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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랫만에 접속한 koogi입니다..
죄송합니다..^^;
이슈거리만 몰고 다니는 것 같군요.
얼마 전에 써본 글입니다.
그 절정은 지난 듯한 이슈입니다만, 아직은 논쟁의 여지가 많을거라고 생각하는
주제입니다.
꼭 외계어뿐만 아니라 앞으로 끊임없이 등장한 異種 언어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글의 적, 귀여니
2004년 여름, 극장가엔 한 인터넷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두 편 걸렸습니다. ‘늑대의 유혹’과 ‘그놈은 멋있었다’라는 이름의 두 영화. ‘귀여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두 영화가 출시되고부터 종영할때까지 영화 관련 사이트에서 이 영화들의 게시판은 꽤나 시끌벅적했습니다. ‘이것도 영화냐?’ 부터 ‘솔직히 재미있었다’, ‘원작을 제대로 못 옮겼다’, ‘한글파괴의 주범에게 돈을 벌게 해주려는 수작이냐’는 얘기까지. 뭐 영화뿐 아니라 모든 문화상품에는 기본적으로 많은 평가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영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한글파괴’가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건 상당히 특이한 일입니다.
재미있다는 생각에 저는 인터넷에서 귀여니 관련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뜨더라구요. 귀여니 팬사이트인 귀사모부터 심지어 귀여니 안티동맹(그냥 안티사이트도 아니고 수많은 사이트의 ‘동맹’ 사이트입니다..^^)까지. 호평이든 비평이든 한국작가 누구 이름으로 검색해서 이토록 많은 정보가 뜨겠습니까. 이런 걸 보면 이슈화되고 있는 건 사실인듯 한데, 사실 귀여니에 관한 평은 칭찬보다는 비판이, 연구보다는 상업적인 호기심이, 팬보다는 안티가 더 많았습니다. 이것도 문학이냐는 얘기부터, 같잖은 장난질로 어쩌다 책 내서 뜬 걸 가지고 대학까지 갔다는 식의 욕설에 가까운 비난이 다반사더군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인 한글파괴. 이것저것 얘기가 많았지만 그녀의 비평, 아니 그녀의 안티들의 모든 주장은 결국 ‘한글파괴’와 ‘외계어’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학 같지도 않은 걸로 책도 내고, 돈도 벌고, 대학까지 간 것 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더 큰 죄였던 걸까요?
사실 ‘온라인’에서 쓰이는 용어들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된 건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인터넷이 아니라 굳이 온라인이라고 한 이유도 그러한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 자체가 이미 예전 PC통신에서의 채팅에서부터이기 때문이죠. ‘하이루, 방가방가..’등의 용어는 이미 전국민이 다 아는 고전적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조금 지난 얘기지만 지하철에도 공익광고가 붙어 있던 걸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거구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가 선생님 하이루, 방가방가 하면서 웃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고 국어교과서가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냐는 식의 공익광고. 상당히 재미있는 광고였지만 그런 광고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용어들이 고전이 되어버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PC통신의 블루스크린 이후 수많은 채팅용어 및 인터넷용어들이 등장했지만 지금처럼 언어사용에 있어 민감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 맞춤법이 틀린 부분이 있으면 당장 지적 리플이 쏟아지죠. 꽤 심하게 맞춤법이 틀려 있으면 당장 ‘초딩’ 이냐는 비난 리플이 집단으로 쏟아지기에 이제는 글 쓰신 분들이 알아서 수정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더군요. PC통신 시절엔 물론이거니와 1,2년 전까지만 해도 맞춤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었던 것은 맞춤법 때문에 글의 내용이 잘못 이해될 수 있을 때에만 한정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맞춤법에 대한 집착은 꽤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물론 그 때에도 논쟁 같은 걸 하시던 분들은 나중에 인신공격으로 서로 맞춤법 같은걸 가지고 초등학교 야간 나왔냐고 비아냥 거렸었지만 뭐 이건 제외하겠습니다..^^) 귀여니와 그 일련의 일당들이 저지르는 한글파괴가 수위를 넘어섰기에 네티즌의 상승된 경각심이 반영된 바람직하고 당연한 결과인걸까요?
