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일시 : 2011. 6. 13(월), 14:00 ~ 17:10 ▣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 ▣ 출석위원 : 박강철(위원장), 고부자, 김경표,김광억, 김명자, 김용수, 이필영, 이해준, 장헌덕, 정명섭(이상 10명) ▣ 심의내용 및 의결사항 : 이하 자료와 같음
문 화 재 위 원 회
1. 안동 하회마을 주변 앞개 양수장 건축물 개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 동 건은 안동 하회마을 주변 앞개 양수장(1977년 설치)의 시설 노후화, 기능 저하로 집중호우?태풍 등으로 재해 우려가 있는 취약시설을 개보수 하고자 하는 사항으로, 역사문화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안동 하회마을」 ㅇ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2) 신청위치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산128임 일원 (3)사업내용 : 앞개 양수장 개축 ㅇ 지상1층, 지하1층 - 건축면적 : 24.00㎡ (당초 4m×4m ⇒ 변경 4m×6m) - 구 조 : 시멘트벽돌 구조 / 기와지붕 ? 토목 : 양수장 기초시설 1식 ? 기계 : 펌프 Ø200m 1식, 배관 2.29㎞, 천정크레인 1식 ? 전기 : 분전반 1면
라. 현지조사 의견( 2011. 6. 2) ㅇ 노후화되고 파손된 양수장을 철거하고 전통 조형미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축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나, ㅇ 전통한식 외관은 마을의 역사문화환경에 인위적인 시인성이 높은 경관을 조성하게 되므로 벽체와 지붕의 재질과 색채만 역사문화경관에 어울리도록 하고 ㅇ 규모는 현재대로 유지함이 좋을 것으로 사료됨.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현지조사 의견대로 하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관계전문가(문화재위원 포함)의 자문을 받아 시행
2. 안동 하회마을 주변 부용용수로 구조물화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 동 건은 안동 하회마을 주변 기능이 저하된 관개시설물을 보수?보강(흙수로를 구조물화)하여 안정적인 용수공급과 효율적인 유지관리를 하고자 하는 사항으로, 역사문화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사항임.
다. 주요내용 (1)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안동 하회마을」 ㅇ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2) 신청위치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1-4구 일원 (3) 사업내용 : 부용용수로 구조물화 ㅇ 구조물화 대상지역 현황 - 용수간선 1조 1,046m, 용수지선 3조 2,366m
ㅇ 구조물화 내용 : 개거 구조물(안폭=0.6m, 바깥폭 : 0.9m)로 개보수
라. 현지조사 의견(2011. 6. 2) ㅇ 기능저하로 인한 수량 손실 등이 심하여 관개시설물을 보수?보강하는 사업으로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며, ㅇ 기존 토용수로의 폭과 선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거 구조물을 설치 후 양측의 자연생태는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구조물의 윗면이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므로 시행하여도 무방한 것으로 사료됨.
마. 의결사항 ㅇ 가결
3. 경주 양동마을 주변 기계천 양동제 및 제방 우회도로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 경주 양동마을 주변 기계천 양동제 및 제방 우회도로 정비를 통한 관람객 편의 및 지역주민의 교통편의를 기하기 위한 사업으로, 역사문화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경주 양동마을」 ㅇ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일원 (2) 신청위치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및 인동리 일원 (3) 사업내용 : 기계천 양동제 및 제방 우회도로 정비 ㅇ 도로신설(우회도로) : L=586.0m / B(폭)=8.0m ㅇ 인도조성 : L=695.0m / B(폭)=3.5m ㅇ 토 공 : 흙 깍 기 : 4,043㎥ , 흙 쌓 기 : 12,468 ㎥ ㅇ 배 수 공 : 이중벽관 부설 L=536.0m, 우수받이 8개소 플륨관 덮개 L=87.0m /집수정 12개소 , 도수로 L= 47.0m ㅇ 구조물공 : L형 옹벽 L=10.0m , 역T형 옹벽 L=94.0m 게비온 매트리스 A=280.0㎡ ㅇ 포 장 공 : 아스팔트포장 A=5,952.0m², 황토포장 A=2,083.0㎡ 콘크리트포장 A= 947.0㎡
라. 의결사항 ㅇ 보류 - 현지조사 후 재검토
4. 경주 양동마을 내 가옥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 경주 양동마을 내 가옥을 신축하고자 하는 사업으로, 역사문화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경주 양동마을」 ㅇ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일원 (3) 신청위치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40번지(지정구역내) (4) 사업내용 : 가옥 신축 ㅇ 사업부지 면적 : 962.0㎡ ㅇ 사업내용 : 본체, 사주문, 주변정비공사 등 - 본체 : 건축면적 88.41㎡ / 전면 5칸, 측면 4칸 / 민도리집 본체 5량가 익랑채 3량가 / 맞배지붕, 각주 - 사주문 : 건축면적 2.75㎡ / 민도리집 3량가 / 맞배지붕 / 각주 - 절토 215.0㎥ / 담장 L=18.0m, H=1.2m - 자연석 석축 : 건물 배면 구간 L=48.5m, H=1.1~1.9m 건물 전면 구간 L=200.0m, H=1.9m - 자연석 계단 : W=1.8m, H=1.9m
라. 현지조사 의견(2011. 5.27) ㅇ 충분한 직접적인 고증자료가 확보되고 금년에 실시되는 종합정비계획의 지침이 설정된 후에 재검토해야 할 사항으로 이를 위원회에서 논의함이 좋을 것으로 사료됨.
마. 의결사항 ㅇ 보류 - 종합정비계획 지침이 마련된 이후의 계획에 따름
5. 경주 양동마을 내 이동통신중계기 설치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경주 양동마을 내 이동통신 불량지역에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주민의 공중복지시설 확대를 위한 사업으로, 역사문화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경주 양동마을」 ㅇ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일원 (3) 신청위치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산5, 산30(지정구역 내) (4) 사업내용 : 이동통신중계기 설치 ㅇ 설치면적 : 1.8㎡ (2본× 9.0㎡) ㅇ 설치내용 : 중계기 2본 (산5, 산30에 각 1기) - 높이 : 16.5m(피뢰침 3.0m 포함)
라. 현지조사 의견(2011. 5.27) ㅇ 위치는 경관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적정한 곳으로 판단되나, 중계기의 나무장식은 제거하고 ㅇ 산30번지 지역에 설치예정인 중계기 높이는 기존 나무보다 낮추도록 함.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현지조사 의견대로 실시
6. 성읍 민속마을 내 보건진료소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 성읍민속마을 지정구역 내(성곽 밖)에 보건진료소를 신축하고자 하는 사항으로, 민속분과 2차회의(‘11.4.4)시에 “성읍민속마을 전통주거 양식에 따라 보완?재설계” 토록하고 보류된 사항임 ㅇ 이에, 성읍민속마을 전통주거 양식에 따라 보완?재설계한 사항을 재부의, 역사문화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성읍 민속마을」 ㅇ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558번지 일원 (3) 신청위치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553번지(지정구역내) (4) 사업내용 : 보건진료소 신축
라. 현지조사 의견(2011. 6. 3) ㅇ 전체적으로 제주 전통초가 이미지가 나도록 보완 설계되었으나, - 덧벽돌의 높이로 볼 때 낮게 보이므로 창호 상부까지 높여 창문과 조화롭게 할 것 - 상부 띠돌림(덧벽)을 없앨 것. - 제주초가 정면에 설치하되 차양의 이미지를 건물 정면에 조화롭게 반영 할 것
마. 참고사항 (1) 현지조사 의견(2011. 3.21) ㅇ 신축의 당위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미흡하고, 신청건물의 매스와 형태가 주변경관에 조화롭지 못하다고 판단됨. (2) 서귀포시장 의견 ㅇ 기존 성읍 보건진료소가 협소하고 노후화됨에 따라 공고의료 서비스 확대 및 이용 편의성을 보강하고자 추진하는 사업으로서 ㅇ 현대적 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지붕 외형을 초가(지붕재질 :에폭시페인트)형태로 계획하는 등 성읍민속마을 이미지를 고려한 부분과, 건물용도 등을 감안한 심의가 필요하다고 사료됨.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건물의 외벽은 제주도 전통양식에 따라 덧벽돌을 창호 상부까지 높여 조화롭게 하고 - 초가 건물 정면은 전통차양의 이미지가 나도록 함. - 세부적인 사항은 관계전문가(문화재위원 또는 전문위원)의 자문을 받아 시행
7. 성읍 민속마을 주변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시설 설치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 성읍 민속마을 주변에 건설폐기물 중간처리를 위한 처리시설을 설치하고자 하는 사항으로, 역사문화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 신청위치는 허용기준상 2구역 해당 - 평슬라브 : 신축불가 / 경사지붕 : 건축물 최고높이 7.5m이하(1층이하)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성읍 민속마을」 ㅇ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일원 (3) 신청위치 : 제주도 서귀표시 표선면 성읍리 1066번지(2구역,465m이격) (4) 사업내용 :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시설 설치 ㅇ 전체규모 : 대지면적 6,173㎡ / 시설면적 2,530㎡ ㅇ 설치내용 : 제품보관동, 사무동, 파쇄시설, 비산먼지 방지시설 - 제품보관동 : 건축면적 364.5㎡ / 최고높이 12.18m처리 /우레탄 판넬, 장방형 박공지붕 - 사무동 : 건축면적 18㎡ /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 샌드위치 판넬 마감 - 파쇄시설 : 설치면적 : 364.5㎡(가로 13.5m × 세로 27m) 파쇄 및 집진시설, 분리시설 - 비산먼지 방지시설 ? 설치 구간 : 해당 부지 경계 전체 / 설치높이 : 7m ? 설치시설 : EGI휀스(4m) + 분진망(3m)
(5) 사업비 : 20억원
라. 현지조사 의견(2011. 6. 3) ㅇ 성읍 민속마을의 역사문화적 환경에 부적합한 시설이라고 판단됨. ㅇ 마을 주민들이 신청건물에 대한 협오 의식을 작고 민원이 가시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도 문제점으로 파악됨.
