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게 참 쉽지 만은 않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세 사람의 인생 역정을 통해서 '삶이 제대로 풀려나가는 것이
과연 어떤 요인에 의해서일까?'라는 그런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의 젊은날부터 권력의 정점에 이르기까지에는 항상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처럼 내 인생이 어쩌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그런
두려움'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더더욱 분발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였지요.
오바마 대통령과 그 여동생 마야 씨를 키운 경제력은 할머니에게서 나옵니다.
할머니는 여자로서 처음으로 부지점장 자리에 올랐지요.
한편 할머니의 성공은 점점 더 할아버지의 자리를 위축시키게 됩니다.
남자의 입장에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렇게 자신의 생이 그냥 흘러가 버리도록
젊은 날 무엇을 했나라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남자가 자기 구실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할아버지는 가구 사업에서 손을 떼고 생명보험 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당신이 사람들에게 팔려고 하는 보험 상품이 그들에게 왜 필요한지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상품을 권했다가 퇴짜를 맞을 때는 그럴 수
있으려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잘 못했기 때문에
보험 판매 일은 할아버지에게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일요일 밤다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 애를 태우며 흥분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할아버지는 서류가방을 들고 텔레비전을 올려다놓은 탁자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다가 얼마 뒤 할머니와 나를 거실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내쫓고는
전화로 사람들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물론 전화를 하는 대상은 할아버지가 보험 상품을 팔아서 고객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전화를 걸 때 나는 종종 물로 마시려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곤 해서, 이때 할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전화를 하는 상대방이 화요일은 곤란하고 목요일은 더 곤란하다고 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지는 다시 무릎에 놓인 주소록을 뒤적였다.
할아버지의 손은 덜덜 떨렸다.
마치 노름판에서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날 가망성이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아는
노름꿈의 손처럼..."
-버락 오바마,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 p.112.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장이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이런 광경들이 오바마로 하여금 출세를 향한 맹렬한 도전으로 그를
이끌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역경이든 순경이든 결국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지게 되지요.
'마치 노름판에서 깊은 수렁에 빠져....'라는 대목만으로
그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혹은 상흔)을 남겼는지 추측해 보게 됩니다.
물론 자서전에서는 이런 대목을 가능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노력하던 외할아버지, 결코 자신이 좋아할 수 없었던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외할아버지, 능력을 키우지 못한 외할어버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독려하였을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반듯하게 세울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다는 점.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서 자꾸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그런 것들을 두루두루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남편의 직장은 총알 없는 전쟁터”
(샐러리맨 아내가 말한다
상계동에서 분당까지 왕복 3시간 출퇴근 …
일하러 나갈 곳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샐러리맨 애환과 꿈)
10년 전 혹독한 외환위기를 통과하고 살아남은 이 땅의 샐러리맨. 그들의 고단한 삶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결혼 13년 차 전업 주부 유주화(40) 씨가 가까이서 지켜본 샐러리맨 남편의 일상과 애환을 담담하게 그렸다.
냉혹한 현실
2009년 새해부터 회사 통근버스가 유료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운행이 중단됐다. 남편은 이제 상계동 우리집에서 사무실이 있는 경기도 분당까지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다녀야 한다. 2년 전인가? 서울 시내에 있던 회사가 분당에 사옥을 신축하면서 미리 회사 근처로 보금자리를 옮긴 직원도 있지만, 우리 부부는 효자 효부도 아니면서 괜히 부모님 핑계에 강남과 비슷하다는 분당 물가를 운운하면서 구석진 상계동을 뜨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서 무료로 통근버스를 운행한 것은 정말 다행이면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남편은 1년6개월 정도를 통근버스로 출퇴근했다(사실 퇴근버스는 오후 7시에 회사에서 출발하므로 자주 이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새해부터 통근버스 운행을 중단하게 된 이유를 듣고는 가슴에 무언가 잔뜩 쌓이는 것 같았다.