변화? 파괴?
그러나 보통 ‘세종대왕님이 슬퍼하신다(?)’ 라는 이야기로 인터넷상에서 자주 대변이 되는 이 한글파괴 논란은 가만히 생각하면 상당부분이 어처구니없는 얘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세종대왕이 그런 걸 가지고 정말 슬퍼하거나 화를 내실 분인지 역사적인 인물 해석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다혈질이라서 이런 문제에 몹시도 화를 내신다는 전제하에 본다고 하더라도 세종대왕이 만들어낸 것은 일련의 문자체계이지 기존의 한반도 내에서 사용되던 언어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단 방가방가니, 하이루, ‘아헿헿’, ‘뷁’ 처럼 여러 가지 쏟아지는 신조어들에 대하여 표시되는 거부감은 지금도 조선시대의 언어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믿거나 혹은 조선시대와 지금의 사용하는 말이 같다고 믿는 분들이 아니라면 차라리 언어의 변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나랏말미 듕긕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이 ‘우리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잘 통하지 아니한다.’로 변하는 과정은 언어파괴라기 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이에 가깝죠.
물론 그런 식의 자연스러운 변화와 오늘날처럼 급격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변화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빠르고 인위적으로 변화하죠. 소설가 김동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광수조차 ‘이러라’, ‘이더라’, ‘하도다’, ‘이로다’ 등을 그대로 사용할 때 내가 주도한 <창조>동인들이 이를 모두 ‘이다’, ‘한다’ 등으로 대체해버리고 ‘했다’, ‘이었다’ 같은 과거형 어미까지 만들어 사용했다. 게다가 조선말에는 없었던 he, she 등의 대명사를 쓰기 위해 ‘그’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모두 <창조>의 공으로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소설 혹은 고전소설의 장르를 보면 모든 어미는 ‘~하도다, ~하더라’등으로 끝이 납니다. 그 전까지 ‘~이다’ 라든지 ‘~다’ 로 끝나는 형식의 문장이나 문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다’ 형식의 문체를 <창조> 동인지 회원들이 소설에 도입하면서 새로운 종결어미, 과거사, 대명사 등이 당시의 언어세계 속에 급속도로 확산됩니다. 이러한 인위적이고 빠른 변화를 언어의 파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지금 너무나 자연스레 그들이 파괴해(?) 놓은 언어를 사용 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덧붙이자면 사실 이러한 문체의 변화는 상당부분 일본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고 새로운 어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 문화, 국민, 낭만 등의 어휘는 개화기 당시의 신조어들이죠.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단어를 일본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을 겪으며 Nation, Culture, Romance등의 단어를 번역하면서 새로이 일본말에 도입하여 만들어내고, 우린 그 한자어를 그대로 수입해서 우리 식으로 발음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변화를 민족 감정등과 연관지어 언어파괴라고 규정하는 일은 오히려 지금의 언어를 변화시키지 않으려는, 지금의 언어만이 옳다고 우기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신화
늘 학교를 가기 싫어했던 프란츠는 어느 날 늦게 도착한 학교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멜 선생님은 정장을 입고 있고 동네 유지들이 모여 있었죠. 알사스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게 넘어가 이제 두 번 다시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 입니다. 프란츠는 그동안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을 것을 후회하며 난생 처음 열심히 수업을 들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프랑스 만세’라고 적은 후 눈물에 목이 멘 목소리로 수업이 끝났음을 알린다는 감동적인 이야기.
다들 아시겠지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이라는 작품입니다. 나라의 중요성과 국어의 소중함을 알리는 데 많이 이용되는 ‘도데’다운, 감동이 철철 넘치는 글입니다만, 당시의 알사스에 대해 알고 나면 이 글에 대한 감동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사스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국가 귀속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지방이었습니다. 문화적 정체성을 따진다면 혈통이나 언어, 문화적 관습 등에서 게르만에 더 가까운 쪽이었지만 당시의 국가가 오늘날의 국가들처럼 영토가 자로 재 놓은 듯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치 자치령처럼 존재했던 것이죠.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이들은 주민투표로 프랑스에 귀속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프랑스 국민이 되면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그 나라의 시민이 되겠지만, 독일인이 되면 여전히 봉건사회에 구속되어 살아야한다는 계산의 결과였죠.
