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과 동물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인간이다. 보통 호모 사피언스라고 불리는 현존하는 동물 무리의 하나이며, 천계에서 잘못을 저질러 지구의 땅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신의 아들이라고도 말하여 진다.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형용색색의 다양한 물질들과 각양각색의 수많은 영혼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운명처럼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캔버스 위에 오색 물감으로 멋지게 그려보고 싶지만 나는 그림에는 재주가 없어 대신 하양 백지에 검정 글씨로 담백한 자화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런데 나는 내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침팬지를 닮은 동물을 그려야 할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의 모습을 그려야 할지. 거무튀튀한 침팬지의 얼굴에 하얀 날개를 단 괴물의 모습을 그려야 할까? 어쨌든 소스라치게 놀라운 나를 한 번 그려보자꾸나.
나는 으슥한 골목길 한 구석에서 어둠이 극도로 고조되는 새벽 3시경을 기다렸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누군가가 침입해도 그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까망 새벽이 되자 나는 살금살금 어떤 집의 담을 뛰어 넘었다. 그 집은 어느 대학교수가 사는 집으로 2층 붉은 벽돌집이었다. 담을 넘을 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지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서서히 1층 거실 유리창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가만히 유리문을 열어 보았다. 흔한 일이지만 이 집도 거실 유리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쉽게 유리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거실의 장식장과 서랍장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모두 돈 가치가 없는, 허세와 거드름을 상징하는 물건들뿐이었다. 두꺼운 고급 표지로 장식된 책들, 번쩍이는 감사패, 멋진 사진틀, 뭐 그런 것들만 가득했다.
나는 가방에서 길고 날카로운 칼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안방을 향했다.
"누..... 누구냐?" 방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어설픈 잠에서 깨어난 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조용히 하면 해치지 않겠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해라." 나는 칼을 번득이며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집주인에게 말했다.
"예, 시키는 대로하겠습니다. 사, 사람만 해치지 마십시오." 이불을 더 끌어당기며 나는 집 식구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몸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칼을 공중에 몇 번 휘두르며 나는 두 사람의 손과 발을 끈으로 묶었다. 내가 칼을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반대 쪽 벽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나는 그들을 위협하여 방안 금고를 열게 했다. 금고를 열어 보니, 금고 안에는 대학교수들에게 소중한 지혜와 지성은 들어 있지 않았다. 대학교수 집 금고에는 나 같은 속물들에게나 귀중한 돈과 귀금속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내 가방에 모두 넣었다. 그리고 금고 안에 책을 한 권 넣고 금고 문을 닫았다.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매끄러운 은 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경쾌하게 방바닥을 굴러 다녔다.
"당신들에게는 쓸 데 없어 금고에 쳐 박아 두었지만 내게는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기에 가져간다." 나는 짧게 말을 뱉으며 방문을 열었다.
"신고하면 가만히 안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칼날을 번득이며 위협하고 나서 나는 대문을 열고 어두운 골목길로 질주해 사라졌다.
"여보, 손을 이쪽으로 좀 돌려." 나는 손과 발이 묶여 거동이 어려웠지만 뒤로 묶인 손을 움직여 아내의 손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어 보려고 애를 썼다.
"손을 잘 비틀어 봐. 밧줄이 꼼짝도 안 하잖아"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안 풀려요. 파출소에 신고하여 경찰을 부릅시다." 나는 밧줄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경찰을 부르면 금고에 있던 외화와 현금 그리고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들의 출처를 대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말할 수 있겠어? 대학교수가 부정 축재를 했다고 떠들고 다닐까? 그러면 신문기자들이 좋아하겠네. 이 여편네가 미쳤구먼. 빨리 밧줄이나 풀어." 나는 옆으로 누워 버둥거리며 말했다.
시간이 한 시간 가량 흘러갔지만 나는 밧줄을 풀지 못했다. 손을 비롯하여 온 몸에서 땀이 나 더 이상 힘을 쓸 수도 없었다.