통근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다른 직원들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사내 게시판에 불만을 토로한 것이 발단이 됐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그 연유를 듣자니 정말 삭막하고 씁쓸했다. 그뿐 아니었다. 남편은 몇 달 전 출근버스 안에서 잠들어 차고까지 갈 뻔했다고 한다.
일반 버스도 아니고, 회사 앞에서 모두 내려야 하는 통근버스임에도 자고 있는 남편을 강 건너 불 보듯 빤히 쳐다보면서 우르르 내렸을 얼굴 모르는 회사 사람들을 향해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회사에는 별별 사람이 많아.”
남편은 그런 내 말에 맞장구도 치지 않고 그저 피곤한 머리를 베개에 파묻으며 잠꼬대처럼 한마디 하고는 그르렁 그르렁 코를 골았다. 나는 잠든 남편의 이마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얼굴 모르는 ‘싸가지’ 없는 인간들을 향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밥을 먹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텅 빈 버스 안에서 혼자 잠들었다 회사에서 한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내렸을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혼자 얼굴을 붉혔다.
그랬다. 남편은 총알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고자 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공짜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곱게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런 것이 요즘 말로 ‘쿨’하다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인가?
두어 달 전인가?
소주에 맥주까지 섞어 마셨는지, 삼겹살 냄새를 풀풀 풍기며 거나하게 취해 돌아온 남편이 보통 때와 다르게 미안한 기색도 없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쓰러지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불안감에 남편 눈치를 보면서도 한바탕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몰골로 어떻게 집은 찾아왔느냐며 옷을 벗기려 했지만 남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구겨진 바지차림으로 침대 위를 헤집었다. 이렇게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널브러지는 날이면 나는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지갑이며 휴대전화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는 했는데, 이날은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남편이 잃어버린 것 없으니 안심하라면서 그제야 옷을 벗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나이 어린 후배와 동료 3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잘리게 생겼어.”
가슴이 덜컹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제조업도 아닌데 경기가 좋고 나쁨에 크게 휘둘리는 것이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은 제조업이 아니더라도 일거리가 없으면 잘리는 것 아니냐면서 “당장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성과가 저조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 조치가 내려졌으니 버틸 사람은 버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짐을 쌀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남편은 경고를 받지 않았지만 미안한 마음에, 안도감에, 우정 어린 동료의식에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서 움찔 자라목을 하고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싱크대 찬장에 있는 꿀을 꺼냈다. 냉수에 잘 녹지 않는 꿀은 옅은 갈색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투명한 유리컵 속에서 몸부림쳤다.
이렇게 살려고 도시락 두 개 싸들고 고생하면서 학교에 다녔던가? 고등학교 3년 공부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재수까지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또 영어공부 하느라 1년을 휴학하고, 재수에 1년 휴학에 남들보다 두 살이나 늦은 나이에 입사했는데, 이제는 또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인생 80의 절반 고개를 조금 넘어선 지금 또 다른 삶의 모퉁이에 다다른 심정이다. 올해로 결혼 13년차가 되는 나는 20여 년 전의 부모님 세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세상을 살고 있다.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것처럼 세상은 빠르고 편리하게 변했지만, 비교적 안정적이라던 월급쟁이는 더 이상 안정적이지 못했고 믿음직하게 우리의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1997년 불어 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월급은 연봉제로 바뀌고, 연 800%를 받던 상여금은 연말 평가에 따라 인센티브를 많이 받기도 하고 적게 받기도 하고 아예 받지 못하기도 하는 철저한 평가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연말 평가가 나오기 전부터 남편의 엄살은 시작된다. 지난해에는 팀을 세 번이나 옮겨 이렇다 할 실적을 내놓지 못했으니 인센티브는 아예 기대하지 말라고 연막을 치는 것이다. 경제가 좋았을 때 S전자 같은 곳에서는 주가가 올라 몇 천 만 원씩 인센티브도 받았다지만, 같은 그룹에서도 희비가 교차하는 마당에 모든 기업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편이 대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엄청난 혜택이라도 받는 줄 안다. 평가를 아무리 잘 받아도 한 달 급여의 200% 이상은 받아본 적이 없으니, 보너스 받는 맛에 산다는 월급쟁이의 축제는 이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린다. 10년 전 IMF는 끝났지만 그때보다 더 심한 경제위기가 올 것을 알았던 것일까?
