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사상은 일본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서(四書)·오경(五經) 중의 『논어(論語)』는 일본인의 정신 생활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사회 생활의 각 분야에도 깊게 침투해 있다. 『논어』가 일본에 상륙한 것은 약 1,700년 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공자의 사상과 유교의 전승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쇼토쿠 태자(聖德太子;574∼622)이다.
스이코(推古) 천황 시대인 604년에 쇼토쿠 태자는 유명한 「17조헌법」을 제정했는데, 그 사상적 근거가 『논어』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제2조의 ''삼보(三寶:佛·法·僧) 독경(篤敬)''은 불교 사상에 의거하고 있지만, 군민(君民)의 명분이나 정치의 요체 혹은 안민책(安民策)에 관한 기술은 공자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 조문 중의 어구도 사서·오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쇼토쿠 태자는 「17조헌법」을 근본으로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축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쇼토쿠 태자는 당시 수(隋)나라에 많은 유학생을 파견했다. 다시 말하면 견수사(遣隋使)이다.
그 최초의 유학생이 유명한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였는데, 그들의 사명은 중국에서 직접 공자의 사상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쇼토쿠 태자는 유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견수사에 이어 견당사(遣唐使)가 중국에 파견되어 많은 유학생이 유교를 공부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견당사는 200년간 19회에 달했으며, 때로는 한 번의 견당사에 500명 남짓의 유학생이 동행했다. 이들 유학생은 당나라의 문화를 들여오는 데 힘썼으며, 공자의 사상을 일본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상륙한 공자의 사상은 그 후에 급속히 뿌리를 내렸다. 헤이안(平安) 시대가 되면 유교가 정치나 문화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당시의 사립 학교는 주로 귀족 자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자 시대의 학교가 그랬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의 스님인 구카이(空海)가 설립한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은 서민을 위한 학사였으며, 공자가 생각한 학교 제도를 일본에 소개했다. 이것이 공자의 사상을 첫 번째로 민간에 전한 것이다. 또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확립한 이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는 무사 계급이 지배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사이 막부는 무예 숭상 정신과 무사도를 높이 선양하였으며, 무사에게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죽음을 돌아보지 말고, 무예를 숭상하여 용감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염치를 알고, 규율을 엄수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 무사도의 형성 과정에서 공자의 사상이 그 이론적 지주가 된다. 예를 들어 공자 사상에 있는 ''충(忠)·용(勇)·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 등이 이론적으로 응용된 것이다. 또 유교 교육도 열심히 진행되어 일본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가 창건한 ''아시카가(足利) 학교'' (토치키縣 아시카가市)이다. 아시카가 학교는 유교를 교육 중심에 놓았다.
학교의 규정에는 ''삼주(三注)·사서·오경·열전(列傳)·노장(老莊)·사기(史記)·문선(文選)''이 교과서로 되어 있었으며, 그 외의 서적은 강의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을 보아도 이 학교의 교과 방침이 유교 중심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도(江戶) 시대가 되면 유교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사상적으로 유교는 막부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장군에서 다이묘(大名), 무사, 농, 공, 상 등 평민 백성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신분 제도를 시행했다. 하층민에게는 윗사람에 대한 주종 관계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고, 동시에 자신의 주인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봉건 제도의 통일과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막부와 각 번(藩)은 무력에 대한 대비를 강화함과 동시에 사상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문치(文治)에 힘을 쏟고,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용해 정치·경제 체제를 확립·발전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막부에게 일본에 전해진 주자학은 실로 안성맞춤이었다. 송(宋)·원(元)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주자학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새로운 체계의 유교이다.
그것은 국가 통일과 대의 명분을 사상의 기둥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인륜 관계를 절대화하여 절대적 복종을 제창한 것이었다. ''윗사람을 범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한 이 사상은 막부에 이상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유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는 주자학을 관학으로 정하고 쇠퇴한 아시카가 학교를 부흥시켰다. 게다가 『논어』나 『주역(周易)』 등의 경서를 대량으로 간행하여 유교 보급에 전력을 쏟았다. 또 유가(儒家)를 많이 등용한 사람도 이에야스였다. 특히 그는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를 중용하였다. 유학자였던 세이카는 주자학에 기초하여 신도(神道)를 해석함으로써 막번(幕藩) 체제의 이론적 지주를 구축했던 것이다. 나아가 세이카의 문하생인 하야시 라잔(林羅山;1583∼1657)도 일본에서 유교를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이에야스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이에야스의 정치고문이 되어 이에야스의 사후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4대에 걸쳐 섬겼다. 역대의 장군들도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을 지키고, 유교 보호와 장려에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이에야스의 아홉 번째 아들인 요시스쿠(義直)는 명(明)나라의 유학자 진원빈(陳元贇, 1595∼1671)을 등용하여 유교 보급에 힘썼다. 요시스쿠는 죽을 때 유교식으로 묘를 건립하도록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또 8대 장군 요시무네(吉宗)는 무로 규우소(室鳩巢;1658∼1734) 등 명성이 높은 유학자를 초빙하여 경서를 강의하게 하고, 학술이나 교화뿐만 아니라 정부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했다. ''미토 고몬(水戶黃門)''으로 알려져 있는 미토(水戶) 번의 번주(藩主:지방의 영주)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국)도 역시 명나라 유학자인 주순수(朱舜水;1600∼1682)에게 깊이 배웠으며, 주순수가 죽은 후에는 그의 묘를 미쓰쿠니의 은거지인 니시야마소(西山莊)에 만들게 할 정도였다.
