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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Part 1
시대별로 팝 음악의 지형도를 알아보는 시간. 이번에는 1960년대 전반기의 주요 음악 현상이었던 서프 뮤직, 포크, 소울 그리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해 알아본다.
The Swinging Sixties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젊은이들이 보다 많은 즐거움을 영위한 시대. 영국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으며 영국은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 되었다. 특히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과 런던에서는 미니스커트 같은 가장 현대적인 옷들이 디자인되고 유행했다. 영국과 미국의 60년대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가치관에 대항하고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형성된 시기였다. 영국과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과 핵무기에 반하는 정치적 저항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히피로 알려진 젊은 층들은 쾌락을 위해 LSD와 같은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피임약의 보급은 사람들에게 더욱 자유분방한 성적 자유를 선물했다. 음악과 패션은 새로운 사고를 표현했다.
'자유의 목소리'는 영국과 미국 외에 제3세계에서도 높이 울려 퍼졌다. 많은 작은 국가들이 더 거대하고 힘있는 나라들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억압과 박해의 역사적 원형을 극복하기 위해 싸웠던 시기였다. 세계 곳곳에서 개개인들이 그들의 자유 발전을 억압했던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성의 패턴들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성취하는 가능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베이비붐 세대 성장, 기성권위에 대한 회의. 젊음의 소리, 로큰롤,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 여권신장. 이제껏 전혀 인정 받지 못했던 것들이 만개했던 시대였다.
Surfing U.S.A. (Surf Music, 1961~65)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던 6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 그곳에서 서프 뮤직이 당시 젊은이들의 무료함을 즐거운 음악과 하모니로 대변해 주는 하나의 장르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원래 하와이 왕족들의 스포츠에서 발전된 서핑(surfing)은 당시 자동차 경주와 함께 캘리포니아 베이비붐 세대들의 가장 중요한 놀이 문화였으며, 아메리칸 드림과 부(富)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서퍼들이 즐긴 서프 음악은 일반적으로 여름음악이나 낙천적인 음악으로만 알고 있으나, 기타가 중심이 되어 향후 전기 기타 연주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음악 스타일이기도 하다.
특히 '서프 기타의 아버지'로 인정 받은 딕 데일(Dick Dale)은 마치 서핑할 때 파도를 연상시키는 트왕(twang) 기타 주법을 발전시켰다(그의 1962년도 곡 'Misirlou'는 영화 [펄프 픽션]에도 삽입되었다). 서프 사운드는 딕 테일과 그의 밴드 델톤스(Del-Tones)에 의해 커나갔으며, 계속해서 많은 서프 밴드들이 등장했다. 'Walk, Don't Run'을 연주한 벤처스(Ventures), 'Surf City', 'Dead Man's Curve' 등을 부른 보컬 듀오 잰 앤 딘(Jan & Dean), 'Wipe-Out'의 서파리스(Surfaris), 'Pipe Line'의 챈테이스(Chantays) 등의 서프 연주 밴드들이 가장 유명했다.
주지하듯이 서프 뮤직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시절, 즉 사시사철 내리쬐는 태양과 모래사장, 그 해변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한 음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프 음악은 서핑족들뿐 아니라 핫 로드 뮤직(Hot Road Music)이라는 (개조된) 자동차 경주족들의 음악으로도 환영 받았다. 비치 보이스의 'Barbara Ann'(1965)은 고속 자동차를 쫓아다니는 여자를 그린 노래이며, 잰 앤 딘의 'Dead Man's Curve'는 위험한 자동차 경주를 내용으로 한 곡이다. 또 비치 보이스가 부른 'Shut Down'의 제목은 자동차 경주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뜻한다.
서프 뮤직과 관련해 가장 많이 사랑 받았던 그룹은 역시 비치 보이스(Beach Boys).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라는 천재 뮤지션이 이끌었던 비치 보이스는 윌슨의 뛰어난 작곡 실력을 바탕으로 척 베리 스타일의 기타와 뛰어난 보컬 하모니를 들려줬다. 특히 기타와 화음이 적절히 조화된 'Surfin' USA'는 불후의 서프 명곡이 되었다. 그들은 그러나 1963년 이후 서프 뮤직을 그만 두고 필 스펙터(Phil Spector)에 영향 받아 음악 폭을 확장하면서 복잡한 스튜디오 실험에 힘썼으며, 그 결과 1966년 [Pet Sounds]라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을 남겼다. 그 음반이나 'Good Vibrations' 같은 싱글을 들어보면 비치 보이스의 놀라운 성취를 실감할 수 있다. 1966년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에 필적했다.