한시적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연봉제는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태세다. 이제 세상은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만 철저해져, 일하러 나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나는 주문처럼 되뇐다.
전업주부로 살아남기
남편은 국내 굴지의 모 그룹에 지원해 우수한 성적으로 필기시험에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고 좀 더 작은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1년 만에 회사가 대기업 계열사로 편입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어쨌거나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주말도 없고 정시퇴근도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남편은 신혼여행 후 첫 1주일을 제외하면 지금껏 평일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이렇게 십 수 년 동안 주말과 휴가도 제쳐두고 가장으로, 남편으로,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의 아버지로, 아니 그 모든 타이틀보다 온통 회사원 이호영(가명)으로 살아온 그였다. 그러나 직장인이라는 명함 하나에 목을 매고 사는 것에 비하면, 나날이 오르는 물가는 반영되지 않은 채 세금부터 상납하고 돌아오는 월급명세서가 얄궂기만 하다.
내 어릴 적이나 처녀 적 꿈이 현모양처는 아니었지만, 대학 졸업 후 짧은 사회 경험을 통해 체험한 극악한 생존경쟁의 현실로 내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1996년 2월, 결혼을 3개월 앞두고 직장을 그만뒀다. 맞벌이 부부로 살아갈 줄 알았던 시어머니는 놀란 눈치였고, 남편 역시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직장을 가지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는다.
언젠가 신문에서 모름지기 갖은 음식솜씨를 자랑하고, 철철이 집안 커튼을 바꿔 달며, 재테크며 자녀교육에 정보통인 아줌마라야 진정한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전업주부가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란 백화점이나 아웃렛의 할인행사에 가서 시간을 돈 삼아 바치고 생필품을 사는 것이다.
1996년 가을, 결혼하고 5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상기된 표정으로 열흘간 미국 출장을 가게 됐다고 입꼬리가 올라가도록 좋아했다. 떠나기 전날 밤, 무엇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몰라 좁은 신혼집을 한껏 어지럽히면서 가방을 꾸렸다. 그렇게 정신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낸 다음날 걸레로 쓰려고 빼놓은 남편의 흰 러닝셔츠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나중에 일부러 싸준 속옷인 줄 알고 입었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얼마나 미안하던지. 걸레가 될 운명에서 비행기 타고 미국까지 다녀온 남편의 낡은 속옷을 나는 차마 버리지 못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비단 그뿐이 아니다. 회식자리에서 번번이 구멍 난 양말 때문에 허연 속살을 들키고 망신살 뻗쳤다고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전구에 끼워 양말을 꿰매던 1950~60년대 어머니처럼 남편의 낡은 양말을 기워 주었다. 구멍 난 양말을 버리는 것이 왜 그리도 아까웠는지 모르겠다.
남자 나이 마흔
나는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말이 없지만 그만큼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회사 일이 힘드네, 그만두고 싶네 하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잔이든 한 병이든, 술 마시는 것을 눈감아 주고 이해하려고 했다.
연애할 때나 신혼 때는 사무실 책상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가면서 회사생활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해주던 남편은 언제부터인지 집에서 입을 여는 일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늦은 밤마다 취한 목소리로 아파트 입구로 나를 불러대던 남편의 목소리에 나는 매번 짜증과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했는데, 이것은 내가 가장 후회하는 나의 과거다. 당시의 남편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후회와 안타까움에 목이 멘다. 그때는 내가 초보 아내였고, 초보 주부였던 것을 남편이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점점 말이 없어지면서 술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고 귀가시간도 늦어지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별의별 흉측한 생각까지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 나이 서른여덜아홉 무렵이었다. 요즘처럼 한겨울이었던 어느 날, 새벽 2시가 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반항심으로 딸아이를 깨워 겹겹이 옷을 입히고 차에 탔다.
