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0
1월4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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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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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W5X1IJmBGo (강인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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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저무는 달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동업(同業) 혹은 협업(協業)한다는 것,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아는 절친한 친구끼리 의기투합해서 동업자로 일하다가 크게 다투고 갈라서는 일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수도 공동체 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주 체험합니다. 함께 일하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할 때도 많습니다. 그저 하나 예수님 따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각자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이 다릅니다. 사고방식이나 가치관도 다릅니다. 거기다가 다들 나름 한 고집합니다. 아주 소소한 작업, 밭을 일구는 일, 이랑을 만드는 일, 모종을 심는 일, 심지어 화물차 밧줄을 묶는 일까지도 각자 생각이 달라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때로 언성도 높아집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저는 홀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대명제 앞에 보여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협업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환상의 콤비, 찰떡궁합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메시아의 오실 길을 닦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 사명을 120퍼센트 완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실 불과 성령의 세례에 앞서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을 구원에 합당한 모습으로 준비시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일찌감치 그분의 제자가 될 사람들을 선발하고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는 모습을 확신한 세례자 요한은 공들여 양성시킨 제자들을 조금의 미련도 없이 그분께 인계합니다.
자신의 눈앞으로 지나가시는 메시아를 확인한 세례자 요한은 지체없이 외쳤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복음 1장 36절)
동시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에게 눈짓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제자들의 어깨를 툭 치고, 등을 떠밀면서, 저분을 따라가라고 귓속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교육시킨 애제자들을 떠나보낸다는 것, 스승으로서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 바라보고 환호하고 박수 치던 사람들이 한명 한명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상실감이랄까 허탈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공들여 쌓은 탑들을 떠나보냈습니다.
새로운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환히 떠오르도록, 멋진 배경이 되어준 세례자 요한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저무는 달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막 신축된 초현대식 별장도 아름답지만, 허물어져 가는 고성(古城)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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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취 지향적 인간, 시스템 지향적 인간>
어떤 분들은 교회 위기를 말하면서 가톨릭에서는 인기강사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유튜브 시대인데 저에게 콘텐츠도 많으면서 왜 유튜브 채널을 만들지 않느냐고 나무라듯 충고합니다. 재능 낭비라는 것입니다.
현시대 상황에 맞춰 인기 있는 사람들이 더 인기 있어져서 신자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줘야 지금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목이 인기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가톨릭교회 안에 얼마든지 훌륭한 강사님들이 많고 그분들이 유튜브나 여러 SNS 채널을 이용하여 좋은 말씀을 쏟아낸다고 해도 교회 분위기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말씀이 차고 넘치는 때입니다. 역사상 지금만큼 가톨릭 콘텐츠가 차고 넘친 적이 없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부족한 것은 콘텐츠나 유명강사가 아니라 현시대에 맞는 시스템입니다.
영원히 사랑받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신데렐라’라고 합니다. 계모 밑에서 못된 언니들과 살면서 요정의 도움을 받아 왕자와 혼인한다고 하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런 일이 거의 벌어질 수 없음을 앎에도 우리는 신데렐라의 성공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데렐라가 왜 사랑받는지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이나 계모는 왕에게 잘 보여 왕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성공, 혹은 성취 지향적 성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왕자와의 혼인을 위해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향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모로부터 자라면 아이들은 이런 성취 지향적 인간이 됩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잘해야 하고, 학원도 잘 다녀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배고픔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남보다 잘하려 하고 경쟁에 이겨 성취를 이루어내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을 믿고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은 “내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어!”입니다.
하지만 내가 빠져서 되는 일이 없다면 인생을 잘못 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존되도록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해도 자신과 비슷한 평생 고생만 하는 자녀를 탄생시킵니다.
신데렐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데렐라는 요정을 만나 모든 성취를 이룹니다. 요정이 다 해줍니다. 엄마에게 부족했던 사랑이 요정을 통해 채워진 것입니다.
이때 갖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이미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실패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유리구두처럼 매력을 흘리고 다닙니다. 잘 보이려고 특별히 노력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왕자도 그 유리구두에 홀려 하인처럼 집안 청소를 하는 신데렐라를 찾아냅니다.
