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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교회(성령강림-500년)
교회는 성령강림을 출발점으로 시작하였다 (약 30년경). 사도들의 열심한 복음 전파와 더불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점차로 늘어났고, 이렇게 믿는 이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한마음이 되어 그리스도의 성찬을 함께 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소공동체로 시작한 하느님의 백성은 점점 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발전 속에서 점차 안과 밖으로 시련을 맞이하였는데, 내적으로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무수한 이단(異端)이 나타난 것이며, 외적으로는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가 그것이었다. 유다교의 박해는, 70년경 유다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비교적 그 기간이나 강도가 짧았으나 약 2세기에 걸친 로마 제국의 박해는 길고도 참으로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 시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튼튼한 기반 위에 서게 되었으며, 정통 신앙과 올바른 삶을 정립하였고, 내적으로는 굳건한 믿음과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결국 로마 제국의 황제(갈레리오, 311년)는 박해가 효과없고 무의미함을 인정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313년)때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교(國敎)로 시작하여 마침내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였고, 교회 내적으로는 수도원 설립, 공의회 개최 등으로 전례, 영성, 신학 등 전반적인 신앙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후반기에 교회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을 향한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었다. 즉 게르만 민족은 결국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는데, 이 때 국교인 그리스도교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사명의 본질인 복음 선포에 충실하여 위기를 잘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개종시켜 그들이 세운 여러 국가들의 고유한 민족적 특성과 함께 하나의 같은 신앙을 갖게 하였다.
2. 중세 교회(500-1500년)
1) 중세 전기의 교회(500-1050)
시련을 발전으로 극복한 교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 이유는 게르만 민족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들의 이교적인 사상이나 관습은 그후로도 2백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적인 회개가 없거나 성실하지 못한 신앙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종전의 생활 규범과 별다름 없는 삶을 살게 하였고, 그 결과 영적으로는 신앙 없는 신자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이 시기에 그들을 정화(淨化)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더불어 영국, 아일랜드를 향한 복음 선포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노력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도 회교도의 침입, 또 다른 이민족의 침입, 게르만 민족간의 패권 다툼 등으로 교회는 안정된 바탕 위에 복음 선포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700년경까지).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은 교회는 게르만 민족 중 가장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이며 구(舊) 로마 제국을 평정한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그 기반 위에 교세의 확장과 전례, 건축, 예술 등 신앙 전반에 걸친 발전을 보게 되며, 더불어 교황령 등 물질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국가의 간섭을 받아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대표적으로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를 초래하였고, 국가와 밀착된 관계로 프랑크 왕국이 붕괴되었을 때, 교회는 그 권위와 권한을 되어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880-1046년).
이러한 암흑기 동안에 교회는 영주들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프랑크 왕국의 재건을 이룩한 신성 로마 제국(960년경)에 의해 암흑의 절정기에서 해방되는가 싶었으나, 황제의 교회 내정 간섭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 자율성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황제의 정치적 간섭과 그러한 간섭으로 인한 동서 교회 서로에 대한 몰이해 등이 결합되어 성화상 공경 문제를 시발로 동서 교회의 결별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1054년).
2) 중세 중기의 교회(1050-1300년)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이었다.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은 교회 내적으로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생활의 정립과 심화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과 모범된 삶은 교회 전반적인 개혁을 시도한 그레고리오 7세에게도 간접적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시도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하였고 세속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교회 쇄신 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 강화에까지 신앙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개혁에서 나타난 쇄신의 정신은 특히 평신도에게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 십자군 운동은 이슬람교도로부터 예루살렘 성지 탈환과 동방 교회 구출이라는 거룩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목적과 그러한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고, 더 나아가 갈라졌던 동방 교회와 일치하게 하였으나, 이슬람교도의 거듭되는 반격과 십자군 운동 정신의 변질 등으로 동방 교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십자군 운동의 결과는 교회 내에 많은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동방 교회의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으로 인해 신학, 학문, 예술 등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또 쇄신의 정신은 원시 교회의 사도적 청빈의 삶에로의 회귀를 싹트게 하였으니, 그것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청빈한 삶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삶의 핵심은 바로 '가난하게 사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삶의 염원에서 청빈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성 프란치스꼬회와 성 도미니꼬회 같은 '탁발 수도회'를 탄생시켰다. 한편으로는 지나친 청빈 운동의 결과로 이단이 생겨나기도 하였지만 올바른 쇄신 정신을 구현했던 탁발 수도회는 이단자의 개종과 선교 활동 외에도 대학 설립을 통해 신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 발전에 기여하였다.
3) 중세 후기의 교회(1300-1500)
이 시기에는 프랑스의 왕이 교회의 강력한 세속권에 반발하여 교황을 공격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교황과 더불어 교회의 자주권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교황직에 대한 프랑스인 추기경의 수가 점점 늘었고, 그 결과 많은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로마 교황청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교황직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들이 건전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여타의 국가는 일개의 프랑스 주교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더구나 프랑스 국가의 압력을 받으며 행한 세금 징수와 같은 일련의 교황청 업무는 많은 문제와 반발을 야기시켰다.
