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1 나해 연중3주일
요나 3:1-5, 10 / 1고린 7:29-31 / 마르 1:14-20
사자의 포효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4개 복음서가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4개 복음서를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로 형상화해서 그 특징을 압축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풀어보자면, 마태오 복음을 사람으로 비유한 이유는 유다의 종교와 전통 속에서 활동하시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소로 비유하고 있는 루가 복음은 소가 희생제사에 제물로 봉헌되듯이 예수님도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땅의 관점이기 보다는 저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독수리와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위의 3개 복음에 비해서 분량은 적지만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은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나 요한복음처럼 신학적 서술 등을 배제하고 예수님이 선포한 핵심적 말씀과 활동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 배경설명이 생략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담함과 사자의 포효처럼 인간세상을 향해 힘차게 선언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신학자이자 영문학자인 C.S.루이스(C.S. Lewis, 1898~1963)가 1950년부터 1956년 사이에 출판한 총7편의 판타지 소설로서 영화로 제작할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동물들이 말하고 마법이 일어나는 나니아라는 가상세계에서 선과 악이 대결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적 상징과 메시지가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C.S. 루이스는 마르코 복음으로 상징하는 사자의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교회는 올해 전례에서 포효하는 사자 마르코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복음(福音)을 듣습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단어는 그리스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정치영역에서 쓰이던 특수용어였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하는 중대발표 때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황제가 직위를 물려받을 때 또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할 때 유앙겔리온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을 때 왕국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과 환경을 규정하는 이러한 정치적 기쁜소식이 사회전체의 풍경을 완전히 탈바꿈하는 소식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갈릴래아 변두리에서 시작한 사람의 아들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마르코 복음저자는 유앙겔리온이란 이 거창한 단어를 다음과 같이 책의 맨 앞에 대담하게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르 1:1)”
그리고 이 예수가 공적으로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말씀-“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입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 신자들은 마르코 복음의 앞부분을 읽자마자 이것은 바로 체제전환(regime change)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질서로 세상을 다스릴 누군가가 왕좌에 올랐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일대를 다스리던 거대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제국의 변방에서 생겨난 조그마한 신생 종교집단이 ‘참으로 무모하고 겁도 없군’하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마르코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공식 선언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코 복음저자는 왜 그래야 되는지를 인간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중들에게는 어리둥절하고 심지어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과 질서가 바뀌고 있으니 복음서에 담긴 메시지를 잘 살피고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말입니다. 이처럼 마르코 복음저자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시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토 교회 신자들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1고린 7:29-31)”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고린 7:3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라져갈 세상과 새로이 올 하느님의 통치라는 두 가지 모습이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과 사도 바울의 말씀이 현세의 여러가지 이해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좀 부담스럽고 그래서 일종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건을 사고나서 새로 산 그 물건을 애지중지하고, 세상과 거래하면서 온통 거기에 우리 신경을 써야만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나아가 잘 먹고 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소식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라는 체제전환이 썩 달갑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소식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전에, 잠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사회를 한번 관조해 봅시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사회 전 분야에서는 경쟁이 강조되어 뒤쳐진 사람은 바닥으로 떨어질까 걱정하고,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자리를 빼앗길까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도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영혼과 기력이 크게 손상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각종 물질적, 비물질적 ‘독려’ 앞에서 자신의 원래 모습과 현실적 모습도 돌아보지 않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상황은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닭을 죽이고 계란을 꺼내는 ‘살계취란(殺鷄取卵)’과 같지 않을까요? 그 결과 우리는 종국에 가선 ‘인생은 허무하다’라는 탄식으로 생을 마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회개할 것과 다음으로 복음을 믿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회개’, 즉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는 뜻은 근원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성공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나를 잠시 멈추고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에선 이러한 태도를 ‘절선(節宣)’이라고 합니다. 여기선 선(宣)이란 떠들썩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절선은 떠들썩함을 절제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행동의 템포를 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피정을 하고 명상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령의 빛을 받아 자신을 돌아보고 내 욕망대로 무절제하게 달려온 그래서 지치고 상처 난 내 영혼을 살펴보고 하느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방향을 잡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와 같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제야 우리는 주님의 기쁜소식을 기쁜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럴 때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믿는다(credo)’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마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 내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을 향해 사자와 같이 포효하신 예수님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1:16)“저는 이 대목을 기도하며 사자가 사냥을 위해 무리의 동료를 필요로 하듯이, 우두머리 사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동료사자로 부르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사자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우리를 부르시며 예수님은 잠자고 있던 내 안에 있는 야성을 깨워 주시고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초대하십니다. 그 부르심을 통하여 모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그래서 열등감과 상처들로 모가 난 상태에 있는 우리가 태초에 대초원에서 함께 포효하고 달리는 사자였다고 일깨워 주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잊어버리고 있는 나, 상처난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초원의 왕으로 불러 주시는 영광스러운 부르심 이기도 합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이 부르심 앞에 사자처럼 세상을 향해 포효하셨던 예수님처럼 큰 꿈을 갖고 함께 힘차게 전진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