마. 참고사항 <민원서류 접수> ㅇ 접수일 : 2011. 6.7(수) ㅇ 민원내용 : 건축폐기물 중간처리시설 설치 반대
바. 의결사항 ㅇ 부결 - 마을의 역사문화 환경을 저해 할 우려가 큼
8. 성읍 민속마을 내 금융자동화 기기 설치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 성읍 민속마을 지정구역 내(성곽 밖)에 금융자동화 기기를 설치하고자 하는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의 역사문화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제주은행(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596-1번지)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성읍 민속마을」 ㅇ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75번지 일원 (3) 신청위치 : 제주도 서귀표시 표선면 성읍리 592번지(지정구역내) (성읍리 부녀회 사무실 앞) (4) 사업내용 : 금융자동화 기기 설치 ㅇ 부스규격 : 가로 2.45m × 세로 1.4m × 높이 2.98m
라. 현지조사 의견(2011. 6. 3) ㅇ 위치, 재료 형태가 성읍 민속마을의 경관에 부조화되어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됨.
마. 의결사항 ㅇ 부결 - 마을 경관에 부조화되어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음.
9. 괴산 청천리고가 주변 도시계획도로 건설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괴산 청천리고가」주변 도시계획도로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원지형 보존지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47호 ?괴산 청천리 고가? ㅇ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번지 (3) 신청위치 :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206, 73-2, 73-3, 74, 75-4, 39-3, 산6 (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인접) (4) 사업내용 : 도시계획도로 건설 ㅇ 도로길이 : 150.0m ㅇ 도 로 폭 : 8.0m(3.00×2@+길어깨1.00×2@) ㅇ 토 공 : 흙깍기(토사 11,608㎥, 사토 10,448㎥) ㅇ 사 업 비 : 1,000백만원(군비) ㅇ 사업기간 : 12개월
라. 현지조사 의견(‘11.4.29) ㅇ 문화재에 인접한 기존도로를 확장하는 것으로 실제적 훼손은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문화재 및 인근의 화재예방 및 진화에 필요한 도로로 판단됨 ㅇ 단, 왼편 마운드의 절개 부분이 전체적인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음 마. 참고사항<괴산군 의견> ㅇ 우리 군에서 2011년 추진 중인 「충북양로원~주유소간 도로개설공사」의 사업구간은 1979년 3월 21일 도시계획시설(도로)로 결정 고시(충북44호)된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도로)로서 현재까지 30여년간 도로구간 내 편입토지 및 지장물 소유자는 재산권 행사에 많은 제약을 받아왔습니다. 또한 금년 도시계획도로(충북양로원~주유소간) 시공구간 내 마을은 도로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소방차 진입이 어려워 화재발생시 많은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 발생의 우려가 높습니다. 이에 따라 면소재지 내 도시기반시설 확충으로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주변에 산재한 공공시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고자 금회 공사를 추진하고자 하니 사업이 원만히 추진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바.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왼쪽 마운드의 절개부분이 전체적인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하여 사업 시행
10. 영동 규당고택 주변 주상복합아파트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영동 규당고택」주변에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4구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40호 ?영동 규당고택? ㅇ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417-2 (3) 신청위치 :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261-2(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490m 이격) (4) 사업내용 :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지하1층, 지상12층/1동 40세대) ㅇ 부지면적 : 932.0㎡ ㅇ 건축면적 : 482.49㎡, 연면적 : 5,087.63㎡ ㅇ 건물높이 : 41.9m ㅇ 구 조 : 철근콘크리트조
라. 현지조사 의견(2011.4.29) ㅇ 영동 규당고택과 공동주택 신청지 간의 경관분석(skyline) 및 평가 후 종합적으로 조정ㆍ논의함이 적절하다고 사료됨 ㅇ 규당고택 일원에 대한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함과 더불어 인근 토지를 매입하는 적극적인 행정시책이 필요하다고 사료됨
마. 참고사항<영동군 의견> ㅇ 이번 주상복합 신축을 위한 현상변경 허가 신청 건은 문화재 외곽 경계로부터 약 500m 인근 대지에 지하1층 지상12층 규모의 근린생활시설 및 공동주택을 신축하고자 하는 민원으로 본 대상지는 당해문화재 경관 및 현상보존에 영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동읍내 중심부로서 지역경제 활성화 및 사유 재산권의 정당한 집행을 위하여 승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바. 의결사항 ㅇ 가결
11. 나주 홍기응ㆍ홍기헌가옥 주변 단독주택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나주 홍기응ㆍ홍기헌가옥」주변에 단독주택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원지형 보존지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51ㆍ165호 ?나주 홍기응ㆍ홍기헌가옥? ㅇ 소재지 :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180, 198 (3) 신청위치 :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277(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315m 이격) (4) 사업내용 : 단독주택 신축(지상 2층) * 현지조사 후 현지조사 의견반영 보완 ㅇ 부지면적 : 1,203.0㎡ ㅇ 건축면적 : 89.46㎡, 연면적 : 138.48㎡ ㅇ 건물높이 : 6.0m ㅇ 구 조 : 시멘트벽돌조, 맞배지붕(시멘트기와)
라. 현지조사 의견(2011.5.3) ㅇ 건축물의 형태와 높이가 주변경관에 조화롭지 못하므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하여 재설계하도록 함 - 현재의 형태는 맞배지붕의 형태가 변형된 경사지붕으로 주변건물의 환경과 이질감이 형성되므로 건축적 외관이 한옥의 맛이 느껴지도록 한다. - 건물의 높이를 아담하게 조정하고 외벽의 재료를 자연 친화감이 있는 재료로 사용할 것이며, 특히 지붕 재료는 전통감이 있는 와가 모습의 재료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한옥의 외형적 조화로움을 지니게 함과 아울러 재난에 안전한 재료를 사용하도록 한다. - 도래마을 한옥 군 방향에 감나무 같은 유실수 및 기타 수목을 군식하고, 생울도 조성하여 시각적 차폐기능 및 경관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마. 참고사항<나주시 의견> ㅇ 김명식 씨가 우리 시 다도면 풍산리 277번지 상에 계획 중인 지상 2층 건축 연면적 138.48㎡ 규모의 단독주택 신축사업은 주변에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2개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재현상변경허용 기준 상 1구역에 해당되어 ‘전통 한옥으로 신축·증축 허용(건축물 최고높이 7m이하) 및 기존 건축물 범위 내 전통한옥으로 재·개축’만 허용되어 있습니다. ㅇ 위 사업계획부지는 우리 시가 중요민속문화재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을 포함하여 ‘다도 도래 전통한옥마을 조성사업’을 추진 중인 사업구역 내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사업부지가 근접해 있어 당초 설계안을 수정하여 전통한옥마을 경관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도록 보완 제출되었습니다. ㅇ 특히 지붕 마감재를 전통 기와 형태로 개선하였고, 전통한옥마을과 건축예정지 사이에 차폐용 조경수를 식재하여 경관을 보존하고자 하였으며, 건물 최고 높이도 8.66m에서 6m로 축소 조정하였습니다. ㅇ 따라서 위 사업으로 인한 문화재 경관 보존에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사료되어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바. 의결사항 ㅇ 가결
12. 선교장 주변 경포천 고향의 강 정비사업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선교장」주변에 경포천 고향의 강 조성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원지형 보존지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선교장? ㅇ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 (3) 신청위치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 초당동 * 문화재와의 이격거리 : 선교장 120m, 해운정(보물183호) 110m, 오죽헌(보물165호) 430m (4) 사업내용 : 경포천 고향의 강 조성 ㅇ 사업목적 : 옛 경포천 복원 및 수질개선 등 ㅇ 사업구간 : 3.94㎞(경포천 하구 ~ 난곡교) ㅇ 사업내용 : 문화재 주변 시설물 계획(선교장, 해운정) - 선교장 : 배다리교(부교형식), 효영정(하중도내 정자설치), 산책로 설치(제방정단), 선착장(선교장 앞 선착장 재현), 배다리교 리모델링, 난곡교 재가설(계획하폭 확장 재가설), 제1가동보(배다리교 재현을 위한 수심확보 및 유지용수 확보) - 해운정 : 데크로드(기존 도로옆 산책로 설치), 운정교 재가설(계획하폭 확장 및 법선변경에 의한 재가설), 효충예 쉼터(조경계획), 제2가동보(경포유수지의 유입수량 조절 및 경포천 수심확보) ㅇ 사업기간 : 2011.8 ~2013.12
마. 참고사항<강릉시 의견> ㅇ 본 사업대상인 경포천은 유량의 부족으로 인한 건천화와 수질오염 등으로 경포호 및 해양환경에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으로 금번 강원도와 우리시에서 기존의 경포천 하천을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강으로 복원하여 건천화 방지 및 수질개선을 기하여 지역과 주민들이 더불어 향유할 수 있는 친수공간으로 조성할 뿐 아니라, 강릉 선교장의 옛 배다리 조성 등을 통한 주변지역 문화재와 연관된 특성을 반영 우리지역의 명물하천을 조성하고자 하오니 동 사업이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검토를 요청함.
바. 의결사항 ㅇ 보류 - 현지조사(건축분과 위원 포함)후 재검토
13.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주변 단독주택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주변에 기존 건물 철거 후 단독주택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원지형 보존지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ㅇ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3) 신청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73 (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68m 이격) (4) 사업내용 : 단독주택 신축(지상 1층 2동) * 현지조사 후 현지조사 의견반영 보완 ㅇ 부지면적 : 777.0㎡ ㅇ 건축면적 및 연면적 : 118.85㎡ ㅇ 건물높이 : 절토(1.2m) 후 건물높이 4.28m (기존 건물높이 : 4.7m) ㅇ 구 조 : 목구조, 경사지붕(한식토기와)
라. 현지조사 의견(2011.5.25) ㅇ 마을 초입의 경관을 다소 저해하고 있는 기존의 시멘트 기와지붕 건물을 철거하고 한식 골기와 지붕의 주택을 건립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됨 ㅇ 단, 초입에 위치하여 배후 당해문화재의 지붕선과 수평선상에 놓이므로 건물의 높이는 기존 건물보다 조금 더 낮추고 기존 안채건물의 우측 수직벽선 오른쪽으로 넘어서지 않도록 함
마. 참고의견<대구 동구청> ㅇ 동구청 관내 국가지정문화재“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261호)의 외곽 경계로부터 68.5m지점에 연접한 동구 둔산동 373번지상에 신축예정인 단층 단독주택의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등 허가신청이 있어 검토한 결과, 문화재에 미치는 영향(신축 건물의 크기와 높이 등), 전체적인 경관(기존 건물이 폐가로 남아있어 미관을 저해함 등)에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됨.
