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저주 속에 은총이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래 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애 3:1-16)
성경에서 고난(연단)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사역자는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는 물론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쑥과 담즙을 먹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잔을 앞에 놓고 아버지께 안타까운 기도를 드린다. 참으로 인간이라면 누가 이런 사역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이런 고난스런 사역을 자진하여 하겠다고 줄을 서 있는 형편이니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음식에도 쓴 것과 단 것이 있고, 인생의 삶에도 쓴 것과 단 것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쓴 것’이 복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
사람의 삶이 젊어서는 고생을 하더라도 늙어서는 평안해야 한다. 그러나 나중은 좋을지 알지만 당장은 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이라면 다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고난을 겸한 신앙생활을 싫어하는 신앙인들도 다 귀를 즐겁게 해주는 달콤한 설교를 찾아 날아가 그 나무에 둥지를 튼다. 사람은 쓴 것보다는 단 것을 좋아한다. 약을 먹어도 달콤한 것을 요구하고, 충고도 달콤하게 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약은 써야 맛이고, 충고 역시 쓰디써야 효과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투병하는 환자들이 자연에서 찾아낸 쓰디쓴 풀로 병을 고치는 것을 우리는 가끔 볼 수 있지 아니한가?
이렇듯 육신의 병도 쓴 약이 치료가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병들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쓴 약이 담긴 잔을 사랑하는 자에게 사정없이 퍼부어 주신다. 만성적인 고질병은 죽음으로만이 치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풀을 베기 위하여 낫을 날카롭게 갈 듯이, 하나님이 쓰실 일꾼들도 저주처럼 힘든 연단을 통과하게 하신다. 그 쓰디쓴 체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꾼(천사)들은 사람들에게 그 쓴 죽음의 잔을 전해주는 배달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저주의 나무에 달렸듯이 복 받기를 소망하기 전에 예수와 같은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갈 3:13). 저주를 통과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방패로, 상급으로’(창 15:1)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전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있겠는가? 이 복이 곧 신령한 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며 풍족하고 평안하여 감사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린애 신앙이다. 그런 신앙은 달콤한 만나(이것이 무엇이냐)를 먹으며 헤매던 광야에서의 표적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 전에 반드시 저주를 먼저 퍼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알 일이다. 예수는 우리의 모델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저주 받은 자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에 달리게 내어주시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 하심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먼저 자신이 부인되어야 하고, 부인되어야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예수처럼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소욕을 못 박음이다. 우리 육신의 소욕이 끊어져야 하나님의 소욕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한 선지자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强勸)에 의하여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죽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의 눈물을 흘리며 살다가 갔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었지만, 인간들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저주하신 고통의 삶이요, 신들린 미친 자의 삶으로 보일 뿐이었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을 추구하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은 거짓으로 가득한 위선이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지하는 능력의 삶일 것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은 나병환자들처럼, 화려한 세상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당신의 입에서 자주자주 쏟아져 나오는 복을 바라는 그 기도소리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한탄의 기도로 바뀔 때, 그때야 비로소 당신은 생명으로 발길이 옮겨지는 것이다. 욥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은 기도소리가 터져 나와야 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성경의 히브리어 ‘바라크’는 ‘축복하다’는 뜻뿐만 아니라 ‘저주하다’라는 뜻으로도 함께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어야 한다(왕상 21:13; 욥 2:9). 그래야 성경에 있는 축복의 말씀들이 자신에게 저주의 사건으로 닥쳤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이 죽어가며, 실제 체험한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 기록이다. 생명은 죽음 위에서만 피어나는, 피를 머금은 붉은 꽃이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나사로는 예수를 만났지만, 이제 우리들은 보혜사 성령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 그리스도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가득한 무덤으로만 찾아오시는 살리는 영이기 때문이다.
볼 수 있다는 우리, 들을 수 있다는 우리, 나병환자가 아니라는 우리에게는 진리의 보혜사는 절대로 오실 수가 없다. 건강하다는 자들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기 때문이다(막 2:17). 이처럼 하나님의 저주는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복의 문이다. 그 문은 저주를 받아 죽어야, 성령과 하나 되어 바람으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바늘구멍처럼 좁은 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를 먼저 전해 주어야 한다. 그 저주를 알아듣는 사람만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달콤하기만 한 ‘축복’이라는 당신의 그 소리는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어 지옥 자식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은 하나님의 저주 보따리 안에서 반짝이는 진주라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면 먼저 저주의 보따리를 받아야 한다. ‘축복’만을 떠벌려대는 것은 속임수요 장사치의 사기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저주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고, 그 저주의 보따리 안에서 복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섭리)이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화려한 ‘축복’만을 외치며, 너희가 구하기만 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얻을 것처럼 허황된 약속을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는 욕망의 마귀가 그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 4:1-11). 그래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은 가난과 고통을 싫어하여,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풍요(豐饒)와 다산(多産)의 신 바알을 숭배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바알을 숭배하며 축복 받았다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하여 슬픔의 노래를 불렀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2) 하였다.
