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경영하는 업주의 입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원의 입장은 매우 다릅니다. 어쩌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것과 최소한의 노동력으로 최대한의 임금을 얻어내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근간에는 기업의 윤리라는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치장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최고의 이익을 내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반면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으로서는 자기 일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이라도 받아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종종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 결과로 노사협의라는 것이 발생하고 노동시간 조절이나 임금협상을 해야 합니다. 최근에는 ‘귀족노조’라는 말까지 생겨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나마 대기업은 조직도 잘 되어 있고 규제도 명확하게 나와서 다른 중소기업보다는 그래도 그런 협상 과정이 공개되고 서로 어떻게든 원만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나 그보다 못한 소규모 업체들 속에는 그런 조직도 규제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말이야 ‘원만한’ 협상이라고 하지만 서로가 불편한 점을 가지고 얼마간의 기간을 버티며 일합니다. 물론 그런 갈등의 시간이 없이 사전에 경영주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나름의 남다른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전체적인 조직 관리가 가능하다면 전체 경영도 공개하며 이익이 날 때나 손실이 발생할 때나 그 고락을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기업도 있기는 합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 원가를 구성함에 인건비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툭하면 원가절감에 인건비 절감이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소규모 업체가 아니라면 직원을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사후조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때로는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직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름 전체 사내 분위기를 위해서 쫓아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퇴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좀 악랄한 수범을 쓰는 것이지요. 대상자를 한직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모두 기피하는 어려운 자리로 업무 자리를 변경시켜줄 수 있습니다.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나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은’(직장에서는 ‘박 대리’로 불립니다)은 그렇게 해서 멀리 떨어진 하청업체로 발령을 받습니다. 도시에 살던 깔끔한 여직원이 어느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로 내려갑니다. 그냥 떠나라 하는 마음으로 발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뭘 잘못했기에 떠나? 하는 마음으로 현장에 내려갑니다. 보내면서 인사치레로 조건을 줍니다. 1년만 버티면 복귀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알만합니다. 제물에 지쳐서 나가라는 것이지요. 여태 일하던 환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창고요 사람들도 다릅니다. 사무직 직원들이 아니고 모두 현장 작업을 하는 근로자들입니다. 하는 일은 송전탑 수리입니다.
일단 이게 체구도 작고 연약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습니다. 사령장을 들고 온 정은이를 맞는 현장 소장도 기막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맞지도 않는 직원을 보냈으니 어쩌란 말인가 하는 것이지요. 괜스레 인건비나 축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것도 원청의 갑질이지요. 자기네가 맡아 처리해야 할 일을 엉뚱한 곳에 맡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박 대리에게 돌아가라는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맡길 만한 일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버팁니다. 처음에는 꿔다놓은 보리자루로 며칠을 보냅니다. 그리고 지켜봅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 살피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장으로 따라갑니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사내들이 입고 세탁도 하지 않은 채 벗어둔 작업복, 냄새나고 더러운 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짊어지고 송전탑이 있는 산꼭대기로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그냥 따라가기도 버거울 텐데 숨이 턱에 닿습니다. 더 어려운 일이 눈앞에 전개됩니다. 짐을 지고 그 높은 탑을 올라가야 합니다. 고소공포증까지 가지고 있는 정은이가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지요. 결국 병원에 가서 약 처방을 받아 약의 힘으로 버티려 합니다. 그래도 쉽지 않습니다.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파트너입니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요. 그래도 버팁니다. 결국 보다 못한 ‘막내’의 도움을 받습니다. 교육을 받고 훈련을 쌓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해고‘입니다. 박 대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해고보다 사망이지요. 어쩌면 요즘 직장인의 고민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이 어려운 형편에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은 전세금 날리고 길거리로 쫓겨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가장이 당해야 하는 공포를 뭐라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직장을 잃는 것은 곧 삶의 터전을 잃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디 함부로 대들 수도 없습니다. 피고용자는 약자일 뿐입니다. 기관에 호소를 한다 해도 짐작하는 대로 해결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그리고 역시 힘 가진 자에게 유리합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그냥 버팁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I Don’t Fire Myself)를 보았습니다. 2020년 작이네요. 현재도 진행 중인 우리의 아픔이 아닐까 싶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