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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2일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가 21,5-11)
Jesus said,
“All that you see here?
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a stone upon another stone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말씀의 초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불안한 꿈을 꾼 다음 모든 점성가와 주술사들을 불러서 해몽해 주기 바랐지만 아무도 그것을 풀이하지 못한다. 유다의 젊은 청년 다니엘이 임금의 꿈을 밝혀 준다. 그 꿈은 하느님께서 멸망하지 않을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흉흉해져서 여기저기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더라도 현혹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모든 거짓과 혼란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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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세상인심이 흉흉해지고, 사회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면 사람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고개를 드는 것이 종교적인 세상 종말론입니다. 요즘도 성경 말씀을 빙자해서 종말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데가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가끔 이런 종말 사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종말론은 세상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미래, 곧 인간과 세상의 궁극적인 상태를 말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종말은 닥쳐올 어떤 지구의 재앙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가 사는 현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실재하고 있다는 뜻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와 있는 온전한 구원의 상태를 희망하고 사는 것이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거짓 종교는 인류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지를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순간순간이 바로 각자에게 구원의 때이니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고 깨어 살도록 가르칩니다. 집회서에서 “모든 언행에서 너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여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7,36)라고 말씀하셨지요.
사회의 일부 집단에서 벌어지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마지막 날처럼 주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주님께서 부르시면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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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가짜는 ‘가짜 메시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재림 예수다.” 겁 없이 외치는 자들입니다. 역사 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가짜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메시아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짜가 분명한데도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인가에 현혹되어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종말 주장에 약해지는 것일까요? 가짜 그리스도에 속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분명한 것 하나는, 추종자들도 무엇인가 느끼기에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도 무엇인가 ‘보여 주기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신비스러운 현상’입니다. 일종의 ‘영적 능력’이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늘 ‘개인 구원’이 목적입니다. 조직에 들어온 자만이 ‘살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들이 ‘독선과 분열’의 늪에 빠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독선’으로 몰고 가지 않으십니다. 일치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평화와 화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이천 년 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현실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계십니다.
삶을 두려워하기에 ‘이상한 곳’에 관심을 가집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곳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김순중 수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여러 예언자가 성전 파괴를 예고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절망스러울까?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아들을 무척 사랑하시어 그 속 깊은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것 같다. 아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그 어른을 알아보는 일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 작은 생명이,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어서 당신께 돌아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아직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운 심판이 닥치지 않도록 사랑을 향하여 어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죽음도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당신의 크신 사랑에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우리 인간한테만 주어졌다. 나를 위한 영원한 삶은 전적으로 이 대답에 달려 있다.
최후 심판 때 사람의 아들이 왕으로 와서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아픈 사람, 낯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물으실 것이다. 소외받는 노인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맞아들이고 베풀어 주는 이들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정신이 번뜩인다. ‘주님, 이 행복한 대열에 들게 하소서.’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기
-조명연 신부-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컵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지요. 하지만
그 물이 화장실 변기통 속에 들어 있다면 같은 물이지만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이 예쁜 사기그릇에 담겨 있으면
먹음직스럽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그 밥은 양식이 아니라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곁에 누워 있으면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그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곁에 누워 있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지 않은 이상
존재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의 결정 , 때의주인
-김찬선신부-
때의 결정.
여러 가지 때가 있습니다.
밥 먹을 때,
기도할 때,
잠잘 때,
만날 때,
죽을 때 등.
성서 희랍어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Chronos입니다.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Kairos입니다.
주관적인 시간,
그러니까 나에게 좋건 나쁘건 의미 있는 시간, ‘때’입니다.
어제는 어떤 자매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신부님, 오늘 축하드려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제가 축하를 받느냐고 했더니
한우리 카페를 시작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11월 1일은 평화 봉사소가 축복식을 한 날이고
작년 11월 23일은 한우리 카페가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들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1월 어느 날이었지만
저에게는 오랜 갈망이 이루어진 의미 있고 중요한 때, Kairos였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영원한 반려자를 만난 Kairos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를 누가 결정하고 누가 이 때를 압니까?
