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 박영
냄비에 육수를 끓이려 멸치를 넣는다
멸치들은 포기한 듯 순종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하얀 눈알의 백내장 멸치만
입을 얼굴만큼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은빛 날개 휘날리며 하늘로 오른다는 시인의 넋두리에 속았지
어망에 발 담그고 꿈도 꾸기 전
멸치털이에 놀라 날아오르다 꼬꾸라지고
눈알 빠진 멸치는 눈인사 못하고 지나친 멸치
목 댕강 내장 쏙 뺀 멸치는 친근한 멸치
눈알 흰 멸치는 기가 센 멸치
피 말리듯 온몸 물기 말리며
염원은 염장으로
햇빛도 소금도 멸치의 길
고등어 횟집 서비스로 나온 멸치회무침은 잊어
다음 생은 멸치회 전문점에서 만나는 걸로
잡놈들 다 모아놓은
한봉지 싸게 값을 치렀지만
근본 없는 멸치라고 하지 않을게
기장멸치 외포항멸치 여수멸치 통영은 죽방멸치
맛있다잖아 봄멸치
그래요 그래요
눈알 내리깔게요
백내장 수술로 세상이 달라 보이면
악을 쓰던 입은 다물어질까요
--- <애지> 2023년 여름호
* 박영 시인
부산 출생
2006년 <애지> 등단
시집 『독백은 일요일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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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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