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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 -최 영- |
용천설악(龍泉雪鍔)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丈夫)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셰워 볼가 하노라. |
[현대어 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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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배경] |
최영은 공민왕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치는 등 빛나는 공로를 세웠고,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할 때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정명군(征明軍)을 일으키는 등 고려 왕조의 최후를 지키는 자랑스런 기상을 보여 주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있을 때, 유배되어 피살되었다. 고려왕조를 위한 장군의 기백과 기상을 읊은 작품인 듯하다. |
[이해와 감상] |
초장과 중장은 녹이상제(주나라 목왕의 준마)와 용천설악(명검)을 소재로 해서,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무인의 늠름한 기상과 대장부의 호기를 대구법에 의해 표현했다. 종장에 와서는 위국충절을 다짐하는 주제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는 화자의 기개와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 정리 ] |
◆ 성격 : 평시조, 단시조, 호기가(豪氣歌) ◆ 표현 : 대구법, 대유법, 직설적 표현 ◆ 주제 : 장부(丈夫)의 위국충절과 호연지기(浩然之氣) ◆ 화자의 태도 : 무인의 기개로 위국충절을 다짐함. |
崔瑩.(최영)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본관은 철원(鐵原). 수사공(守司空) 유청(惟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이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달치(于達赤: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護軍)이 되었다.
1354년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는데, 그해 원(元)나라에서 남정군(南征軍)을 요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파견되어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벌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자, 서북면병마사 인당(印), 부사(副使) 신순(辛珣)·유홍(兪弘)·최부개(崔夫介)와
더불어 압록강 서쪽의 8참(站)에서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8년에는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했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서북면병마사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이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平壤尹兼西北面巡問使),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으며, 1361년 홍건적이 재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였다.
1363년 김용(金鏞)이 사주한 흥왕사(興王寺)을 진압했고, 이듬해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 명과 함께 쳐들어오자 도순위사(都巡慰使)에 임명되어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정주(定州) 달천(獺川)에서 섬멸했다.
이어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으며,
다음해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때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훈작(勳爵)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신돈이 처형된 1371년, 6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복귀했다. 1373년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었고, 1374년 경상도·전라도·양광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이어 명(明)나라에서 요구한 제주도의 말 2,000필에 대해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오자
양광도·전라도·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서 염흥방(廉興邦)·변안렬(邊安烈)·임견미(林堅味)·나세(羅世) 등과 함께 평정했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침입하자 출정을 자원하여 운봉(雲峰)의 홍산(鴻山) 전투에서 적을 섬멸했다.
그 공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육도도통사·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서강(西江)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듬해 다시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지금의 豊德)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무찌르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1384년
판문하부사·문하시중이 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다가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그해 우왕의 밀명으로 정권을 천단한 염흥방·임견미를 숙청했으며 딸을 우왕에게 납비(納妃)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북변(北邊) 일대를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일으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 등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되었고,
고봉(高峯:지금의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합포(合浦)에 옮겨졌으며,
공료죄(功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다. 참형된 지 8년 만에 이성계에 의해
무민(武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최영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 들게 갈아 두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낱말 풀이
녹이상제: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명마, 준마
용천설악: 아주 잘 드는 좋은 칼.
들게: 날이 잘 들게
두러메고: 둘러메고
장부: 대장부, 사나이
위국충절: 나라를 위해 바치는 충성과 절개
○풀어 읽기
명마를 잘 먹여 시냇물에 씻겨서 올라타고
용천검같이 잘 드는 큰 칼을 잘 갈아서 둘러메고
사나이답게 나라를 위한 충성된 절개를 세워 보려 하노라.
☆느낌나누기
고려 말 팔도도통사로 이름을 날렸던 최영은 여러 번에 걸친 왜적과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습니다.
그는 명나라를 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에 반대하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도성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고려의 충신 최영은 이성계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조는 준마를 타고 용천검을 갖춘 대장부의 무인다운 기개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최영 장군은 예절을 아는 무인이었습니다.
이 시조의 마지막 장은 대장부의 기개와 늠름한 무인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이 직설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