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인어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자신이 떠날 때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주어 행복을 빌어주는 거야. 지금 네 손에 들려있는 보석이 카이시야의 심장이지. 즉, 카이시야가 너에게 자신의 심장을 준건 네가 소중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나는 인어가 행복을 빌어준 존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까지 그 존재의 곁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아르시타의 마지막 말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는지 유난히도 밝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런가...’라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 거렸을 뿐이었다.
[참내, 카이시야는 이 인간의 기억 봉인할 때 감정까지도 봉인한 거야? 이 인간 도대체 뭐야? 왜 이렇게 무뚝뚝해?]
신경질적인 말투로 그녀는 말했지만 그녀의 눈과 입가에 장난기가 넘쳐흐르는 것으로 보아 진심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강유가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강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 말대로 그랬을지도 모르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는 강유의 모습을 보고 아르시타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뺨이 딸기처럼 불그스름하게(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으나 강유의 눈엔 그렇게 비춰졌다) 물들어 허둥대며 말했다.
[그, 그럼 약, 약속을 성립 시키도록 하지.]
“약속?”
강유의 물음에 아르시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 카이시야가 자신의 생명을 댓가로 너의 행복을 빌어줬다고 말했잖아? 그 약속을 성립시켜야 하니까. 내가 당신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당신이 행복해질 때까지만 이니까. 아! 내 정신 좀 봐라. 당신 이름이 뭐지?]
횡설수설한 아르시타의 말에 강유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다. 강유가 이름을 말하자 아르시타는 방금 전까지의 허둥대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어디 갔는지 없어지고, 완전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질 정도로 위엄 있고,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나 안내자 아르시타. 지금 이 순간부터 바다의 신 카인돌프님의 증거인 ‘카이시야’의 생명의 약속에 따라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 ‘이 강유’를 주인으로 섬겨 안내자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맹세한다.]
어둡지만 밝은 검은빛과 마치 구속하는 듯한 붉은빛의 사슬 같은 것이 아르시타를 에워쌌고, 그 사슬 같은 것과 그것에 감싸인 아르시타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강유의 손바닥 크기보다 더 작아졌다. 그리고 그 사슬이 풀리며 아르시타의 피부로 흡수 되었으며, 붉은빛과 검은빛의 사슬 모양이 아르시타의 피부에서 환하게 빛나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지?”
강유의 놀람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약속’이란 것을 성립시킨 후 아르시타의 모습이 조금 변했기 때문이다.
먼저 아르시타가 자신의 손바닥 크기만큼 작아졌고, 오른쪽 손목에는 붉은색의 투명한 팔찌를 왼쪽 손목에는 검은색의 팔찌를 차고 있었으며 맨발이었던 그녀의 발에 붉은 색의 천 같은 것에 검은 색의 작은 밧줄을 축소해놓은 것이 둘러 매여져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했던 그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약속을 성립시킨 거라고. 당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고. 그럼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은?”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 오는 목소리가 아닌 직접 귀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강유는 처음부터 상관하지 않았기에 놀라지도 않았고,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내가 기억을 되찾는 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말은 당신은 기억을 찾고 싶다는 것인가?”
아르시타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에효. 그럴 줄 알았어.”
아르시타는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강유의 손에 들려있던 보석을 마법 같은 것으로 들어올려 강유의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는지 강유의 복부를 강하게 쳐 강유가 그 보석을 삼키도록 했다.
“이게 무슨 짓...”
강유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이상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당신 기억 봉인을 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 당신 봉인 풀고 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당신이 그걸 먹음으로 그 보석이 당신의 육체와 융합 될 거야. 그럼 당신은 아프지도 않고, 당신에게 걸린 마법이나, 봉인이 다 풀릴 거야.”
아르시타는 강유가 듣던 안 듣던 상관하지 않는 다는 듯 팔짱을 끼고 강유의 머리 위에서 그의 몸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음.. 이제 거의 끝나가는 듯 하군.”
강유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점점 사라져 갔고, 그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강유의 몸에 갈무리 될 때까지 강유는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아아... 카이시야. 왜, 왜 나 같은 거 때문에...”
그 기운이 사라지고 강유가 처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가 기억이 봉인당하기 전으로 돌아간 듯 그 애처롭고도 안쓰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는 생각 없이 흘리며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돌아왔군. 뭐... 한동안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 일단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으니.”
아르시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가 주인으로 섬겨왔던 존재들이 그러했듯이 금방 충격에서 헤어 나와 밝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아르시타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만큼 강유에게 있어 카이시야의 존재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기 때문에...
“그만해. 이런다고 해서 카이시야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아르시타는 더 이상 강유의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기 싫은 듯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물도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지만 그는 아주 건강한 사람처럼 혈색이 좋았다. 그 것은 그가 그녀의 심장인 푸른 보석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시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어...?”
며칠 만에 겨우 입을 연 강유는 아르시타에게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말에 아르시타는 강유가 충격에서 헤어 나온 줄 알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시야... 그녀는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그녀가 태어나면 내가 그녀와 다시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할 수 있겠어...? 나는 그녀가 없으면 안돼... 그녀가 없으면 난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그녀가 이 세상에 없는데 행복해 봤자 뭐하겠어...”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강유의 흐리멍텅한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건...”
아르시타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천기를 거스르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거절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던 아르시타는 슬픈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힘으로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하지만 당신이 카이시야의 환생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주 불가능 한 것은 아니야.”
강유의 흐릿흐릿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내가 내 힘으로 카이시야, 그녀가 환생할 때까지 당신의 육체의 시간을 멈추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기다리면 되는 거야. 지금 당신의 나이가 18세지? 그렇다면 카이시야가 다시 태어나 18세가 되면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장담 못해. 그래도 좋아? 기다릴 거야?”
아르시타의 말에 강유는 세상의 모든 기쁨을 거머쥔 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기쁜 듯한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머금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천사의 얼굴로...
“좋아.”
곧 아르시타의 양쪽 팔목의 팔찌들과 양쪽 발에 감겨진 천과 그 천을 지탱시켜 주는 듯한 밧줄이 빛을 내더니 강유의 몸을 휩싸고는 사라졌다.
“당신 육체의 시간은 멈춰졌어.”
강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하는 줄 알았지만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놀랍게도 노랫소리였다.
“바람이여 나를 실어주오
내님 계신 곳으로 나를 실어주오
고통이 두렵겠느냐
죽음이 두렵겠느냐
내 이미 나와 얽힌 인연 모두 끊었으니
이 세상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느냐
내게 남은 것
내님 곁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것 마음 뿐
내님께 가련다
나의 미소에
활짝 핀 얼굴로 답하고
나의 서글픈 미소에
한 없이 흐르는 눈물로 답해주니
내 모든 마음 내님께 바치련다
내 이 세상에 남은 미련 없고
내님 없는 이 세상 필요치 않으니
바람이여 나를 실어주오
나를 내님께 데려다 주오”
강유가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자 아르시타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유의 노래가 끝나고 강유는 점점 잠에 빠져 들어갔다. 아마도 기다림이 강유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 될까봐 걱정한 아르시타의 배려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