그렇지만 그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은 새벽 4시 정도가 돼서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아파트 현관을 향해 걸어왔다. 겨울 새벽길을 어두운 표정으로 꼿꼿이 걸어오던 남편의 얼굴은 단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나는 시동도 켜지 않은 자동차 안에서 2시간을 넘게 추위에 떨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벽기도 다녀왔을 테지’ 하며 별 생각 없이, 아무 변명 없이 남편은 나를 떠나고 나도 남편을 떠났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서로를 잠시 떠나 보냈다.
남편은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한 척하기 위해 취기를 빌려 최면을 걸고 고단한 인생의 시름을 잊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남편은 외롭고 힘들고 지쳐 있었지만 남편이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내가 외로움에 울고 있을 때는 남편이 메말라 있었다. 세상은 학창시절에 배운 지식과 논리와 법칙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미래는 물질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아무런 예측과 준비도 할 수 없음을 나는 40년 짧은 인생을 통해 알았다.
나는 경제학자도, 미래학자도 아니어서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홀딱 젖은 것처럼 당혹스럽게 2000년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세찬 비가 내릴지, 보슬비가 내릴지 내 짧은 인생 경험으로는 미처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예측불허인 삶은 끊어지지 않는 거미줄처럼 쉽게 부서지지도 않는다는 또 다른 인생의 법칙을 배웠기에 나는 이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서울에서 집 장만하기
우리는 1996년 5월 다가구주택 2층의 전세 3,800만 원짜리 신혼집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당시 남편의 연봉은 1,500만 원 정도였다. 그 해 10월 바로 아래 시누이가 출가했고, 이듬해에는 둘째 시누이도 시집을 갔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 어느 날, 평소 말씀도 별로 없으시던 시아버님께서 느닷없이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나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한겨울에 더운물도 나오지 않는 시부모님의 커다란 주택에 들어가 살 수 없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얼마간의 돈을 대출받아 부모님께 드렸다. 그 즈음 외환위기로 내내 빠지지 않던 집이 나가자 나는 상계동의 17평짜리 전세 아파트를 계약했다.
좀 더 넓은 평수로 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대출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알았지만 장남인 남편은 시댁에 들어가 살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아파트를 계약하고 와서 나는 남편과 통화하면서 30분 이상 큰소리로 싸웠다. 그 이후 남편은 더 이상 그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연 13%까지 오른 이자를 감당할 수 없으셔서 2층을 개조해 전세를 주었다 결국 집을 팔았다.
시부모님은 60평이 넘는 2층 단독주택을 소유하셨으나 이제는 전세 5,500만 원의 저층 아파트 5층 꼭대기에 사신다. 남편과 나는 그 이후 몇 년을 더 전세를 살다 2003년 대출을 끼고 허름하고 낡은 작은 재건축아파트를 샀다. 시부모님은 집을 잃고 우리는 집을 샀다. 그때 집을 사두지 않았더라면 2년마다 보증금을 올려주거나 여전히 이사를 다녀야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사람들이 결혼하면 집부터 장만하려고 하는지 진작 깨닫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뉴스나 신문에서 집값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남편 옆구리를 찔러가며 내 공치사를 했다. 경상도 남자도 아닌 남편은 왜 그리 무뚝뚝한지, 아무 대꾸도 반응도 없다. 이제 서울에서 집을 장만하기란 웬만한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힘든 세상이 되었다.
