"를 퇴게로에 소재하였던 구 해군본부 자리에 독립된 기관으로써 "원호청"이라고 하여 설치를 하시면서 "원호청장"을 장관급으로 예우를 하시면서 "박정희 장군"께옵서 직접 챙기시면서 6,25 전상 상이군경 선배님 들을 반 강제적이다 십게 공공 기관과 각 기업체에 취업을 알선 하여 주심으로써 어렵사리 가정을 이룰수가 있었으면서 또 그 자녀들의 교육과 취업등을 위하여 제도적인 보완 장치 등 을 마련하여 주심 으로써 비로서 "국가가 위란"에 처 하였을 때의 몸 받쳐 나라를 구하였다라고하는 '명예 '와 "자긍심 "이 하늘에 치 솟았다라고 하는 감격어린 사연을 전하여 듣곤 같이 환호 한적이 있었다,
본인도 "박정희 대통령각하"와 그 "영부인이신 육영수 "님의 은덕으로 군경력 밖에 없었던 본인도 국영기업체에 입사되어 무난히 정년 퇴임을 할수가있었으며 그 은덕은 아직도 길이 간직하고 있으면서 아마 영원할것임니다..............
1973년 허허 벌판 이였든 지금의 여의도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각하 '의. 특별하사금으로 "상이군경회 중앙회관"이 삼층으로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곤 중앙회관을 찾아 임직원님 들을 만나 뵈옵고 사정이 여의치않아 이곳에서의 결혼식을 할수가 없겠는 가?라고 상의를 하니 쾨히 허락을 하여 주심으로써 1974년2월20일 늦깍이 장가를 들게되었으며 중앙본부 임직원님 들이 주선 하여, 서대문 "노라노 예식장"에서"결혼 선언문","피아노" 등을 대여하고 을지로 입구에 있었던 "허바허바 사진관"의 일류 촬영기사를 초청하고 전 임직원님 들은 물론 전쟁 미망인회 의 임직원 들과 서울지부?도 같이있어서 서울지부? 임직원 들도 참석하여 주심으로서 "중앙회 안 0 0회장님"의 주례로 화려 하고 거창 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의 행복하고 축복받는결혼식을 올릴수가 있었으며 또 임직원님들이 정성스레 마련하여주신 삼륜 오토바이 화물 추럭 에 찬장. 이불,양은 솟단지 등의 신혼 살림살이 도 마련 하여 주심 으로써 행복한 신혼 살림을 차릴수가 있었다,
본인은 1975년도에 전상의 재발과 몸에 남아있었든 파편등의 염증 등으로 오류동에 소재하였던 "원호병원"에서 몇달간 입원치료를 받은적이 있었다,그런데 때 마침 "영부인이신 육영수님"의 첫기일이신 1975년 8월14일을 맞아 병원 당국에 요청하
여 동작동 "현충원 육영수님"의 묘소 를 참배케 하여달라고 요청 을하여 "별상 병동"에 입원 치료를 받든 동료 전상환자 삼십여명이 동작동 현충원 주차장에 도착하여 근무 헌병을 불러 우리들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상을 입은 상이 용사"들로 오류동 소재의 원호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인데 팔다리가 없어 걸어갈수가 없으니 책임자를 만나게 하여달라고 하니 헌병 소대장이 와서, 우리들은 걸어갈수가 없는 환자 들이니 차로 묘소 에까지 갈수가 없겠는가,라고 하니 헌병 소대장이 쾨히 승락을 하고 "헌병 백차로 에스코트"까지 하여 묘소 에 도착 하니 참배 시민들의 행열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담당 행사요원 들이 시민 들의 참배를 일시멈추게 하고 검은 양복의 정장차림에 행사요원 들이 우리 들을 일일이 업고 참배를 맞치니,............
당시에 "동양 티브이","엠비씨 티브이". "케이비 에쓰 티비"등이 앞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이므로 우리들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상 을 입은 상이 용사"들로서 현재 상이처 의 재발등 으로 오류동 소재의" 원호병원" 에서 전상 치료중 인 "월남 참전 상이용사 " 들로서 ,살아 생전 따듯한 손길로 우리 들을 돌보아 주시던" 육영수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오류동 원호병원" 에서 이렇게 참배를 하러 왔다라고 한적이있었다
40여년이 흐른 세월속에서도 살아생전 따듯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특별하게 우리 상이 용사 들을 보살펴주시던 "영부인 이셨든 고 육영수님"의 은덕 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있으면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2.07.11 09:10
첫댓글 유공자님, 감사 감사 함니다 귀하의 카페에도 방문한적이 있는데 ? 글열어보기가 좀 그래서 아직 정회원 가입은 않되어 있습니다 빠른 시간내에 등록 올리도록 하겠슴비다 내내 건강 하시기를 부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