"야, 도저히 안되겠다. 할 수 없다. 파출소에 신고하여 경찰을 부르자." 나는 기진맥진하여 작은 소리로 말하고 마치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입으로 전화번호를 누르고 수화기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도둑이 들었습니다. 빨리 와 주십시오,"
나는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 나오자 말자 머리를 깊이 감추며 가방을 어깨에 매고 무작정 길을 걸었다. 발길이 이어지는 대로 끝이 없는 길이 계속 내 앞에 펼쳐졌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새벽을 여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를 존재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자꾸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깊은 공허함 속에 빠졌다. 나는 없었다. 커다란 도시의 한 복판에 서서 나는 내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에 밝아 오는 태양의 희미한 불빛만 하늘을 가득 채웠고 가방 속에 들어있는 무거운 현금과 보석들만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없었다.
나는 지하철이 운행되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자 지하철역을 찾았다.
"집안을 잘 살펴보시고 잃어버린 물건들의 목록을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십시오. 잃어버린 장물이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입니다." 나는 옆구리에 찬 권총을 추스르며 잠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피해자를 바라보고 짧게 말했다. 그리고 집안을 둘러보며 범인의 행적을 추적했다. 범인이 남긴 발자국을 쫓아 보니 범인은 골목길 옆 담을 넘어 1층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을 뒤진 후 안방으로 곧장 들어갔고 범행을 저지른 후에는 대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면식범일까? 나는 다각도로 범인의 흔적과 범행 단서를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집안을 돌아다녔다. 범인의 족적 외에는 지문도 남아있지 않았고 단서가 될 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요즈음 부촌인 이 동네 일대에 발생한 절도 사건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
"다 적었습니까? 빠짐없이 적으십시오." 나는 피해자에게 언성을 높여 심문하듯 말했다. 부잣집일수록 피해자들이 도난품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아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별로, 없습니다. 집에 귀중품은 없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느라 가슴이 조금 뛰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대학교수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점잖은 어조로 말하고 빈 종이를 형사에게 내밀었다.
"잃어버린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도둑놈이 들어와 금고를 털어 달아났는데 도난품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대학교수나 되시는 분이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다시 적으십시오." 더러운 놈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참으며 나는 피해자에게 빈 종이를 다시 건네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는 무안 당해 얼굴을 붉히며 종이를 받았다. 무엇을 적어야 할까? 나는 종이에 현금 2백만 원과 금반지 5돈이라고 쓰고 그것을 형사에게 주었다. 대충 조사하고 가면 됐지 하급 경찰이 무슨 말이 이렇게 많담.
나는 피해자가 쓴 피해품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한 숨이 나왔다. 사회 정의가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지식인들의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가면을 보기라도 하는 양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피해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야! 너도 도둑놈하고 다를 바가 없구나.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오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지하철역 구내를 뒤흔드는 건조하고 뜨거우며, 먼지가 잔뜩 낀 지저분한 지하철 바람이 싫었다. 무쇠가 서로 부딪혀 생기는 날카로운 쇠 마찰음과 함께 나타나는, 어두운 터널 저편이 고향인 바람이 또다시 지하철역 구내를 휘젓고 지나갔다. 나는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등을 돌려보았지만 번번이 그 고약스러운 바람의 횡포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잔뜩 구부린 채 온몸으로 그 바람을 맞으면서 지하철이 지나가고 다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좋은 방도를 찾지 못했다.
나는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오가며 적당히 낮 시간을 보내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로 올라왔다. 그 때까지 내 어깨에는 시지프의 돌덩어리만큼이나 무거운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땅거미가 거리의 건물들을 모두 삼켜 버리고 가로등만이 외로운 도시의 골목들을 지키고 있는 늦은 시간에 나는 터덜터덜 뒷골목의 허름한 여관을 찾았다. 여관 출입문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한동안 나는 여관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경계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혹시 형사들이라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여관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여러 쌍의 남녀가 눈치를 살피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별달리 의심할 만한 특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관 출입문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여관 주인과 겨우 몇 마디를 주고받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을 벽장 속에 감추고 피곤을 풀어 볼 속셈으로 목욕탕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온 몸을 따뜻한 물줄기로 촉촉이 적시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 동안 나의 거친 피부에 묻혀 있었던 먼지와 때가 전부 씻겨 나가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샤워도 끝나고 무료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나는 할 수 없이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방문을 열고 한 아가씨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건장한 체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옆에 누웠다.
"고향이 어디야?"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아가씨를 향하여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나는 어색했다.