Blowin' In The Wind (Modern Folk)
1960년대 초반 미국 서부에서 서프 뮤직이 붐을 이뤘다면 동부에서는 포크가 널리 퍼졌다. '40년대 중반부터 피트 시거와 그의 그룹 위버스(Weavers), 그리고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에 의해 전통적인 저항가요의 형태로 발전된 포크 음악은 60년대 들어 진보적인 백인 대학생들에게 어필하면서 새로운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미네소타에서 온 뉴욕의 젊은 가수 밥 딜런에게 포크가 당도했다. 밥 딜런(Bob Dylan,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은 포크 음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포크의 혁신자였다.
밥 딜런이 처음부터 포크의 원형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음악에서 모범을 찾았고, 현대적인 포크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1961년 전통적인 멜로디에 근거한 셀프 타이틀 앨범을 낸 이후 밥 딜런은 곧 자신만의 언어와 음악을 만들어냈다. 'Blowin' In The Wind'라는 포크 명곡과 [Freewheelin'](1962) 등의 걸작 앨범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기타와 하모니카 단 두개의 악기와 비음 섞인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했다. 그러나 딜런은 그 단순한 음악 속에서도 깊은 사상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음악을 문학의 경지에 끌어올렸다.
예전 포크 가수들과 비교했을 때 밥 딜런의 가사는 보다 풍자적이고 쓰라렸으며 시적이었다. 운율과 의미 둘 다를 완벽하게 구현한 시인이자 사상가였다. 또한 그의 텍스트들은 미국 사회에 대해 저항의 뜻을 분명히 했고, 그는 정치적이 될 것을 주장했다. 밥 딜런의 프로테스트 포크는 환영 받았지만 모든 대중들이 그의 뜻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존 바에즈, 필 오크스 등 여러 포크 가수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싱어송라이터들에게 밥 딜런의 존재는 공룡과도 같았다. 소니 앤 셰어, 버즈, 더 밴드, 러빙 스푼풀, 터틀즈, 도노반, 사이먼 앤 가펑클 그리고 헤비 메탈 사운드를 제시한 지미 헨드릭스까지 모두 밥 딜런의 세례를 받은 뮤지션들이다.
밥 딜런 류의 정치적 포크와는 달리 편안하고 달콤한 상업적 포크 음악도 그 이전부터 동시대까지 크게 사랑 받았다.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는 포크송 'Tom Dooley'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비슷한 성향의 3인조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도 1963년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If I Had A Hammer’ 등으로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한 그룹들의 음악은 밥 딜런의 그것보다 도시적인 팝 음악의 전통에 보다 기대고 있었고, 저항색채가 훨씬 덜했다. 노래 부르기 스타일도 훨씬 부드러웠으며, 하모니는 매끄럽고 전문적이었다. 그러나 피터 폴 앤 메리가 1963년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녹음하면서 포크의 두 진영이 함께 포크 리바이벌을 이끌게 되었다.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Soul Music Part 1)
’50년대까지 흑인음악은 블루스를 거쳐 두웝 사운드를 유행시켰고 무엇보다 로큰롤을 파생시켰다. 하지만 미국 백인 자본의 철저한 흑백분리 고수 원칙과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가수들은 음반 한 장 제대로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흑인음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것은 인종 차별 폐지의 목소리, 즉 소울(soul) 음악이었다. 소울 음악은 흑인들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소울이란 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소울 음악은 단지 양식뿐 아니라 신념이었으며 귀속의식, 잠재력,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소울 음악이 미국 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중심에는 레이 찰스(Ray Charles),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샘 쿡(Sam Cook) 등의 걸출한 가수들이 있었으며, [모타운], [애틀랜틱]과 같은 흑인 전문 레이블이 든든히 뒤를 받쳐 주었다. 우선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등을 발굴했던 [애틀랜틱(Atlantic)] 레코드. [애틀랜틱]은 40년대 중반 터키계 미국인이었던 아메트(Ahmet), 네슈이 어테군(Nesui Ertegun) 형제가 재즈와 블루스를 위해 설립한 소규모 레이블이었다. 하지만 작곡자 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Jerry Wexler)를 영입한 이후 흑인음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부터 대표적인 흑인음악 레이블이 되었다.