바. 의결사항 ㅇ 가결
14. 아산 성준경가옥 주변 마을회관 및 경로당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아산 성준경가옥」주변에 마을회관 및 경로당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2구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94호 ?아산 성준경가옥? ㅇ 소재지 :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528번지 (3) 신청위치 :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486 (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120m 이격) (4) 사업내용 : 마을회관 및 경로당 신축(지상 1층) ㅇ 부지면적 : 660.0㎡ ㅇ 건축면적 / 연면적 : 95.00㎡ /88.20㎡ ㅇ 건물높이 : 4.80m ㅇ 구 조 : 철근콘크리트, 적벽돌 치장쌓기, 평지붕
라. 참고사항<아산시 의견> ㅇ 아산 성준경 가옥 현상변경 기준 2구역(5m이하, 1층이하, 주거 및 농업용 창고에 한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3구역과 인접하여 있으며, 이번에 신청하는 건물은 최고높이 4.8m로 현상변경 허용기준안에 적합하나, 주거용 및 농업용 창고에 해당하지 않는 제1종근린생활시설(마을회관 및 경노당)이기에 신청하게 된 사항임 ㅇ 또한 신축하는 옆 필지에 기존 마을회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1층 민가들이 있어 문화재 보호 및 경관 보호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사료됨.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건물의 외관?색상 등에 대하여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시행
15. 화성 정용채ㆍ정용래가옥 주변 단독주택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화성 정용채ㆍ정용래가옥」주변에 단독주택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08.10.10(근대문화재과-1034 관련) 규모가 경미하게 변경되고 소유자가 바뀐 사항에 대하여 기 변경허가를 득하였으나, 건물의 규모 및 높이 등의 변경으로 인한 현상변경 허가사항 변경허가 신청사항에 대하여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4구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24ㆍ125호 ?화성 정용채ㆍ정용래가옥? ㅇ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8, 109번지 (3) 신청위치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300-1, 303-9 (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480m 이격) (4) 변경내용 : 단독주택 신축(지상 2층 1동)
라. 현지조사 의견(2011.5.31) ㅇ 사업대상지는 문화재와 약 480여미터 떨어져 있고 도로건너 전방 산 능선 너머에 정용채ㆍ정용래가옥이 위치하고 있어 문화재가 보이지 않으므로 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없는 것으로 사료됨 마. 참고사항<화성시 의견> ㅇ 문화재와의 거리가 483m가량 충분히 떨어져 있으며, 문화재 후면으로 지방도에 의해 단절되어 있는 지역으로 허용기준상 4구역으로 4층이하의 건축물이 가능한 구역이나, 허용기준상의 공통사항 중 농경지에는 농업용시설 이외의 시설은 제한하고 있어 신청하는 사항으로 긍정적인 검토를 바람.
바. 의결사항 ㅇ 가결
16. 청원 이항희가옥 주변 단독주택 신축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청원 이항희가옥」주변에 단독주택 신축을 위한 사업으로 ‘10년 제5차 문화재위원회(‘10.8.2)에서 기 허가를 득하였으나, 건물의 규모 및 소유자변경, 허가기간연장 등을 변경하고자 하는 바, 동 사항이 문화재 주변 경관에 미치는 영향을 심의하고자 하는 것임 ㅇ동 사업예정지는「문화재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상 1구역으로 허용기준을 넘어서므로 문화재청에 허가를 구한 사안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33호 ?청원 이항희가옥? ㅇ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190-1번지 (3) 신청위치 :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208-2, 207-11 (문화재 외곽으로부터 약 200m 이격) (4) 변경내용 : 단독주택 신축(지상 1층 10동)
※ 기허가 조건 : 관계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차폐림 조경식재, 법면?옹벽 등에 대한 안전 조치
라. 현지조사 의견(2011.5.30) ㅇ 청원 이항희가옥과 계획대상지와는 경관축을 형성하고 있는바, skyline 확보가 중요한바, 이에 계획대상지의 표고를 이전표고(+90)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됨 ㅇ 계획대상지 북쪽의 능선상에 기존 수림대와 연계될 수 있는 경관식재가 요구되며 식재수종, 식재지반, 식생구조 등에 대한 전문가 자문을 받아 처리하기 바람 마. 참고사항<청원군 의견> ㅇ 위 사업대상지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이항희 가옥으로부터 이격거리 약200미터 가량 떨어져 있어 문화재 현상변경사항에 대하여 변경허가 계획에 따라 사업을 시행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됨.
바.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기 허가조건을 준수하여 시행
17. 부안 서문안당산 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안)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부안 서문안당산」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안)이 제출됨에 따라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1.3.14.) 후 이를 부의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8호 ?부안 서문안당산? ㅇ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171, 192, 205 (3) 제출내용
라. 검토의견 (1) 현지조사 의견(2011.3.14) ㅇ 현재의 지역 건축이 1층의 주거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앞으로의 보존과 개발을 감안할 때 미리 문화재경관을 고려한 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 적정한 것으로 판단됨. ㅇ 가능하면 구역을 지정할 때 도로에 의한 구획으로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됨. ㅇ 주도로 상부 부분은 역사성을 고려하여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됨. (2) 문화재청(무형문화재과) 의견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문화재청에서 검토한 안으로 함. - 다만, 보존지역에서 “개축”을 포함.
18. 부안 동문안당산 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안)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동 건은「부안 동문안당산」주변 현상변경 허용기준(안)이 제출됨에 따라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1.3.14.) 후 이를 부의하는 것임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대상문화재 : 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 ?부안 동문안당산? ㅇ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87-2 (3) 제출내용
라. 검토의견 (1) 현지조사 의견( 2011.3.14) ㅇ 부안동문안당산 주변의 지형과 현황을 볼 때 현재의 안은 적정한 것으로 사료됨. ㅇ 가능하면 구역을 지정할 때 도로에 의한 구획으로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됨. (2) 문화재청(무형문화재과) 의견
마. 의결사항 ㅇ 조건부가결 - 문화재청에서 검토한 안으로 함. - 다만, 보존지역에서 “개축”을 포함.
19. 안동 귀봉종택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 검토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5호(1982.12.01 지정)인「안동 귀봉종택」을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 신청한 사항에 대한 지정가치 여부를 검토하고자 하는 사항임 다. 주요내용 (1) 신청인 : ㅇㅇㅇ (2) 문화재 신청명칭 : 안동 귀봉종택(安東 龜峰宗宅) ㅇ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1번지 ㅇ 소유자/관리자 : 토지(의성김씨운천공파문중), 건물(김승태:종손) ㅇ 수 량 : 일곽(건물 3동, 토지 3,141㎡<1필지>) - 건축물 지정 : 3동
- 토지 지정 면적 : 3,141㎡
라. 현지조사의견(‘11. 5. 12) : 세부의견 별첨1 참조 <문화재위원 ㅇㅇㅇ>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실제 종부가 거주하면서 전통 생활양식을 전승하고 있음 <문화재위원 ㅇㅇㅇ>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안대청의 공간구성 및 가구수법, 이색적인 지붕형식 등 19세기 경 건축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음 <문화재전문위원 ㅇㅇㅇ>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 당시의 일반적 문화와 가문의 독특한 민속의 유기적 공간구성이 건축학적 가치가 높음 마. 참고사항 (1) 경상북도지사 의견 : 별첨 2 참조 ㅇ 이 건물은 의성김씨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의 종택임. 1660년(현종 1)에 귀봉의 현손부인 창녕조씨가 가묘와 함께 건립하고 1888년(고종 25)에 김주병이 중건하였다고 함. ㅇ 안채 평면이나 가구의 법식이 대종가인 의성김씨종가와는 다르지만 그 맥이 흡사함은 가문의 일관성 때문임. 대종가와 이 집은 형상의 대소와 정교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법식이나 기법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음. ㅇ 귀봉종택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 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가구의 법식이나 기법이 뛰어나므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함. (2) 지자체 전문가 의견(2008. 5. 30) : 별첨 3 참조 ㅇ 귀봉 김수일 선생의 종택으로 현종 1년(166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집 양식을 지닌 건물임. ㅇ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종택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ㅁ’자형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 건물이 있고. 사당에는 운천 김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이 종택에는 보물 484호인 ‘운천 호종일기’보관되어 있음. ㅇ 또한 바로 인근에 위치한 보물 제450호인 의성김씨 종택과 비교하여도 안채평면이나 가구의 법식이 대종가인 의성김씨종가와는 비록 다르지만 그 맥이 흡사한데 이는 가문의 일관성 때문으로 보이며 대종가와 형상의 대소와 정교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법식이나 기법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음. ㅇ 따라서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 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3)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2009. 10. 27) : 별첨 4 참조 ㅇ 아직도 종부가 살고 있는 귀봉종택은 안동지방에서 유난히 많은 인물을 배출한 천전마을에 잇는 사대부가로서, 조선후기의 전통적 종가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집임. ㅇ 안동지방의 50위 불천위(不遷位) 가운데 한 분인 운천 김용을 지금까지 사당에 모시고 매년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있는 집으로서 종가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 ㅇ 안동에서 대표적인 의성 김씨 청계 김진 문중의 두 번깨 파로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호종일기, 유물 등이 다량으로 보존(기탁 포함, 지정문화재 포함)되어 왔으므로, 유교의 종법에 따라 성립된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모범적인 종택임. ㅇ 안채, 사랑채, 사당이 잘 갖추어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종택임. 그러한 전형성은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실천하도록 조성한 가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확인됨. ㅇ 유교이념의 실천에 앞장선 종택이지만 家神인 성주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과 유교의 복합현상을 읽어낼 수 있음. 바. 의결사항 ㅇ 가결 〈별첨 1〉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 지정조사 개요 ㅇ 대상문화재 : 안동 귀봉종택(安東 龜峰宗宅) ㅇ 조사일자 : 2011. 5. 12(목) ㅇ 조사자 : 문화재위원 김명자?정명섭, 문화재전문위원 이철영
