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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주는 영적 교훈
열왕기상 13:29~32,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 우니라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찬송가 197장(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263장(이 세상 험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내려온 젊은 선지자를 속여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들고 벧엘에서 밥을 먹고 돌아가다가 결국 죽게 만든 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는 솔로몬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그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남 유다 왕국과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된 상황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아히야의 기름부음과 예언의 말씀을 받는 과정을 거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자로 세워졌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체험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되자 초심을 버리고 정치적 야망을 따라 자기 백성들이 명절마다 예루살렘에까지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막아버렸습니다. 북왕국 백성들이 절기마다 다윗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결국은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나 다윗 가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은 북 왕국의 남쪽 벧엘 성과 북쪽의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제단을 만들고 평민 제사장들을 세워서 백성들로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는 백성들로 여호와를
떠나 우상 숭배를 하게 만든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러자 북 왕국에 거주하던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집과 기업의 땅들을 버리고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으로 이주해버렸습니다. 그 외에도 경건한 신앙을 가진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남 유다 왕국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죄 속에서 육신적으로 평안히 살기보다 순결한 신앙 속에 가난과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 격변과 종교적 환경의 대 격변 시기에,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 살던 한 젊은 선지자를 북 왕국에 보내셨습니다. 그 선지자는 금송아지 우상이 있는 벧엘 제단에 나타나 예언하였습니다.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마침 그 자리에 여로보암 왕이 참석하여 직접 분향까지 하고 있던 차였는데,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그 엄숙한 종교 예식이 진행되던 자리에 한 낯선 자가 나타나 큰 소리로 제단을 저주하는 불길한 예언을 하자 “저 놈을 잡으라.”고 말하며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뻣뻣하게 굳어서 오그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단이 갈라지면서 재가 다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그 선지자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선지자가 기도해주니 그 손이 다시 성해졌습니다. 왕은 마음이 감동이 되어 그 선지자에게 자기 집으로 함께 가서 식사하자고 청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시기를
“가서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고 하셨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고 유다로 향한 다른 길로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두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로보암 왕이 참석하는 그 벧엘 제단에 왔다가 그 놀라운 일들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서 놀라서 자기 집으로 와서 자기 아버지에게 자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 늙은 선지자는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을 아는지 물은 후에 나귀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중에 눈에 띄는 큰 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그 젊은 선지자가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신분을 확인한 후에 자기와 함께 집에 가서 떡을 먹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면서도 거부하였습니다. 그 때 늙은 선지자는 거짓말을 하기를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늙은 선지자가 이렇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 유다의 선지자를 청하여 식사 대접을 하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선의로 생각하면, 늙은 선지자는 그 젊은 선지자가 용기를 내어 왕에게 경고하는 모습을 보고 고맙고 존경스러워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더 자세히 물어보고자 자기 집에 모시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그냥 보내지 않고 대접해서 보내드리고자 하는 선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의 선의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는 그가 식사를 마친 후에 유다의 선지자가 길을 나설 때에 그에게 나귀 한 필을 내주어 고향까지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나귀 한 필에 안장을 내주어 고향에 가지고 가게 한 것이니, 이는 늙은 선지자가 젊은 선지자를 선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젊은 선지자가 죽었을 때에도 진심으로 울면서 “오호라 내 형제여”라고 울었던 것을 보면, 늙은 선지자는 이 젊은 선지자가 용기 있게 왕에게 예언하면서 우상 숭배의 죄와 맞서는 하나님의 싸움에 나선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큰 감동과 존경과 사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늙은 선지자가 그러한 선한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젊은 선지자를 자기 집에 모시고 식사를 대접할 요량으로 천사를 언급하고 여호와의 말씀까지 언급하면서 거짓말을 하여 그 젊은 선지자를 속인 것은 악한 일이 분명합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이러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만큼 그 늙은 선지자의 영성이 밑바닥 상태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늙은 선지자는 영적으로 오랫 동안 깊은 침체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벧엘에서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름받아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증거하기도 했던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타락으로 인하여 북 이스라엘 열 지파의 민심이 달라지면서 다윗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떠나고 북 이스라엘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반발심이 거세졌습니다. 그렇게 되더니 결국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 가문이 다스리는 남 유다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고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더니 정말 원치 아니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 드릴 것 없이 벧엘과 단에 가서 예배 드리라고 강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제사장들을 폐하고 평민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도 본래 절기에서 한달씩 느리게 하여 지키도록 명하였습니다. 