시부모님의 전세 보증금과 우리 집을 팔아 합쳐도 40평대 아파트나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살 수 없다. 상계동의 20평대 아파트마저 수억 원을 호가하니 앞으로 월급쟁이들이 돈을 모아 집을 살 수 있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남편의 꿈
언제인가, 500만 원의 연말 보너스를 받았다. 통장에 들어온 동그라미를 세어보는 기쁨도 잠시, 돈도 찾아볼 새도 없이 남편이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나 카메라 살 거야.”
수고하며 땀 흘린 남편에게 흔하디 흔한 디지털카메라 한 대도 인심을 쓰지 못하는 소크라테스 부인 같은 악처도 아니니, 나는 쾌히 그러라고 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것은 부부 간에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경우이지 싶었다. 내가 생각했던 카메라는 30만~40만 원짜리 ‘똑딱이’였는데, 남편이 구입한 카메라는 DSLR라는, 이름도 거창한 중형 카메라였던 것이다.
- 900만 원이던 통장이 - 400만 원이 된 것도 찰나였다. 급여 통장은 다시 - 700만 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남편은 주말이면 출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운전을 못하니 멀리 지방까지 가지도 못하고 겨우 서울 시내 곳곳에 숨어 있는 빛과 그림자를 찾아 다니는 정도였다. 어릴 적 잠시 미대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더니, 남편은 사진 찍는 감각이 있었다.
렌즈만 들이대도 그림이 되는 유럽이나 서남아시아의 이국적 풍경이 아니라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동네 꼬맹이들의 세발자전거나 흙탕물, 담벼락, 오래된 포스터들이 그의 렌즈에 사로잡혀 작품이 됐다. 그렇게 3년 동안 열심히 사진을 찍던 남편이 어느 날 렌즈가 망가졌다면서 고쳐야겠다며 남대문으로 갖고 나갔다.
렌즈 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겨우 12만 원짜리 렌즈를 새로 사겠다 말도 못하는 남편의 뒷모습이 짠했다. 그러던 남편이 렌즈 하나만 사도 되겠느냐며 어렵게 물어왔다. 300만 원짜리 카메라 살 때는 큰소리 탕탕 치더니, 어디서 공돈이 들어온 것도 아니니 내 눈치를 살핀 것이었다.
나는 짐짓 심기가 불편한 듯, 목소리를 깔면서 렌즈가 얼마냐고 물었다. 50만 원이라고 했다. 한 달 월급에서 5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3년 동안 12만 원짜리 렌즈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온 남편에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며칠 후 주말 저녁식사 중에 갑자기 렌즈가 생각나 남편에게 새 렌즈 좀 보자고 했다.
남편은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새로 산 렌즈를 가져왔다. 과연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 리 만무한 나는 그저 성의껏 렌즈를 봐주고 밥을 먹었다. 남편은 여전히 렌즈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사진에 빠져 살던 남편이 어느 날 사진 찍는 일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샐러리맨의 일상으로 돌아가 술에 취해 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놓는 나에게 회사 그만두면 치킨가게를 하겠다고 중얼거렸다. 몇 년은 말없이 술로 버티고, 몇 년을 더 사진으로 버티더니 이제야 힘들어하는 표정이라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사람다워 보여 좋았다.
아플 수도 없는 상처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아들을 찾는다던데, 남편은 도무지 자식 욕심이 없는지 여태껏 빈말이라도 아이 하나 더 낳자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당신 닮은 아들 하나 갖고 싶지 않으냐고 은근슬쩍 속내를 떠봐도 “하나도 키우기 힘든데…”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한 집안의 가장 노릇 하기 힘든 이 세상이 종족 번식의 본능조차 삼켜버린 것일까?
결혼 7년 만에 집을 장만했지만, 13년차가 돼가는 마당에 신혼집이나 지금의 집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여전히 66M2가 겨우 넘는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그저 애 낳을 때 고생해서, 더 이상 애가 안 생겨 하나로 끝냈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집이 작아서였다.