작년 11월 1일 평화 봉사소 축복식을 하게 된 것은
저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거의 끝장이 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뜻이면 되겠지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축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화 봉사소를 하게 됨도 하느님의 결정이요,
평화 봉사소를 시작하게 된 때도 하느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정부가 방북을 불허하여
평화 봉사소가 중단되었고 안동 대마 회사도 어렵습니다.
언제 다시 열릴지 영영 그만 두게 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의 결정 사항이 아니고 하느님의 결정 사항입니다.
밥 먹을 때와 잠 잘 때와 일러날 때와 같이 많은 것들은
우리가 그 때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그 때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난 때를 우리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는 때를 우리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때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모든 때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 가을에 나무들이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때에 순종하여
자신의 이파리를 미련두지 않고 떨구는 것을 보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그 어느 때의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그 때에 순종할 뿐이고
그 때를 의미 있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의미 있게 사는 것,
의미 있는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
어느 순간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Kairos를 의미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한우리 책임자요 카페 지기인데도
그 의미 있는 때를 놓쳤는데
어제 저에게 전화를 준 그분은 그것을 기억하셨으니
그분은 정말 Kairos를 잘 사는 분입니다.
대체로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이 결혼기념일을 잘 기억 못한다는데
저도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요?
징후 (SYMPTOM)
-전삼용신부-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쌓여진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비만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냇가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학년 때는 개근상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장마 때면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밤새 제방을 지켜보던 분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한 분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돌아가면서 지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멋모르던 우리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하십니다. 요즘 복음들이 자꾸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지금이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즉 종말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온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거짓 스승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 날 것이고 큰 지진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과 기근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지진과 하늘의 표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바보들이라도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그런 징조들을 잘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큰 죄부터 짓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죄를 짓고 기쁨과 평화도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잘 보고 빨로 돌아서는 사람은 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방관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알기 위해 죄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병에 걸려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충분하듯이 우리도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보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어금니에 자꾸 음식물이 끼어서 오른쪽으로는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들어가 예전에 금으로 때웠던 곳을 다시 하려고 떼어냈는데 그 안이 썩고 있었습니다. 치아가 썩고 있어서 아팠던 것인데 음식물이 끼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치아를 다 썩힐 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몸에 신경이 있어 통증을 느끼는 것도 느낄 때는 아프지만 더 몸이 나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삶에 있어서도 작은 아픔들이라도 그 원인을 찾아 잘 고쳐나가야 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야합니다. 혹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런 파수꾼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매일매일 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는 묵상이 없는 영혼은 ‘갑자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하늘에서까지 굉장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은 미리 준비하라고 예고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작은 표징들이 있으면 방치해 두지 말고 그때그때 고치려 하는 민감한 의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조명연신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구리는 개굴 개굴 우는 자기 자신의 둔탁한 목소리를 싫어해서 몹시 속상해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이 개구리에게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소원을 말했지요. 그랬더니 천사가 개구리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종달새의 목소리로 바꿔 주었습니다.
개구리는 너무나도 신이 났지요. 그리고 이 개구리는 새로 얻은 목소리를 자랑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개구리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을의 모든 개구리를 불렀습니다. 이윽고 개구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아름다운 새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가 끝나자 개구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둔탁한 목소리로 개골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개구리 목소리가 저렇게 흉칙할 수도 있담!"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개구리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새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참, 듣기 좋은 소리라고 말을 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 말을 하지 못하고, 새 소리만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이고, 저 사람 참 안됐어."