그녀의 언니들이 왕궁이라는 시스템에 들어가려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녀는 왕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삶의 시스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나를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나의 시스템 안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때문에 자신은 빠져도 모든 일이 잘 돌아가게 만듭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책 중 ‘나는 네 시간 일 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주일에 네 시간만 일하면서도 수천, 수억을 벌어들입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가족과 함께 즐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미국의 큰 부자는 “여러분이 잠을 잘 때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파는 사람들이 아닌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파는 사람들이고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당신 개인의 성취로 세상 사람들을 당신께 모아들이려 하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때 잠깐 반짝하고 더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성취가 아닌 시스템을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당신은 빠질 생각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그저 교회를 세워놓고 교회가 당신 일을 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 당신은 빠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성취한 분이시므로 매력을 흘리고 다니십니다. 그 매력을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아라!”, 혹은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당신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교회라는 것을 세워 성취하려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도 성령을 보내시며 교회를 끊임없이 응원하고 계시지만, 당신이 교회 안에서 돌아다니시며 어떠한 역할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만들어놓으신 교회 시스템 자체가 곧 당신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당신만 혼자 거룩하게 지냈다면 이렇게 오래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당신 수도회를 세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후배들이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때문에 행복하여 그분에게 영원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한 삶 자체가 나의 시스템입니다. 그다음 그 시스템 안으로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는 삶이 진정 성공한 삶이고 영원히 사랑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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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다큐멘터리 ‘우리들의 우주’를 보면서 지구에 계절이 생긴 이유를 알았습니다. 원시 태양계에는 지구와 가까이에 지금은 없어진 행성 테이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중력 때문에 테이아는 지구와 충돌하였고 그 충격의 여파로 지구는 23.5도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충돌로 떨어진 잔해들이 모여서 지금의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계절의 변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달은 지구의 회전축이 23.5도 기울어질 수 있도록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달의 인력이 조수간만의 차이를 만들면서 다양한 생명이 살아가는 갯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양이 빛과 에너지를 지구에 보내고 있어도 45억 년 전에 원시행성 테이아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 결과로 달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구는 지금처럼 생명이 넘쳐나는 푸른 별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에는 마리아의 순명, 요셉의 순명이라는 선택이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였던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콜레스테롤’에 대한 강의도 들었습니다. 저도 혈액검사를 하면서 의사 선생님께 콜레스테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콜레스테롤이 조금 높은 편이라고 하였습니다. 콜레스테롤은 간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라는 이름은 각각 담즙과 고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chole- 와 stereos, 그리고 알코올을 의미하는 -ol 이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우리 몸에 염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은 염증을 없애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이 적으면 우리의 몸은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은 세포의 형성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세포의 뼈대를 이룬다고 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은 적당한 양의 콜레스테롤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의 양을 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근본적으로 생활습관을 건강하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깊어지면 나뭇잎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바람을 탓하는 것은 나뭇잎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탓하는 것도 나뭇잎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동안 충실하게 빛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바이러스를 탓하는 것은 팬데믹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치료약을 만들고,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여정에도 가라지와 같은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시편 23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악의 세력을 탓하고, 고통을 탓하는 것은 신앙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악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멀어지기보다는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마음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일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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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5-42: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 세례자는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면서,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는(참조: 1,31.47-49)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그 하느님께서 메시아에게 주신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된다.(참조: 3,27.29) 두 제자가 따른다는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며, 여기에 함께 지내는 일이 이어지는데, 단지 그날만이 아니라(39절), 그분과의 계속된 친교 안에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38절) 물으신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 제자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도가 담겨있다.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함께 지내면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오후, 네 시쯤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간은 단지 함께 있었던 시간을, 대화의 결실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고, 제자들에게 때의 중요성을, 그때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친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40절)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절) 하면서 시몬을 예수께 데려간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1-42절) 그래서 시몬도 그 친교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만남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만남은 그것이 짧은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분 안에 함께 머무르는 삶이 되고 그분을 구체적으로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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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을 듣고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 있던 어부들이었다는 공관 복음의 내용과 달리 오늘의 말씀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요한 복음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요한 복음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다르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는 모든 이를 향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업적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초대를 받은 모든 이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된 “묵었다”의 본뜻은 ‘머물다’입니다. 그리고 머문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서 믿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믿음에 대한 표현이고, 이것으로 두 제자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안드레아는 형인 시몬, 곧 베드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안드레아는 다시 베드로에게 증언합니다. 요한 복음의 부르심은 이렇게 증언을 통하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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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이 성서 구절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자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제자들의 요구에 무엇이라 말씀하지 않고 직접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진정 메시아이심을 여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쭈었으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똑같이 물으시자, 예수님께 가서 묻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 묻습니다.