신(神)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만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출 33:20-23).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오는 죽음, 그것은 신을 떠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귀향길이지 고독으로 오는 죽음의 병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 독생자를 잉태한 여인의 즐거운 친정집 나들이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믿음, 소망, 사랑을 이야기한다. 휘장이 찢겨지는 십자가 고통 없이는 사랑과 하나 될 수 없는데도, ‘축복’이라는 이름 아래, 진리를 알았고 진리가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었다며 창녀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고 있다(눅 15:13). 스스로 율법을 폐한 자유(?) 안에 사랑이 있는 줄 알고, 자유와 방종이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애매한 관념의 줄타기만을 열심히 하고 있다.
신(神)은 내 자신 안에서 자신과의 싸움, 피 흘리기까지의 처절한 싸움의 정점에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이다. 인위적인 교리적 방법으로 자신을 자학하는 고통 속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은혜라는 허황된 환상 속에도 그는 자리 잡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깨달은 사람들을 쫓아다니던,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리석은 방법들일 뿐이다. 얍복 나루에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록 씨름하며 만난 야곱의 하나님. 그 만남은 평안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 흘리는 고통이다. 설교자들이 말하는 그 평안은 사람들을 허송세월만 하게 만들 뿐이며, 또 그들이 스스로 자학하는 그 고행은 위선일 뿐이다.
진정한 구원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만나서 하나 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 사건이 내 걸레 같은 이 육신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은혜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을 하며 이루어나가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믿음은 피나는 싸움 끝에 피어나는 소망으로 가득한 꽃이고, 피어나는 꽃은 차고 넘쳐야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매를 맺고 잘 익어서 땅에 떨어져야 남에게 생명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라는 그 당신의 사역도, 당신 안에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생명이 되어 흘러넘치는 삶이 되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神)들린 무당들이 자기가 모시는 그 신이 스스로 되어서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듯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입이 되어 대언(代言)의 말씀으로 넘쳐나는 소리가 되는 것뿐이다. 그 소리는 축복도 되고 저주도 된다. 내 의지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단어의 의미와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수시로 뒤바뀌는 소리다.
예레미야가 소명(召命)을 받고 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떠한 쓴 쑥과 담즙을 마셔야 했는지 우리는 유의하여 보고 오늘날의 사역자들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5-6)
예레미야의 사역은 가나안 땅에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사람들은 등 뜨시고 배부르니, 그 달콤함에 취하여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하늘에서 자기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판 우물물을 퍼 먹으며 고향의 아버지를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종살이 하던 애굽과 광야에서의 방황하던 삶은 먼 추억 속 조상들의 역사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버리고, 가나안의 기름진 땅에서 풍요로움만이 그들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복음은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경종의 말씀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젖과 꿀처럼 달콤한 말로 사랑과 구원과 축복을 떠버리며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거짓 사역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저주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사역이었다. 추수군의 사역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니라.”(겔 2:7)
추수군의 사역은 예리한 낫으로 밀과 보리를 베어 알곡과 쭉정이가 드러나게 하는 작업이다. 쭉정이는 불에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성경은 온통 알곡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성경의 구원은 농부가 알곡의 껍질(겉옷)을 벗겨서 튼실한 곡식을 골라 곳간에 넣는 이야기다. 그리고 심판은 알곡을 까부르는 작업이다. 알곡의 껍질은 쭉정이와 함께 불 속에 던져진다. 껍질 벗겨지는 작업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지, 곡식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은총이 인간들에게는 저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항상 반대 입장을 취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은총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총을 저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입만 열면 은총이요, 은총하면 부와 권력과 명예만을 이야기 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심판과 구원은 하나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자 사탄(마귀)이 알곡들에 대하여 하는 것이요, 구원은 하나님이 시험하는 자에게 내어주어 마귀의 시험에서 이긴 자를 건져주심이다. 마귀는 쭉정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도 더 낫지 못하면 심판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욕했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덩달아 비난한다. 자신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인 것을 알 일이다. 온 세계에서 종교생활을 그들보다 더 반듯하게 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그들을 욕한 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종교의 틀(율법)을 뛰어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지 도덕 윤리적으로 흠이 많다는 질타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뛰어넘은 자들만이 그들에게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은 자신들을 뛰어넘은 자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십자가에 달아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할 것인가?
