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관중의 패권을 노리며 부씨의 저족과 경쟁했던 요씨의 강족. 그러나 저족이 힘겨운 싸움을 거쳐 관중을 평정하고 진을 건국했을 무렵, 요양(姚襄)이 이끄는 강족은 고향인 관중에서 수천 리 떨어진 회남(淮南)까지 흘러들어가 살고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5호16국 시대 이민족의 진출에 있어서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은호의 북벌군을 깨부수고 회수 유역을 휩쓸고 다닌 요양은 353년 12월, 7만 명에 이르는 무리를 이끌고 회수 남쪽의 우태(盱胎)에 주둔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성하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동진 조정에 난을 일으킨 것을 사죄하고 복속을 표명한 뒤였다. 이러한 복속이 말 그대로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뻔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렇게 풍전등화의 동진 조정을 내버려두고 북벌을 하러 떠난 환온에게는 동진 조정을 엿멕이려는 속셈도 없지않아 있었으리라.
어쨌거나, 요양이 복속을 표명한 속내에는 환온의 서부군에 대한 두려움도 일정 부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온이 354년 2월에 북벌을 떠남으로써, 요양이 복속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줄어들었다. 요양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일단 모용부의 연에 복속을 표명하고, 회남에서 동진의 수도 건강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연에 복속한 것은 약간 뜬금없는 감이 있다. 그러나 어차피 요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적인 세력이었으니 명목상의 상국이 어느 나라건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상 북방의 이민족이었던 강족 출신의 요양과 그 부하들에게 강회의 이 땅은 그다지 매력은 없었던 것 같다. 부하들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자 요양은 미련없이 땅을 버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355년 5월, 요양은 동진의 허창을 점거하고 관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요양이 회남에서 허창에 이르는 길에 잔뜩 분탕질을 하고 다녔으니, 동진이 새로이 확보한 영역들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화북에서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연에게 그러한 지역들은 먹음직스러운 먹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은호가 어렵사리 확보했던 낙양은 은호가 실각한 직후에 주성(周成)이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여 일찌감치 동진의 판도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요양은 관중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목인 낙양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운명은 강족의 편이 아니었다.
356년 7월, 환온에게 요양 토벌의 명령이 떨어졌다. 환온의 두 번째 북벌이 시작된 것이다. 환온의 대군이 낙양으로 진군하자 요양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즉시 포위를 풀고 싸울 준비를 하는 한편, 환온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할테니 군대를 물려달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환온은 당당하게 항복하려면 직접 와서 무릎을 꿇으라 대답하고, 직접 갑옷을 입고 군대를 독려하며 전투에 나섰다.
치열한 전투 끝에 요양은 크게 패배하여 낙양 북쪽의 산 속으로 도망쳤다. 환온은 낙양의 주성을 항복시키고 마침내 낙양을 점령한다. 2차 북벌의 가장 큰 성과였다. 환온은 낙양에 2천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강릉으로 귀환한다.
한편 패배한 요양은 병주(幷州)의 평양(平陽)으로 달아났다. 이때 병주에는 과거 요양의 부장이었던 윤적이 주둔하고 있었다. 요양이 동진에 항복하여 동진 영토로 이동하던 때, 진의 습격으로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윤적은 요양을 배반하고 진에 항복했었던 것이다. 윤적이 휘하의 군대와 부족을 이끌고 옛 주군에게 다시 찾아와 요양의 세력은 다시 회복되었다.
당시 병주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장평은 진의 대장군이었는데, 당연히 자신의 영역에 난입해 들어온 요양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장평의 공격으로 요양은 크게 패배했지만, 기묘하게도 장평은 패배한 요양과 의형제를 맺고 이들을 받아들인다. 장평이 실질적으로 병주를 통치하고 있던 군벌이었던 만큼 요양의 세력을 이용하려던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후의 상황으로 추측해 보건대, 요양이 진나라와의 길목을 막고, 장평은 이를 핑계로 독립을 준비하려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근거지를 마련한 요양은 357년, 드디어 관중을 넘보기 시작한다. 원래 관중이 고향이던 강족이 요익중과 요양을 따라 중원을 떠돌아다닌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관중으로 귀환할 것을 결의했던 후조 말기의 혼란 시기부터 따져도 7년, 말 그대로 강호를 떠돌며 절치부심한 대장정이 바야흐로 결실을 맺을 때가 온 것이다.
요양이 거병하여 관중으로 진입하자, 관중의 강족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당시 진은 폭군 부생의 치세였는데, 부생은 관중 강족의 지도자이자 진의 건국공신이었던 뇌약아(雷弱兒)를 참살한 바 있다. 가뜩이나 폭군의 치세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강족들은 강족 출신으로 명망 높은(?) 요양이 나타나자 이에 대대적으로 호응한 것이다. 강족들 뿐 아니라 흉노와 저족 일부도 요양을 따랐다.
요양은 황락(黃落)을 점거하였고, 진의 토벌군이 이에 맞섰다. 토벌군 대장 부황미(苻黃眉)는 소수의 군대를 보내 요새에 틀어박힌 요양을 도발하였고, 이 도발에 낚인 요양은 신나게 추격하다 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요양은 전사하고, 요양의 동생 요장(姚萇)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진에 항복하였다.
기나긴 대장정의 초라한 끝이다.

※ 강족의 이동 경로
첫댓글 에구~어이없어라...요양이 허무하게 가는구나...쯧쯧.
살아남기 위해 갖은 최선을 다했건만 끝내는 어이 없는 종국이군요. 그럴 바에는 이미지나 구기지 말 것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용맹한 전사로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졌으니 그리 욕 먹을만한 삶은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중국 대륙을 휘저으며 지냈던 그 수년간의 생활이 그에게는 어찌보면 행복했을 지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살짝 듭니다. ^^;;
ㅎㅎ 행복이랄 것까지야... 어쨌든 실패한 삶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