사태는 가타리나 성녀와 브리짓다 성녀의 예언적 권고로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옴으로써 일단락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는 교황직과 함께 교회에 대한 신뢰를 동요시켰고, 더 나아가 프랑스 교회와 이탈리아 교회와의 갈등으로 교황청 재분열되어 40년 동안이나 대립 교황 선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다. 다행히 전체 교회의 각성으로 이 혼란기를 극복했지만, 그 상처는 큰 것이었다.
이 시기의 평신도의 신심 생활은 매우 활발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의 신심 생활은 불안한 현세로 말미암아 현세적이고, 기복(祈福)적으로 흐른 것도 사실이었다.
3. 근세 교회(1500-1900)
1) 루터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新敎)의 출현
중세 후기 교회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국가는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가득차 있었고, 따라서 많은 비난과 함께 쇄신을 요구하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쇄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집단 이탈의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대사(大赦)'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고(1517), 이를 시발로 교회에 대한 불만과 비난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적 배경이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교회의 대사 남용에 전적으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대사 남용도 그 원인 중에 속하지만, 그러나 그 원인은 대사 교리 자체에 대한 잘못에 있지 않고 그것을 시행한 이의 남용에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이른바 '탑 체험')을 바탕으로 그의 신학을 정립하여 '성서만으로, 신앙만으로, 은총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천명하였는데, 이는 구원의 보편성사로서의 교회, 은총의 중재자로서의 성사, 인간적 노력의 행업인 덕행이 구원을 위해 전혀 필요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는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정신에 대립되었으며, 결국 교회의 대내적 정화(淨化)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새로운 신학관에 의해 단행된 '종교개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교회로부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루터와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新敎)가 설립되었는데, 독일은 루터에 의해, 스위스는 츠빙글리와 칼뱅에 의해 설립되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국교로서 '성공회(聖公會)'가 설립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대해 진정으로 유감인 점은, 종교개혁이 시민들에게 교회의 봉건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한 개선책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며, 사실 일반 시민들은 종교개혁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배경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 분열은 가톨릭 교회의 책임이라 하겠으며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2) 가톨릭 교회의 쇄신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종교개혁에 앞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이미 15세기초부터 교회 쇄신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지도층에는 이를 실행할 만한 내적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결국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큰 혼란을 맞이한 교회는 뒤늦게 쇄신을 위한 어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쇄신을 향한 교회의 이러한 결단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최로 연결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진실되이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이제까지 믿어왔던 가톨릭 교리를 정리, 정립하는 한편 교회 규율을 쇄신하였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천명한 교회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배우는 교리와 큰 차이가 없다. 시간과 상황의 아쉬움 속에 교회는 계속적인 쇄신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이 공의회를 폐막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로 말미암아 교회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쇄신된 삶을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삶은 '신대륙 발견' 이후 선교로 나타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서양에 걸쳐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서양에 걸친 이 시기의 선교는 국가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여러 나라들의 욕심으로 종교적, 정치적, 사상적인 압력을 받았으며 특히 동양의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양에 대한 선교는 많은 문제점과 불행을 초래하였다.
3) 계몽주의 시기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다시 강력한 교회의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쇄신하고 감독하고 순찰하면서 유래없이 국가와 교구의 내부 사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 중심의 중앙집권주의는 교회의 쇄신 작업이 지속되는 한 상당히 필요하고 유익하였으며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의 회복이 이루어지자마자 그것은 점점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제후들은 교황의 보호를 도움이 아니라 간섭으로 느꼈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들과 지역교회는 반발하기 시작했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갈리카니즘', '국가 절대주의', '얀센주의', '에피스코팔리즘' 등의 이단이 일어나 교회를 혼란케 하고 나아가 교황직을 실추시켰다. 또 이 시기에 인간 이성(理性)의 절대성을 부르짖는 '계몽주의'가 출현하여 결국 '프랑스 혁명'(1789)으로 이어졌고, 혁명의 여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내 교회들의 권위와 권리를 크게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세속화시켰다.
교회는 이러한 정신적인 사조와 혁명의 피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교회는 이 공의회를 통하여 이성과 신앙, 그리고 교황의 무류지권(無謬之權)에 대한 가르침을 공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보불 전쟁(1870)의 발발로 교회내 정립과 쇄신을 목표로 개최한 공의회는 아쉽게도 한계를 느끼며 끝낼 수 밖에 없었고, 교회는 이 과제를 다음 공의회로 연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교회는 이러한 반성과 쇄신과 더불어 민중, 특히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교황 '레오 13세'는 이러한 관심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노동헌장'을 반포함으로써 계속적인 그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인류와의 동고동락의 의지를 다져갔다.
4. 현대교회(1900년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먼저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법을 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계획은 3년 동안의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며, 1983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선포되어 1984년에 발효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교회는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 등 총 16개의 문헌을 반포하는데, 이는 교리에 대한 문헌이 아니라 사목을 지향한, 즉 삶에 관한 문헌이다. 이 문헌에서 교회는 우리의 과제들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지시하였는데, 집약하자면 화해와 쇄신의 삶으로써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