남편 혼자 벌어 세 식구가 살다 보니 시댁과 친정 기념일이나 명절 챙기기도 힘들기도 했고, 여기저기 사람 구실 해야 하는 경조사 치다꺼리를 핑계로 우리 부부는 이기적인 부모가 되고 말았다. 지영이가 어른이 된 세상에서는 친형제자매 간이 아니어도 친구나 동료가 잘 챙겨주고 격려해주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지만, 어쩐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 같은 듯해서 내가 먼저 풀이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젊을 때 부렸던 호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덧 하나만 낳아 잘 기르리라 했던 마음은 내 키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딸아이를 보면서 헛헛하게 무너져 간다. 키우기 쉬운 화초 하나 제대로 살려낸 적 없던 내가 산세베리아며 베고니아, 벤자민 화분을 들여 키우고 있다.
‘제 밥그릇은 제가 갖고 태어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자식은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자식을 키우는 것임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쩌겠는가? 자식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수십 년 전의 표어로 내 허전하고 어리석은 마음 한편을 달래볼 뿐이다.
아직 남은 길
남편은 지난해 1월 차장으로 승진했다. 월급은 겨우 15만~20만 원 올랐는데 승진 턱을 내느라 용돈 외에 200만 원이나 더 썼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남편은 그래 봐야 퇴직할 시일만 더 당겨지는 것이라며 술냄새를 풀풀 날리며 한숨을 쉬고, 그 말에 나는 또 움찔할 뿐이었다.
남편이 차장으로 명예퇴직을 당해도, 아니면 만년 부장이 될지라도 나는 그가 명함에 박힌 한 남자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다고 인정해줄 것이다.
비록 결혼하고 여태껏 가구를 옮겨준다거나 시멘트못 하나 박아준 적이 없어도, 사춘기가 시작된 딸아이가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아버지나 남편의 인생이 아닌 그저 한 남자의 인생을 무겁게 감당하며 살았던 그를 탓할 수 있으랴. 최근 남편과 나는 집안 대소사에 대해서는 그저 전화나 문자로 통보하고 통보받기 일쑤다.
가장의 임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장이 필요한 것인데, 어찌 보면 집과 가정이 직장생활을 원만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 같다. 사무실의 남편 책상과 달리 집에 있는 남편의 자리와 아버지의 자리는 어쩐지 공석으로 비어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벌써 십 수 년이 지난 연애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헤어지고 돌아와서도 두세 시간씩 전화를 하다 겨우 잠든 적이 부지기수였는데, 현실 속의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 앞 골목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그런 추억들은 책상 서랍 구석에 꼭꼭 숨겨놓은 옛날 연애편지처럼 그렇게 숨겨놓기라도 한 것일까? 전화 통화보다 문자가 더 익숙해진 디지털 세상에서 과거의 추억 운운하는 내게 남편은 또 어떤 면박을 줄까?
하기야 처진 가슴팍이며 굵어진 허리, 이미 귀밑머리가 허옇게 샜는데, 온통 간질거리는 핑크 빛 일색이던 지나간 사랑이야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고서 작성할 것이 있다며 휴일 밤에도 알람 시계를 맞춰놓고 떠지지 않는 눈과 씨름하며 월요일 새벽 3시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남편은 5시 첫 지하철을 타겠다며 서두른다.
이른 아침 깔깔한 뱃속을 매번 미숫가루로 채우는 남편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 안쓰러워 보인다. 나는 언제나처럼 일찍 들어오는지 똑같은 인사를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매일 일찍 오겠다는 대답을 한다. 나는 일찍 들어온다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언제 오느냐고 문자를 보낸다.
으레 그렇듯, 저녁은 먹고 들어간다는 답신을 보면서 적어도 아침에 나갈 때는 일찍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하는 측은지심으로 오히려 내 자신을 위로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더 속아주고 기다리며 살아야 할까? 아침마다 일찍 들어오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바람과 함께 돌아오는 남편도 누추한 작은 집에 슬쩍 들어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에 위로받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좋은글 잘읽고가네 한번만나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