□ 지정조사 결과(조사보고서) < 문화재위원〉 1. 문화재 현황(연혁·설명·유래 등)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신청한 안동 귀봉종택은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지정 당시는 민속자료) 제35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의 종택으로 의성김씨 소종가이다. 귀봉종택이 있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279번지)는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알려진 의성김씨 내앞파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의성김씨는 15세기 후반 김만근(金萬謹 1446-1500)이 문호를 열고 그의 손자 청계(靑溪)공 김진(金璡 1500-1580)이 아들 5형제를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5자 등과댁이라는 별호를 얻으면서 크게 가문을 일으킨 이후 그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세간에는 ‘내앞김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의성김씨 종택은 조선시대 의성김씨의 대종가이며, 대종가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대종가는 1967년 6월 23일 보물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소종가인 귀봉종택은 대종가인 청계공 의성김씨 종택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다. 귀봉 김수일은 청계공의 둘째 아들로 자는 경순(景純)이며, 도산에서 수학하고 155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평생을 처사로 지낸 인물이다. 귀봉의 후손들이 대소과(大小科) 급제가 끊이지 않았고, 학문(문집) 또한 이에 못지않았다는 사실은 조선후기 귀봉파의 정치사회적인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귀봉의 후손 중에는 문과 급제자 6명, 생진 급제자 19명, 문집을 남긴 사람 62명이며 독립운동 서훈자가 13명에 이른다. 경상도 71읍(邑) 가운데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경우가 5개 고을이었다는 사실은 조선후기 귀봉파의 사회적 위상을 가늠케 해 준다. 귀봉종택은 조선조 현종 1년(166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집 양식을 지닌 건물이다. 1761년과 1824년에 중수하였고, 1888년에 수리한 바 있다. 특히 1761년, 1824년 중수 시의 상량문(上樑文)이 전하고 중수와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이 짓고, 김상렬이 쓴 1761년 상량문에 따르면 그해 3월 21일 신시(申時)에 입주하여, 4월 7일 유시(酉時)에 상량하였다. 김양운(1764-1824)이 짓고, 김조수가 쓴 1824년 상량문에 따르면 그해 3월 1일 사시(巳時)에 입주하여 3월 9일 신시에 상량하였다. 종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등의 건물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제례준비 등의 대규모 행사를 위한 공간인 안마루 대청이 아주 넓은 점이 특기할만하다. 사당채가 별채로 되어 있는데, 사당에는 귀봉의 맏아들인 운천 김용(雲川 金涌, 1557~1620)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귀봉종택에는 옥적(玉笛) 등 보물 2점을 비롯하여 서책 337種 824점 등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백운정, 임호서당 등의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서책 가운데서도 특히 雲川 金涌公이 작성한 ?扈從日記?와 ?承政院日記草?, 그리고 學峯 金誠一公이 남긴 ?晋州守城節次?는 壬辰倭亂과 17세기 政治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생활문화로서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실생활을 통해 전승하고 있다. 봉제사 접빈객은 유가(儒家)의 아름다운 전통 중 하나이다. 이는 안동 내앞의 귀봉종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귀봉이 세상을 떠난 이후 현재까지 4백년 넘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귀봉종가에서는 퇴계학맥의 계승자이며 임진왜란 공신인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운천은 귀봉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숙부인 학봉의 학문을 이어 퇴계학통을 계승하였다.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예문관 검열로 있을 때 신병을 얻어 고향에 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하고 안동수성장에 추대되어 인근 각 고을에 모병문을 보내고 향병을 일으켜 왜적을 막는데 전념하였다. 이듬해 의주로 가서 예문관에 복직하고, 행재소에서의 정무를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겼다. 이 일기는 보물 484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운천은 난이 끝난 뒤에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성균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에 근무하였으며 병조?이조의 낭관, 예천군수, 홍주목사, 여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실록편수관으로 선조실록편찬에도 참여 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을의 선비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노림서원, 덕봉서원, 묵계서원, 임호서원 등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문집 6권 4책이 남아있다. 귀봉종가의 불천위제사와 설 차사에는 종부에게로 이어져온 가전 비법으로 빚은 청주를 제주(祭酒)로 쓰는데, 그 전통은 일제 강점기 때도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모든 제례의 장이 조상을 추모하고 자손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자리지만, 귀봉종가의 불천위는 설 차사와 더불어 4백여 년간 한 장소에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의성김씨 귀봉공파 문중에서는 위선(爲先)과 보종(保宗)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 후손들의 화목을 다지기 위하여 매년 한 차례 음력 12월 15일에 종가의 사랑방에서 문중회의를 연다. 조상을 받드는 이러한 일은 직계조상 위주로 이루어지지만, 드물게는 후손이 없는 외조상의 제사(외손봉사)를 같은 방식으로 모시기도 한다. 지금까지 4백년 넘게 이어져온 귀봉공파의 외손봉사는 귀봉의 후손들이 귀봉의 장인 조효종(趙孝宗) 부부와 조효종의 부모 제사까지 받드는 일이다. 사당고유(祀堂告由)도 귀봉종택이 지키고 있는 전통의례이다. 귀봉종택 사당은 불천위 기제사 및 설날과 같이 정해져 있는 고유 이외에도 집안이나 문중의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면 지금도 각종 고유를 행해오고 있다. 사당이 단순히 돌아가신 선조의 위패를 모셔놓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조상과 만나며 즐거움도 함께 나눠가고 있는 공간이라 할 만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는 문중성원들의 일상적인 사당 고유로는 자녀를 혼례 시켜서 며느리나 사위 등 새로 맞이하는 구성원이 생겼을 때 행하는 참례, 각종 고시의 합격 같은 커다란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경우 등이다. 근래에는 온 문중원이 힘을 합쳐서 백운정의 중수(重修)를 마무리 지었던 경사스러운 날에 맞추어 독립유공자, 고시합격자, 박사학위취득자를 함께 고유한 바 있다. 유교문화와 함께 민속신앙의례도 전승되고 있다. 민속신앙 의례는 유교문화권에서 자칫 음사(陰祀)로 취급될 수 있지만 귀봉종택에서는 자연스럽게 행한다. 소소하게나마 가신신앙이 전승되고 있는데 집안의 으뜸 가신(家神)인 성주를 각별하게 받든다. 음력 구월 스무이튿날은 ‘성주생일’로 성주를 위한다. 성주생일이 되면, 안마루대청 한쪽에 모셔져 있는 성주단지 앞에 붉은 설기를 비롯하여 실과 및 채소, 감주 등, 그리고 탁주와 정화수 한 그릇으로 상을 차리고 안주인의 축원한다. 삼신의 자리도 아직 있으며 버들고리로 된 봉안신체(奉安神體)도 남아있지만 현재 섬기지 않으며 대문 위쪽에는 액을 막는다는 큰 엄나무가 가로로 걸려있다. 음식문화 역시 전통성을 보유하고 있다. 귀봉종택의 가양주와 안주는 안동지역 반가의 풍속이 그대로 전해온다. 귀봉종택에 전해 내려오는 가양주로는 청주, 달주, 탁주, 동동주 등이다. 달주를 아주 귀한 술로 여기며, 집안에 초상이 나면 이듬해 제사를 지낼 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어른 손님들이 찾아오시면 꼭 대접하는 술이다. 달주와 함께 먹는 안주로는 유과, 약과, 대구포 보풀음, 과일 등이 있다. 현재 종부 금동길(86세)은 16살 되던 해에 김종해에게 시집왔는데 이 때부터 시어머니가 달주 만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돕고 배우면서 전수받았다. 종부의 친정은 예안면 부포리의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종택이며, 어릴 적부터 술과 음식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아 왔지만 시집온 이후 귀봉종택에서 전승되어오는 방식으로 익혔다. 가양주 제조가 금지되었던 일제강점기에도 끊이지 않고 제주를 빚어왔다. 음식문화를 잘 보존, 전승한 현재의 종부는 애초 차남의 아내였다. 그러나 종손(김종원)부부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 집안을 맡고 있다가 장남이 태어나자 아얘 호적을 종손(김종원) 앞으로 올리면서 양자로 보냈다. 이른바 차양자(次養子)였던 셈인데 양자로 들어간 김승태가 아직 어린 탓에 생부 김종해(금동길의 남편)가 종손의 아우 신분으로 조상제사를 모셨다. 이후 시어머니가 1978년, 남편 김종해가 1985년에 세상을 뜨고 자녀들마져 외지로 떠나자 금동길 혼자 종택에 살고 있다. 현 종손은 김승태로 2001년 4대 조상들의 기제사를 모셔갔으며 종택에서는 불천위만을 모시고 있다. 내앞 김씨들의 설 쇠기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밤에 집안 대소가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무고한 송구영신을 기원하는 뜻의 구세배(舊歲拜, 묵세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월 초하룻날에는 아침 일찍 각 가정에서 먼저 세배를 하고, 촌수가 가까운 큰집으로 모여 차례를 지낸다. 귀봉종가의 설 차사는 이렇게 크고 작은 지손(支孫) 각파의 자손들이 자기 집안 친척의 차사를 마치고 모두 종가로 모이면 그때 행사를 시작한다. 이 때는 평소 마을에 거주하던 자손 뿐 아니라, 설을 쇠기 위하여 귀향한 자손과, 안동 시내를 비롯한 인근 마을의 자손들도 참여하여 선조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에서 행사를 봉행한다. 통상 오전 11시를 넘겨서 시작되는 귀봉종가의 차사에는 매년 50여명이 참여한다. 차례 뒤에 이어지는 음복 자리에서는 종가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으며 덕담을 나눈다. 도회지에 살던 젊은이들은 가문과 조상에 대한 평소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어릴 적 같이 자랐던 친구들은 오래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며 경향각지의 일족들 소식도 이때 듣는다. 예전에는 명절이면 문중이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지난 1960년대까지도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는 종택 안 대청에 모여 척사대회(윷놀이)를 하면서 전 문중의 화합을 다졌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은 부녀자들에게 여흥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날이었다. 이날 부녀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마을 뒤에 있었던 400여년 수령의 팽나무에 그네를 매어놓고 그네를 뛰었다. 남자들은 그네를 거의 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단오절에는 귀봉파 문중 소유인 백운정(白雲亭)에 부녀자들이 모여 화전(花煎)놀이를 하거나, 그 아래 낙동강에서 선유(船遊)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날 화전(花煎)을 해 먹고, 부녀자들만이 참여하는 뱃놀이를 했다. 이 날만큼은 부녀자들에게도 부드러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했다. 화전놀이를 하든 뱃놀이를 하든 내방가사를 지어 낭송하거나 잡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흥겹게 놀았다. 이 때 사용하던 내방가사가 마을에 다수 남아있다.