곧, 이 물음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믿는다면, 바로 ‘너희가 찾는 메시아이고, 믿지 않으면,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단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각기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맡겨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강요 같은 부르심이 아니라, 당신에게 와서 직접 보고, 느껴서 따를 만 한지를... 자신의 인생, 자유, 목숨을 걸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면, 충실하고 굳건하게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학식 있고 똑똑한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소박하게 당신을 따를 사람을 부르는 것입니다.
곧, 어떠한 이익이나 목적을 얻기 위한 응답이 아니라, 진지한 부르심에 대한 가식 없는 응답, 엄마의 부르심을 듣고 ‘네’ 하고 달려가는 아이의 응답 같은 그런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베드로의 부르심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평생을 고기잡이로 보낸 뱃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는 솔직함과 굳건함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따르는 것을 변치 않고 충실하게 지킬 믿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이런 베드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첫 대면에서 ‘게파 곧 반석’ 이란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어떤 역할, 일에 대한 부르심이라 하더라도.. 강요나 압박이 아니라, 불림 받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성서 구절을 묵상하는 내내,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유롭게 우리를 부르시고, 자유롭게 응답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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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이냐시오 신부님]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우쳐 주는 작은 목소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어긋난 우리를 바로 잡아주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삶의 진리를 새롭게 체험하게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 경험한 일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본당 관할구역에 있는 한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그 날도 몇 명의 신자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양로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께서 매달 찾아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조그마한 선물이라며 포도주 한 병을 내놓으셨습니다. 날씨도 더웠고, 저는 제가 할머니들을 위해서 뭔가 해드려야 한다는 입장만을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포도주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자세히 포도주를 보니 그 포도주는 국산으로 지하철 티켓 두 장 값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참 싼 포도주도 있구나 했는데 사제관 식사를 도와주시는 자매님께서 옆에서 듣고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네요."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좋은 선물, 값비싼 선물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저는 그 한마디의 말씀에 큰 방망이로 머리를 맞는 듯 큰 충격을 받았고, 그동안의 삶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것, 좋은 성과,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 보니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보는 눈과 귀가 멀었나 봅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 포도주는 지금 제 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전합니다. 어부인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부로서 어디서 고기잡기가 좋은지 더 잘 아는 베드로,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지쳐 있었던 베드로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더 해보겠노라며 다시 그물질을 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가 왜 처음 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호수로 나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복음서가 전하듯 색다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외면해 버려도 상관이 없을 법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에 그는 놀라운 결실을 맛볼 수 있었고, 고기낚는 어부로서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지만 그래서 소홀할 수 있는, 지나쳐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외면하고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잊고 살았던 진실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시장 사람의 성실과 정화원들의 정성된 빗질로 유지되는 깨끗한 거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어린아이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웃이 건네는 인사와 미소. 우리 주위엔 나를 가르치는 작은 목소리를 많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랑을 담은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작은 목소리가 주는 작은 감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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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뒤따라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며 어떠한 일상을 지내고 계신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따르고자 할 때 그분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원의가 생깁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거나 성당에 가서 봉사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분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분의 축복을 가득 받고 싶어서 성당에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려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분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 아이가 건강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은 삶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입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상의 종말에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지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셨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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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사람>
요한 1,35-42 (첫 제자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분의 사람>
그분 찾아
나에게 오신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그분이 아니라
그분의 사람이랍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는
그분의 사람 말이지요
그러니
애써 그분을 찾아
나에게 오신 벗이여
미련 없이
나를 딛고서라도
나의 그분께로 가세요
그러면
나의 그분을
반드시 만나실 테니
그때에 비로소
그대의 그분으로 모시고
그분의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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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문제를 알면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해결하기보다 남을 탓하기에 급급해합니다. 소이 잘 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면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37) 하고 말하였습니다. “바라봄의 절정은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분을 우리가 비로소 바라보는 것입니다.”(발타살)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나를 애타게 찾으셨고, 언제나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스승 노릇을 하지 않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하며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것이 요한의 진심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을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주제를 알고 분수를 지켰으며 있어야 할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쁨을 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삶의 자리,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우리의 삶을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피 2,15)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희생 봉사하는 삶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사랑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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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의 욕망 충족 이론을 단순하게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 = 소유(have) / 욕망(want)
행복은 욕망을 줄이거나, 소유를 늘릴 때 커진다는 것을 이 공식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소유를 놀리는 방법은 ‘채움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욕망이 너무 크면 소유가 다른 이에 비해 많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두 번째 방법이 중요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것으로 ‘비움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공식의 분자(소유)와 분모(욕망) 중 어떤 것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편하게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브릭만과 그의 동료들은 거액 복권 당첨자와 척추 손상 환자들의 삶을 조사했습니다. 대다수의 복권 당첨자들은 당첨 초기에 행복감이 급격하게 상승했지만, 1년이 되지 않아 행복도가 당첨 이전 수준 또는 그 이하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고로 사지가 마비되어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척추 손상 환자들은 초기에는 절망감에 휩싸여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복도가 서서히 회복되어 나중에는 복권 당첨자들보다 더 행복도가 올라갔습니다. 소유를 늘리는 채움의 삶보다 욕망을 줄이는 비움의 삶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라고 물으십니다. 소유를 찾는지, 욕망을 찾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삶을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모범은 채움의 삶일까요? 아니면 비움의 삶일까요? 바로 비움의 삶이었습니다. 욕망을 줄이면서 참 행복의 길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복을 보았기에, 그들은 큰 기쁨 안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비움의 길을 따라서 참 행복의 길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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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라” 또 “보라>
성탄 시기에 들어와 우리가 계속 읽는 요한복음 1장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신 얘기로 시작되는데 말씀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도 맞아들이지도 않았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주님을 증언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아 그리스도이신지 궁금하여 묻습니다.
