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를 독재와 인권 탄압의 상징으로 주장하는 것은 정치학적 안목의 무지요, 조금만 민주주의에 애착을 가지고 관찰하면 삼청교육대는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께서 전두환이란 버팀목을 찾지 못하셨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없어질 뻔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이 입을 여시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행정 전문가이신 그분 입장에 서서 시국읽기를 해보자.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쳐 어렵게 1945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1980년에 멸망해가고 있었다. 양김씨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신현확 총리 동시 퇴진, 내각 총사퇴, 직선제 선거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과격 시위하도록 시위대를 선동하였을 때 그 목적은 대한민국 정부 전복이었다.
김대중의 사주를 받은 광주 시위대는 5월 14일부터 신현확 국무총리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부 전복을 노렸는지 모르지만 5월 20일 신현확 총리 내각 총사퇴가 있었다.
(신현확 국무총리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 사진.)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21일 신문에 "최규하 대통령이 곧 하야를 단안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처럼 광주폭동이 곧 정부를 전복시키고 민주주의 헌정을 중단시킬 기세가 컸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 단안이 임박하였음을 보도하는 1980년 5월 21일자 경향신문)
당시 각국 정보기관들이 광주와 북한 사이에 오고가는 무전 교신을 포착하였다고 하며, 광주일보는 시위 지도부가 광주 시민들에게 대한민국 방송을 듣지 말고 북한 방송만 들으라고 강요했던 사실이 있었음을 인용보도한다: "그들은 군용지프와 트럭, 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돌면서 위협시위와 요란한 가두방송을 하였는바 심지어 우리 방송은 못 믿으니 북한 방 송을 듣는 것이 좋다고 버스에서 북괴 방송을 틀고 운행하기도 했다"
(광주일보
http://www.kwangju.co.kr/518/069.asp 마지막 단락.)
자, 여기 정당도 내각도 없는 대통령이 있었다. 여당의 역할을 하여야 할 김종필씨의 민주공화당은 최규하 대통령이 1979년 12월 23일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등을 돌렸으며, 양김씨의 신민당은 야당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하야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광주사태가 터지고 5월 19일 나주경찰서에서 수천 정의 무기가 광주 시민군에게 탈취된 다음 날 신현확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더욱이, 광주사태 기간에 북한군이 남침하려 한다는 정보를 중국, 일몬, 미국 3국이 한국 정부에 제공하여 주었던 그 시점에서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여당이 없고, 야당은 하야를 요구하고, 내각마저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은 국가 대표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새 내각을 임명하는 대신 민정과 군정 연합체를 구상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6월 1일 이후 3개월간 계속된 국보위였다. 국보위 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며,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중장이 임명되었다.
국보위란 최규하 대통령이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아이디어을 얻으신 것이었다. 1961년 장면 총리의 윤보선 대통령에 대항하는 쿠데타로 정국이 심히 어수선하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윤보선 대통령을 보좌하여 내각을 대리하는 국정 운영을 한 바 있었으며, 그 효율성이 입증되었었다. 그래셔 최규하 대통령은 내각 재임명으로 운동권과 충돌하는 대신 국보위를 설치하여 내각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래서 군부가 내무부가 관장하는 치안 유지의 책무까지 떠맡게 된 상황이 3개월간 계속되었다. 갑자기 정부 각 부서의 책임을 떠맡는 외에 치안 유지의 책무까지 떠맡았다. 그러나 보다 긴 역사의 선상에서 바라본다면 이것은 민주화 운동이었다. 양김씨의 민주화 반대 운동이 국가를 전복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이란 인물이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으면 나라는 하루아침에 멸망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연약한 어깨에 갑자기 너무 많은 짐이 지워지니깐 때로 무리를 범하기도 하였지만 바로 그 시각에 전두환은 대한민국이 멸망하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국민은 전두환 없으면 나라가 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국민은 저 잔혹무도한 양김씨가 신현확 내각을 총사퇴시켰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같으면 군정으로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근 석달간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부린 후에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확인한 최규하 대통령은 8월 하순에 하야 발표와 동시에 전두환에게 대통령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규하 대툥령이 정해준 일정에 따라 11대 대통령 임기 6개월간 유신헌법을 개헌하고 1981년 3월에 5공화국이 출범하게 한 것이었다.
8월 4일 계엄령이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였을 때는 전두환 본인도 자기가 미래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8월에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진행되어 국정이 군정에서 헌정으로 복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 같으면 영구적 군정으로 가기 마련이었던 상황에서 헌정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국보위 시절 3개월간에도 국가 원수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니 양김씨기가 정부를 사실상 전복시켰음에도 헌정이 유지될 수 있었으며, 그해 가을에 개헌하여 유신헌법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보다 민주적인 공화정 시대가 열렸으니 이것은 실로 민주화운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이었다.
http://cafe.daum.net/issue21
첫댓글 사진이 안 나오네요^^
바이올린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엠퍼스 사이트 사진은 다음에서 안나오는군요. 방금 시사 사진 자료실에 사진 올리고 여기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