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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증언, 최후의 증인
요한복음 1:29-3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둘째 주일이다. 주현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낸 사실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사자는 세례 요한이고, 3년 동안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제자들이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의 행적이 여러 복음서로 남아 지난 2천 년 동안 인류에게 전해온 것은 성령의 역사 외에 해석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증언과 기록자들의 성실함이 있다.
최근에 <12제자 이야기>란 책이 나왔다. 열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이전에도 여러 책들이 있었다. 이진경 교수가 쓴 새 책은 형식이 훨씬 흥미롭다. 베드로의 경우, 먼저 베드로가 쓴 두 개의 편지를 통해 베드로의 행적을 추적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본론에서는 성경 속 베드로를 다시 관찰하며 깊이 들어 간다.
이 책을 내기까지 나도 한몫하였다. 바로 ‘응원’이다. 기록하는 사람은 쉽게 지친다. 글 재료가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책을 완성하고 나서 내가 몇몇 응원꾼들에게 밥을 사기로 했다. 세상에 기록물을 하나 완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더군다나 우리 모두의 믿음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평소 내가 자주 하는 ‘적자생존’이란 말이 있다. 적는 자, 곧 기록하는 사람만이 남는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다이어리 하나쯤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핸드폰이라는 만능기계가 주어졌지만, 우리의 기록은 흔적만 남길 뿐, 진실한 행로를 적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니 복음서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담아내길 바란다. 소소한 일지 든, 나의 하루든, 영성 일기든 아니면 하루 식단이든 기록하면 분명히 남는다.
1)
본문은 주현절 메시지다. 예수님이 비로소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일들을 기념한다. 오늘 살펴볼 요한복음 1장에는 두 명의 증인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이다. 한 사람은 복음서의 주연으로 등장하고, 또 한 사람은 복음서의 기록자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군에 속한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기록을 통해 복음의 길을 안내한다. 등장인물은 세례 요한이고, 12제자이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기록자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관찰자의 시선을 옮기면서 증언하고 있다. 그 한복판에 선 첫 번째 인물은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 두 요한은 모두 빛의 갈림길에 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속담에 “두 요한이 일 년을 나눈다”는 말도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빛을 증거한 사람들이다.
두 요한은 서양에서 가장 사랑받는다. 세례 요한의 축일은 하지이고, 사도 요한의 축일은 동지이다. 세례 요한이 하지의 성인이 된 까닭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란 고백 때문이다.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하지의 주인공이 되었다. 반대로 사도 요한은 빛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동지의 성인이 되었다. 12제자 중에서 얼마나 큰 영광인가?
두 요한은 가장 흔한 이름이다.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이 되었다. 영어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 ‘존’이 바로 그 요한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이름에도 요한(約翰)이 있다.
심지어 200년 전 조선에서도 요한이란 이름을 썼다. 조선 천주교는 한문으로 세례 요한은 약한(若翰)으로, 사도 요한은 약망(若望)이라고 표기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세례명이 약망, 곧 요한이었다. 정약용은 유명한 개혁 군주인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를 진실하게 기록한 장본인이다.
나중에 개신교는 요한을 약한(約翰)이라고 적었다. 중국어 성경 요한복음의 한자가 ‘約翰’(약한)이다.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세례 요한을 ‘요안’으로, 사도 요한은 ‘요왕’이라고 구분하여 불렀다. 그러다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두 요한의 이름을 같은 음가인 요한으로 부른다.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경 출간 이후다.
두 요한 중 먼저 세례 요한에 대해 살펴보자. 세례 요한은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선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린 최초의 증언자였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한 시대는 역사의 암흑기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예언이 끊기고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시대에 마땅히 따를 길이 바로 죄로부터 회개이고, 임박한 심판을 준비하는 일임을 증거하였다. 그때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은 얼마나 큰 희망이던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기는 메시야가 아닌 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과 도로가 있다. 세례 요한은 광야로 나아가 새 길을 닦는 역할을 맡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세례 요한은 국민적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작아지고, 스스로 낮춘인물이다. 그리하여 낮은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장본인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라! 내 안의 어둠 속에서 보물지도처럼 드러나는 그 길을 통해 빛으로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때가 주현절이다.
2)
세례 요한은 4복음서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의 기록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말과 행동의 분량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들에게 선포하듯 말하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이해하였을까? 아마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담긴 어린 양의 수난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사 53:7).
그 말을 할 때는 마침 절기상으로 유월절이 가까웠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2:13).
사람들은 이미 유월절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설날을 앞둔 이번 주간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요한은 다가올 유월절을 의식하며, 어린 양의 희생적인 죽음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깨달았다.
유월절 명절에는 집집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며 어린 양을 잡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명절을 앞두고 유월절에 쓸 희생양들을 매매하였다. 출애굽 당시 애굽 사람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 배가 모두 죽음의 심판을 받을 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바른 히브리인들의 가정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월절의 배경이다.
세례 요한은 어린 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더구나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린 양의 피의 제사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볼 때 어린 양은 비참하게 죽어야 할 존재이고, 또 내 죄를 대신하는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런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서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뜻은 예수님이 해방자라는 의미로 느껴진다. 사실 해방자의 모습이라기에는 그 어린 양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선포는 아주 단호하다. 자신은 어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의 강림을 목격한 이후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33).
이제 세례 요한의 사명은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증거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와 함께 있던 두 제자에게 말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5-36).
세례 요한이 두 제자에게 저기 가시는 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라고 말하니,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을 떠나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다. 세례 요한에게는 자기 제자를 보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제자의 입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확신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
예수님은 메시야, 곧 내 죄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다운 화려함과 위엄을 갖추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죄를 모두 짊어지듯 비참한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오셨다.
어린 양이 세상을 구원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메시야가 가장 연약한 어린 양으로 오신다. 거룩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징벌하지 않고, 되려 어린 양처럼 고통당하시고 죽임당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은 그러한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임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다.
3)
이번에는 두 요한 중 사도 요한에 대해 살펴보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최후의 증인’이 된 인물이다.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이 친애하던 세 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3총사와 같았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머물렀던 열두 제자 중 유일한 사람이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문서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최후의 증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증언했다면,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죽임당했으나 승리한 어린 양’(계 5:6)에 대한 증인역할을 한다. 그가 기록한 계시록을 통해서다.
사도 요한과 모든 제자들에 대해서는 <열두 제자 이야기>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진리를 증언하고, 수호하며,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기록자의 사명은 사도 요한을 통해 그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사랑, 사역, 관계를 인정하고, 내 삶에 받아들이는 절기이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를 결심한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럴 때 내 인생의 주현절이 비로소 시작된다.
주현절을 사는 사람은 사랑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작은 양’으로 살라고 하신다. 우리를 향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사 42:1)로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특별하게 대하신다. 누구나 존귀한 이유는 ‘저마다 자신의 사연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에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있다. 고마운 말이다. 사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늘 배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장래 희망을 꿈꾸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낭비 없는 삶을 위해 자신을 관리한다. 그런 점에서 기록하는 일만큼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하게 하는 방법도 귀한 일이다.
이런저런 내 주변의 환경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최초의 증언자가 된 세례 요한이나, 최후의 증인이 된 사도 요한처럼 진실하게 살아온 인물이 그 시대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자리를 복되게 하신다. 올해도 하나님의 은총의 삶을 살기를 그리하여 나와 내 주변을 복되게 하고 변화시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