2. 입지환경 귀봉종택은 크고 작은 산과 임하댐에 모인 물이 동북에서 서남방향으로 흐르며, 다시 동남방향에서 북쪽방향 천전리 앞으로 흐른 후, 서쪽 안동대학교 앞을 흐르며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들 강과 종택 사이에는 넓은 평지가 있는데, 이곳은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 산자락에는 의성김씨 대종가인 내앞종가와 귀봉종택이 나란히 동남향을 하고 있다. 대종가와 소종가 주변에는 여러 채의 전통가옥이 있는데, 이들 가옥은 전통가옥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들 종가의 동남쪽에는 안동의 근대사 모습을 알 수 있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마을 앞산에 있는 백운정은 내앞마을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백운정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977번지 蓮花峯 아래 傅岩 위 가파른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아래 반변천을 사이에 두고 천전리와 마주한다. 靑溪公이 터를 잡아주고 둘째아들 龜峯공이 창건했다. 창건연월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문헌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청계공의 시편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청계공이 작고한 1580년 이전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두 칸은 방, 네 칸은 마루이다. 부속건물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4칸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5호(1986. 12. 11)이다. 亭子 이름 '白雲'은 당나라 초기의 賢臣 梁公 狄仁傑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심이 담겨있는 '白雲孤飛' 고사 가운데 "登高山 望白雲 思親在其下(높은 산에 올라 흰 구름 바라보며 그 아래 계실 부모님 그리워하네)"에서 인용되었다고 하고, 宋나라 유학자 羅從彦이 어머니의 무덤이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정자의 이름 白雲亭을 답습하였다고도 한다. 귀봉은 晩年 藏修之所로 삼은 이곳에서 자제들을 敎誨하고 후생들을 訓迪하였으며 때로는 형제들과 함께 講道하였고 佳辰名節에는 奉老携朋하여 吟詠하며 逍遙忘世하기도 하였다.
3. 현지조사 의견 안동 귀봉종택에는 실제 종부가 거주하면서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전승한다는 점에서 우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특히 ‘내앞김씨’라고 할만큼 전통을 뿌리 내린 집성촌으로서 그에 버금가는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희석된 부분도 있고 단절된 것도 있지만 귀봉종택의 품격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귀봉종택은 안동지방에서 유난히 많은 인물을 배출한 천전마을에 있는 사대부가로서, 조선 후기의 종가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집이라 생각한다. 그 중요성을 요약해 본다. 첫째 우선 안동지방의 50위 불천위(不遷位) 가운데 한 분인 운천 김용을 사당에 모시고 있어 종가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대종가와 담 하나를 두고 나란히 있어서 이들을 연계하여 활용할 때 종택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상승되리라 본다. 둘째 종택은 안채, 사랑채, 사당이 잘 갖추어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전형성은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실천하도록 조성한 가옥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랑채에 큰 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대청을 꾸며서 남성중심의 장유유서의 덕목을 잘 실천하도록 하였다. 가족원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혼례, 상례가 종택의 공간에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행해졌다. 셋째 안동의 대표적인 의성 김씨 청계 문중의 두 번째 파로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호종일기, 유물 등이 다량 보존(기탁과 지정문화재 포함)되어 왔으므로, 유교의 종법에 따라 성립된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표본이 될 수 있다. 넷째 후사없이 사망한 종손과 종부를 대신하여 종손의 아우가 종손역할을 하면서, 20세기 후반에도 차양자를 하였다는 점, 외손봉사 등을 통해 유교의 종법이념의 준수가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를 헤아리는 좋은 사례가 된다. 다섯째 유교 이념에 앞장 선 종택이지만 가신(家神)인 성주를 모시고 있고 삼신 역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아직도 대문에는 액을 막는다는 엄나무를 걸어두었다는 것 등을 통해 민속문화와 유교문화의 공존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해마다 음력 9월 12일을 성주생일이라 하여 성주고사를 지내고 있다. 성주생일은 종택을 건축, 또는 중건할 당시 상량식을 한 날짜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현상은 주거사, 주거문화, 가신신앙(나아가서는 민속신앙)을 동시에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종부가 종택을 지키면서 전통문화를 잘 지키고 있지만 연로하기 때문에 후손이 종택을 이을 준비는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상 사람이 살지 않는 종택 보다는 거주하면서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살아있는 종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거주하므로서 생활문화의 전승이 가능할 수 있다. 다행히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은 그 모습을 항시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귀봉종택도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야 어떻든 전통적인 사대부가의 문화가 점차 멀어져가는 요즈음 전통문화를 보존, 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소중하다고 본다.
〈문화재위원〉 1. 건축연혁 이 집은 의성김씨 소종가로 龜峯 金守一(1528~1583)의 종택으로 1660년(현종 1)에 귀봉의 현손부인 창녕 조씨가 가묘와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761년과 1824년에 중수하고 1888년(고종 2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해지고 있는 중수 상량문을 보면 먼저, 김상렬이 쓴 1761년 상량문에 따르면 김낙행(1708~1766)이 짓고 그 해 3월21일 신시에 입주하여 4월 7일 유시에 상량하였으며, 다음은 김조수가 쓴 1824년 상량문에 따르면 김양운(1764~1824)이 짓고 그 해 3월 1일 사시에 입주하여 3월 9일 신시에 상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 건물은 유래와 건물의 구조양식으로 미루어보아 1888년 중건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지금껏 비교적 잘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귀봉종택이 자리 잡은 내앞 川上 川前里는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 김씨들의 집성마을로 크고 작은 기와집들이 동서로 길게 늘어앉아 전통마을 풍광을 이루고 있다. 반변천이 마을 앞 도로 건너에 흐른다하여 내앞 천상이라 부른다. 이 마을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손꼽은 삼남(三南 ; 영남, 호남, 충청)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내앞 마을 이외의 명당은 경주 양동마을?안동 하회마을?봉화 닭실마을로 양동을 제외한 나머지는 안동 지역에 몰려 있다. 풍수가 이중환은 이 안동의 세 명당과 예안의 도산 마을을 조선에서 양반 선비가 살 만한 이상적인 장소로 꼽았다. 안동 지역은 층층 기암절벽 사이로 냇물이 많이 흐르는 곳으로 산수를 즐기기에 최적지일 뿐만 아니라 왜구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안전지대로 전란이 적어 많은 학자와 문인이 나온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제시한 네 가지 조건(지리적?경제적 조건, 인심, 아름다운 경관)을 골고루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계거(溪居)’이다. 계거란 냇가에서 산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가장 이상적인 가거지로 생각했다. 내앞 마을이 바로 이러한 계거의 전형적 모습 중 하나이다. 내앞 마을은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 밝은 달빛 아래에다 비단을 빨아서 늘어놓은 아름다운 모습)의 풍수형국을 취하고 있다. 마을 뒷산(지네산)은 主山으로 日出山으로부터 뻗어 나온 지맥이다. 마을 남쪽으로는 가깝게 청성산이 오른편에 솟아있고, 동쪽으로는 일출산에서 내려온 또 다른 줄기의 산이 마을을 남동쪽까지 감싸며 名形局地를 이루고 있다. 명당에 자리 잡은 내앞마을 집 들 중에서 대종가의 기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안동 의성 김씨 종택’(보물 450호)이 단연 눈길을 끌어 머물게 한다. 소종가인 귀봉종택은 담을 사이에 두고 대종가의 동남쪽에 자리 잡고서 대종가와 함께 이 마을의 중심 영역을 이루고 있다. 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앉은 집의 ‘一’자형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口자형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口자형 정침의 앞쪽 우측으로 돌출한 사랑채와 담장 사이에는 내외담을 쌓고 협문을 내어 출입하게 했다. 정침의 우측 뒤편 먼 높은 상위 공간에는 사당이 별도로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독립되게 함으로써 더욱 신성한 장소의 영역성을 갖게 된다. 정침의 좌측 뒤에는 내측이 놓여 있다.
2) 건 물 ? 정침 몸채는 口자형으로 앞쪽에 一자형 사랑채가 좌?우측으로 돌출하여 앉고 그 뒤에 ‘?’형 안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채는 정면 2칸?측면 3칸의 6칸통 큰 안대청을 안마당 쪽으로 돌출시키고 그 좌측에는 상방과 마룻고방을, 우측에는 침식방?안방?부엌을 두었다. 이들 안채의 방 상부 모두에는 비교적 높고 넓은 다락이 마련되어 있는데, 부엌 위 다락은 지붕의 합각벽에도 창을 낸 모습이 눈길을 끈다. 다락으로 인해 안채의 기둥이 상당히 높아지게 되면서 돌출한 큰 안대청이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안채의 공간구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모습으로 마치 안대청을 돌려 앉힌 듯하다. 상방 앞으로는 통래간?곳간?광이 연이어져 좌 익사를, 부엌 앞으로는 통래간?욕실(옛 온돌방)?보일러실(옛 부엌)이 우 익사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 가운데 중문간이 자리 잡고 그 좌측으로는 작은방?부엌?아랫사랑방?아랫사랑마루가 차례로 놓여 아랫사랑 공간을, 우측으로는 2칸통 큰 사랑방?4칸통 큰사랑마루?동쪽사랑방이 큰 사랑공간을 이루고 있다. 큰 사랑방 우측 칸 배면에는 큰 사랑공간에 딸린 작은방이 뒤로 뻗어 안채 우 익사와 이어진다. 작은방은 큰 사랑방과 큰 사랑마루에서 안마당으로 드나들 때 통과하는 공간으로 안마당 쪽으로 난 작은방의 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는데, 이는 엄격한 내외 공간 규범에 따라 차면 벽을 두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19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내외법이 약화되는 경향을 읽게 하는 좋은 예라 생각된다. 중문간도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 전체가 한눈에 그대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한 정침의 곳곳에 동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쪽마루를 시설하고 많은 수납공간 등은 19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로 나타나는 주요 특징들이다. 정침의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이다. 안대청 상부가구는 5량 가로 휘어 오른 대량위에 양봉을 끼운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게하고, 종보 위에는 키 큰 제형판대공 놓아 종도리을 지지하도록 했다. 안대청 남쪽과 마룻고방 쪽으로는 외기틀과 추녀를 걸고 그 상부에 합각지붕을 얹었다. 이런 가구수법은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대종가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한다. 상방 부엌으로 돌출한 다락의 계단 받이는 미려한 통곡재와 좌 익사와 안대청의 고풍스러운 자귀질 기둥이 눈길을 끌며 이 집의 격조를 더해 준다. 좌?우 익사는 전저후고의 대지 경사에 따라 흘림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장혀 없이 납도리 3량 가로 가구하고 대량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했다. 큰 사랑채는 안채와 같은 장혀수장 5량 가 민도리형식인데, 판재동자주와 제형판대공에 소로 얹은 첨차형 부재를 끼워 안채보다 품격을 높인 점이 다르다. 안대청 상부가구처럼 큰 사랑 마루의 좌?우측 청방간 4분합 정자살 불발기 들문도 대종가 사랑채 것과 유사하다. 아랫 사랑채는 좌?우 익사처럼 장혀 없이 간략한 3량 가 민도리형식으로 꾸몄다. 이런 정침의 지붕형식을 보면 집의 머리에 속하는 큰 사랑채는 높은 팔작지붕으로 위용을 갖추게 하고 그 좌측으로 펼쳐진 아랫사랑채와 그 뒤편 오른쪽으로 조금 비켜서 높게 솟은 안채의 지붕은 합각벽이 보이는 서산각 지붕으로 지붕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위엄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서산각 지붕은 18세기 이전 건물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 또한 대종가와 닮았다. 안대청을 여느 집과 달리 돌려 앉힌 것은 멋스러운 서산각 지붕을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큰 사랑채 팔작지붕의 좌측 뒤쪽은 그 아래의 모서리에 실을 두지 않고 앞쪽과 달리 추녀 없이 가적 지붕처럼 꾸민 반쪽 팔작지붕이 이색적이며, 정침 지붕 용마루의 착고와 부고 사이에 암기와를 끼운 기법도 흔치 않은 모습이다. ?사당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민도리형식이다. 전면에 툇마루가 깔려있고 그 뒤편 두 짝 굽널정자살 문을 열고 들어서면 통칸 마루로 꾸며져 있다. 자연석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정면은 원형 초석 위에 원주를, 나머지는 방형 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다. 정면만 기둥 위에 안쪽을 초각한 보아지를 끼워 주두를 얹고 소로수장하고 5량 가로 가구하였다. 대량 위에는 판재동자주가 종보를 받고, 종보 위에는 소로 끼운 제형판대공이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다. 옥개부는 겹처마에 박공지붕을 얹고 풍판을 달았다. ?대문채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민도리형식 홑처마 박공지붕 집이다. 가운데 기둥 대문을 단 솟을 대문간이 자리 잡고 그 좌측에는 2칸통 초당방이, 우측으로는 마구간과 화장실이 놓여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3량 가로 대량 위에 동자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대문간 중앙 상부의 상방과 장혀 사이에 병이나 액운을 가져오는 잡귀가 접근을 못하도록 얹어놓은 음나무가 눈길을 끈다.