그밖에도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다운 경우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컵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지요. 하지만 그 물이 화장실 변기통 속에 들어 있다면 같은 물이지만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이 예쁜 사기 그릇에 담겨 있으면 먹음직스럽도록 귀하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그 밥은 양식이 아니라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곁에 누워 있으면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그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곁에 누워서 제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리에 충실히 계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서 입이 쩍 하고 벌어졌을 것입니다. 마치 시골 사람이 서울에 와서 사람이 많고, 높은 건물을 보고, 많은 차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성전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전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이곳에서만 최선을 다하는 행동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왔다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이 현재에 대해서 충실한 삶을 살 때, 즉 지금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열심히 지금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리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얼마나 그 자리에 충실했는가를 반성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양승국신부-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 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 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처방으로 "성전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너를 허물고 나를 세우리라
-상지종신부-
살다보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에 대해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서 내심 뿌듯하게 생각하며 자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외적으로 드러난 것에만 눈길을 보낼 때 이런 어리석은 짓을 너무나 당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자신,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교회안에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 이 모두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 하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면, 주님의 뜻으로 정향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내 허물어지고 말 모래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와 자신의 일을 주님의 뜻으로 채우기 보다는, 인간적인 욕심과 명예, 알량한 자존심과 하찮은 지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미명하에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무척 당당합니다. 이들의 당당함 앞에 오히려 측은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당당하게 아니 뻔뻔스럽게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이내 인간적 한계안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조금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사실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못인지 안다면 그것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 안에서 쌓여 온 여러가지 것들을 떨어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관점들도 오랫동안 자신 안에 묵혀 있으면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주님의 뜻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인간적인 뜻도 이기심에 눈이 먼 자신에 의해,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잘못된 전통에 의해 주님의 뜻으로 둔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 바로 주님과 맞대고 앉아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것, 교회 공동체 전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신앙인은 아무도 없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실천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교회 공동체안에서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라고 해서 여기서 특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교회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교회안에 있는 여러 단체간의 미묘한 갈등이나 입장 차이, 이로 인한 개인 신상에 관련된 문제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경우도 많고, 심지어 주체하기 어려운 격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솔직히 사제로서의 한계를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한탄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멋대로 교회 활동을 하는 이들이 교회 공동체 전체의 입장이나 다른 신앙인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함부로 주장하는 경우에 참으로 암담한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 잡아주되, 이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무너질 때 오는 상처를 최소화시킴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사제로서의 책임이기에 사제 생활이 참으로 어려운가 봅니다.
요즈음 이런 저런 일련의 일 때문에 고민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얻습니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의 전통만으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만으로 세워놓은 아성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다른 단체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모두 함께 일구어가는 주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미숙한 이들이 참 신앙을 되찾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아픔을 겪어야만 하겠지만, 제 안에서 먼저 이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 안에서 이 일을 꼭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자그만한 도구로서 사목 현장으로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달려가렵니다.
<천국 체험>
-양승국신부-
오늘 "모닝 미팅" 때에는 6개월 만기를 채우고 귀가하는 한 친구의 참으로 가슴 찡한 작별인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괜히 여기저기 간섭하다가 형들에게 혼도 많이 났었고, 목소리가 유난히 커서 오버할 때도 많았던 친구였지만, 모닝미팅 "신나요" 코너-장기자랑-단골손님으로 팍팍한 모임의 청량제가 되었던 친구, 참으로 심성이 곱고 정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아침 모임이 끝나갈 무렵, 진행하시는 선생님이 그 친구를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앞에서 "한 말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다들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전체를 한번 둘러본 그 친구는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자기보다 더 어리버리하고 비실거린다고 생각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한마디씩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야, 너! **! 너는 수사님들한테 개기지 말고 열심히 살아. 그리고 **! 너는 말이지 빨리 담배끊어. 일생에 도움이 않되. 또 **! 너 제발 가출 좀 하지마. 여기서 나가봐야 특별한 게 있는 줄 아냐?" 등등.
그리고 마침내 표정을 가다듬더니,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그간 잘 지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주 놀러오겠습니다"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떠나가는 아이의 표정은 연신 싱글벙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천국체험을 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가 "종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작별의 날이 우리 착한 친구가 체험했던 기쁨의 순간, 행복의 순간, 감사의 순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마지막 날이 오랜 세월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 십자가가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에 너무 기뻐 뛰노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공포의 순간,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 은총의 순간, 희망의 순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할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봉헌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 주어진 처지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각자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일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방인 왕을 통해서도 계시된 하느님 나라
-경규봉 신부 -
어느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는 바빌론의 재사나 술객, 점성술사 등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알아맞히고 해석하라고 명했으나 아무도 꿈을 알아맞히지 못했다. 이에 다니엘이 나서서 그 꿈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왕에게 앞일에 일어날 일을 계시해주신 것이라며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준다.