그저께 복음에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답하고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재차 묻자, 요한은 다시 “아니다.”라고 답하고, 다시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어저께 복음에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요한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똑같은 증언을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탄생하시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주님을 사람들이 몰라보고 자기를 향하자 거듭 자기가 아니라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또 “보라”
이 두 번의 초대에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이 갈립니다. 본 사람이 제자들이고 보지 않은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 보고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보지 않고 그래서 돌아선 사람은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보는 것은, 제자 되는 것의 시작, 곧 출발점입니다. 흘깃 보든 똑바로 보든 보는 것이 소위 관상이고, 관상이 제자 되는 것의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그래도 제자가 되려면 제대로 보기 위해서 방향을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흘깃 보든, 곁눈질로 보든, 지나치며 보든, 정면으로 보지 않던 사람은 방향을 틀어 주님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따라가야 합니다. 먼발치에서 또는 먼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려면 가까이 다가가 또렷이 봐야 하고, 더 나아가 함께 살며 주님을 더 그리고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觀察, 이것이 관상의 더 깊은 단계이고, 이것이 어쩌면 클라라가 얘기하는 관상의 두 번째 단계 곧 “Considera”의 단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은 관찰을 통해 통찰하게 되었을 것이고, 스승 세례자 요한의 증언대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심증을 확실히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다른 제자들도 데리고 가 주님의 제자가 되게 했을 겁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라고 한 대로 봄으로써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우리도 보라는 주님은 보지 않고 세례자 요한만 보고 돌아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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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행복한 제자의 삶>
- 주님을 증언하는,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삶 -
-“신부님, 충전 잘하고 왔습니다. 수도원에서 힘 받아서 속세에서 홧팅하면서 살아가야지요! 약발 떨어질 때쯤 충전하러 또 가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멜라니아”
조용히 며칠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 안에 머물다간 아름다운 분의 카톡메세지입니다. 즉시 수도원 하늘길 사진과 더불어 드린 답신입니다. 이번 수백통 드렸던 성탄 카드 답신의 전형적 사진에 문구입니다. 이름 앞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형제님(또는 자매님)’이란 말이 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새해 수도원 하늘길 축복선물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긴 축복 말씀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세 말마디가 계속 마음에 긴 울림을 줍니다.
1.“베네딕도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 ‘Lord, I love you!(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전 수십년동안 왜관 수도원에 사셨던 독일 출신의 노수사님의 노동으로 거친 손을 보며 짧은 독일어로 ‘이히 리벤 지(Ich liben Sie;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말하면, 활짝 웃으면서 ‘정말’ 하고 한국어로 대답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사랑한다 고백하면 정말 고백대로 이루어지니 우선 용감하게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2.“We thank God for the gift of Benedict 16”(우리는 베네딕도 16세의 선물에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새해 첫날 삼종기도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3.“Benedict spent his life seeking the face of Jesus(베네딕도는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았다)”라는 롬바르디 신부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증언자로 주님의 소명에 충실했던 주님의 제자, 참으로 성인답게 사셨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한폭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귀감이 되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차례대로 그 중요한 내용을 살펴 봅니다.