그렇다면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사스가 다시 독일로 넘어간 것은 주민투표로 프랑스에 귀속되기로 결정한지 불과 80년이 지난 다음입니다. 게르만의 언어나 문화, 혈통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불과 80년 만에 프랑스의 1등 애국국민이 되는 상황. 식민지 상황에서 36년을 있었으면서도 우리 문화를 형태적으로나마 죽어라고 고수했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민투표로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입던 옷, 먹는 음식, 사용하는 말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건 분명히 아닐텐데요.
오히려 이 글에서 드러나는 것은 언어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다분히 정치적인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사람이 불어를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의 목적이 일단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의 결과물을 얻기 위함이었고, 독일군이 들어오자 바로 프랑스어 교육이 중단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에 있어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죠. 곧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사람들을 하나의 국가에 귀속시키는 ‘국민제조’에 필수라는 것 이구요.
문제는 이러한 동일언어 강요가 사람들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볼까요? 현재 이스라엘의 ‘표준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 전 대다수의 유태인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아 무려 천 년 전부터 ‘이디시어’를 사용했죠.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그 땅에 나라를 만든 유태인들은 국가 통합을 위해 교회에서나 사용되던 히브리어를 되살려 표준어로 제정하고는 국민 통합이라는 명분하에 이디시어를 금지시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전혀 모르는 말을 사용하기를 강요받은 거죠. 학교에서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것은 징계의 대상이고, 길거리에서 이디시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욕설이나 물리적인 공격을 당하기 일쑤였다니 거의 일제 시대의 문화말살정책과 다름없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저런 상황이 일어난 적이 없다구요? 이스라엘 처럼 극단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이 존재합니다. 표준어가 바로 그것이죠.
대부분 아시겠지만 표준어의 정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의 서울말’입니다. 표준어가 처음 제정될 때는 그 나라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어느 곳의 말이냐가 표준어 제정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표준어가 도쿄어고 북한의 표준어는 평양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그 나라의 정치적 권력의 중심지 언어가 표준어가 되죠. 지배적 언어가 생겨남으로서 멀쩡히 존재하던 언어들은 그냥 언어가 아닌 ‘사투리’가 됩니다. 사투리는 특별한 목적(문학적 목적이나 지방색을 표현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방송에 등장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으며, 책이나 논문들 또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투리로 쓰여지지 않죠. 반면 표준어는 모든 곳에서 언어활동의 척도이자 규범이 되고 심지어 사용하는 사람의 지위를 표현하기도 합니다(TV에서 이른바 상류계층 사람들이 사투리 쓰는거 보셨습니까?). 이제 와서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50년 전 제주도로 피난 간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제주 사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도 꽤나 심각한 수준의 언어적 강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앞서 논의한 한글파괴와 연관 지어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동안 파괴당했다고 생각한 ‘한글’이 ‘한글’자체가 아닌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표준어’ 로 지정한, 전혀 자연적이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일련의 언어군임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생각해 온 ‘한글파괴’ 라는 문제가 세종대왕이 슬퍼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의 훼손과는 그다지 관계 없는, 단지 국가가 우리에게 쓰라고 지정해 강요한 언어인 표준어의 변형에 반(反)하는 현상이었던 거죠. 아니, 어쩌면 세종대왕과 별로 관계없는 문제에 세종대왕을 저들 마음대로 갖다 붙여서 이미지를 이용해 먹었으니 그거야말로 세종대왕께서 화내실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어’라 불리는 기호체계의 환상들..