하느님께서 왕에게 힘과 권세를 주시어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금으로 된 머리는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킨다(바빌론 제국 : 기원전 605). 가슴과 두 팔이 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왕 다음에는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페르시아 제국 : 기원전 539-331)가 다스린다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는 놋쇠로 된 나라(그리스 제국 : 기원전 331- 기원 476)가 다스리고, 네 번째 나라(로마 제국 : 기원전 63 - 기원 476)는 무쇠처럼 단단한 나라가 다스릴 터인데 그 나라는 다른 많은 나라들을 부술 것이다. 그 후 나라는 분열되어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부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당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뛰어난 전략가이며 정복자였다. 그의 군대는 막강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꿈은 그의 나라도, 그의 뒤를 이은 다른 나라도 결국은 무너질 것임을 알려준다.
아무리 크고 화려하며 막강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스러지고 마는 것이며, 인간의 나라는 멸망할 것임을 꿈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영원한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다른 모든 인간의 나라를 부수고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통해서도 인간은 스러지며 오직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힘과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 백성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다.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당신 나라를 주실 것임을 이방인의 왕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으므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지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다니엘 서는 전하고 있다.
현세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많은 이들은 낙심하고 절망한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부인하며 원망하기까지 한다. 이는 그가 현세에 매여 있고, 현세만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현세가 아무리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현세란 지나가는 뜬구름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현세의 고통이나 즐거움도 뜬구름처럼 지나갈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느님 나라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나라를 희망하며 믿고 살아간다.
오늘 이 세상의 덧없음을 생각하자.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되 세상에 매이지 말자.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2-3)는 말씀을 생각하며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바라는 신앙인이 되자...........◆
그때에 이르면
- 원영배-
오늘 복음을 읽으며 4년 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미국 CLC(Christian Life Community)의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회 프로그램 중 사회정의 사도직 체험의 일환으로 현지의 빈민구제와 난민보호사업 견학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조금 벗어난 거리에 들어서자 이곳이 미국 땅인가 의심이 들었다. 야자수만 무성한 먼지투성이 길에 갈색 피부의 하이티 출신 난민들 모습을 보니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카리브해 섬나라의 살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싶었다.
그런 거리 한가운데 건축이 장엄하고 내부 장식이 화려한 코퍼스 크리스티 성당이 난민들의 보호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그곳 신자들의 99퍼센트가 불법체류자라고 했다. 50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의 비벌리힐스처럼 미국에서 손꼽는 부촌이었으나 쿠바와 하이티 등에서 난민이 밀려오고 슬럼화되면서 부자들이 떠난 자리를 가난한 이들이 대신 차지했다. 아름다운 성당은 이제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수용소, 구호기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처음 건립할 때는 부유층 신자들을 위한 성당이었지만 반백 년 세월이 바꿔놓은 것이다.
사람이 처음에 꿈꾸던 목적과 계획대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면 과연 하느님이 계셔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 생각은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히 멀 듯 그 단절된 거리를 한달음에 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비록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그분이 예시하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성급한 호기심에 애탈 필요도 없다. 다만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삶을 기도처럼 수행할 뿐이다. 그러면 그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손길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일어날 일들이 다 일어난 후에 종말은 올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신뢰하며 순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단련하는 것뿐이다.
무당 신앙
장재봉신부-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경지를
하느님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삶의 가장 최고의 기쁨은 하느님이심을 말하고
최대의 축복은
복덩이 자체이신
하느님을 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속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속이는 자는 늘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이들은
땅의 것을 해결해 준다고 선언하여
기복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홀립니다.
혹은 땅의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맹신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속지 말아야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속을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서조차 기복신앙이 허다합니다.
