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한복려 씨가 구현한 궁중음식.
경국대전,조선왕조실록,각종 진연의궤, 진작의궤, 궁중음식발기 등등에 그릇, 조리기구, 상차림 구성법,
음식이름과 음식의 재료 등을 통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시대 왕가의 일상식을 유일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있습니다
반상식도’라는 제목으로 9첩반상·7첩 반상·5첩 반상·곁상·술상·신선로 상의 상차림 그림이 나온다.
반상식도란 ‘상에 음식 차리는 법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현대 한정식처럼 시간순으로 배열을 하는가?
진어찬안 이라는 상차림에는 83개의 음식이 상위에 올려집니다 그 요리의 순서 또한 존재 합니다
찬품 단자란 잔치음식들을 음식발기라 하는 것에 모두 기록하여 올리는것으로, 10가지의 상을 차례로
올리게되는데,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진어찬안-> 진어미수(進御味數)-> 진소선(進小膳)-> 진대선(進大膳)-> 진어염수(進御鹽水)-> 진탕(進湯)-> 진만두(進饅頭)
-> 진다(進茶)-> 진어별찬안(進御別饌案)-> 진과합(進果驛)
궁중요리 또한 시간순으로 배열해서 음식이 나옵니다.
과거 일본은 1872년까지 육류 섭취를 금지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들어온 서양인이 자국민들보다 체격이 월등히 크자일본 왕실은 육류 섭취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 전격적으로 육식 해금령을 내렸다.일본의 요리나 음식관련 고서나 고대 기록물에 전혀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대한 기록인 전무한 상태다조선시대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에서는 ‘소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뒤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기름과 소금을 발라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구우면 연하고 맛이 좋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며“이 음식은 설야멱적으로 불렸는데 설야적, 설리적 등으로 칭하다가 너비아니구이로 발전했으며오늘날 불고기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고서에 전해지는 불고기의 기록김홍도의 <설후야연> (雪後夜宴)에서는 양반가 집안에서 불고기를 먹는 모습이 나온다4세기 진대(晉代)의 수신기(搜神記). 최남선‘조선상식문답’, 음식디미방’기록‘설야멱(불고기)’, 필원잡기 (筆苑雜記)(1487년),산림경제 (山林經濟)(1715년)는 설야멱 , 시의전서(是議全書), 추재집 (秋齋集)(1839년) 소고기를 먹는 법과 조리법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1842년), 해동죽지 (海東竹枝)(1925년)에는 설야적,조선요리제법(1939년)에서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에 대하여 ,고사통 (故事通)(1943년) 맥적(불고기)의 기록
초등학교 1학년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가시는데 나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어머니는 대목장이니 사람이 많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딱 잘라버렸다. 왜 그랬는지 나는 마당에 뒹굴고 울며불며 떼를 썼다. "나 데리고가 잉잉~." 할 수 없이 어머니는 나를 장에 데리고갔는데 입이 툭 튀어나와서는 저만치에서 졸졸 따라오더란다. 하도 불쌍해 보여 풀빵을 사서 손에 쥐어주었다는데, 그 풀빵의 축축한 촉감은 아직 내 손에 남아 있다.
풀빵은 밀가루를 넉넉히 쓸 수 없는 형편이라 반죽을 묽게 해서 구운 빵이었다. 풀빵이란 말도 반죽이 너무 묽어 익히면 빵이 풀떼죽처럼 된다 하여 붙은 것이다. 동그란 국화 문양 틀에 넣어 찍어낸다 하여 국화빵이라고도 했다.
곡물가루에 물을 넣고 치대 구우면 빵이고, 찌면 떡이다. 예로부터 서양에서는 빵을, 동양에서는 떡을 해서 먹었다. 우리나라에 빵이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때의 일이다. 서양 문물을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그보다 휠씬 이전에 빵을 접했다. 외래 문물을 제 것으로 재창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일본인들은 이 빵에다 그들의 전통 떡인 모찌를 결합시켰다. 밀반죽에 단팥을 넣고 빵을 구운 것이다. 그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이런 빵이 없었다.