"고향은 왜 물으세요?" 나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떠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얼굴이 예쁘고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라서....." 나는 물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 컵이 쟁반에 부딪혀 소리가 났다.
"고향이 없어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에게 무슨 고향이 있겠어요? 아무 데서나 먹고사는 곳이 고향이지. 담배 하나 피워도 되요?" 나는 담배를 집어 붉은 입술 사이에 물고 불을 지폈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내 고향이 어디지? 라이터 불빛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내게도 고향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농촌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잊혀진 고향, 내게 지금 떠오르는 것은 이런 말들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게는 고향이 있어. 바닷가 작은 어촌이야. 항상 푸른 바다가 보이고 각종 바다 생선들이 아주 잘 잡히는 곳이지. 그 곳은 깊고 맑은 물 속에서 물고기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늘 살아 있다는 신선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나는 언젠가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등을 돌려 벽 쪽으로 돌아앉아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측은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내게도 여동생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향도 잃어버리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황량한 세상에서 홀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너야말로 돈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나는 벽장으로 걸어가 숨겨 둔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만원 권 지폐 한 다발, 돈 백 만원과 진주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나는 그것을 들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 받아라. 이것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주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는 갑자기 생긴 이 이상한 일에 깜짝 놀라 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고 나는 슬며시 그 물건들을 받았다. 이게 웬 횡재지?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짤막한 인사말을 남기고 여관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나는 오늘 운이 좋은 날이라고 깡충깡충 뛰다시피 역 뒤편의 촌으로 돌아왔다. 나는 돈을 나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두었고, 은회색의 진주 목걸이는 당장 지금 입고 있는 검정 스웨터 겉에 멋지게 걸었다. 누가 보면 틀림없이 가짜라고 생각할 것이었기 때문에 진주 목걸이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걱정은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를 찾는 고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작은 골목에서 서성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골목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속이구나 생각하며 뒤쪽으로 뛰어갔지만 때가 늦었다. 그 쪽도 이미 경찰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소지품을 전부 압수 당하고 소지품에 대한 취득경위를 하나한 조사 받았다. 급기야 진주 목걸이의 출처까지 추궁 당해야 했다. 취조하던 형사는 내가 모든 사실을 말하는 조건으로 나를 훈방 조치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나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보호소로 끌려가기는 싫었다. 어떤 여관에서 낯선 남자에게 현금 백 만원과 진주 목걸이를 받았다고 털어놓았고, 그 남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하며 몽타주 작성을 도와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느 경찰서에서 범인의 몽타주와 함께 흰색의 진주 목걸이 장물이 압수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그 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지난 대학교수 집의 도난 사건을 떠올렸다. 드디어 장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군. 이제 장물을 역추적 하여 범인을 잡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지하철은 계속 흔들거렸다.
나는 여관을 몇 개 옮겨 다니며 은신을 계속했다. 이럴 때는 아무도 모르게 잠수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도 보고 싶었지만 집에 전화연락도 할 수 없었다. 장물도 빨리 처분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장물을 처분하면 경찰의 추적이 그만큼 쉬어지기 때문에 사건이 잠잠할 때까지 장물을 처분하지 말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나는 궁리 끝에 좀 더 안전한 은식처로 아동보육원을 생각해 냈다. 나는 아동보육원을 찾았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시 경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동보육원의 주소를 알아내고 그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 다니던 회사에 부도가 나서 실직한 사람입니다. 사회 봉사도 할 겸 머리도 식힐 겸해서 왔습니다. 며칠 묵으면서 무보수로 일하겠습니다. 제가 할 일을 정해 주십시오." 나는 아동보육원의 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신부에게 말했다.