기복신앙이란
꼭이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기복’입니다.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밀어 두고
하느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꾸만 세상 것에 안달하고 조바심을 친다면 ‘기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많이 갖고 누리는 것을 행복인양
인식하는 까닭에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기승을 부립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잘 먹고 잘 입는 일이 축복이라 생각하고
큰 소리 치면서 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을
복이라 여긴다면
한 마디로, 무당신앙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의 에센스는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기뻐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세상이 속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쁜 사람에게는
‘그날’마저 기쁨의 때입니다.
그분을 모시기 위해
그분을 뵙기 위해
변화되고 성숙되는 최고의 오늘이기를 원합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뒤뜰에 있는 큰 바위를 보았습니다. 반은 땅 속에 묻혀있고 반은 나와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보면서 ‘쓸모없는 돌이 왜 여기에 있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지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돌 속에 다윗이 들어있다. 다윗이여, 나오라.”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수 만 번의 정을 쪼아가면서 거대한 돌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조각상인 다비드 상으로 변신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쓸모없는 바위만을 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바위 안에 있는 다윗을 보았고 그 다윗을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쉽게 단정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중요한 것을 찾지 못하고, 헛된 것만을 쫓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바라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감탄할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어떤 표징이 나타 나냐고 묻지요. 예수님은 답변하세요.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종말 언제 올지, 그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추측이나 계산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하느님께만 맡겨진 것이기에 우리가 굳이 그 종말의 때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지요.
어느덧 11월이라는 시간도 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력을 바라보면서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의 빠름만을 한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을 생각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빠다킹신부
세상의 종말
-서현승 신부-
약 15년 전쯤에 한바탕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묵시적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며 준비되고 선택된 이들만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하늘로 들어올려져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죠.
세기가 전환되는 때였던 지난 1999년에도 예언가들의 말을 빌려 한바탕
사이비 종말론이 극성을 부리더니 요즘에 또 다시 인류의 대재앙설이 회자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인류의 고대문명을 이루었던 마야인들에 의해서 예언된
해인 2012년을 전후로 여러 생태 환경적 요인들로 인한 지구의 파국을 거론하고 있는 형국이죠. 지난 종말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2012년 대재앙설은 종교적
종말론의 관점이 아닌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문득 오늘 복음에서마저 세상의 물리적 종말을 예언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은
딱 오해받기 쉽겠단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종말을 내심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필요한 말씀들로만 ‘취사선택’해서 인용하기 좋은 말씀들이죠.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종말은 언제고 올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그러한 ‘끝’이
있기에 언젠가는 끝날 모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고 영원한 것을
그리워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고 여겨집니다. 누군가가 말했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그 마음은 영원에 대한 소망과
그 실현이 이미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깨우침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
-정애경 수녀-
연중 제34주간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이다. 이제 며칠 후면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전례는 세상의 종말과 그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고, 종말의 끔찍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며 당신을 사칭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종말은 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예수께 언제 그러한 때가 오겠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신다. 우리의 현실이 마치 종말로 치닫는 징조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징조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도대체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느님께서는 종말로 치닫는 인간의 잘못에 대해 경고는 하시지만 그것으로 인한 세상의 종말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속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나의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겪는 나의 참담한 상황, 곧 직장을 잃고 병으로 고통 받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이 해체되고, 범죄와 무질서로 사회가 무너지고, 테러와 전쟁으로 무고한 이들이 생명을 잃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심각한 자연재해 현상`…. 이러한 표징들 안에서도 결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은 심판자이시지만 그 이전에 우리를 살리고자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탈출 22,26)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여러 표징이 나타날 때 그것을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심판의 때로 알아듣기보다는 다시 주어지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곧 그러한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2코린 6,2 참조)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한 묵상
-한영일 신부 -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저와 함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초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반듯이 종말이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의 종말 즉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가 한 일에 후회없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종말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옛날에 땅 갖기를 좋아하는 욕심쟁이가 있었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땅을 꼭 사곤 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는 그를 불렀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예, 땅을 많이 갖는 게 소원입니다."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 여기 이 말을 타고 하루동안 마음껏 달려라. 네가 탄 말이 밟고 지나간 땅은 모두 주겠다."