예레미야도, 예수도, 바울도 모두 바리새인이었지만 그들을 상대하여 싸운 것은 이들이 그들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진정 이단(異端)이란 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뛰어넘은 자들만이 들어야 될 영광된 이름이다(마 5:20).
이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던가? 하나님의 은총을 돈과 명예와 이 세상 권력이라고 전했던가?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말씀만을 전했다. 천국은 심판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험난한 것이다. 저주 받아 벌거벗은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가 눈같이 흰옷으로 갈아입은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벼 껍질을 벗기어 정미(精米)하듯이 벗기고 또 벗기어 앙상한 뼈(속 알)만 남은 자들이 예수라는 새 살과 그리스도라는 새 피로 입혀져 하나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이방인으로 한없이 방황하다가 죽어서 하얀 뼈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열조들이 묻혔던 동굴 무덤이요, 그곳은 조상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서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발점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8-9)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 사랑은 겉은 달콤하지만 삼키면 배에서 쓴 것으로 녹아지는 꿀로 코팅된 당의정이다(계 10:9-10). 화려한 표적을 보고 광야로 이끌려 나온 무리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불 뱀과 전갈과 지독한 갈증뿐이었다. 육신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화려한 현실의 삶만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이것은 은총이 아니라 기막힌 저주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복을 받으려고 바알에게 돌아간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당신, 설탕이나 소금을 치면서 맛을 낼 필요는 없다. 사랑이든, 저주이든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요동쳐 나오면 된다. 말씀은 이미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데, 그 음성을 듣는 자와 못 듣는 자가 있을 뿐이다. 밖에서 주어다 먹이는 당신의 소리는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에 의해 녹아져버릴 광야의 만나일 뿐이다. 그래서 먼저 당신 안에서 들리는 말씀을 자신이 들어야 한다. 당신은 어차피 하나님이든 마귀이든 당신 안에 있는 존재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고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운운하는 당신의 그 설교가 당신 안에 아직도 하나님처럼 도사리고 있는 마귀의 소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안다면 달콤한 설교를 스스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말씀 사역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단 것만을 요구하고, 스스로 사역자라는 엉터리 장사치들은 자신들이 혼합하여 빚은 달콤한 포도주로 은혜와 자유를 떠벌이며 ‘축복’이라는 과자로 돈 벌기 바쁘다. 그래서 과다한 당분 섭취로 속이 시커멓게 썩은 불치의 당뇨병 환자들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19-22)
저주(쓴 것)를 부르짖어도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달게 받는다. 그러나 자기 의(義)에 배부른 자는 꿀(진리)이라도 싫어한다. 하여 잠언 저자는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의에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하였다.
아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마지막 약속의 때가되어… 성령님꼐서 천사들과 함꼐... 하나님 아버지꼐 올라가시게됨을 전하노라!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성취가 보이고...들리는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책에 녹명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자는 기뻐하라 !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 주님꼐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의때가 이르렀음을 전하노라 ! 이제… 우리주님꼐서 두증인을 보내셨음을 전하노라 ! 보이고...들리는자는 기뻐하라 !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 주님꼐 모든 영광과 찬송을 소리높여 부르자 ! 아멘 ! 온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꼐서 약속의 증표로 주신... 오직...성경말씀만을 기억하고...두려워하며 ! 순종하라 ! 이제...사단...마귀...악마의 시대가 너희곁에 다가와있음을... 전하노라 ! 하나님 아버지 말씀 이외 어떤것에도 유혹과 미혹 되지말라 ! 놀라거나...두려워하지말라 ! 오직... 성경말씀만을 붙들고... 너희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성령만을... 따르고... 순종하여! 너희집과 형제자매들을... 굳건히 지키라 !
보라 ! 들으라 ! 하나님 말씀의 언약과 성취의 마지막때가 되었음...! 전하노라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 영생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창조주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너희가 사탄의 자식이되어 영원히 죽을까 하노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사람의 말을 믿는자는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감이다 !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만을 믿고 빛의 영원한 생명길로 나아가라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어찌하여.... 보아도...보지못하며 들어도... 듣지못하고... 살다가 죽어가는 자야 ! 너의영은 사단의 영에 매인자요 ! 사단에 잡혀 먹힌자 이니라 ! 너의 육이 죽은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너는 사단의 자식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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