1.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활짝 사랑의 눈이 열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 보며 최초로 자기 제자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참으로 순수한 영혼의 요한 세례자입니다. 정말 제자든, 이웃이든 사랑한다면, 그 최고의 사랑은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사심없는 순수한 사랑이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때가 되자 미련없이, 집착함 없이 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떠나 보내는 참으로 자신을 비운 무욕의 겸손한 요한 세례자의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질투심이나 경쟁의식이 전무해 보이니 말입니다. 문득 어제 쓴 “겨울나무가 좋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본질(本質)로 서있는 겨울나무가 좋다
하늘만을 향해 살아왔기에 저리도 훌쩍 컸나 보다
별만을 사모(思慕)하였기에 저리도 초연(超然한)가 보다
수도원 하늘길옆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겨울나무들”
침묵과 고독중 겨울 동안거(冬安居)중인 겨울 배나무들이 흡사 기도하는 수도승들 같습니다. 이런 본질로 서있는 겨울나무같은 순수한 영혼의 사람이 바로 요한 세례자입니다.
2.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자기를 따라오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며 물으십니다. 아, 이 물음은 주님을 찾는 구도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승입니다. 어찌 수도승뿐입니까! 모두가 내면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그리워, 하느님을 목말라 하느님을 찾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편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의 그립나이다.”(시편63,2)
저절로 연상되는 요한1서 말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애타게 끊임없이 찾는 자들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의 씨가 상징하는 말씀이, 성령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1요한3,9)
이런면에서 주님을 증언하면서 이웃을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도록 이끄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무죄한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주님의 증언자들을 일컫는다 생각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도 그렇습니다.”(1요한3,10ㄴㄷ)
참으로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자기 형제를 진정 사랑하는 주님의 증언자는 요한 세례자처럼 자기 제자나 형제를 자기가 아닌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3.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자가,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이가 제자입니다. 여기 ‘머물다(stay)’라는 그리스어로 ‘메네인(menein)’은 ‘살다(abide)’ 또는 ‘머무르다(remain)’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바로 제자들의 이 말씀 안에는 스승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보고 배우며, 항구하고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은 염원이 배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소명에 응답한 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늘 당신 안에 머무르기를 바라십니다.
4. “와서 보아라.”
감격에 벅찬 주님의 환대의 초대입니다. 늘 우리를 “와서 보라”고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와서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팜프렛 사진과 함께 씌어진 성구가 바로 “와서 보라”란 초대입니다.
정말 "와서 보아라"할 정도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우리의 삶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주님이 없는 집, 정말 얼마나 썰렁하고 쓸쓸하고 공허하겠는지요! 모든 것 다 지녔어도 그 안에 주님의 기쁨이,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희망이,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빛이, 주님의 생명이, 주님의 영이 없다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일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에 감읍하여 응답함으로 마침내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합니다. 참으로 생애에 획기적 회개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5.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살아 있는 진리, 메시아 주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지체없이 자기 형 시몬을 만나자 주님을 증언, 고백함으로 그를 예수님께 안내함으로 소명에 응답하게 합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진리이신 주님의 체험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이것이 진정 최고의 이웃 형제 사랑입니다.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눈여겨 보시며 이르십니다.
6.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내심 시몬 베드로를 기다려왔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신의 한 수와도 같이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된 축복받은 제자들입니다.
한두 번으로 끝나는 소명의 응답이 아니라, 죽는 그 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다음 제 좌우명 기도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순례자되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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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그리스도를 만났는가?>
오늘 복음(요한1,35-42)은 '첫 제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보며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자 요한의 그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만납니다.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고, 그는 자기 형 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복음화와 선교의 모습'입니다.
내가 먼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너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화이고 선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그리스도를 만났는가?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애쓰고 있는가? 그 애씀이 바로 말씀을 가까이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일이 아닌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내가 그리스도이신 메시아를 만나면, 이렇게 변할 수 있고, 또 이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오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마산교구 사제와 부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3명의 사제와 1명의 부제가 탄생했습니다.
어제 서품식 때의 강론이 마음에 남아 있는데... '부제'는 '자기는 없고(不) 그리스도만 있는 부제', '사제'는 '자기는 죽고(死) 그리스도만 살아 있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없고 그리스도만 있는 것! 내가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에서 드러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가까이하고, 죄가 없어진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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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32fNY-16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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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하느님의 뜻은
만남으로
더욱 빛납니다.
성탄도
부활도 모두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의 선물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됩니다.
만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모든 만남의
여정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된 만남입니다.
만남으로
사람의 삶이
변화됩니다.
메시아와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집니다.
메시아와의 만남은
우리의 일상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은
이와같이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만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육화된 말씀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우리는 치유되고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삶이란
마침내 가장
알맞은 때에
메시아를 만나게되는
은총의 삶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만남의 소명에
충실한 만남의
일상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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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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