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해 짧은 생을 살다간 장철수
서른 아홉해 짧은 생을 살다간 장철수. 그는 위대한 기록문학가로, 탐험가로, 독도지킴이로, 그리고 발해1300호 탐험대장으로 산자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왜? 그들은 굳이 그길을 나서는가? 왜? 발해1300호는 그길을 나섰는가? 발해1300호와 장철수의 행적을 되찾아가면서 그 의문을 풀어보려한다.
글을 쓰는 이유
하나 글을 쓰면서 솔직히 걱정이 되는 부분을 밝혀야 겠다. 죽은 자들의 기록을 부족한 필력으로 얼마나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을지, 혹은
그들이 살다간 길지 않는 생을 통해서 얻으려 했던 그 무엇이 산자들에게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히려 이 글이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구태여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세상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그들의 얘기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이유이다. 아니 그 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글쓰기를 통해서 장철수라는 얼굴 한번 뵙지 않았던 사람으로부터 무언가 내 자신이 힘을 얻고자 하는 솔직한 바램이어서이다.
그들과 가까웠던 주변의 몇몇 분들, 그리고 그들이 떠난 후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철수생각'의 글들을, 그리고 나의 상상력을 참고로 글을 이어가겠다.
발해1300호의 출항 그리고 사고
97년 12월 31일 오후2시 15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끄라스끼노항
▲발해1300호 항해도(발췌:WIN 98.3) |
천년이 넘도록 역사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던 발해의 역사를 우리들
눈앞에 펼쳐 보이겠다는 굳은 의지와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바다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의 현재적 발굴. 그러한 의지로 그들의 한달여의 장정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발해1300호 최후의 날인 98년 1월 23일, 오후4시의 장철수대장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탐사대장 장철수, 발해1300호 선장 이덕영, 사진촬영담당 이용호 그리고 통신담당 임현규 대원.
그리고 결국 4명의 탐사대원들은 동해의 혼이 되었다.
다음날(24일) 아침6시쯤 오키제도 도고섬 서북쪽 후쿠오라항 남쪽반도에 좌초된 '발해 1300호'가 일본의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탐사대 대원들의 시신은 온데간데 없었다. 밧줄이 묶인 자욱이 선명한 발목만이 돛대에 남아 있었다. 죽어서도 뗏목을 지키겠다는 마음이어서 였을까? 나중에야 그 남은 발목이 이덕영 선장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자체적인 항해능력이 부족한 원시적인 뗏목에게 집체만한 파도와 폭풍우 더더구나 섬 주변의 암초는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으리라. '살아서만 돌아오라'는 주변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야 말았다.
뗏목이 좌초된지 10여일후가 지나서야 장철수 대장을 제외한 3명의
대원의 사체가 수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철수 대장은 끝내 발견되지 못하고 장철수 대장의 것으로 확인된 다리만이 남은 자들에게 돌아왔다. 아니 그 보다 그의 살아 소원처럼 너른 동해바다로 돌아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산기슭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산기슭. 그를 찾아가면 발해 1300호 추모비와 그의 육신의 한자락만이 묻힌 묘역이 참배객들을 기다린다.
"이 암울한 현실속에서 역사에 책임의식을 느끼고 진실을 찾고 의미를 위해 생명을 거는 삶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기억하자.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우리모두 이야기 하자...."(추모비 글 중에서. 탐험문화연구소장 동국대학교 사학과 윤명철 교수)
육신의 한자락으로 참배객을 맞는 장철수 대장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가 산자들에게 정말 바라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장철수
라는 인간자체가 오래오래 기억되기 보다 그가 살아 생전 담으려 했던 발해정신, 탐험정신그리고 시대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는 저항정신. 바로 그것이 그의 진정한 바램이라고 구태여 떠올려 보는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 추위에도 사람은 태어났고 또 죽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이루어졌다. 역사란 결코 찬란한 햇빛에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억센 찬바람과 모진 고난속에서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희망찬 깃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철수 육필원고 중에서)
장철수, 서른 아혼 생
장철수. 인간 장철수는 서른 아홉 생을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를 만났던 대학 후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의 한 단면이나마 알아보고
싶어진다.
다음은 그의 대학후배인 김주환씨(YTN기자)의 글의 일부분이다.