붕어빵이나 국화빵 또는 풀빵을 접할 때마다 누가 이런 형태의 음식을 만들었을까 궁금했었다. 이럴 땐 자료를 찾는 게 순서인데 마땅한 자료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다 빵의 역사를 뒤적이다 이런 추측을 하게 되었다. '붕어빵이나 국화빵 또는 풀빵은 일본에서 시작한 음식일 것이다' 하고.
이럴 땐 어른들의 증언을 듣는 게 더 정확하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다.
"응, 맞다. 일본에 있었다. 동그란 모양으로 여러 가지 문양이 찍혀 있었는데 그 중에 국화가 많았다. 빵 모양 자체가 아예 국화처럼 생긴 것도 있었고."
역시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어머니가 곁에서 거들었다. "야키모찌 아니에요?" 그렇다면 '구운 앙코 빵'? 이 정도만 해도 일본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증거는 될 듯싶었다. 그리고 특히 풀빵에 새겨진 문양이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라는 것이 이런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혹시나 하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풀빵, 붕어빵, 국화빵에 관한 자료란 것이 거의 다 가난했지만 따스한 정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월급날이면 늘 막걸리 한잔 걸치시고 풀빵 한봉지 사들고 들어오던 아버지와 누런 월급봉투, 빨간 내복 차림으로 아버지를 반기는 꼬마들의 모습은…", "달동네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낮에는 풀빵을 팔아가며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고…", "어떤 아이가 풀빵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100원 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풀빵을 샀더니 아저씨께서는 2개를 주셨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갔다. 그 아이의 꿈은 풀빵장수가 되는 것이었다. 풀빵장수가 되면 먹고 싶은 풀빵을 많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어느해 일본 동경을 여행하게 되었다. 만약 풀빵, 붕어빵, 국화빵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면 지금도 그 흔적이야 남아 있겠지 싶어 빵가게나 과자가게가 눈에 띄면 이부터 찾았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빵은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동경 시내 대형 백화점 지하 음식 코너에서 붕어빵을 발견하였다. 틀 모양은 딱 우리의 붕어빵 틀이었고 밀가루 반죽에 앙코가 든 것도 같았다. 하나 차이가 나는 점은 앙코가 겉으로 삐져나올 만큼 잔뜩 넣는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동경 한복판 백화점에서 붕어빵을 확인하고는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풀빵이나 붕어빵, 국화빵에 대해 애틋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게 말야, 일본에서 온 음식인데…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일본 왕실의 문양인 국화를 새긴 것은 기분이 영…" 하는 민족감정과 "못살던 시절엔 이 풀빵 한 봉지로도 겨울이 따스했었지" 하는 감성이 충돌하는 설명을 해야 하는 맛칼럼니스트로서의 입장 때문이다. 나에게 과다한 민족의식을 주입한 교육을 탓해야 할까. 풀빵을 풀빵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는 내 불우한 역사적 환경이 마득찮다.
맛칼럼은 문헌을 참고해서 써야지....
첫댓글 아직도 방송나옴 ? 걍 일본가라
좆본으로 가라;;;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삼겹살ㅋㅋㅋㅋㅋ쪽바리들은 삼겹살도 니뽕 전통 음식이래
교이쿠
헐
그럼 좆본으로 가세요 아니다 일본에서 칼럼 쓰면서 한국은 좆본의 영향을 받아 어쩌고 저쩌고 이 지랄할 것 같아서 씨발 그건 또 좆같네
완전 돌팔이아냐
개짜증나네 씨바
고기도 못 먹던 시궁창 원숭이들 사람답게 옷 입고 먹고 살게 해줬더니만 죄다 지들꺼라 우기는 중
그것도 웃기던데 소금가지고 뭐라한것도 그래서 소금회시 회장이 평생 이소금먹은 나하고 정제소금 먹은 나하고 누가 오래산지 두고보자! 라고 한사건도 웃기고 완전 지입맛에 맞게 다 해석을 하네
아 진짜 존나 싫어.... 알쓸신잡3에서도 제발 뺐으면;;
교이쿠 고 니혼
좆봌 계몽시킨게 우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