[애틀랜틱]의 대표가수는 레이 찰스. 1930년 조지아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 다행히도 장애를 겪기 전 피아노를 배워 10대 후반까지 냇 킹 콜 풍의 가수이자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대부분의 소울 가수들이 교회 출신이지만 레이 찰스는 예외였다. 그러나 그는 R&B 스타일에 가스펠의 요소들을 혼합했다. 레이 찰스는 1959년 ‘What’d I Say’의 히트로 백인들에게 인정 받은 첫 번째 흑인가수가 되었는데, 그 곡에서 보면 리드 보컬에 답하는 가스펠 스타일의 ‘주고 받기(call and response)’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레이 찰스가 다른 소울 가수들과 구별되는 뛰어난 재능은 컨트리, 리듬 앤 블루스, 재즈를 가스펠과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밴드 편곡은 컨트리와 블루스적인 요소들을 혼합했고, 그의 피아노 연주는 가스펠에서 영향 받았다.
야성적이고 독특한 무대매너 때문에 ‘미스터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은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의 혁신자였다. ‘소울 브라더 넘버 원’이고도 불리는 그는 침례 교회에서 가스펠을 배웠고 50년대 중반 스와니스(Swaness)라는 가스펠 그룹에서 활동했다. 브라운은 가스펠을 통해 세속적인 주제를 노래했으며, 극적이고 정력적인 발성으로 무대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듯 라이브 공연에 몰입했다. 1963년도의 전설적인 음반 [Live At The Apollo]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공연 실황이다. 또한 그는 ‘Out Of Sight’(1964), ‘Papa’s Got A Brand New Bag’ 같은 곡에서 보듯이 아프리카 토속의 폴리 리듬과 멜로디에 근거한 새로운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바로 펑크(funk)였다. 브라운은 소울과 펑크(funk) 무브먼트에 둘 다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한편 자동차의 도시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에서는 또 하나의 흑인 사운드가 탄생하고 있었다.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창설한 [모타운(Motown)] 레코드였다. 베리 고디가 직접 발표한 ‘Reet Petite’와 재키 윌슨(Jacky Wilson)에게 준 ‘Lonely Teardrop’(1959)의 성공과 함께 [모타운]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그 곡들이 밀리언 셀러가 되자 베리 고디는 1959년 가족들에게 800달러를 빌려서 [모타운] 레코드를 설립했다. 잠시 자본난에 허덕이기도 했던 베리 고디는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스를 레이블의 주력 그룹으로 내세워 승승장구 해나가기 시작했다.
[모타운]은 말하자면 스타 양성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작곡가와 안무가, 프로듀서들을 일류로 배치시켰으며, 소속 아티스트에게 말투, 행동, 걸음걸이까지 마치 자동차 공정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스타가 되는 모든 과정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심지어 세련돼 보이도록 가수들에게 가난한 흑인들은 절대 걸칠 수 없던 턱시도, 중절모 등을 입게 했다. 베리 고디는 그렇게 만든 [모타운]의 세련된 이미지를 미국 주류에 어필할 수 있는 가스펠과 결합시켰다. 향후 베리 고디는 걸 그룹 사운드의 유행을 감지하고 걸 그룹들을 집중 양성해 마벨레츠, 마사 앤 더 반델라스, 그리고 다이애나 로스의 슈프림스(Supremes) 같은 슈퍼스타를 탄생시켰다.
I Wanna Hold Your Hand (The Beatles Part 1)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래식 전통이 강했던 영국은 상당히 절충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스키플과 트래디셔널 재즈 정도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같은 음악들은 흑인의 것이라는 이유로, 과격하다는 이유로 온전히 수용되지 못하고 여과장치를 거쳐 절충적인 형태로 전파되었다. 로큰롤 음악들은 섀도스(Shadows) 같은 밴드에 의해 인스트루멘틀로 필터링되어 영국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하지만 1962년 비틀즈가 첫 레코드 'Love Me Do'를 발표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이제 영국인들(그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비틀즈와 로큰롤 광기에 빠지게 된다.