3. 조사자 의견 귀봉종택은 1888년에 중건한 의성김씨 소종가로 삼남의 4대 길지 중 하나인 내앞 마을의 대종가(안동 의성 김씨 종택 ; 보물 450호) 바로 우측에 접하여 이 마을의 중심영역을 이루고 있다. 안대청의 독특한 공간구성과 상부가구 수법이 돋보이며, 격조 높고 이색적인 지붕형식은 귀한 모습이다. 또한 19세기 이후부터 주로 나타나는 쪽마루?수납공간 등이 발달한 특징과 내외법이 약화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는 동선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귀봉종택은 대종가와 상호 긴밀한 관련성을 띠고 있어 민속적으로 미흡함이 없다면 중요민속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재전문위원〉 1. 건축연혁 귀봉 김수일 선생의 종택으로 현종 1년(166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집 양식을 지닌 건물로 고종 25년(1888)에 수리한 바 있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등의 건물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몸채 뒤편 사당에는 귀봉선생의 맏아들인 운천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호종일기(보물 제484호)가 보관되어 있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귀봉종택은 마을 뒤편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종택 앞에 동-서로 흐르는 반변천을 바라보며 남동향을 취하고 있다. 귀봉종택이 위치한 마을 앞으로는 반변천의 회류(回流)에 의하여 생긴 너른 경작지가 펼쳐져 있고, 이 때문에 내앞[川前]마을이라고 부른다. 부분적으로 꺾인 장방향의 대지 가운데에 놓인 귀봉종택의 배치는 'ㅁ'자형으로 문간채,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ㅡ'자형의 대문채에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초당방과 마구가 있으며, 정면으로 큰사랑채와 아랫(작은)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면해 안채가 자리잡고 있으며, 안채 뒤편으로는 운천(雲川) 김용(金涌)과 4대 조상의 신주가 봉안된 사당이 있다. 이와 같은 배치를 귀봉종택의 서쪽에 위치하여 있는 안동 의성김씨종택과 비교하여 보면, 상당부분 대칭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의성김씨종택의 사당 일곽은 서쪽 후미에 위치한 것에 비하여 귀봉종택은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제청과 안채의 보조시설의 경우도 의성김씨종택은 사당에 맞추어 서쪽에 치중되어있으며 귀봉종택은 동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의 공간구성적인 면에서도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귀봉종택의 배치와 공간적 특성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종택에 견주어 볼 때, 그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건 물 사랑채 : 귀봉종택의 사랑채는 정침을 이루는 ㅁ자형 구성의 정면에 一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중문을 기준으로 동쪽에 큰사랑채, 서쪽에 아랫사랑채(작은사랑채)가 위치하여 있다. 이 둘은 별채로 있다기보다는 ㅁ자형 평면에 일조하는 하나의 건물로 이어져 있다. 다만, 큰사랑채는 정면에서 보았을 때, 팔작지붕으로 단독 구성되어 별동으로 인식된다. 큰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전면에 툇마루, 동쪽 방 옆에 쪽마루를 두어 안마당에 대하여 동남쪽으로 사랑영역을 강조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즉 이는 별동으로 구성되지 못한 사랑채를 별도로 인지시키기 위한 수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측면의 규모가 2칸인 큰사랑채는 겹집과 유사한데, 이는 종택에 무시로 드나드는 일가친척 및 손님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되는데, 이 때문에 가구는 튼실한 5량 가구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아랫사랑은 안채에 딸린 모습을 취하고 있어 단촐한 3량 가구로 구성되었다. 다만, 서쪽 끝에 마루방을 1칸 두어 전면의 사랑영역에 속한 건물임을 보여준다. 큰사랑의 지붕은 특이하게 전면에서는 팔작지붕처럼 보이지만, 안마당과 면하는 부분에는 추녀마루 없이 내림마루에 눈썹지붕이 붙은 것처럼 처리해 놓았다. 이는 안마당의 주체는 안채이며, 따라서 안마당에서는 사랑채가 주체일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귀봉종택은 운천 김용의 불천위를 모신 불천위사당이 있다. 이 외에 기본적인 4대 봉사까지 합하면, 봉제사를 위하여 집이 구성되고 운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사랑채는 사랑마당에서 보았을 때 당당한 정면성을 취하고 그에 맞추어 가구가 구성되지만, 제사를 도모하기 위한 안채의 영역에 사랑채가 접할 경우에는 사랑채의 구성 원리를 끝까지 고수하지 않고, 안채의 구성 원리에 내어주는 실용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민속과 건축적 성격이 잘 어우러져 있는 이 종택의 특징에 해당한다.
안채 : 귀봉종택의 안채는 사랑채의 북서쪽 뒤에 있는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모습인데, 안대청이 정방형의 마당으로 돌출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3칸인 안대청의 서쪽에는 마룻고방 1칸과 상방 2칸이, 동쪽에는 침식방 2칸, 안방 1.5칸이 있다. 그리고 안방의 동쪽에 정면 1.5칸, 측면 2칸의 부엌이 위치하여 있다. 한편, 안대청은 귀봉종택의 일곽 밖에서 보았을 때, 상부에 팔작지붕 측면 합각부가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는 의성김씨종택 안대청 지붕과 닮아있다. 하지만, 의성김씨종택의 안대청이 맞배지붕의 측면 풍판에 해당한다면, 귀봉종택은 팔작지붕의 측면 합각부를 보여주는 것으로, 풍기는 느낌(이미지)은 서로 닮아 있지만, 구조적 해결과 구성방식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는 한 집안의 주택이라고 하더라도, 분파되어 종택을 구성할 경우 새로운 건축적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안대청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문중사람들이 모여 척사대회(윷놀이)를 하면서 화합을 다졌다고 하는데, 1960년대까지 해마다 지속된 놀이문화였다고 한다. 즉 안대청은 귀봉종택만의 공간이 아니라 문중 전체를 위한 일종의 공공 공간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대청이 보다 적극적으로 커 질 수밖에 없었다. 또 집의 주인에 성주신을 모신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안대청은 한 집의 안채 중심공간이면서, 문중의 중심공간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담기 위하여 안마당으로 돌출하여 2면에 대하여 정면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독특한 가구법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 측면의 높은 합각면은 일곽 외부에서 볼 때, 문중의 중심공간임을 보여주고, 정면은 안마당에서 볼 때, 안채의 중심공간을 보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안대청 상부에서 3량과 5량가구가 복합적 만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귀봉종택의 안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집안의 문화와 민속적 성격과 절묘하게 결부되어 있고, 이를 위하여 독특한 건축수법을 구사하였다.