이처럼 장군들이 앞다투어 유교를 배운 덕분에 유교의 지위는 높아지고 전성기에 달하였다. 한편 교육의 면만을 보아도, 중앙에서 지방, 관학에서 사학, 고등 교육에서 초등 교육, 여성 교육, 유아 교육까지 모두 유교 일색이었다. 예를 들어 막부 직할의 최고 학부는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學問所), 통상 ''창평횡(昌平
)''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유교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11세부터 15세까지인 동과(童科) 시험에서 사서와 오경이 필수 과목이었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유교가 중시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사학의 경우도 나카에 도쥬(中江藤樹)의 등수서원(藤樹書院), 요시다 쇼잉(吉田松陰)의 송하촌숙(松下村塾) 등도 유교를 교육의 중심에 놓았다.
또 유교, 특히 『논어』는 민중 속에도 침투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사정을 평론가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정말로 『논어』가 민중에게까지 침투한 것은 역시 도쿠가와 시대일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많은 판본이나 해설본의 간행으로도 명확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겐로쿠(元祿:1688∼1704) 시대에 이미 ''『논어』를 읽은 자가 『논어』를 모른다''는 속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어』가 이미 친근한 것이 되었고, 또 『논어』를 읽은 사람이 많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이 반드시 『논어』에 쓰여진 대로 살지 않고 있음을 민중도 알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공자 사상의 영향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도 남아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없었으면 기적적인 일본의 근대화는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유신에 참가한 남자들에게는 피가 끓는 개혁운동이었다. 이 메이지 유신에 의해 그 때까지의 봉건적인 정치나 경제, 혹은 봉건적 신분 제도가 무너졌으며, 서구식의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구를 뒤쫓아 앞지른다는 근대화로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유교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는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았으며, 이로써 유가사상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막부가 무너짐으로써 존망의 가장자리에 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서구의 여러 나라를 따라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구의 과학 기술이나 제도를 수용했다. 그것은 제철·조선의 중공업 분야에서 제지·인쇄의 정보 관련 분야, 게다가 은행·보험의 금융 분야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다. 한편 정부는 체제를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에 부딪쳤다. 서구의 기술을 수용하더라도 국민이 흩어져서는 근대화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근대화라는 공통 목표에 매진할 필요성에 직면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자의 사상을 체제에 추가하고 이용하기로 하였다. 예를 들어 자유 민권운동이 절정기를 맞이했을 무렵, 정부는 천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공자의 사상에 주목했다. 공자의 사상은 충이나 효를 중요시하므로 천황의 권위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정부는 (1) 국민 교육에 유교를 부활시킨다, (2) 공자에 대한 제사를 계속 거행함으로써 공자를 신격화한다, (3) 유교의 연구 활동에 힘을 기울인다는 등을 정책의 기본으로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그대로 교육면에 반영되었으며, 학생들은 정치 사상과 도덕 교육으로서 유가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청소년을 근대화의 첨병으로 삼는 동시에 충성스런 백성으로 만들기를 노렸던 것이다. 이를 위해 메이지 정부는 연달아 유교 부활의 교육 방침과 정책을 공포하였다. 예를 들어 메이지 천황은 유학자인 모도다 에이후(元田永孚)의 협력을 바탕으로 1879년에 성지(聖旨:천황의 생각)를 공포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지금부터 선조의 훈전(訓典)에 근거하여 인의충효(仁義忠孝)를 우선적으로 천명하고, 도덕학에 공자를 주로 기술한다"라고 하여, 공자의 사상을 도덕 교육의 중심에 놓을 것을 표명하고 있다.
그 후 1890년에는 「교육칙어」를 공포하였는데, 그것으로써 유교 사상의 존중이 교육에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칙어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교육 방침이 되었는데, 그 목적은 유교적 윤리로써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신민(臣民)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도쿠가와 막부의 종언과 더불어 위기를 맞이했지만, 근대화를 향한 일본에서 다시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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