물론 지금의 인터넷에서 사용되고 있는 많은 종류의 새로운 언어들, ‘한글파괴’라고 불리는 모든 현상에 있어서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신조어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외계어들, 한글 기호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모티콘의 남발, 그리고 기존 맞춤법으로는 전혀 만들어질 수 없는 신조어인 뷁이나 아헿헿등. 이를 단순히 특정 집단의 특이성이나 질풍노도(?)의 시기인 청소년들이 공유하는 문화, 혹은 한글파괴 따위로만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기존과는 조금 다른 시각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고 그를 위해 지시체와 그에 상응하는 기호가 존재하는 집단 내의 체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apple)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과’라고 쓰고 ‘사과’라고 읽으며 그것에 대해 사람들은 언어기호로서 사과가 아니라 실제의 사과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는다는 거죠. 여기서 지시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공통적인 ‘사과’라는 물건이고, 기호는 우리가 쓰고 읽는 ‘사과’라는 글자이며 우리는 기호로서 사과라는 실제의 과일을 연상시켜 재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의 전통적인 언어이론은 근대에 들어 상당한 공격을 당합니다. 좀 전에 들었던 예처럼 ‘사과’라는 기호를 접할 때 우리는 그 기호의 의미를 과일의 한 종류인 사과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실제로 그 기호와 실제의 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든, 혹은 ‘과사’나 ‘옹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단순히 같은 언어집단 내에서의 관습내지 약속일 뿐이죠. 이것은 기호의 대상이 존재하는 말이 아닌 ‘과’나 ‘와’, ‘의’, ‘그런데’, ‘그리고’등을 떠올려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언어라는 것이 현실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언어가 현실을 설명해주지 못하는 상황과 연계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두드리고 있는 ‘키보드’의 의미는 ‘기호가 새겨진 키를 두드려서 컴퓨터에 정보를 입력하는 기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호들의 집합일 뿐, 이것을 설명하려면 다시 ‘기호’와 ‘키’와 ‘컴퓨터’와 ‘정보’등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합니다. 그 각각의 설명은 또 다른 설명을 낳고, 다시금 설명을 낳아 끝없는 기호의 연쇄만이 반복될 뿐, 단순히 언어로는 실제를 그대로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같은 기호로서 ‘사과’를 이야기 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사과’는 모두 다릅니다. 붉고, 푸르고. 그 향도, 크기도, 맛도 모두 제각각인 사과들. 어떤 이는 사과알레르기로 고생한 기억이나 오래 전 사과를 훔쳐 먹다 들켜서 두들겨 맞은 기억이 떠올라 괴로울 것이고, 누군가는 사과밭에서 프로포즈한 기억으로 행복해 할 것입니다. 각각의 기억과 경험, 현실인식이 모두 다른 상황에서 같은 기호로 같은 것을 공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누군가와 말이 안 통해 답답한 상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발생하죠.
기호와 현실간의 괴리, 현실 재현에 있어서의 언어의 한계. 그렇기에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단순히 기호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호로서만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을 기호외의 다른 것을 이용함으로서 전달하죠.
어린 자식을 둔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병을 들고 물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 병 안에 든 것을 일반적으로 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것을 가리키는 기호를 물이라고 사용해라.’ 정도의 뜻일 겁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가슴을 두드리면서 아이에게 목이 막힌 소리로 ‘물!’ 이라고 하는 것은 ‘밥을 먹다가 목이 메여 답답하니 네 앞에 있는 물을 좀 달라.’ 정도의 뜻이 되겠죠. ‘물’이라는 같은 기호를 사용하지만 이 두 가지의 뜻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목소리의 크기와 높이, 억양, 어조에 따라서 같은 기호는 전혀 상이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구소련의 사회주의 연극의 대표적 연출가였던 스타니슬라브스키는 배우의 오디션에서 ‘오늘 밤’이란 하나의 단어로 30가지의 서로 다른 상황을 연출해보라고 주문했다고 합니다. 이 때 배우가 발음하는 30개의 단어는 모두 같은 기호이지만, 그 30번은 발음과, 표정, 억양, 어조, 목소리의 크기 등에 따라 모두 다른 의미의 ‘오늘 밤’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히 기호만을 가지고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호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 외(外)적인 것-음량, 음색, 음고, 어조, 억양, 기타등등-을 사용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기호보다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언어의 한계성은 언어 자체의 변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존의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상황, 기존의 언어가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효과와는 조금 다른 효과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죠. 이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늘 새롭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언어들이 그래왔고, 지금의 인터넷 상에서의 새로운 말들 또한 그렇습니다. 기존의 유행어들이 주로 TV라는 매체를 통해 음성의 형태로 전파되었기에 기존의 언어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면 지금의 신조어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주로 텍스트의 형태가 되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형태의 언어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만.