"이 쪽으로 앉으십시오." 나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남자가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온 것에 대해 무슨 영문인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그를 우선 가까운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보고 있던 성경책을 덮고 그의 갑작스런 방문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실직자가 거리를 방황하다 일자리도 구하고 숙식도 해결하기 위해 찾아왔을까? 아니면 범죄자가 몸을 숨기기 위해 찾아왔을까? 나는 잠시 그와 간단한 얘기를 하면서 그의 진짜 방문 목적을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그의 분명한 의도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일손은 항상 부족합니다. 우선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할 일을 찾아봅시다." 나는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의 이름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여기 찾아온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본관 뒤쪽에 있는 별채의 작은 방을 내 거처로 정해 주어서 나는 우선 그 방에다 내 짐을 풀었다. 훔친 물건이 들어 있는 가방은 벽장 구석에 숨기고 그 위에 낡은 이불보를 덮어 감추었다.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이 곳이라면 당분간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에서 그냥 밥만 축낼 수는 없어 무엇이든 할 일을 찾아 일을 해야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청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쓰러진 담장을 고치는 일, 식사 때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 이것저것 나르는 일, 밥 먹을 때 거동이 불편한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일, 먹고 나면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일, 아이들의 산더미 같은 옷가지들을 세탁하는 일,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나면 나는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하고 내가 방안에서 뒹굴며 놀고 있는 아이에게 물으면 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노는 게 제일 좋아요." 나는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얼마 전부터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큰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저씨의 손을 끌어당기며 같이 놀자고 보챘다.
"얘야, 무얼 하고 놀지?" 나는 한 아이의 손에 이끌려 나가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술래잡기 놀이해요." 나는 커다란 아저씨를 올려다보고 아저씨의 손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내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저씨가 좋았다. 나와 함께 놀아 주고 나의 얘기도 잘 들어주는 아저씨는 정말 누구보다 더 고마운 아저씨였다. 마치 성경 속에 있던 천사가 살아 나타난 것만 같았다. 여기에서 그 동안 아무도 나에게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그들에게 나는, 방안의 흔한 가구처럼 그냥 많은 아이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아저씨, 나하고만 놀아요." 나는 커다란 아저씨의 얼굴을 껴안고 말했다.
"얘야, 다른 애들하고 같이 놀아야지." 나는 그 아이를 가슴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얘가 너무 이기적이구나.
"아저씨, 아저씨는 어렸을 때 꿈이 무엇이었어요?" 나는 아저씨의 팔에서 내려오면서 말했다.
"내 어렸을 때의 꿈?" 나는 내 꿈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너만 했을 때 나는 허황된 꿈을 꾸었었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줄 알았단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웃집 사람들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이야.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세상은 내가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나는 그런 꿈을 꾸었지.
하지만 그런 꿈은 얼마 오래 가지 않아서 부서지는 파도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내가 소년원에 처음 들어 갈 때였어.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의 한 귀퉁이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어. 오히려 세상의 걸림돌이라는 것이야.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냐? 그것을 깨달은 날 나는 한없이 울었다. 첫 비행에 성공한 새끼 부엉이가 둥지를 벗어나 낯선 나뭇가지에 매달려 외로움에 밤 새워 울었듯이, 나도 썩은 담요를 둘둘 말아 덮고 감방에서 이를 갈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없다. 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 나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나는 아저씨를 올려다보고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이제 가까운 동네 이웃사람들은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방문하는 낯선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내가 움찔 놀라 건물 뒤로 몸을 숨겨 동태를 먼저 살피는 것을 자주 본 신부가 나의 정체를 눈치챈 것도 같아 점점 불안해졌다. 이제 여기를 떠나야 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났다. 소리 없이 일어나 가만히 벽장을 열고 숨겨 둔 가방을 꺼내 열었다. 한 무더기의 돈 다발과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등 수 많은 보석으로 치장된 십자가 장신구 하나를 보자기에 쌌다. 그 보자기를 깨끗한 방바닥 한가운데 놓고 짧은 글이 담긴 쪽지도 함께 넣었다.