비틀즈 열풍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들의 데뷔앨범 [Please Please Me]는 1963년 영국에서 6달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했다. 미국을 처음 공략한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1964년 초 발매 2주만에 미국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미국에서는 1964년 1/4분기 팝 시장 총 앨범 판매량의 60퍼센트를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4년 2월엔 미국 JFK 공항에 도착하는 비틀즈의 모습과 그들이 맞이하는 (동원된) 열성 팬들의 모습이 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비틀즈는 향후 10년 사이에 가장 순식간에 널리 광고된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들의 출발은 다른 록 밴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척 베리와 버디 홀리, 리틀 리처드의 로큰롤 패턴 그리고 흑인 두웝 그룹들과 에벌리 브라더스, 비치 보이스의 화음을 모범으로 삼았다. 비틀즈는 그러나 거기에 훨씬 더 강력하고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들은 대부분 적당히 빠른 4/4박자 템포를 사용했다. 로큰롤 특유의 2번째와 4번째 비트에 강세를 주면서도 리듬과 비트를 좀더 거칠게 몰아갔다. 'I Want To Hold Your Hand'만 보더라도 달콤하고 나긋나긋하기만 하던 당시의 곡들과는 확연히 구별됐다.
또한 리듬 기타(존 레논), 베이스(폴 매카트니), 리드 기타(조지 해리슨), 드럼(링고 스타) 등 4개의 악기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뤘다. 비틀즈가 처음부터 정립했던 이러한 완전한 록 밴드 형식은 당시 한 명의 가수가 다수의 백밴드를 동원하던 기존의 상하부체계(엘비스 프레슬리나 버디 홀리, 빌 헤일리 등이 모두 그랬다)와는 전혀 다른 멤버 전원이 동등한 위치에서 연주하는 평등 체계였다. 그래서 비틀즈는 각 파트에서 그 어떤 밴드들보다 균형 있는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다.
곡도 단순 명료했다. 노래 패턴은 12마디 블루스 곡들이라기보단 AABA나 ABAB 등 아주 평범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가사는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 그 주제는 옛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이었지만 구세대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하자면 '날 사랑해 줘', '추신 널 사랑해', '너의 손을 잡고 싶어' 같은 제목에서 보듯, 그들의 솔직함은 기성 세대들의 '엄숙주의'를 무너뜨리고 성역으로 여겨지던 언어의 형식을 파괴했다. 따라서 십대들은 그들의 직접적인 언어에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코드 역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즈는 그 단순한 코드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여기에 더해진 게 멤버들의 화음과 코러스였다. 보컬 솔로가 이끌어나가고 그 뒤에 멋진 하모니를 동반한 백 보컬과 코러스가 등장한다. 멤버들의 완벽한 조화가 비틀즈의 특장점이었다. 그들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과 행복해 보이는 텍스트들은 10대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 세대들까지도 로큰롤 그룹을 껴안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스스로 가사와 곡조를 만들 줄 알았다. 그들의 자작곡 능력이 동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월등했기 때문에 그 같은 성공을 가능케 했다.
British Invasion
비틀즈의 성공에 힘입어 여러 영국 밴드들이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른바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 시작된 것. 그 중 선봉은 단연 롤링 스톤즈(다음달 2부에 언급할 예정)와 머시 비트(Mersey Beat: '머시'는 리버풀에 흐르는 강) 그룹들.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 출신이었던 이들은 실제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주도하에 미국에 진출했다. 제리 앤 더 피스 메이커(Gerry & The Pacemakers), 피터 앤 고든(Peter & Gordon), 여성 가수 실라 블랙(Cilla Black) 등이 바로 엡스타인 사단의 뮤지션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피터 앤 고든의 넘버원 히트곡 'World Without Love'은 폴 매카트니의 작품인데, 과연 듀오의 멤버 피터 애셔는 당시 매카트니의 연인이던 제인 애셔의 오빠였다.