조금 온건하신 분들은 이렇게 얘기하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특이한 말을 쓰지 않아도 같은 뜻을 지닌 다른 말이 있을 텐데 꼭 그런 말을 써야 하냐고. 기존의 유행어가 그랬고, 지금의 한글파괴 논란에 있어서도 종종 이런 형식의 대응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껏 얘기했던 것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언어들이 겨냥하는 것은 그 동안의 언어들이 지칭할 수 없었던 현실의 어떤 부분이고,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언어들을 포함하여 단어의 뜻이 같은 단어들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사람’은 같은가요? 아닙니다. ‘인간’과 ‘사람’은 비슷한 무엇인가를 가리키지만 분명 조금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죠. ‘인간’과 ‘사람’을 항상 같은 곳에 사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뷁’은 어떻습니까? ‘아헿헿’은요? 이 기호들이 표현하는, 혹은 표현하려고 하는 무엇을 다른 기호로 대체시킬 수 있습니까?
언어란 현실을 재현하기가 불가능한 기호들의 체계입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기호와 기호 사이에 숨은, 기존의 기호로서 재현할 수 없었던 무엇인가를 재현하기를 욕망하죠. 현실이 변함에 따라 언어는 끊임없이 변이하고, 기호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새로운 말들을 생성해냅니다.
Heart of Darkness?
그러나 사실 여태까지 다룬 것은 어찌 보면 한글파괴의 진정한 원흉(?)에 대한 얘기를 제외하고 한 셈입니다. ‘아헿헿’이나 ‘뷁’, 이모티콘 같은 건 한글파괴에 있어서 여기에 비하면 댈 것도 안되죠. 그 이름도 찬란한 한글파괴의 최강자(?), 외계어를 소개합니다!!
øよøぎㅎビλĦㅎコ_¤ 읍ㅎF_しち흐ロっㅉヴ횾_≥∇≤☆ ゴıゴıㆀ 읍ㅎ℉_
ズй_ザウてエ_øГøノでł_칀구등록_ㅎħ㈜λЙㅎゴ_。
칀그등록_ㅎħ㈜λıㄲうズı횽?_≥∇≤★
ㅎŊ㈜λıㄸйㄲじズı_ 글올ㄹらしıて℉_∽*
ロЙ흴_ゼつじĦ㈜λıㄲっズき¿?
자, 이 글을 해석하실 수 있다면 당신도 외계어의 세계에 한발 들여놓은 셈입니다. 혹시 해석 가능하십니까?^^
이 글은 이런 뜻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빠 너무 멋져요. 키키오빠, 제 버디 아이디 친구 등록 해주세요. 친구 등록 해주실 거죠? 해주실 때까지 글 올립니다. 메일 보내주실거죠?’ 누군가 연모하는 오빠에게 적극적인 대쉬를 하는 듯한 내용인데요, 해석과 찬찬히 비교해 보시면 어떤 구조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다른 새로운 말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이 외계어가 이슈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발은 대단했습니다. 이게 과연 무엇인지, 처음 보는 사람은 한참을 고민해도 알아먹기 힘든 이 알 수 없는 기호의 나열들. ‘아헿헿’, ‘뷁’, ‘KIN’ 같은 것이 처음엔 잘 몰라도 일단 뜻만 대충 알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외계어라는 놈은 읽기도 쓰기도 너무나 힘이 듭니다. 아무에게나 접근을 허용하지 않죠. 이러니 귀여니가 한글파괴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도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낯선 것의 충격이란 일단은 거부감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다음 예를 한번 볼까요?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혹시 이 글은 이해가 가십니까? 한자를 잘 몰라서 힘드시다구요? 하지만 이건 한자를 좀 아시는 분도 그냥 봐서는 이해가 조금 힘든 글입니다. 첫 줄은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라는 뜻입니다. ‘三十’은 우리 말로 서른이고 서른은 ‘설운’, 곧 ‘서러운’이라는 뜻이 되죠. 두 번째 줄에서 ‘사십’은 마흔이고 이것은 ‘망할’이, ‘오십’은 ‘쉰’이 되어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먹는다’는 뜻이 됩니다. 세 번째 줄의 ‘칠십’은 ‘이런’이 되고, 넷째 줄의 ‘삼십’은 서른이 되었다가 ‘설은’, 즉 설익었다는 뜻이 되어 전체 시의 뜻은 이렇습니다.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 놈의 집에서 쉰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 설익은 밥을 먹으리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유명한 김삿갓이 어느 마을의 부잣집에서 푸대접을 당하고 나오며 화풀이로 쓴 글이죠. 이걸 왜 예로 드냐구요? 이 시에서 김삿갓은 한자의 음과 훈, 한문과 한글등을 뒤섞어 한글도, 한문도 아닌 독특한 ‘외계어’를 만들어냅니다. 