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86]터키(튀르키예)라는 나라?
터키(튀르키예)를 찾아가는 길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직선거리로는 8000km쯤 된다는데, 국가간 사정으로 에둘러 가니 13000km쯤 된다던가.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 꼬박 12시간. 그 좁은 좌석에서 옴짝달싹 못하니 참말로 뛰다죽을 노릇이었다. 아무 영양가 없는 국산영화 4편(정치를 희화화한 ‘특별시민’ ‘정직한 후보’ 등)을 봤는데도 아직도 멀었다. 전라도 표준말로는 ‘주니(지겨움)가 더럭더럭 나 못살겠다’이다. 게다가 기류가 불안정하여 두세 시간 기체가 쎄게 요동을 하는데, 옆지기 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사고가 하면 뼈조각 하나 추릴 수 없을 터인데, 남은 두 아들가족은 어쩔 것인가? 이건 아니다싶었다. 불안하여 눈도 붙여지지 않았다. 왜 아니겠는가? 시속 800km에 고도가 1만m도 더 된다. 아아- 무엇하러 이 비행기를 탔던가? 여행을 가자던 아내가 살짝 원망도 되었다. 새벽 4시에 용인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에서 연발한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2시간을 허비하고 12시간 비행 끝에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한 게 꼬박 20시간만이다. 휴우-, 이건 좀 심했다. 단지 하나 위로된 것은 아시아나 항공 기내식 두 끼만큼은 아주 준수했다.
내가 아는 어느 안경집 사장가족이 생각났다. 이 친구는 아들과 딸이 가히 천재여서 중앙일간지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는데, 예기치 않는 교통사고 등에 대비해 부부가 함께 택시나 승용차를 절대로 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법도 하지 않은가. 아내는 올해 하반기에 로마 그리스를 최소 3주는 가야 한다고, 가자고 여러 권 오금을 박았으나, 서너 시간 이상은 다시 타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 돌아올 길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일거에 해결하는 ‘마법의 약’이 있었을 줄이야. 귀국길 수면제 반 알을 먹으니 나도 모르게 7시간이 흘렀다. 갈 때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남은 서너 시간은 영화 한 편 보면 됐으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유럽여행을 욕심내볼까?
아무튼, 어떠한 사전지식 없이 아내의 권유로 터키 패키지투어 6박8일 길에 올랐다. 오죽하면 ‘이스탄불’을 여지껏 ‘이스탐불’로 알았겠는가. 중고교때 세계사 과목에서 들은 ‘동로마제국’ ‘오스만투르크’가 그 나라인지도 긴가민가했을 정도였으니. 2002년 월드컵 3,4강전에서 터키와 맞붙었을 때, 터키가 왜 우리나라(대한민국)를 ‘형제의 나라’라며 열광을 했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몰랐었다. 한마디로 무식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확연히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패키지 여행이 즐거우려면 ‘날씨복’‘손님복’‘가이드복’ 등 3가지 복福이 뒤따라야 한다는데,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열기구’는 날씨탓에 못탔지만, 손님복도 괜찮은 편이었고 ‘가이드복’ 은 제대로 탔다. 대체로 유럽지역의 가이드는 아시아지역 가이드들과는 달리 상당히 유식한 편인데, 이 친구는 그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같았다. 이스탄불대학에서 언어학와 역사를 전공했다는 40대 초반의 가이드는 시쳇말로 상남자였다. 자화자찬을 수시로 하는데도(완전 깔때기과) 조금도 밉지 않은 것은, 신화와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에 반한 때문이었다. 터키가 그렇게까지 신화와 역사가 범벅이 된, 오래된 나라이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나라인지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보다 8배 크기, 총인구는 8천여만명인데, 서울의 3배 크기의 이스탄불에 전체 인구의 20%가 산다고 한다. 이슬람국가는 아니지만 이슬람교도가 90%쯤 되는 나라,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우리는 하늘의 신성한 민족이다. ▲우리는 돌궐족의 후예이다. ▲우리는 코레(대한민국)와 형제의 나라이다”라고 적시돼 있고, 투르크TURK가 돌궐突厥의 음차音借이며, 고구려와 형제국가였던 돌궐족이 서진西進을 계속하여 아나톨리아반도인 이곳에 정착했고, 우리와 위도가 비슷해 사계절이 같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우랄 알타이어계열인지라 우리말과 100여 가지가 겹쳐 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우리는 왜 역사교과서에 그런 사실史實을 제대로 밝혀놓지 않은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도 ▲고구려는 천손天孫의 나라이다. ▲우리는 단군의 후예이다. ▲우리는 터키와 형제의 나라이다는 세 줄을 써넣으면 안되는 걸까? 한국, 한국인에 대한 호감, 친밀감이 유난히 강한 이 나라는, 한국전쟁때 15000여명이 참전하여 용감하게 싸웠던 고마운 나라인데도 말이다(전사자 724명 부상자 3626명).
