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담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키도 반에서 제일 작고, 말할 때 아직도 혀 짧은 소리가 나는 우리 집 귀염둥이 막내. '이면지'라는 글자를 보고 "엄마, 면지가 누구야?"라고 묻고, 물티슈가 다 떨어졌다는 말엔 "어디서 떨어졌는데요?"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학생이라니. 공책에 자기 이름을 눌러쓰는 작은 손을 나는 생경하게 바라봤다. 입학식 날, 담이는 들떠 있었다. 할머니가 사 준 새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멘 채 양쪽으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친구들과 강당에 줄을 서서도, 교실에서 선생님과 인사할 때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귀갓길에 “귀염둥이야, 그렇게 좋아?" 하고 물으니 담이가 갑자기 주위를 의식하며 말했다. “엄마, 이제부터 그렇게 부르지 마.” “귀염둥이를 귀염둥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불러!" 서운함을 표현해도 꼬마 신입생은 단호했다. "이름으로 불러 줘." 그날 밤, 샤워를 끝내고 우리의 마사지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사지 가게 사장님이 됐다. "손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보죠?” 아이의 작은 등과 엉덩이에 베이비오일을 듬뿍 바르며 가볍게 눌렀다. 연두부 같던 살이 조금씩 여물어 감을 느꼈다. "네, 사장님. 제가 학교를 갔다 오느라 바빴거든요." "와, 학교에 가셨어요?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머리도 길고 착해요." "그럼 오늘 제일 좋았던 건 뭐였나요, 손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에 무얼 말하려나 싶었는데 대답이 의외였다. "지금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사랑이 가득한 집은 무릇 행복의 원천이다.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따뜻한 샤워, 영양가 있는 식사, 포근한 침대, 좋은 향기가 나는 로션, 가족과 나누는 다정한 말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 전쟁을 치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때마다 도서관에서 재밌는 책을 왕창 빌려다 아이들에게 읽어 주고, 아침저녁으로 꽉 껴안는다. 젖은 머리를 정성껏 말리고, 눈 코 입도 콧구멍도 사랑스럽다고 알려 준다. 내 아이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엄마는 항상 너를 응원한다고 눈 맞추며 말한다. 사랑 많은 아이가 다른 이에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자랄 거라 믿는다. 미동 없이 엎드린 아이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늘 그렇듯 마사지 도중에 잠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우리 둘이 있을 땐 귀염둥이라고 불러도 돼." 마음속 깊이 사랑이 넘쳐흘렀다. 귀여우면 왜 깨물고 싶다고 하는지 알게 한 아이.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다면 담이는 이미 그 일을 다 했다. 남은 생 동안 피어날 아이의 모습을 언제나 기쁘게 지켜보고 싶다. 박수영 | 울산시 중구 사람을 사랑하고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일. 그것을 어머니는 내게 물려줬다. _ 안미선
우리는 대화 중
편의점에 음료수를 사러 갔다. 창가 탁자에 한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어린이집 가방으로 보아 하원 길에 잠시 들른 것 같았다. 나도 세 살 된 딸이 있었기에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토끼 같은 손녀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할아버지의 눈빛. 그 모습은 마치 인생의 해돋이와 황혼 사이에 영롱한 무지개가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흐뭇해하며 물건을 고르는데 등 뒤에서 둘의 대화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뭐 하고 놀았어?" "미끄, 미끄럼틀 탔오." "우와, 재밌었겠네? 할아버지 어릴 때는 어린이집 같은 게 없었어. 그래서 친구들이랑 산에서 칡이나 캐고 놀았지. 아인이는 칡 알아? 칡! 칡! 칡!"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하면 아이가 알아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얼굴까지 바짝 들이밀며 반복해 말했다. 아이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까르르 웃으며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고 맞장구쳤다. 생각지 못한 아이의 순수한 반응에 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었다. 내 얼굴에도 덩달아 웃음이 번졌다. 이렇게 깜찍하고 따스한 불통이라니! 나는 손녀와 가까워지려는 할아버지의 노력이 부디 가닿길 바랐는데, 아이가 말했다.
"할부지, 우리 젤리도 먹으까?" 역시나 아이는 할아버지의 칙칙한 말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집 가서 밥 먹어야지. 할아버지는 옛날에 먹을 게 없어서 밥 대신 칡을 먹었어. 그 쓴 게 그때는 달고 달았어. 참 이상하지? 아무튼 아인이도 키가 쑥쑥 크려면 밥을 많이 먹어야 돼. 알았지?" 할아버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능숙한 거절과 어린 시절의 감상, 약간의 잔소리를 한 문장에 모두 담아내는 노련미를 발휘했다. "그러면 쪼꼬렛은?" "칡이 몸에 참 좋은데…." 할아버지와 아이는 그렇게 한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이 출구 없는 대화가 어찌나 재밌던지. 나는 편의점을 나서며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직 이 세상에 있었다면 우리 딸과 저렇게 편의점에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낯가림이 심했던 딸이 겨우 걸음마를 뗐을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장아장 걸어가 아버지한테 먼저 안긴 일. 그때의 경탄과 웃음, 행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사이 딸아이는 훌쩍 자랐다.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젤리며 초콜릿이며 손녀가 사 달라는 거 다 사 줬을 텐데. 귀여운 말동무가 돼 줄 수도, 맛있는 거 사 주려고 모아 둔 쌈짓돈 꼭 쥐고 편의점에 같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 가끔 출근길에 생각한다. 그때 만난 그 할아버지와 손녀가 편의점에 자주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둘의 대화에 잠시나마 끼여 있고 싶다. 유철현 | 편의점 회사 홍보팀 직원, 작가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_ 하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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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안녕하세요
동트는아침 님 !
다녀가신 고운 멘트
감사합니다 ~
즐거움과 미소로 가득한
알찬 주말 보내세요
~^^
보육원에서 크는 아기는
잘 먹여도 앙상하게 크고,
집에서 키우는 아기는
그럭저럭 먹여도 토실토실 큽니다.
그 이유는?
보육원에 아기는 스킨쉽을 안 해주고,
집에 아이는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스킨쉽을 많이 해줘서 토실토실 하답니다~
좋은 공감 멘트로
공유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정읍 ↑신사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