거룩한 분노로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경건한 여호와 신앙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이 벧엘의 선지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왕의 우상 숭배를 싫어하면서도 벧엘에 그냥 남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왕의 종교 정책에 대하여 항거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자기 아들들까지도 벧엘의 제단에 가서 참석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점점 우상숭배에 굴복되어간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렇게 용기 있는 유다의 젊은 선지자의 의거를 보니 큰 도전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 부럽고 한편은 그 젊은 선지자가 벧엘에 선포한 대로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까 의구심도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젊은 선지자를 자기 집에 모셔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자세한 것을 묻고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선지자를 물과 떡으로 대접해주라는 말씀을 주었노라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젊은 선지자를 강권하여 자기 집에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늙은 선지자가 젊은 선지자를 대접하는 중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늙은 선지자에게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그 늙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던 곳으로 돌아가지 말고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 죄로 인하여 그 젊은 선지자의 시체가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튀어 나온 것입니다. 실로 그 늙은 선지자는 오랜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여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식사 후에 나귀에 안장까지 지워 보낸 그 젊은 선지자는 가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사자는 선지자를 물어 죽인 후에 몸을 훼손하지도 않고 나귀를 물어뜯지도 않고 그 시체를 지키듯 가만히 있다가 그 늙은 선지자가 소식을 듣고 아들들과 달려와서 시체를 수습하여 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그제서야 그 젊은 선지자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요 그가 벧엘 제단에 한 예언의 말씀이 참으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는 젊은 선지자를 자기 묘실에 두고 슬피 울며 장례를 치룬 후에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그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에 장사하고 자기 뼈를 그 젊은 선지자의 뼈 곁에 두라고 명합니다.
훗날 그 젊은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3백년(르호보암 주전 930년~요시야 주전 640년) 후에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이 직접 군사들과 신하들을 이끌고 이미 앗수르에 망한 북 이스라엘 지역에 가서 벧엘의 금송아지 제단을 다 헐고 제사장을 잡아 죽여 그 제단에 태우고 묘지를 헐고 그 해골을 가지고 와서 제단에 던져서 그 터를 더럽히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요시야 왕이 주변을 둘러보는 중에 한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을 보고 “저 비석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봅니다. 그 때 신하가 “이는 왕이 후일에 와서 이 제단에 행할 일을 예언하려고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입니다.”(왕하 23:17)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그 젊은 선지자의 해골과 늙은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보존해 두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이 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늙은 선지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으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뒤늦게라도 깊이 깨닫고 회개하였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고, 그렇게 깊이 침체에 빠진 결과 도리어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던 그 젊은 선지자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는 걸림돌 역할을 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늙은 선지자가 그렇게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된 것은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갑작스럽게 급변한 까닭도 있었고, 그러한 상황 변화에 어느틈엔가 서서로 물들고 압박이 되어 침체에 빠졌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여러 차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서며 결단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돌이키지 않음으로써 그처럼 마음 깊이 괴로워하면서도 우상 숭배의 죄에 동참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세월을 낭비한 채 그 젊은 선지자를 희생하고 난 후에야 회개하면서 남은 세월 보내고 그 영혼만 부끄러운 구원을 얻었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자녀들 역시 우상 숭배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있는 상태에 있다 할 것이니 그가 구원을 얻는다 해도 그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처음 부름받았던 그 뜨거웠던 영성을 지키지 못한 채 지내다가 갑작스러운 종교적, 정치적 상황 변화를 맞아 갈팡질팡하다가 그만 영적 침체의 나락으로 깊이 미끄러져버렸다 할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계속하여 상황의 악화의 징조를 보면서 더욱 뜨겁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 제일주의의 길을 추구했다면 그렇게 상황이 악화되어도 끝내 이겨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늙은 선지자의 불행한 일은 오늘날 우리들이 앞으로 맞이할 일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황도 어떻게 급변할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오직 미리 충분히 영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충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순교적 신앙 정신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안이한 신앙, 타협적인 신앙, 세속주의적 축복만을 바라는 신앙 가지고는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강력한 배교의 높고 험한 물결을 넘어설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늙은 선지자의 유혹에 젊은 선지자가 넘어지듯이, 우리도 비굴해진 타협적 영성을 가진 자들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신의 영적 경건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쌓아놓읍시다. 우리 교회를 위하여, 성도님들을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한국의 정계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합시다. 그것이 이 늙은 선지자의 쓰라린 후회의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