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 3,1-10
루카 11,29-32
자신을 부정하기를 원치 않으면 표징이 소용없다
코로나19의 20대 확진자가 53명에서 일주일새 1,235명으로 폭증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신천지 신도 중 상당수가 20대이기 때문입니다.
30대부터는 40대, 50대, 60대 대부분 확진자가 약 500명 수준인 것을 보면 젊은이에 대한 신천지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젊은 대학생들이 그런 곳에 빠져서 가출까지 해가며 신천지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할 수 없어 옛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이비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아무리 많은 표징을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천지에 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 이전의 삶을 영화 “트루먼쇼”와 비교합니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이라는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한 섬에 마련된 아주 큰 세트에서 자랍니다.
자기 외에는 모두 연기자들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직장동료들도 다 연기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장해서도 그 삶이 진실인줄 압니다.
도처에 그 모든 것이 가짜라는 표징이 있고 누군가 그 삶이 속는 것이라고 말해주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온통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 표징들을 무시합니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표징이 필요 없습니다.
신천지에서 나온 한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천지 교회에 입성하기 전 센터 교육을 마쳐야 하는데 7개월 동안 주5일로 진행됩니다.
그 외에도 계속 다양한 활동이 생기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못 만난다며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신천지 관련인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신천지에서 나오려면 큰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수년간 쏟은 노력을 모두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조: ‘확진자 30%가 20대. 그들은 왜 신천지에 빠졌나’, 박고은 기자, 노컷뉴스, 2020.03.03]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가 “악한 세대”라고 정의하십니다.
악하다는 이유는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표징이 없어서 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핑계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자신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악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핑계만 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버티다 나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자루 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서 용서를 바랐습니다.
무슨 용서를 바랐던 것일까요?
자금까지 자신 맘대로 살아온 것에 대한 용서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모습을 부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남방 여왕의 예도 드십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매우 먼 걸음을 했습니다.
그만큼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한 왕국의 여왕이지만 그 삶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찾아와 자신의 삶도 그 지혜를 가진 사람답게 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크시고 요나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계속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입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주님께 순종하여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표징은 찾으려고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늦게 들어갔습니다. 25살 이전까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시작하기 전에 피정을 하는 도중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기억나는 모든 것을 써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태어날 때부터 주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저를 부르시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돈 많이 벌고 결혼하는 것을 행복으로 믿고 살았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가끔 부르심을 느낄 때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의 삶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행복으로 여겨지기 전까지는 우리도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 3,1-10
루카 11,29-32
오늘 우리가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으니, 솔로몬(BC 971~931)이 왕좌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 뿐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 건축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솔로몬 왕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그는 잠언을 3천개나 지었으며, 천 다섯편이나 되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지혜와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많은 임금들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 칭송했고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특히 남쪽에 위치한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을 한번 만난 뒤로 열혈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온 최초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정말 항간의 소문대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준비해온 그녀는 마침내 퀴즈 보따리를 솔로몬 앞에 잔뜩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문제를 내는 족족 그 자리에서 정답을 알아맞추었습니다.
솔로몬의 탁월하고 비상한 지혜 앞에 스바의 여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의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 왕좌에 올려 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1 열왕기 10장 7~9절)
놀랍게도 스바의 여왕은 자신이 가져온 금 120 탈렌트,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약 4톤의 금과
엄청난 양의 향료, 보석들과 당시 최고급 목재로 손꼽히던 자단나무도 내려놓았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로움을 감탄하면서도, 그 지혜가 인간으로부터 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솔로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지혜로 충만한 솔로몬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뵌 스바의 여왕이었기에 위험으로 가득찬 장거리 여행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온 값진 선물들을 하느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것을 큰 기쁨이요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 솔로몬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더 지혜로운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찬란한 태양빛이시라면 솔로몬은 작은 랜턴 불빛 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넘치는 열정과 큰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몰려와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고, 그분을 찬미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들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보여준 태도는 어땠습니까?
무관심을 넘어 배척, 시험, 증오였습니다.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의 냉대와 적개심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동족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강한 날이 서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복음 11장 31절)
어쩌면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살아가지만 비신앙인보더 훨씬 초라하고 남루한 삶, 부끄럽고 죄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요즘 뉴스의 촛점이 되고 있는 사이비 교주들과 추종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4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가 11,29-32 :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니네베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표징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절하셨을까?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즉 주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역사상의 인물인 시바의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다.솔로몬 왕 때, 시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시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며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