이 욕심쟁이는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말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되도록 쉬지 않고 말을 달린 욕심쟁이가 돌아왔습니다. 큰 땅 부자가 된 그를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던 욕심쟁이는 긴장이 풀려 말에서 떨어져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땅은 이 나라의 절반이나 될 뻔했지만 지금 그의 땅은 한 평의 무덤 밖에 없도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남에게 인정받고 뻐기고 싶은 욕심, 마음껏 놀고 싶은 욕심, 좋은 집, 좋은 차, 갖고싶은 욕심 등등 하루를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욕심이라는 두 글자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욕심을 잘 조절하여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이요 덕인이 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쯤에는 무서운 일들과 기근과 전염병, 지진 등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무슨 징조가 없을까요? 애청자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죽어 본일 없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형님이 네 분이나 계셨는데 세 분은 이미 작고하시고 한 분은 메리놀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느낌에 형님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아마도 자기 삶의 종말을 예견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늘 깨어 준비하는 생활을 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이야기로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원주민이 자그마한 조롱박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밤과 땅콩 같은 것을 가득히 넣어 가지고 해가 질 무렵에 그걸 커다란 나무에 튼튼히 매달아 놓았습니다. 밤이 되자 뭔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원숭이가 나무에 올라 이 조롱박을 발견하고 조롱박 안에 먹을 것이 들어 있는 것을 안 원숭이는 얼른 그 안에 손을 넣었습니다. 조롱박에는 간신히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이 구멍을 통해 원숭이는 손을 조롱박 속에 넣어 땅콩과 밤을 집었습니다. 그렇지만 구멍이 작아서 땅콩과 밤을 집은 손은 빠지지가 않았습니다. 손을 빼려 안간힘을 쓰지만 손이 빠질 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아침은 밝아 오지만 땅콩을 잡은 원숭이의 주먹은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다가와 미련한 원숭이를 사로 잡았습니다. 주먹에 든 먹을 것만 놓으면 손이 빠질텐데 - 그리고 목숨도 건질 수 있었을텐데 -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또 뵙겠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오 마리아 수녀-
지난 여름 미국에서 카트리나라는 무서운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난을 당했다면 제3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더 큰 재난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도 지난 추석에 충청도에 뜻하지 않은 폭우로 농경지가 모두 물속에 잠겼을 때 한 농부가 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뭐, 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요.” 천재지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어떤 준비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이런 체험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는가고 묻는 장면을 본다. 예수께서는 그때를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끝날이 곧 온다고만 하셨다. 아마도 이것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란 말씀이신 것 같다. 나 역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그런 징조를 보기보다는 어떤 외부적 큰 사건을 통해 주님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좀더 내 맘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마음을 닦고 그분의 움직임에 반응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두 사람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에 까맣게 검댕이 묻어 있었고 또 한 사람은 깨끗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굴뚝 청소를 끝내고 얼굴을 닦으러 간 사람은 검댕이 묻은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 얼굴에서 검댕을 보는 순간 자기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진정 자기가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그후에 일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 전상규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기원 후 70년경에 성전 파괴라는 재앙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인 비극이었을 뿐, 세상의 종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자칭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속지 말라고 경고 하셨고,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그것의 허무한 끝을 보셨습니다.
