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권씨 18-1 함양 열녀호랑이를 잡은 여인, 초계 정씨 鄭泰一의 처 열녀 權氏夫人
權氏烈女碑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하원리 968-26, 내동마을 대로변 마을회관에 접하여 안동권씨열녀비(安東權氏烈女碑)가 서 있다. 정려(旌閭)는 별도의 정려각 없이 자연석 기단 위에 정려비를 세웠다. 정려비의 좌우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려 비를 보호하고 있다. 외부에는 기단의 침하를 막기 위하여 시멘트를 발라 놓았으며 정려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쇠창살형 보호책을 쳐 놓았다. 비의 전면에는 ‘열녀학생정태일처안동권씨지려(烈女學生鄭泰一妻安東權氏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모양도 특이 하지만 보존에 문제가 있어보인다. 권씨는 39세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권씨의 정려는 도로변에 있고 주변에는 민가가 있다. 주변의 민가가 단층 규모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경관상의 문제는 없으나 보호책이 설치된 지 오래되어 부식이 심하여 미관상 좋지도 않고 뭔가 손을 봐야 하는 지경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열녀라고 하면 보통 절개를 지킨 여인을 의미하여 주로, 남편 사후 순사(殉死)하거나, 정조를 지키려 죽음을 택하거나, 남편 사후 가정을 잘 일으킨 경우 등이나 이것은 매우 아주 특이한 사례이고 그 행적이 명백하지만, 그 남편이나 부인의 자세한 족보를 알지 못하여 다 같이 연구한다는 심정으로 소개한다.
윤용 ( 尹容 ·1708~1740) 의 호미를 든 여인과 정홍래 ( 鄭弘來 , 1720~?) 의 산군포효도
남편이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죽음에 이르자, 밭을 매다가 호미로 대응하여 호랑이의 눈을 가격하였다는 것이다. 남편은 살고 자신은 죽었거나, 다 같이 죽었거나, 호랑이도 같이 죽었거나 하는 설이 여러 가지이나 일단은 그녀가 죽었기에 열녀가 되었다고 봐야하며 나중에 전설로 까지 내려오니 대단한 이야기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초계 정씨인 정태일(鄭泰一)의 처 권씨부인은 1756년(영조 32)에 태어났고 이웃 고을에서 혼인하였다. 1795년(정조 19) 남편이 호랑이에게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였을 때 권씨부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호랑이와 싸워 결국 호랑이를 때려 죽이고 본인도 숨졌다고 하며, 이 소식이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1795년(정조 19)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으나 당시 아들인 정한익(鄭漢翊)이 어려서 바로 세우지는 못하고 장성한 후 1832년(순조 32)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하원리 길가에 세워지게 되었다.
여기서 정태일에 대해서는 함양문화원 국장에게 문의하니 초계 정씨라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확인은 어렵고 다만 초계 정씨 대제학공학파 경산파 34世의 항렬이 태(泰)이니 그 정도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 옆이 바로 유명한 초계 정씨의 심원정(尋源亭)이 있다. 조선시대의 중층 누각 건물로서 2005년 10월 13일 경남문화재자료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草溪 鄭氏와 尋源亭
초계 정씨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을 관향으로 하고 시조는 고려 문종때 학자이며 예부상서(외무장관급)인 정배걸(鄭倍傑)이다. 그 후손인 거제현령(巨濟縣令)을 역임했던 돈암 정지영(鄭芝榮)이 후진을 양성하며 1558년에 현재보다 조금 더 상류인 덕추폭포 근처에 초가로 정자를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후손들이 1770년에 다시 지었지만 풍수해로 다시 훼철되었다. 정지영의 7대손 정복운 등이 1845년에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고, 1948년에 중수를 거쳐 2018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양 심원정 전경이다. 지우천 계곡의 제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되어 있다.
덕유산을 뿌리로 하여 남으로 양 산맥이 내리뻗어 세 고을을 형성하였는데 중앙에 심진동(尋眞洞), 동편에 원학동(猿鶴洞), 서편에 화림동(花林洞)으로 이것이 안음삼동(安陰三洞, 안의삼동)이다, 이 고을에는 삼가승경(三佳勝景)이 있는데 심진동에는 심원정(尋源亭), 원학동에는 수승대(搜勝台), 화림동에는 농월정(弄月亭)을 말함이다.
심진동은 기백산군립공원 용추계곡의 관문으로 첫 경관이다. 정자가 서 있는 바위는 거북바위 즉 구암(龜岩)이요, 그 아래 소는 청심담(淸心潭)이며 건너에 포개진 바위는 농암(籠岩)이다. 바라보는 상류 쪽엔 재궁폭포가 이곳에 합류한다.
초계정씨가 함양 지역에 처음으로 입향하는 것은 고려 우왕 대에 정전이 하동정씨 정지의(鄭之義)의 딸과 혼인하여 고을 북쪽 덕곡(德谷,덕암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부터이다. 정전의 아버지 정습인(鄭習仁)은 공민왕 대 과거에 합격한 후 전교령과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배척한 일로 유명하다. 정전은 1377년(우왕 3)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고 1381년(우왕 7) 문과에 급제한 후 조선 태종 때 좌사간대부를 지냈다. 세종 때는 보문각 직제학을 지내면서 은퇴를 요구하여 함양으로 내려와 살았다. 정전의 아들 정재안(鄭齊安)도 거창유씨 유환(劉懽,1337~1409)의 사위가 되어 황곡(黃谷)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영조 때는 정배걸의 후손으로 전하는 정동학(鄭東鶴)이 삼가(三嘉,합천 지역의 옛 지명)에서 들어와 고을 북쪽 개평(介坪,개평마을)에 자리 잡았으며, 헌종 때는 문간공 정온(鄭蘊,1569~1641)의 후손 정주학(鄭周學)이 거창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월평(月坪)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現況’은 1934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씨’에서는 함양군의 초계정씨가 안의면 신안리에 39세대 규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은 것으로 소개하였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초계정씨는 전국에 2만 9,264가구 9만 3,586명, 함양군이 106가구 279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초계정씨가 전국에 10만 4,155명, 함양군이 218명으로 조사되어 2000년에 비하여 전국의 초계정씨 인구가 증가하였으나 함양군은 61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함양군의 초계정씨는 수동면 상백리 상백마을, 지곡면 덕암리 덕암마을, 안의면 하원리 하비마을, 안의면 신안리 안심마을 등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遺跡’으로는 초계정씨 종가에 전하던 ‘거창 초계정씨 종가 소장 고문서(居昌草溪鄭氏宗家所藏古文書)’는 1997년 1월 30일 경남유형문화재 제320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면 권씨는 과연 누구의 후손인가? 그 입향 경위로 추정하고져 하고 다음 회차에 그녀를 족보에서 찾아 밝혀보고자 한다. (계속) (글 권오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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擊虎救夫烈女權氏 호랑이를 때려 남편을 구한 열녀 권씨 20230807 진허吟
心身合律 瑟琴多 부부의 몸과 마음이 합하여 조화로우니 금슬이 많아 좋아 山水同呂 烈婦娥 함양의 산과 물은 어우러 지니 열녀가 나와 아름답구나야 虎咬丈夫 逢胴損 호랑이가 남편을 물어서 몸에 상처가 생기는 일을 당하니 妻锤大獸 遇睛頗 부인이 큰 짐승을 내리 찍어 눈알이 못쓰게 만들었다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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