기존의 정형화된 한시(漢詩)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거죠. 우리가 보았을 때는 그러려니 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시는 당시의 정형화된 한시에 익숙해진 양반들에게는 지금의 외계어와 맞먹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외계어가 기존 한글 기호의 형태적 유사성을 이용해 특수 기호나 일본어등을 섞어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과 김삿갓이 기존 한자의 음과 훈, 한글과 한문, 구어와 문어를 뒤섞는 것이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이 시뿐 아니라 김삿갓의 시 중 상당수가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김삿갓은 당시의 한자문화를 파괴한 오늘날의 귀여니와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김삿갓은 대부분의 양반들, 사회 기득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떠돕니다. 반면 그의 시들은 민중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상당수가 암송되고, 구전되며 많은 아류작이 만들어지죠. 그저 어느 지식인의 말장난이 우연히 인기를 얻은 것에 불과한 걸까요?
그러나 방금 본 예에서의 김삿갓의 시는 그러한 형식으로 존재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의 뜻과 같은 한자가 사용되어 기존의 한시들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면 지금의 시가 내포한 신선한 느낌의 비아냥거림이나 매력 같은 건 갖출 수 없었겠죠. 또한 이러한 매력은 기존의 기득권이나 일반화되어 있는 무엇에 대항하는 Anti적인 것에서만 발생합니다. 민중들이 김삿갓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 역시 김삿갓의 시가 가진 이러한 면모 때문이었던 거죠.
그리고 이것은 외계어라 불리는 지금의 언어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어의 매력은 기존의 언어체계가 규정하고 강요하는 표준어라는 틀을 벗어나는데 있으며 외계어라는 형식 자체가 겨냥하는 지점은 이미 표준어의 둔탁한 시야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외계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효과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죠.
뷁!!
물론 외계어를 사용하는 사람 하나하나가 기존 표준어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Anti 이며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표준어가 분명 정치적이고, 스스로 자연스러운 양 가장하며 사람들에게 표준어 사용만을 강요하는 어거지임을 생각할 때, 외계어나 인터넷 상의 새로운 신조어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표준어라는 국가 규정의 언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고,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 상에 있는 하나의 지점인 것은 확실합니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현실을 기호적으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은 기존의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무엇을 담아내려는 언어 자신의 근본적인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구요.
우리는 여태껏 ‘한글’이 아닌 ‘표준어’를 한글로 알고 그것과 배치되는 행위를 ‘한글파괴’라 부르며 별 관계도 없는 세종대왕을 들먹여가며 비판해왔습니다. 단순한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준어 수호에 연관시키는 국가의 언어정책을 내면화하여 그저 한글이라면 모두 좋은 줄 알고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부했던 것이죠. 사실 이른바 ‘올바른 언어사용’을 생활화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워 온 대로, 아는 대로만, 남들이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만 골라 하면 그것은 이미 국가 권장 ‘올바른 언어사용’에 상당히 근접한 것일테니까요.
문제는 이러한 무비판적인 언어 사용이 우리의 삶 자체에 가져오는 효과입니다. 다르다는 것을 다름이 아닌 나쁨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 미디어에서 나오는 정치판은 비판할 줄 알지만 거미줄처럼 우리를 싸고 도는 미시적인 권력들에는 무감각한 획일적인 인간형. 근대국가가 생산해 내는 특유의 상상력 결핍 증후군의 감염자들.