아름답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 성전이 파멸되어 없어지듯이,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것도 변하고, 늙어가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도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끝 날이 언제 올지는 예수님만이 아시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인은 막연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지만,
그 종말을 날마다 준비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끝이 있기 때문에,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소중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영원히 단 한번밖에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어떤 믿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았는지
세상 끝날 주님께서 물어보실 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몇몇 사람을 향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에 그들이, 이러한 일이 언제, 그리고 어떠한 표징으로 나타나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이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반드시 먼저 벌어지고 말 '그러한 일'들이 현재의 세계 역사 속에서 누누이 일어나고 있지만 '바로 끝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속지 말고 뒤를 따라가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헤쳐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어두운 이 세상이지만, 주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며, 속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유지가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암혹의 시기마다 성인ㆍ성녀들이 탄생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풍요로운 마지막 날
-김현영 신부 -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여러 가지 징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여러 종파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던 사건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납하고 마지막 날을 기다렸지만 지도자들이 예고하였던 그 어떤 사건도 표징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허탈하게 공황 상태에 이른 추종자들에게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일삼다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간 여러 사건들을 접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가 21:8)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표방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것과 그러한 잘못된 지도자들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의 거짓된 언행만을 따르고 성경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추종자들 모두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굳이 ‘참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 즉, 사랑의 복음 말씀에 기초하여 세상의 삶을 올바로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삶이 끝나는 날 즉,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세상에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서로 서로를 사랑하여 미움과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 여겨질 때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지상의 삶이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먼저 나부터 출발하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이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이나 더 갖기를 갈망했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노라면, 나의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하루가 더 주어진다면, 사과나무를 심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 즉, 나를 사랑해준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지 못했던 그 말 ‘사랑합니다’라고 진정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갑자기 들이닥친 생애 마지막 사건에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기쁨을 살 수 있다면 인생 전체를 기쁨의 바다에서 유람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기쁨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마디가 세상에서 미움도 질투도 갈등도 전쟁도 없앨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내, 남편, 부모, 자식, 형제들, 동료들, 이웃들에게 여러분이 먼저 이 말들을 고백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신뢰심과 인내심 갖기
-백광현 신부 -
언젠가 불후의 명작 ‘벤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벤허가 잡혀 배를 젓는 노예가
되어 해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해전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치열했습니다. 게다가 벤허가 탄 배도 말이 아니었고 얼핏 보기에 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을 때 그 배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그들이 패배한 줄 알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 때 벤허가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노로 지휘관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킵니다.
한참 뒤에 지휘관이 깨어났을 때 그는 승전보를 듣게 됩니다.
그가 기절한 사이에 전세는 역전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가끔 우리에게 불리한 현실에 직면할 때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패배와 실패를 쉽게 속단해 버리고 포기하는 경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온전히 맡기고 살아갈 때
패배나 실패처럼 보였던 상황이 바뀌어 더 큰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신뢰하고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를 허무는 것들
-강영구 신부 -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그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적인지도 모르고 함께 삽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독소가 온 몸에 퍼져서 죽음에 임박해서야 알게 됩니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적이 아닙니다.
설사 적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겉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지만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성전이 안타까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눈물 흘리면서 한탄합니다.(루가 19,41)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입니다.
AD66년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닙니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이 발로 찼을 뿐입니다.
독선과 오만으로 하늘을 외면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박상대신부_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가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가 21 5-11)
-유 광수신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려 주는 말씀이다. 이 세상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올 것이고 인간도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세상 끝 날은 그리고 나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즉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안개 속에 쌓였던 신비스런 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쁨일 수도 있고 완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치열한 경선 끝에 마침내 단일화를 이루워져서 그 동안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일들이 하나로 정리되고 일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듯이 나의 죽음은 그리고 세상 종말은 굳이 불행한 일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침내 우리가 바라던 때가 되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일화가 두 사람 중에 하나가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었듯이 나의 죽음 후에 올 세계가 그리고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누누히 말씀하셨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가서 일어날 일들은 지금 현재 나의 삶과 무관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현재의 삶의 결산이 종합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열심히 살았으면 상을 받을 것이고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반드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우리는 매일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하루 하루 지나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완성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물을 흘러보내지 않고 고여있게 하면 반드시 썩듯이 매순간 영원을 향해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을 흘러가는 리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이 현재의 것들에 집착되어 있다면 새로워지지 않고 마침내 썩을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종말과 현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신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삶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보여주시고 실현시키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으셨다. 즉 이 세상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너희는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 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겁내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종말에 가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심판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지 않으면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19-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이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셨듯이 세상 끝 날에 그리고 나의 죽음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온갖 사치와 화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며 사는 삶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으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복음에서 이야기한 부자들 즉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다 바친 예수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예물로 다 바친 가난한 과부이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이 세상도 인간의 운명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또한 이 세상의 惡도 善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심판할 것이다. 즉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낡은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듯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파괴되듯이 그렇게 피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전은 물질적인 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루가 20,17)라고 말씀하셨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성전만이 남아 있을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제물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퉁이 돌 즉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고 또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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