사당 : 귀봉종택의 사당은 종택의 일곽 내 북동쪽 후미에 위치하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전면에 마루를 깐 툇칸을 두었고 내부에도 마루를 깔았다. 사당에 전퇴를 둔 예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닌데, 전퇴에 마루를 둔 것 또한 흔치 않다. 귀봉종택 사당의 특징은 건물 그 자체에도 있지만, 사당과 정침사이의 공간, 즉 일종의 사당영역 외부공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안채의 동단과 사랑채의 북단이 이루는 공간은 마치 사당의 또 다른 외부공간으로 인식된다. 지금은 일부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무시로 열리는 제사 시에 제물을 나르던 공간이요, 문중 사람들이 열 지어 있던 공간이었다. 즉 사당을 위한 제례공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공간의 동단에는 남-북으로 이어진 긴 경사로가 있고, 이는 곧 사당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사당영역에서 보면, 큰사랑채가 동쪽으로 돌출된 이유와 안마당이 북동쪽으로 뻗어 통로가 사당영역으로 이어져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대문채 :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가 솟은 솟을대문이다. 가운데 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화장실과 마구간이 각각 1칸씩 있고, 서쪽에 초당방 2칸이 있다. 대문채의 실(室) 구성은 조선시대 안동지역 상류주택의 사례에 비하여 별다른 특징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대문채가 큰사랑채와 축을 이루고 서로 병렬로 놓이게 하기 위하여 일곽의 동쪽에 치우쳐 있고, 이는 안채로 들어가는 동선을 의도적으로 어렵게 하려는, 즉 내외의 구분을 위한 의도가 보여진다. 3. 조사자 의견 전기한 바와 같이 귀봉종택은 퇴계학맥의 계승자이며 임란공신인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의 불천위를 모시는 종택이다. 즉 한 집안이 지내온 주택인 동시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이는 문중의 중심건물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느 종택이 그렇듯이 4대 봉사 또한 충실히 지내오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문화와 집안 내부의 독특한 행사로 발현되었고, 그것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각 건물(채)은 서로 유기적으로 엮이도록 계획되었다. 큰사랑채의 지붕은 전면이 팔작인 반면, 안마당에 면한 배면은 맞배에 눈썹지붕이 달린 형식으로 구성되었고, 안채는 안마당과 사당 방향으로 양면성을 취하도록 구성되었다. 이것은 마치 통도사의 대웅전이 두 면에 대하여 정면성을 취하도록 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문화와 민속에 의하여 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어 보인다. 물론, 대부분의 조선시대 종택들이 유교적으로 제례에 치중하여 건축을 구성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귀봉종택처럼 명쾌하고, 치밀하게 계획한 사례는 흔치않으며, 의성김씨종택과 비교해 볼만한 민속, 건축적 특징들이 많다는 점에서 귀봉종택의 가치는 더욱 높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항들을 충분히 감안할 때, 귀봉종택은 현재 지정, 관리되어 오고 있는 '경상북도 민속자료'보다는 향후 '중요민속문화재'로 상향 조정, 지정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가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별첨 2〉 경상북도지사 의견서
이 건물은 의성김씨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의 종택임. 1660년(현종 1)에 귀봉의 현손부인 창녕조씨가 가묘와 함께 건립하고 1888년(고종 25)에 김주병이 중건하였다고 함. 고샅이 열린 골목 끝에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ㅁ'자형의 정침이 있는데 대문채와 정침사이에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정침 동쪽 뒤에 사당채가 있음. 정침은 소위 날개집 유형에 속하는데 안채부분과 사랑채 및 부속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대청은 정면 2칸, 측면 3칸이 6칸으로 측면의 길이가 길게 되어 마루가 돌출하였고 안채 대청부분의 지붕은 팔작이며 추녀끝이 평면에 따라 ‘ㄱ’자로 꺾어 회첨을 만들면서 안방쪽으로 이어져 감. 안채 평면이나 가구의 법식이 대종가인 의성김씨종가와는 다르지만 그 맥이 흡사함은 가문의 일관성 때문임. 대종가와 이 집은 형상의 대소와 정교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법식이나 기법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음. 대청에 이어 한 단 낮게 부엌과 곳간과 뒤주가 좌익사를 이르며, 뒤주에 이어 작은 사랑채가 정침의 전면 좌측에 자리잡고 있고 곳간과 뒤주의 맞은편인 우익사엔 안방 부엌에서 계속되어오는 협문칸과 곳간이 있으며 이어 큰사랑이 정침 전면 우측에 자리잡았다. 작은 사랑채는 마루방 1칸과 한칸반의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쪽마루가 있고 난간이 설비되어 있으며 이 마루칸 1칸은 내루(內樓)와 같은 용도로 높이는 방과 같은 평상형이나 사면에 문짝과 창문이 달려 계절에 따라 개방하고 차경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꾸며졌음. 작은 사랑의 방 다음이 부엌 1칸이다. 이어 방 1칸이 있고 다음이 대문인데 이 독립된 방은 사랑채와는 격리된 방으로 이런 구성도 특이함. 큰사랑채는 대문(중문)의 동쪽에 위치하며 '┛'자형으로 배치된 방 3칸과 대청 4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물마루를 깐 이 대청도 안채 대청만큼이나 큼직하여 넓은 맛이 뛰어나며 대청 전면에는 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으며 큰사랑채의 지붕은 따로 팔작지붕이 됨. 귀봉종택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 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가구의 법식이나 기법이 뛰어나므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함. 〈별첨 3〉 안동시 학예연구원 의견
□ 지정조사 개요 ㅇ 대상문화재 : 안동 귀봉종택(安東 龜峰宗宅) ㅇ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9-1번지 ㅇ 조사일자 : 2008. 5. 30. ㅇ 건립연대 : 조선중기
□ 현 황 ㅇ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의 가장 큰 종가인 ‘의성김씨 종택’(보물450) 옆에 위치한 작은 종가임. ㅇ 고샅이 열린 골목 끝에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口’자형의 정침이 있는데 대문채와 정침사이에는 넓은 마당이 있으며 정침 동쪽 뒤에 사당채가 있음.
□ 구조·형식·규모·형태 ㅇ 정침은 소위 날개집 유형에 속하는데 안채부분과 사랑채 및 부속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고 안대청은 정면 2칸, 측면 3칸이 6간으로 측면의 길이가 길게 되어 마루가 돌출하였으며 안채 대청부분의 지붕은 팔작이고 추녀끝이 평면에 따라 ‘ㄱ’자로 꺾어 회첨을 만들면서 안방쪽으로 이어져 감. ㅇ 안채평면이나 가구의 법식이 대종가인 의성김씨종가와는 다르지만 그 맥이 흡사함은 기문의 일관성 때문이며 대종가와 이 집은 형상의 대소와 정교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법식이나 기법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음. ㅇ 대청에 이어 한단 낮게 부엌과 곳간과 뒤주가 좌익사를 이루고 뒤주에 이어 작은 사랑채가 정침의 전면 좌측에 자리잡고있으며 곳간과 뒤주의 맞은편인 우익사엔 안방 부엌에서 계속되어오는 협문칸과 곳간이 있고 이어 큰사랑이 정침 전면 우측에 자리 잡았다.
ㅇ 작은 사랑채는 마루방 1칸과 한칸 반의 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쪽마루가 있고 난간이 설비되어 있으며 이 마루칸 1칸은 내루(內樓)와 같은 용도로 높이는 방과 같은 평상형이나 사면에 문짝과 창문이 달려 계절에 따라 개방하고 차경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꾸며졌고, 작은 사랑의 방 다음이 부엌 1칸이며 이어 방 1칸이 있고 다음이 대문인데 이 독립된 방은 사랑채와는 격리된 방으로 이런 구성도 특이함. ㅇ 큰사랑채는 대문(중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자형으로 배치된 방 3칸과 대청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물마루를 깐 이 대청도 안채 대청만큼이나 큼직하여 넓은 맛이 뛰어나고 대청 전면에는 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음. ㅇ 큰사랑채의 지붕은 따로 팔작지붕으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 양식을 갖춘 건물임.
□ 작자·유래·전설 ㅇ 이 건물은 의성 김씨 龜峰 金守一의 종택으로 1660년(顯宗 元年)에 귀봉의 현손부인 창녕 조씨가 가묘와 함께 건립하고 1888년(高宗 25)에 김주병이 중건하였다고 함. ㅇ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종택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ㅁ’자형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 건물이 있고. 사당에는 운천 김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이 종택에는 보물 484호인‘운천 호종일기’보관되어 있음.
□ 조사자 의견 ㅇ 귀봉 김수일 선생의 종택으로 현종 1년(1660)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종가집 양식을 지닌 건물임. ㅇ 또한 바로 인근에 위치한 보물 제450호인 의성김씨 종택과 비교하여도 안채평면이나 가구의 법식이 대종가인 의성김씨종가와는 비록 다르지만 그 맥이 흡사한데 이는 가문의 일관성 때문으로 보이며 대종가와 형상의 대소와 정교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법식이나 기법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음. ㅇ 따라서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 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별첨 4〉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
□ 지정조사 용역개요 ㅇ 용역기간 : 2009.7.30 ~ 2009.10.27. ㅇ 참여연구진 - 전통건축분야 : 책임연구원 ㅇㅇㅇ - 생활 및 민속분야 : 연구원 ㅇㅇㅇ
□ 조사자 의견 ㅇ 아직도 종부가 살고 잇는 귀봉종택은 안동지방에서 유난히 많은 인물을 배출한 천전마을에 잇는 사대부가로서, 조선후기의 전통적 종가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집임. 1) 안동지방의 50위 불천위(不遷位) 가운데 한 분인 운천 김용을 지금까지 사당에 모시고 매년 불천위 제사를 올리고 있는 집으로서 종가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 특히 귀봉종택 주변에 대종가 등 문화유산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연계하여 활용할 때 종택의 문화유산 가치는 높음. 2) 안채, 사랑채, 사당이 잘 갖추어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종택임. 그러한 전형성은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실천하도록 조성한 가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확인됨. 3) 사랑채에 큰 사랑방, 작은사랑방, 사랑대청을 꾸며서 부계중심사회에서 남성본위의 접빈객과 장유유서의 덕목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음. 4) 가족원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혼례, 상례가 종택의 공간안에서 일정한 질서를 갖고 행해졌음. 5) 안동에서 대표적인 의성 김씨 청계 김진 문중의 두 번깨 파로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호종일기, 유물 등이 다량으로 보존(기탁 포함, 지정문화재 포함)되어 왔으므로, 유교의 종법에 따라 성립된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모범적인 종택임.
6) 후사 없이 죽은 종손과 종부를 대신하여 종손의 아우가 종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후반에도 次養子를 하였다는 점에서 유교의 종법이념의 준수가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헤아리는 데 좋은 사례가 됨. 7) 유교이념의 실천에 앞장선 종택이지만 家神인 성주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과 유교의 복합현상을 읽어낼 수 있음. 특히 매년 음력 9월 12일을 ‘성주생일’로 부르면서 성주고사를 지내고 있음. 성주생일은 종택을 건축(또는 중건)할 당시 상량식을 한 날짜로 판단되는 바, 이러한 현상은 주거사, 주거문화, 가신신앙을 동시에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례임. 이는 가옥에 대한 관념과 결합된 성주신앙이 유교문화 정착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문화 정착 이후에도 유교의례의 이면에서 면면히 이어진 것임을 웅변함. 더욱이 가옥의 축조가 성주라는 가신을 탄생시키는 것이라는 관념이 ‘성주생일’이라는 명명 속에 잘 남아 있음.