'신부님께
저는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사람입니다. 신부님의 배려로 그 동안 잘 쉬었다가 갑니다. 신부님의 넓은 아량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조금의 현금을 남겨 두었으니 천사 같은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꾸려 가시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도망 다닐 때까지 도망 다니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습니다. 저는 본래부터 내 존재에 대해 긍정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도 내가 이곳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신부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사람 올림’
경찰서로 돌아온 나는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범인의 족적과 창녀의 진술을 토대로 그려진 몽타주 그리고 장물 진주 목걸이를 압수했다고 사건 기록부에 기재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찾지 못했다. 창녀에게 돈을 후하게 치르고 목걸이 선물까지 한 것을 보면 범인은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능범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과자 기록을 뒤졌다. 그러나 비슷한 범행 수법의 전과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바닷가에서 모래알 찾기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내로 돌아와 다시 지하철을 찾았다. 이제는 노숙자로 위장하여 잠수하기로 했다. 지하철 구내에서 하루종일 헤매다가 밤까지 거기서 보냈다. 가끔 밖으로 올라와 햇빛도 쬐고 밥도 얻어먹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철 역 안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살고 있는 노숙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근로 의욕을 많이 상실하여 누가 일을 맡긴다 해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길바닥에 앉아 깡소주나 까면서 그날 그날의 생존에 목을 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노숙자 생활도 오래 하다 보면 마치 직장이라도 얻어 다니는 사람들처럼 하나의 생활 패턴을 갖게 되었다. 노숙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정해졌고 점심은 어디에서 먹고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고 잠은 어디에서 자기로 하는 등 하루 일과가 정해져 일정한 생활 리듬에 따라 살았다.
나는 지하철에서 노숙자로 잠수해 있는 동안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과 가까운 자리에서 잠자리도 같이 하며 얼굴도 익히고 제법 알고 지내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그들과 한 식구처럼 같이 몰려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그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한 노인은 기침을 몹시 많이 했다. 다른 많은 노숙자들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가끔 쿨룩쿨룩 기침을 했지만 특히 이 노인은 지하철 바닥에 누워 잠을 잘 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아주 심하게 기침을 했다. 나는 이 노인이 폐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그 노인 옆에서 누워 자는 것이 기분에 썩 내키지 않았다.
범인과 비슷한 인상 착의의 사람을 보았다는 또 다른 목격자가 나타났다. 나는 급히 경찰서에서 나와 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동보육원을 찾아갔다.
"이렇게 생긴 사람입니까?" 나는 신부님의 평상시 정복인 수단을 입고 있는 신부님께 범인의 몽타주를 보여주었다.
"예, 비슷합니다." 나는 검은 가죽 잠바를 입고 있는 형사를 보며 말했다.
"이름이나 주소를 밝히지는 않았습니까?"
"예, 그런 것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수배자인 줄은 몰랐어요. 여기에서는 성실히 일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냥 김씨라고만 불렀습니다."
"뭐 남긴 물건은 없습니까?"
"예, 편지 한 통과 돈을 두고 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편지를 받아 눈을 아래로 깔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범인 체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 편지를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예, 좋으실 대로하십시오. 그런데 나머지 이 돈은 어떻게 하지요?"
"그냥 쓰셔도 됩니다. 신부님께서 좋은 일에 쓰시는데 별 문제가 있겠습니까?"
나는 편지 한 장만 받아 들고 보육원을 나왔다. 이제 범인의 윤곽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기는 한데 범인의 명확한 인적 사항을 알 수가 없고 사건의 실체가 혼미하여, 범인을 가린 두터운 커튼이 초여름의 짙은 새벽 안개처럼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었다.
"쿨룩쿨룩, 여보시오. 김씨!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어..... 옆구리가 결려 도저히 참을 수가....." 나는 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옆에 누워 자고 있던 김씨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이제 때가 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자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빗줄기 같은 식은땀이 나면서 저승사자의 그림자라도 나타난 것처럼 먹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었다.
"예? 무슨 일이요?" 나는 노인의 다급한 소리에 부시시 눈을 비비며 일어나 노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잔뜩 꼬부린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이, 모두 일어나! 지금 노인이 위급한 가 봐." 나는 주위에 자고 있던 노숙자들을 깨웠다. 그리고 다 함께 노인을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몇 가지 진찰을 하더니 고개를 내 저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폐와 간이 완전히 상했습니다. 이 환자는 이제 가망이 없어요. 돈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결핵전문병원인 서울시립 서대문병원으로 옮겨 마지막 준비나 하는 게 좋겠습니다."
쿨룩쿨룩. 마지막이라니 이제 정말 내가 죽는 것인가?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침대에 누워 나는 허리를 구부렸다. 아직 더 살고 싶은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일까? 60 가까이 살아왔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 왔을까? 나는 기침을 할 때마다 내 영혼을 물어뜯어 뱉어 내듯, 입에서 이물질을 토해 냈다. 정신이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내가 죽으면 조금은 달라질 지하철 역 구내와 내 주변의 세상을 걱정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쓰던 골판지는 어떻게 될 까? 누가 잘 써야 할텐데.