그런 의미에서 외계어의 필연성이나 외계어 사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지금의 문제제기에 반(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특정한 언어 사용을 권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언어 속에 우리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중심의 언어를 설정해 주변 언어를 배타시키는 상황을 다시금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외계어냐, 외계어가 아니냐가 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복제하려는 언어 자신의 욕망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형태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유연성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가지만을 강요하는 근엄한 얼굴의 권력에 대하여 ‘뷁!’이라고 외치며 낄낄댈 수 있는 유쾌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만 살아왔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작성자 koogi. " "외계어 사용은 한글파괴인가? 그래서 금지되어야 하는가?" 작성일시(한국시각) 2004-12-06. Reading Fantasy 토론 공간. 접속일시(한국시각) 2004-12-09. <http://readingfantasy.pe.kr/zb41pl2/bbs/view.php?id=foru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18>
퍼온 이 : 하늘을 나는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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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웹 글 인용에 대한 출처 게재의 예.
기존의 것을 이용하여 그 뜻을 나타낼 수 있을만한 가능성을 먼저 타진하는 성실성이 기발함의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글 파괴의 일부분이라고 보이기는 하지만....물론, 그것이 사회로 나오지 않을경우에는 그들이 그런 외계어를 사용하는 것에 상관은 없지만, 그것이 사회로 나와서 우리네들의 언어 생활에 장애를 주면 문제가 될 듯...
음... 통신어야 이미 예전부터 많이 쓰였지만... 아무래도 그게 출판의 형식으로 사회에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거겠지요. ;;
잠깐! 저건 어디서 많이 보던 홈페이지다;; (쿨럭!)
흠.. 과거의 언어변화와 현재 상황의 차이점은.. 변화범위와 변화 속도. 지금의 통신체는 대부분 10대에 한정되있고 변화속도도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할정도.. 이정도면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지금의 외계어는 규범화 한다거나 하는게 어려워서 장기적으로는 초중딩들도 원래의 국어를 쓰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국어 교육을 잘해야 겠지요.
기본적으로 언어란 -대중성-에 기본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대중화에 실패해 사라진 언어도 있고,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어(이유는 불문이지만) 생기는 신조어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 생기는 신조어들은 대부분이 파생어, 의성어등 기존의 언어에서 변형되는 등의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머리에서 생각하는 언어와 소리로 생각하는 언어(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그리고 문자와의 공통점 역시 중요합니다. 물론 일정한 규칙과 필요에 의해 달라지는 면이 있긴 합니다. 그럼 외계어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지금 제가 위에서 말한 것에 모조리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외계어는 말이 아닌 문자가 대부분입니다.(~당 등은 소리로써도 표현이 가능합니다만) 대부분 인터넷과 한정된 연령대(10대 전후)가 사용하는 것이 거의 100%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또한 기존의 한글(언어)와의 극명한 대조성때문에 엄청난 충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변화되어진 언어가 아닌 갑자기 인위적으로(적절한 단어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들어진 언어이기에 다른 언어로 분류되버릴 수 있으며, 같은 말을 두 가지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은 일단 경제성만을 봐도 굉장히 불리한 방법입니다.
또한 외계어는 합성어아닌 합성어(파생어 포함)가 대부분입니다. 합성어란 기존 두 단어가 조합을 하는 것인데 외계어는 모음과 자음 자체를 다른 기호들로 대처하여 사용되어집니다. 그렇기에 한글의 모습을 기본으로 되어 있다곤 하지만 한글이라고 부르기엔 굉장히 꺼려지는 언어가 되버렸으며, '외계어'라는 지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시니피에,시니피앙,문자의 공통점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생각은 언어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셋의 공통성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설사 외계어의 창시자일지라도 한국인 일테니 생각은 한국어로 할 것입니다. -외계어로 한다면 할 말없습니다.- 여하튼, 그렇기에 외계어란 결국 기본
적으로 -언어-라고 지칭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 대체어인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워낙 심심해서 그냥 주절대본 것이라 오류가 많아도 양해바랍니다.)
P.S - 대처 방안 역시 시급합니다. 일부 어린 학생(초등학생, 중학생등)들이 외계어를 한글과의 혼동 현상이 일으키지 않게 강경한 방법도 불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견] 긴 말씀은 덧글보다는 답글을 사용하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