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바둑을 배운 것은 제가 24살 정도였을때입니다. 저도 경상도 남자인지라 아버지와의 대화가 거의 없는 편이어서 군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랑 좀 더 친해지기 위해 배운 바둑이 저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취미 활동 중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꽤 오래전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바둑 TV를 보았는데 그 당시엔 바둑의 기본적인 지식이 거의 없을 때라 잠시 구경하려고 보았는데, 목소리 좋은 젊은 분이랑 언변이 유창한 나이 드신 분 두 명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낮잠이 막 오려는 나른한 오후에 봐서 그런지 몰라도 참 감미로우면서 분위기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바둑TV에서 방영한 '명승부 열전'이었습니다. 젊은 분은 양재호 9단이며 나이 드신 분은 박치문 아마 7단이셨고요...
바둑에 대해 잘 모를 때지만 막연히 양재호 9단을 좋아하게 되었고 양재호 9단이 대국을 한다는 예고를 보면 가급적 그 바둑을 보면서 양재호 9단을 응원하곤 했습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서 타이젬이란 바둑 사이트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런 저런 동호회를 거치다가 양재호 팬클럽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삼성화재 세계 기전의 준결승전을 경산에 위치한 영남대학교에서 치르게 되었고 양재호 9단이 해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그 다음날 무작정 영남대학교를 찾아 갔습니다.
공개 해설장을 둘러 보고 나서 양재호 9단이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다짜고짜 다가가서 양재호 9단의 팬이며 양사랑 회원이라 말을 하니 무척 반가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밥을 먹었냐 물으시곤 아직 식전이라 하니 자기랑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팬이 프로기사를 만나면 식사 정도는 대접해야 한다는 불문율(?)에 대해 알지 못한지라, 저보다 나이도 많고 경제력도 좋은 양재호 9단이 밥을 사주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당당하게 얻어 먹었습니다.
양재호 9단은 주위 사람들에게 저를 자기 팬이라 소개시켜 주었고, 식사를 하러 가서는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려던 한해원 3단(?)과 박영훈 9단을 우리 테이블로 불러서 그들과 같이 밥을 먹게 해주었습니다.
오후 대국이 시작될 무렵 양재호 9단은 해설장으로 향하였고, 해설장에 가기 전에 프로기사들이 있는 검토실로 데려 가 주었습니다. 프로 기사도 아니고 바둑 관계자도 아니며 아마 고수도 아닌 제가 프로기사들이랑 같이 머리를 맞대고 검토를 구경하고 잡담을 주고 받는데 기분이 참 좋고 왠지 우쭐해 지더군요.
대국이 끝나고 나선 당시 대국 구경차 왔던 프로기사들과 해설을 위해 왔던 프로기사들에게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하여 사진도 꽤나 찍고 나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다시 영남대로 가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그것도 모자라 타이젬 관계자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당시 가장 궁금했던 것은 타이젬 9단들의 실명이었습니다) 또 밥을 얻어 먹고 놀았습니다...
그 해 결승전은 중국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는데 박영훈 9단과 조치훈 9단이 결승에 진출하여 부득이하게 중국에서의 대국이 취소되고 다시 영남대에서 대국이 치뤄졌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는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보통 폐를 끼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국 전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양재호 9단이었습니다. (물론 준결승이 펼쳐질 때 제 번호를 반 강제적으로 저장하게 했지만, 전화를 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전에 행사가 있어 왔는데 차편을 못 구해서 그러는데 차 가지고 와줄수 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차가 없었지만 앞 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렌트카 센터에 가서 ef 소나타 한 대를 렌트하여 곧장 대전으로 달려갔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성 어디에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갔더니 양재호 9단이 계시더군요. 그 날 행사가 있었다면 바둑 tv 관계자들이랑 뒤풀이로 밥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비싼 식사도 얻어 먹고 양재호 9단을 모시고 대구로 왔습니다. 그리고 양재호 9단 옆엔 제트소년으로 유명한 김지명 아마 6단이 있었는데, 첫 공중파 진행을 맡게 되었다면서 무척 좋아하시더군요.