동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세운 오스만투르크(제국)는 600여년이나 지속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붕괴된 터키를 1923년 민주공화국으로 우뚝 일으켜 세운 사람은 케말 파샤(파샤는 지도자라는 뜻)로 알려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11.10.)였다. 아타튀르크는 ‘투르크인의 아버지’란 뜻으로, 명실공히 튀르키예의 국부國父이다. 터키를 오늘날의 세속국가로 만든 초대 대통령인 그는 ‘1인다역’의 눈부신 주인공으로서, 전쟁영웅이자 민족주의 혁명가였으며, 공화주의자이자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가 숨진 9시 5분만 되면 모든 차량이 멈춘 채 그를 추모한다니, ‘존경받는 국부’는 부럽고 또 부러운 일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 통일정부를 백범 선생이 이끌었다면, 아마도 아타튀르크 못지 않은 존경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입맛이 못내 썼다. 모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친일파 청산도 못하고 초대 대통령도 지금 대통령처럼 잘못 뽑아도 한참 잘못 뽑은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남雩南 선생은 국부라고 할 수 없을 것같다. 아타튀르크는 재임하는 동안 엄청난 업적을 쌓아 오늘날의 터키의 초석을 닦았다고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고 한 나라의 전체 국민이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여섯 밤을 자면서 돌아다닌 지역을 어찌 다 기억하랴. 왼쪽 손을 펼쳐놓은 것같은 터키의 지도를 보자. 이스탄불은 소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초접점지역이다. 보르폴루스해협의 제1대교를 놓은 것이 현대와 SK건설이라니, 듣기만 해도 으쓱해진다. 그것뿐이랴. 마르마라해 지하터널도 뚫은 주역이며, 최근 섬에서 석유를 시추한 것도 삼성의 기술력이라니, 그러잖아도 해외에 살면 애국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데, 가이드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하지 않는가.
도착 다음날, 이스탄불의 모스크 한 곳(무조건 봐야 하는 아야소피아는 입장을 기다리기에 너무 긴 줄이어 돌아오는 날 관람하기로 했다)과 블루모스크(입장 불가) 외관만 본 후 토프카프궁전을 관람했다. 궁전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우리의 고궁과 판이했다. 술탄의 옥좌玉座 위 천장에는 무거운 추錐가 달려있었다고 한다. 술탄이 어떤 일을 잘못 판단했을 때에 추가 내려와 머리를 강타하게 했다던가. 신하들과 접견실은 더욱 재밌다. 긴밀히 나누는 얘기들을 밖에서 들을 수 없도록 모서리에 수돗물을 틀어놓았다던가. 박물관에는 믿거나말거나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돼 있었다.
영화 <벤허>의 전차경기장이자 콜로세움 공연장이었던 히포드롬은 블루모스크를 지으면서 나온 흙으로 메워 광장이 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독일 빌헬름3세가 오리엔트특급열차를 이용해 선물한 ‘정자PAVILLIAN’의 지붕 천장이 온통 금이라서 대낮에도 경찰이 감시를 하고 있는 히포드롬 광장에는 이집트에서 공수해온 60여m의 오벨리스크와 뱀 3마리의 청동기둥만이 말없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오오오-, 첫날부터 난관에 부닥친 게 ‘끼니’(음식)였다. 터키는 온통 ‘케밥(KEBOB)’의 나라였다. ‘불로 구운 요리’라는 케밥은 종류만도 100여종이라는데, 하루 세 끼, 반찬도 없이 형편없는 야채 샐러드에 케밥만 먹고 사는 종족같았다. 쌀밥이라도 내가 지은 아끼바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놈의 안남미는 숟가락으로도 집어지지 않는, 바람 불면 날아갈 것같은, 몹쓸 놈의 쌀이었다. 정말로 오마이갓이었다. 빵조차 밍밍하여 맛이 없으니, 나는 어쩔 바를 몰랐지만, 여행내내 눈으로 직접 본 고대도시의 유적들만큼은 눈을 휘둥그레하기에 충분하고, 보았지만 믿기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하여, 가이드에서 쪽지로 써 보여준 게‘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었다.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 등 무너지고, 일부 복원한 숱한 유적들은 경이로웠다. 괴이했다. 무섭기조차 했다. 불가사의不可思議 그 자체였다. 정말로 이게 고대도시인가? 얼마나 센 강진이 덮쳤길레 이 모양으로 망가졌을까? 사람들은 당시 몇 명이나 살았으며,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찍소리 한번 못하고 죽어갔을 그 사람들은 대체 무슨 기술로 이런 석조石造도시를 이룩했을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신혼여행 목욕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완벽하게 ‘신화神話의 세상’이었을까? 그 신화와 전설이 건축을 비롯한 생활 전반에 배여 있었을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셀추크도서관’의 무너진 기둥들을 보았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었길레 세계 3대 도서관이었을까? 귀족들의 정교한 아파트를 힐끗힐끗 훔쳐 보았다. 가이드의 해설처럼 정말 그런 시대와 세상이 존재했었을까? 노예들은 무슨 잘못으로 끝도 없는 그런 노동에 동원되었을까? 온통 수수께끼들이었다. 귀국하면 터키관련 책들을 찾아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평균 대여섯 시간의 버스로 이동하는 터키의 땅덩어리는 넓었다. 그 지루함을 달래주는 것은 신화를 텍스트로 한 현란한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터키는 국토 전체가 신화의 땅이자 성서聖書의 무대이므로 기독교인의 성지순례길이기도 하나, 곳곳에 이슬람이 모스크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꼭 직접 가서 보기는 봐야 하는데도, 버스로든 국내 비행기로든 고생이 막심한 터키여행, 터키관광 6종 시리즈를 비롯한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