시립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이 죽었다. 죽은 노인을 애도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의 노숙자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하찮은 일에 불과했다. 같이 지내던 나도 남의 일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노인의 죽음이 확인되자 이내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불현듯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죽은 노인과 아이들 모습이 교차하며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 사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는 거리의 노숙자 생활도 싫증이 났다. 지하철역 구내의 건조하고 지저분한 바람은 정말 싫었다. 피곤함, 따분함과 지루함을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이 생활을 청산하자.
나는 경찰에 자수하기로 결정했다. 훔친 물건들 대부분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추어 두고, 나는 경찰이 적당히 속아줄 정도의 약간의 보석만 갖고 경찰에 자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친 다음 세상에 다시 나와 숨겨 둔 보석들을 처분하여 새로운 삶을 살면 되지 않겠느냐?
모두 잠든 새벽에 나는 지하철역 구내를 나오면서 옆에서 새우처럼 누워 자고 있는 낯선 노숙자의 가방 안에 돈을 조금 넣어 주었다. 이것은 천사의 선물이야. 그리고 나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거리로 올라왔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머리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는 시늉을 하고 나는 인근 야산으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자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숨을 크게 몰아 쉬고 나는 적당한 곳을 골라 훔친 물건들을, 여우가 먹이를 땅 속에 감추듯이 조심스럽게 파묻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다.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주위를 살피며 산을 내려왔다.
"또 다른 범행을 자백해!" 나는 피의자를 윽박지르며 범행을 추궁했다.
"더 이상의 절도는 없었습니다. 제발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몇 가지의 범행 사실만 시인하고 사정하다시피 형사의 손을 잡았다.
"장물은 이것밖에 없어? 모두 어디에 숨겼어? 나는 너처럼 남이 애써 벌어 놓은 것을 슬쩍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이게 전부입니다. 더 이상은 없어요."
"알았어!" 나는 피의자를 유치장에 가두고 혼자 생각해 봤다. 놈이 훔친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닐 테고, 피해자로부터 신고 들어온 피해품 목록하고도 서로 맞지 않고 이 장물들을 어떻게 하지? 그러다 내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장물들 중 일부를 내가 조금 처분하자. 놈의 형량을 낮추어 주는 역할도 하는데 뭘. 집에 생활비도 쪼들리고 수사비도 턱없이 모자라잖아.
"내가 변호를 맡으면 형량을 낮출 수도 있어요. 돈만 두둑이 낸다면, 피해품도 적고 판, 검사하고도 내가 잘 알거든."
"저는 돈이 없어요. 변호사 비용을 댈 만한 돈이 없어요."
"그러면 얼른 나가!" 나는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것이 아까워 앞에 있는 절도범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교도소에 와 보니 수많은, 또 다른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틈만 나면 술이나 마시고 행인들을 폭행하며 패거리로 몰려다녔던 조폭 행동대원인 나,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나, 흉기를 들고 강도질한 나, 남의 재산을 가로채기만한 사기꾼인 나, 이웃집 부녀자를 욕보인 나, 부모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형제를 살인한 나, 세상이 더럽다며 닥치는 대로 자동차며 집이며 불을 지르고 다닌 나, 집권당이 못되어 정치적으로 배신당했다며 이빨을 부드득 부드득 갈고 있는 나, 조국의 통일을 위해 혹은 민초들의 아픔을 대변하려고 지식인의 양심만을 지키고 있는 나, 내가 신을 보았노라고 내가 신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을 속인 나, 나, 나, 나.
그래, 그렇게 나를 둘러보니 모든 인간들의 속성이 나에게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속속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빼곡이 배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선과 악, 모든 욕망과 갈등, 저속함과 비열함, 그리고 알량한 고상함까지 모두 내게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개성이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전체 인간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인류라는 커다란 붕어빵의 비늘에 붙어있는 작은 점, 개인이라는 하나의 작은 붕어빵에 불과했다.
어디를 보아도 참다운 나는 없었다. 흔히 길거리에서 보았듯이, 땅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조각 난 거울 속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무 데도 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