두 분을 모시고 영남대 숙소로 향한 뒤 양재호 9단은 피곤해서 먼저 쉬시고 저랑 김지명 아마 6단은 박영진 아마 7단을 만나러 대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같이 노래방에 가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놀고 나서 김지명 아마 6단과는 당구 한 큐 약속을 한 다음 헤어졌습니다.
다음날 영남대학교 앞에서 제가 아는 형님과 함께 김지명 아마 6단을 만나서 당구치고 놀고 영남대 대국장으로 가서 마치 스텝인양 여기저기 간섭하고 물어보고 빈 자리 있으면 그냥 앉아서 놀다가 당시에 조한승 9단이 인터넷 해설을 했는데, 대국이 끝난 후 총평을 하려고 웹 카메라를 설치하는데 마침 타이젬 관계자들이 모두 자리에 없어서 저에게 난감한 표정으로 카메라 좀 잡아 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하여 카메라를 잡아주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한승 9단이 어렵기만 한, 프로기사라기 보단 그냥 아는 동생 같은 느낌이 살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양재호 9단에게 가서 저녁 얻어 먹고, 대국이 끝난 뒤엔 타이젬 관계자 숙소에 놀러가서 박지은 9단이 인터넷 대국하는 거 구경하고 잡담하고...
준결승까지 해서 며칠 꾸준히 갔더니 제가 어딜 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봉수 후 점심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리에 입장한 조치훈 9단을 단독으로 사진 촬영하고 간단한 인사도 해보고, 대국이 끝나고 박영훈 9단과 복기할 때엔 프로기사들과 같이 대국장으로 가서 바로 옆에서 복기하고 참고도 놓는 모습 구경하고... 누가 봐도 관계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대전까지 렌트해서 갔다 온 비용이 10만원 조금 안되는 돈이었지만 당시엔 백수였던지라 적지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은 있는지라 양재호 9단에게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팬의 입장에서 충분히 해줄 수도 있었던 것이었고요... 그런데 마지막 날 양재호 9단이 저에게 와서 10만원권 수표를 한 장 주시면서 참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거절도 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당시엔 저도 백수 3년차였던지라...
프로기사들에겐 저런 경험은 흔할 수 있기에 당시의 일을 기억할 수 없을 수 있겠지만, 제가 바둑을 끊더라도 그 당시의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며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이세돌 9단과 관련하여 한국기원에 대해 불만도 많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을 지닌 프로기사들에 대한 반감도 크지만, 프로기사들 모두가 도매금으로 욕을 얻어 먹기엔 그들이 너무 인간적인 것 같아서 조심스레 예전 이야기를 꺼내 보았습니다...
첫댓글 프로기사분들 한사람 한사람을 따져보면 모두들 좋은분들일것입니다.. 또한 모든 프로기사분들이 바둑을 누구보다 사랑할것이구요.. 다만 그 방법에 대해서 타인과의 의견이 다를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의견이 다른부분에 대해서 욕을 할수는 없구요.. 다만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 더 이해하려 노력하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지 안을까 생각합니다...
ㅋㅋ. 기억나네요. 그때 대전으로 차몰고 간다고 했던 기억이.. 그러고보니 천황님하고도 꽤 오래 알고 지냈네요. 암튼 양재호9단 멋지네요. 제가 젤 좋아하는 해설입니다.
와.. 멋진 추억이네요..
부럽네요^^ 전 오프라인 바둑행사에는 광주 KIXX 와 모모 팀간 프로리그전에 인터넷 수순입력 아르바이트로 참가해본게 전부지만, 아직도 그날의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날 만났던 여러 프로기사분들의 따뜻한 배려와 그날의 특별했던 기억들^^(머 싸인을 쉽게 받아냈다는 정도겠지만요ㅋ) 이번 사태로 인하여 저처럼 바둑 변두리에서 바둑을 즐기시는 여러 기우분들이 맘을 상하셨겠지만, 좋은분들이 더 많은 바둑 세상이라는데에 이(異)견을 표할 기우분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__)꾸벅
훈훈한 글이군요..잘 읽었습니다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