"그해 5월로 기억된다.하루는 그가 수업도 마치지 않는 상태에서 기숙사로 돌아왔다.몹시 흥분된 상태로 말이다. 그때 그의 전공수업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어회화시간을 담당했던 러시아인이었던 고직(Godzik)교수가 '동해'를 '일본해'라는 요지의 수업을 했다며 교수와
심한 언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그는 그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다.) 그날 이후 그는 왜? 독도가 동해가 일본영토(해)야 하는
것인지, 그 같은 주장이 잘못됐다라는 점을 밝히는 문제에 거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와 나는 종로서적,교보문고 등지를 돌아다니며, 아틀라스(Atlas)에 일본해로 표기된 부분을 동해로 바꿔놓는 작업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그의 청년시절 많은 부분을 독도에 정렬을 쏟아부었다. 얼마전
독도수호대에서는 지난 8월말 '울릉도-독도간 뗏목탐사'를 실시하여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뗏목을 무사히 독도에 안착시켰다. 이
뗏목탐사의 시작에 장철수가 있었음을 뒤늦게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7월 울릉도-독도뗏목탐사(독도앞) |
1987년. 그해 우리나라 대학동아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외대 독도문제연구회( http://user.chollian.net/~td96, 2000년 명칭이 독도연구회로 변경) 발족의 주역을 담당한 장철수 대장은 그해 5월 24일 1차 독도탐사를 진행하고, 곧바로 5월 30일 우리나라 최초로 울릉도-독도간
뗏목탐사를 시도하였지만 여러 이유로 실패로 마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 실패를 소중한 경험으로 삼았다. 두달후에 그는 한국탐험협회 주최로 열린 '울릉도-독도뗏목탐사'에 참가하여 성공리에
독도뗏목항해를 마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1987.7.15~18)
그는 그 뒤로도 수차례에 걸쳐 서울역, 겔러리아 백화점, 현대백화점,
전쟁기념관 등 곳곳에서 '독도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사진 및
자료전시회를 개최하며 국민들과 혹은 주변의 후배들과 독도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다.
당시를 기억하는 이원석(한국외대 인도어과 95)후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96년 2월 일본의 독도망언으로 전국이 떠들썩했을때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서 독도 가두전시회를 하게되었다.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런데 막상 당일날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서울역측에서 행사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기만 했다. 어린 나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난 형에게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형은 수퍼맨이었다. 형의 전화 한 통화로 모든일은 잘
해결되었다."
그렇게 장철수 대장은 그가 주도적으로 모임을 이끌어갔던 한국외대
독도문제연구회 후배들과 더불어 독도를 향한 걸음들을 성큼성큼 디뎌갔다.
이제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발해뗏목탐사로 눈길을 돌려보자. 1995년 장철수 대장의 구상에 의해 시작된 이 계획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과 러시아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물푸레나무를
이용한 길이 15m, 폭 5m의 뗏목을 대원들이 직접 제작함으로서 뗏목탐사는 무르익었다.
그가 발해를 찾아 나선 이유는?
그런데 왜? 장철수 대장은 발해를 찾아 떠났는가?
그의 육필원고를 뒤적거려보자.
"1.바다에 대한 원초적 항해를 토대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인류의 이동항로를 밝히고자 한다. 2. 바다에 대한 근본적 사상의 정립과 신해양질서에 대한 국가간의 충돌을 완화하고 모색하고자 한다. 3. 바다에
대한 인간의 적응한계 극복과 바다 종사자들의 식량과 피부작용의 임상실험. 4. 세계환경의 날 기념하여 바다를 통한 환경운동의 실현. 5.
동북아의 평화에 대한 기원. 6.민중들의 바다에 대한 민속의 고증..........."
그는 이렇게 나름의 발해항로의 대탐사 목적을 적고 있었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뗏목탐사가 아니었음을 느낄수 있다. 그는 평화주의자 였으며, 바다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지금도 동해바다를 떠돌고 있지만, 그는 그를 아는
사람이 평가하는 '위대한 기록문학가'라는 얘기처럼 그가 쓴 원고를
통해 우리에게 그가 정말 바랬던 동아시아 평화, 바다에 대한 애정어린 접근을 원하고이었다.
"여러분 한번 실어 보십시오. 우리는 기필코 해낼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개척의 용기입니다."
그가 읊었던 발해1300호 뗏목탐사의 출항사의 일부이다. 그는 비록
미완의 완성으로 우리들 곁에 다가왔지만, 그가 남긴 미완의 분은 이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발해건국 1300주년 학술탐사대 대장 故장철수 프로필
1960.2.9 경남 통영 생
1981.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입학
1987. 한국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 발족
------. 독도탐사대 창단
------. 제1차 독도뗏목탐사 참가 (7월,한국탐험협회 주최)
------. 제2차 독도탐사(8월)
------. 제1회 독도종합영상제 개최(11월)
1988. 제2차 독도사진전 ( 7월, 울릉도 농협)
1995. 21세기 바다연구소 소장
1996. 한국해양대 대학원 해사법학과 석사과정 입학
------. 경남신문 주최 독도와 거북사진전 (4월)
1997. 발해 1300호 탐험대장으로 활동(12월)
1998. 탐험도중 일본 근해에서 사망(1월)
------. 러시아 극동대학 명예 해양학 박사학위 수여(2월)
참조
- 철수생각,발해 1300호 장철수 대장을 기리는 사람들의 소식지
- 월간중앙 WIN, 1996.3
글쓴이/김 윤배 (한국해양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