그밖에도 서처스(Searchers), 스윙잉 블루 진스(Swinging Blue Jeans), 홀리스(Hollies), 허먼스 허미츠(Herman's Hermits), 데이브 클락 파이브 등의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서 록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국내 영화 [태양은 없다]에 쓰인 'Love Portion No.9'으로 낯익은 서처스는 곧 미국에서 막 태동할 포크 록과도 비슷한 기타 사운드를 들려줬다. 'Needles & Pins' 같은 곡이 그러한 예. 스윙잉 블루 진스는 'Hippy Hippy Shake', 홀리스는 'Bus Stop',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한편 버디 홀리의 추종자들이었던 그룹 홀리스의 그래함 내시(Graham Nash)는 나중 포크 록 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의 멤버가 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들, 특히 머시 비트 그룹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미국의 포크 록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틀즈, 홀리스, 서처스 등 머시 비트 계열의 청명한 기타 리프는 밥 딜런을 비롯한 여러 포크 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으며, 또한 매우 서정적인 멜로디로 서구 팝 음악계에 음악적 낭만성을 제공했다.
연대별 주요 사건
1960년
비틀즈, 함부르크에서 공연.
진 빈센트가 사고를 당함.
트위스트와 다른 춤들이 인기 폭발.
[모타운], 스티비 원더와 계약.
에디 코크란 사망.
1961년
서프 록(surf rock) 미국 웨스트 코스트에 유행.
레이 찰스, 샘 쿡, 그리고 모타운 가수들에 의한 소울 음악이 광범위하게 퍼짐.
비틀즈, 리버풀의 캐번 클럽에서 유명해짐.
밥 딜런, 뉴욕에서 공연.
척 베리, 감옥에 수감됨.
스테레오 라디오가 FM 방송국에서 승인.
1962년
블루스 리바이벌 밴드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탄생.
비틀즈의 첫 레코드가 영국 차트에서 히트를 기록.
밥 딜런이 첫 음반을 발표.
많은 포크 가수들이 전통(traditional) 포크에서 프로테스트 송으로 전환.
포크 쇼 [Hootananny], ABC TV에서 방영.
1963년.
서프 뮤직과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가 미 전역에 울려 퍼짐.
걸 그룹들의 인기.
밥 딜런과 존 바에즈,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서다.
프로테스트 싱어들이 주로 커피하우스에서 포크를 연주.
프로토 펑크 넘버 'Louie Louie' 발표되다.
영국 언론에서 '비틀마니아(Beatlemania)' 현상을 보도.
첫 카세트 레코더가 팔림.
1964년
비틀마니아 그리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에서 시작됨.
제임스 브라운, 펑크(funk) 시작.
킹크스(Kinks)가 기타 디스토션을 대중화시킴. 그리고 비틀즈가 피드백을 사용.
무그 신서사이저가 발달됨.
디제이 앨런 프리드, 짐 리브스, 샘 쿡 사망.
1965년
밥 딜런과 더 버즈가 포크 록을 시작.
12현 전자 기타가 포크 록 악기로 유행.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그레이트풀 데드가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키델릭 댄스 홀에서 연주.
켄 케세이의 애시드 테스트 콘서트가 널리 퍼짐.
퍼즈 박스 디스토션 장치와 최초의 트랜지스터 마이크가 나옴.
1966년
비치 보이스, 테마 앨범 [Pet Sounds] 발표.
비틀즈의 마지막 콘서트.
비틀즈가 'Rain'이란 곡을 녹음하면서 처음으로 테이프를 되돌리는 백워드 기법 사용.
프로토 펑크를 연주하는 반항적인 개러지 밴드들 출현.
많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약물 관련 노래들을 금지.
사이키델릭 나이트 클럽에서 현란한 불빛 쇼가 인기 폭발.
밥 딜런 치명적인 오토바이 사고를 당함.
1967년
휴먼 비인(Human Be-In) 운동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남.
FM 라디오에서 앨범에 기반한 록 프로그램을 허용함.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출시 이후 앨범들이 싱글의 인기를 물려받음.
더 후(The Who)와 지미 헨드릭스가 무대에서 기타와 각종 악기들을 파괴한 것으로 유명해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이 개최됨.
모노 레코드가 점차 폐기되기 시작.
지미 헨드릭스와 크림(Cream)에 의한 프로토 헤비 메탈 등장.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오티스 레딩 사망.
1968년
자메이카에서 스카로부터 레게가 발전.
제임스 브라운이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를 녹음.
일렉트릭 플랙(Electric Flag), 재즈 록을 녹음.
딜런 그리고 다른 곳에서 컨트리 록 스타일을 시작.
버블검 음악, 젊은이들과 10대 이전의 아이들을 강타하며 시장 형성.
