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명시감상 {사상의 꽃들} 15권에서
택배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형제가 이 세상을 떠나갔을 때에도 우리는 울고, 대학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 또는 학생회장선거나 국회의원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에도 우리는 운다. 뜻밖의 홍수와 화재를 당했을 때에도 우리는 울고, 너무나도 때 이르게 실직을 하거나 이 세상의 꿈을 상실했을 때에도 우리는 운다. 운다는 것은 그 엄청난 상실감과 좌절감 때문에 비롯된 생리적인 현상이며, 우리는 이 현상들을 슬픔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슬픔은 여러 가지 복잡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감정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슬픔은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이면서도, 역사 철학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정신불열증, 불안과 공포, 회의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등의 기원은 슬픔이고, 따라서 슬픔은 기쁨과는 반대방향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이 크나큰 장애를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슬픔을 물질화(상품화)시킨 시이며, 이 ‘슬픔’이 ‘발송자 미상’의 택배로 왔다는 ‘가상의 현실’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매우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부터가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왜냐하면 슬픔은 물건이 아니며, 따라서 슬픔은 택배로 보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고 주소도 없기 때문에 어느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고,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겨보지만, 그러나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도 않는다.” 아주 얇은 슬픔도 있고, 매우 깊은 슬픔도 있다. 풋감처럼 떫은 슬픔도 있고, 청양고추처럼 매운 슬픔도 있다. 가벼운 슬픔도 있고, 무거운 슬픔도 있다. 슬픔에도 여러 차원의 슬픔들이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슬픔이 배송되어 왔나라고 정호승 시인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그러나 매우 심각하게 되물어 본다. 슬픔은 상품도 아니고, 어떤 물질도 아니며, 따라서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가상의 현실은 그러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시인의 심리적 상황의 반영일 뿐이며, 이 심리적 상황이 그의 [택배]의 시적 주제로 승화된 것이다. 슬픔이 슬픔을 낳고,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으며, 이 수축과 확산의 힘이 정호승 시인의 [택배]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두 눈이 멀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야 할 목표와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보낸 슬픔이며, 그 슬픔과 날이면 날마다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 슬픔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슬픔도 없고, 택배로 주고 받을 슬픔도 없다. 슬픔의 출생지도 모르고, 슬픔의 창안자도 모르고, 슬픔의 얼굴(진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러나 슬픔은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나를 괴롭히고, 이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받아보게 만든다. 나의 슬픔이 또다른 슬픔을 낳고, 따라서 이 동병상련의 마음이 이 엄동설한에 사랑을 잃고 따뜻한 밥과 국과 잠잘 곳을 잃어버린 그의 이웃들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게 한다. 택배로 포장된 슬픔은 수축의 힘이 되고, 그 슬픔의 진실(얼굴)을 보려는 힘은 확산의 힘이 된다. 슬픔이 슬픔으로 모여들고, 슬픔이 슬픔으로 모여들어 그 힘을 비축한 슬픔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찾아나서게 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라는 시구나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라는 시구는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시구이며,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동병상련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고, 초록은 동색이다라는 말도 있다. 슬퍼하는 자는 슬퍼하는 자들만을 보고, 슬퍼하는 자들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슬퍼하는 자들만을 바라보면서 그들과의 무한한 동료의식과 함께 공동체 의지를 발산시키게 된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그의 좌절감과 상실감, 즉, 그의 슬픔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의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진다. 이 세상의 삶의 장애물 때문에 사랑과 희망과 꿈을 잃고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그 슬픔의 존재를 역사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집요한 노력 때문에 그의 ‘삶의 철학’으로 승화된다. 사회적 불의 때문인지,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과 자원의 분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슬픔의 기원과 그 존재 이유를 규명하려는 너무나도 분명한 목표와 그 공동체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을 때, 이 슬픔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새싹이 솟아나온다. 정호승 시인의 [택배]는 희망의 택배이며, 그의 개인의 의지와 공동체 의지가 마주쳐 ‘삶의 철학’으로 활활 타오른다.
*나는 지난 18년 동안 반경환 명시감상 20여 권을 통하여 1,170여 편의 시에 대한 글을 썼다. 단 한 푼의 원고료도 없고, 돈도 되지 않는 명시감상을 오직 한국 현대시인들과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썼다. 비록, 젊은 날처럼 공부할 시간은 없었지만, 틈틈이 공부하고 나의 글을 통하여 우리 시인들과 하늘을 감동시키고자 했었다. 70이 넘은 나이가 되도록, 이마에 땀을 흘리며 붉디 붉은 피로 썼다.
사상의 꽃들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