영국에서 무디 블루스(Moody Blues)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하며 아트 록을 시작.
랄프 네이더(Ralph Nader, 전 녹색당 당수)가 시끄러운 록 음악이 청각을 해친다고 경고.
아이언 버터플라이(Iron Butterfly)가 미국에서 헤비 메탈을 유행시킴.
1969년
우드스탁과 알타몬트 페스티벌 개최.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 록 퓨전 레코드 [Bitches Brew]를 녹음.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에벌리 브라더스, 패츠 도미노, 리틀 리처드, 제리 리 루이스 오랜 공백을 깨고 순회공연으로 돌아오다.
더 후가 록 오페라 [Tommy]를 연출.
존 레논과 오노 요코, 평화를 위해 '베드 인(bed in, 침대에 드러누워 꼼짝 안 하기)' 시위에 돌입.
짐 모리슨이 마이애미에서 외설적인 행동으로 기소됨.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존스 사망.
1960~1969 : 빌보드 넘버 원 싱글 25 (괄호 안은 1위에 머문 기간)
1 Hey Jude The Beatles (9주), 1968년
2 The Theme From A Summer Place Percy Faith (9주), 1960년
3 Tossin' And Turfin Bobby Lewis (7주), 1961년
4 I Want To Hold Your Hand The Beatles (7주), 1964년
5 I'm A Believer Monkees (7주), 1966년
6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Marvin Gaye (7주), 1968년
7 Aquarius / Let The Sunshine In (The Flesh Failures) The 5th Dimension (6주), 1969년
8 Are You Lonesome To-night? Elvis Presley (6주), 1960년
9 In The Year 2525 (Exordium & Terminus) Zager & Evans (6주), 1969년
10 It's Now Or Never Elvis Presley (5주), 1960년
11 I Can Stop Loving You Ray Charles (5주), 1962년
12 Love Is Blue Paul Mauriat (5주), 1968년
13 Big Girls Don't Cry 4 Seasons (5주), 1962년
14 Big Bad John Jimmy Dean (5주), 1961년
15 Sugar Shack Jimmy Gilmer And The Firebails (5주), 1963년
16 Honey Bobby Goldsboro (5주), 1968년
17 To Sir With Love Lulu (5주), 1967년
18 Cathy's Clown Everly Brothers (5주), 1960년
19 People Got To Be Free Rascals (5주), 1968년
20 Get Back The Beatles with Billy Preston (5주), 1969년
21 The Ballad Of The Green Berets SSgt Barry Sadler (5주), 1966년
22 Sherry 4 Seasons (5주), 1962년
23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5주), 1964년
24 Sugar, Sugar The Archies (4주), 1969년
25 (Sitting On) The Dock Of The Bay Otis Redding (4주), 1968년
1960~1969 : 빌보드 차트에서 가장 장수한 싱글 8곡
1 The Twist Chubby Checker (39주), 1960년 18주, 1961,62년 21주
2 Running Bear Johnny Preston (27주), 1960년
3 Sunshine Of Your Love Cream (26주), 1968년
4 Finger Poppin' Time Hank Ballad & The Midnighters (26주), 1960년
5 Moon River Henry Mencini (26주), 1961년
6 Never On Sunday Don Costa (26주), 1960년
7 Sixteen Reasons Connie Stevens (24주), 1960년
8 Sweet Nothin's Brenda Lee (24주), 1960년
1960~1969 주요 아티스트
남자
Elvis Presley
Ray Charles
James Brown
Marvin Gaye
Bonny Vinton
Chubby Checker
Brook Benton
Jackie Wilson
Roy Orbison
Sam Cooke
Bobby Darin
Bobby Vee
Dion
Ricky Nelson
Frank Sinatra
여자
Brenda Lee
Connie Francis
Dionne Warwick
Aretha Franklin
Petula Clark
Mary Wells
Nancy Sinatra
Lesley Gore
Etta James
Dusty Springfield
Carla Thomas
Tammi Terrell
Dianh Washington
Pattie Page
Dee Dee Sharp
그룹 및 듀오
The Beatles
The Supremes
The Beach Boys
The Temptations
The Rolling Stones
The Miracles
Dave Clark Five
Hermans's Hermits
The Drifters
The impressions
Four Tops
The Everly Brothers
Herb Alpert/The Tijuana Brass
The Shire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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