20. 안동 번남댁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 검토
가. 제안사항
나. 제안사유 ㅇ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호(1973.08.31)인「번남댁」을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 신청한 사항에 대한 지정가치 여부를 검토하고자 하는 사항임. 다. 주요내용(신청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 (2) 문화재 신청명칭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ㅇ 소 재 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 일원 ㅇ 소유자/관리자 :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문중 ㅇ 수 량 : 일곽(건물 1동, 토지 3,369㎡<1필지>) - 건축물 지정 : 1동
- 토지 지정 면적 : 3,369㎡
라. 현지조사의견(‘11. 5. 12) : 세부의견 별첨1 참조 <문화재위원>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임 <문화재위원 >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당시의 주생활과 건축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임. 소유자가 거주하면서 지속적인 경상관리가 필요 <문화재전문위원 > ㅇ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가치 있음. - 조선후기 시대성, 안동의 지역성, 진성이씨 문중의 시작이라는 목적성을 건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일부 소실된 점이 아쉬움. 민속학적 가치가 추가적으로 밝혀질 필요가 있음 마. 참고사항 (1) 경상북도지사 의견 : 별첨 2 참조 ㅇ 이 집은 순조 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현 소유자의 고조부인 이휘부(李彙溥, 1809~1869)의 선친(先親)인 번암(樊庵)이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을 위해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좌산(左山) 이만윤(李晩胤, 1834~1906)이 중건하였다고 함. ㅇ 이 가옥은 원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99칸이었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여칸 정도만 남아 있음. 평면구성은 성자(成字)를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ㅇ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ㅁ'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하회 충효당이나 양진당처럼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ㅇ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ㅇ 번남댁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신청함.
(2) 지자체 전문가 의견( 2008. 5. 30) : 별첨 3 참조 ㅇ 6.25당시 건물의 상당부분이 무너지고 없으나 그래도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무너진 건물지도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 ㅇ 이 건물은 안동에서 가장 큰 집중의 하나로, 조선 고종(高宗) 대에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어진 가옥으로 전함. ㅇ 단순한 ‘口’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ㅇ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음. ㅇ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부자집의 삶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3)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 2009. 10. 27) : 별첨 4 참조 ㅇ 번남댁은 퇴계 이황 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서, 대단히 규모가 큰 고택으로,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집임. ㅇ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하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확인됨. ㅇ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기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함.
바. 의결사항 ㅇ 가결 〈별첨 1〉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
□ 지정조사 개요 ㅇ 대상문화재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ㅇ 조사일자 : 2011. 5. 12(목)
□ 지정조사 결과(조사보고서) 〈문화재위원〉 1. 문화재 현황(연혁·설명·유래 등) 국가지정 문화재(중요민속문화재)로 신청한 안동 번남댁은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지정 당시는 민속자료) 제 7호로 지정된,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에 있는 저택이다. 의촌리는 진성 이씨 의인파의 집성촌으로 번남댁은 전통사회에서 저택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99칸의 집이었다. 그러나 현재 99칸의 저택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너른 집터, 여러 건물을 통해 99칸의 위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의인파는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의인마을을 중심으로 한 진성이씨의 한 파를 말한다. 의인파의 파시조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손자 3형제 가운데 둘째 손자인 장사랑공(將仕郞公) 이순도(李純道, 1554-1584)이다. 장사랑공의 증손인 수월헌공(水月軒公) 이집(李集, 1672-1746)이 8남2녀의 자녀를 둠으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진성이씨 상계파(上溪派)에서 분파된 문중이 의인파이다. 의인마을은 장사랑공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진성이씨 집성촌이다. 번남댁의 여러 건물은 3대에 걸쳐서 지어진 것이다. 정침(안채)은 주손(이동익)의 6대조인 이동순(1779-1860, 호:번엄, 호조참판)이 문과급제(순조7년:1807년) 후 고향으로 이주하기 위하여 내직에 있을 때 건축(약 200년)한 것이다. 그 뒤 삼척도호부사를 지낸 아들 이휘부(1809-1869, 호:치옹)가 아버지를 위해 영천군수 재직 시(1853년: 철종4년) 북편 사랑채를 지어 바쳤다(약 160년 전). 또한 소실된 남쪽 사랑채(삼호당)는 상주목사를 지낸 손자 이만윤(1834-1906, 호:좌산)이 1870년경(약140년) 건립한 것이다. 가옥의 전체적인 모습은「成」字 배치 형식으로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을 당시 99칸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지금은 70여칸만 남아있다. 특히 퇴계가 시로 읊은 바 있는 “태평연화의인지촌(太平煙火宜仁之村)의 유지앵소지지(柳枝鶯所之地)”에 터를 잡은 상류주택으로서 3代 이상 대가족이 거주할 수 있도록 배치와 평면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뒤편 전석으로 쌓은 굴뚝은 집 전체 연기를 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영남에서 제일 건물 규모가 크고 구조가 특이한 조선후기 반가 주택이다. 번남댁의 현 주손인 이동익(李東翼)의 증조 때까지 4代에 걸쳐 참판, 승지 및 각지의 목·부사를 지내면서 문벌을 기리던 집이었다. 또한 현 주손의 5代祖인 삼척부사 치옹 이휘부는 선성유림(宣城儒林)에 제안하여 유생(儒生) 50여명을 모아 사비(私費)를 기울여 퇴계선생 전서인 『도산전서(陶山全書)』 70여 책을 편찬하였다. 이것이 세칭 『도산전서』 번남본(樊南本)이다. 이 『도산전서』 75책은 1980년 12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도산전서』 1,2,3,4권으로 간행하여 제현(諸賢)에게 널리 배포하여 退溪學 연구 활성화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번남댁은 당초 □자 집으로 시작되었다. 집은 정침과 사랑채 별당 그리고 행랑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보통 건물에서는 굴뚝을 두 개의 방도 연결할 수 없다. 그런데 번남댁은 정침과 사랑채 등 별당과 행랑채를 제외한 6개의 부엌을 한 통로로 아우르는 굴뚝이 하나 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성은 어떠한 고건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지금 형태로는 알 수 없지만, 당초 □자형 고택에서 출발했던 번남댁은 가세가 번성해지면서 범위를 넓혀 이룰 성(成)자형의 고택으로 완성되어 궁궐과 같은 위용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는 안동만의 독특함이며 전국 어느 고건축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별당과 사랑채, 방앗간 말 마굿간 등과 목욕탕, 정침 내당 화장실 사랑채 화장실, 북편 담에 설치되었던 삽문과 담에 설치되었던 삽문, 그리고 정원과 호수는 물론 사랑채와 행랑채로 통하던 삽문은 메워져 버렸고, 굴뚝은 소실되고 형체를 찾아볼 수 없다. 정침에서 북쪽 사랑채로 연결되는 문살 속의 긴 통로 등은 중국 송대의 건축 양식을 가미하고 있으며 현대 고건축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건축형태라 한다.가세가 번성했던 그 옛날 99칸 집을 돌아볼 때는, 비나 눈이 와도 우산과 우의 없이 다닐 수 있는 건축 구조였다. 안채와 사랑채 내부로 통하는 복도를 기능적으로 독특한 서비스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인 듯 하다. 번남댁은 의인마을의 많던 고가옥 중에서도 76년도 안동댐 건설 당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는 유일한 고가이다. 그러나 번남댁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서 생활문화를 찾아볼 수 없다는 취약점이 있다. 그러나 예전, 이를테면 사람이 거주하던 1970년대까지는 다양한 생활문화가 99칸의 저택 답게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번남댁은 문중 대소사를 하기 위한 회의, 吉祀 준비회의, 대동보 또는 파보 편찬 회의 등 문중회의를 하는 공간이었다. 회의는 여러 가지였다. 가을 추수 후 음력 9월 중으로 문중재실 위토 관리를 위한 사전 회의를 열고, 음력 10월 중에 시제를 올리기 위한 회의를 한다. 이런 회의는 연례적인 회의로서 번남댁에서 여는 대표적인 회의였다. 선조 3년 탈상 후 길사(吉祀)가 다가올 때는 문중회의를 열어서 길사 준비에 대하여 논의했다. 대동보 또는 파보 편찬을 위한 사전 회의도 번남댁에서 열렸다. 번남댁의 주인 치옹 이휘부가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오던 ?퇴계선생 유집 초고?를 번남댁에서 비용을 대고 ?퇴계선생전서?로 편찬한 일은 바로 이런 회의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번남댁은 봉제사 접빈객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진성이씨 의인파는 퇴계의 가계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유교적 덕목의 실천을 대단히 중시했다. 재산이 넉넉하였기 때문에 유교적 생활이념을 실천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따라서 ‘봉제사 접빈객’과 같은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인마을 주민들에게 유교적 실천 덕목을 은연 중에 보급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기여했다. 번남댁의 주인이었던 이휘부가 개인적으로 비용을 부담하고 ?퇴계선생 전서?를 편찬한 사실은 성리학과 가례 보급에도 앞장섰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마당마다 풍속이 달랐던 것도 99칸 집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번남댁에는 별당 마당을 제외하고도 3개의 마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당마다 행해지는 민속적인 행사가 따로 있다. ‘봉제사 접빈객’을 중시하던 그 옛날 명문가의 법도 또한 민속으로 남아있었다. 정침 즉 내당에 있던 네모반듯한 마당은 □자 정침 속의 마당이어서 햇빛을 많이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방이 막혀서 바람 또한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부엌이 모두 6개가 마당을 향해 있고, 정침 중에서도 문간채와 연결되는 곳에는 곡간이 있다. 행랑채 곡간에는 도정을 하지 않은 조곡을 보관하였고, 정침의 곡간에는 도정을 한 정곡을 보관하였다. 정침 마당 역시 길흉사 때에는 인절미와 가래떡, 다식을 만들고, 명절에는 떡국 등을 집에서 만들 때 이용된다. 또한 사랑채의 네모반듯한 마당은 ‘봉제사 접빈객’의 마당이었다. 손님이 찾아 들면 항상 마당에 나가서 맞이하고 봉제사 시에는 많은 대소가에서 제사에 참석하기 때문에 마당에 도열하여 제사를 올리기 때문이다. 행랑채 마당은 한 없이 넓다. 말과 소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많은 공간에는 가을에 추수한 조곡 즉 노적봉과 난방용 화목을 쌓아 놓는 장소로 활용되는 공간이었다. 음력 5월이면 산야초를 배어 모아 퇴비를 만들고 가을이면 도리깨로 탈곡하고 겨울이면 넓은 공간에 멍석을 펴 놓고 윷놀이를 하는 공간이었다. 수몰 직전 의인마을은 20촌 이내 혈족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종기 살면서 명절마다 조상님을 모시며 세시풍속을 지켜왔다. 섣달 그믐날이면 어른들께 ‘묵은세배’를 다녔다. 마을의 집집마다 부녀자들은 설 차례 제수와 음식 장만에다 식구들의 설빔을 챙기느라 밤을 새곤 하였다. 의인마을에서는 설날 아침에 아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대문을 열고 우물가는 길을 쓸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사내아이들은 서로 먼저 일어나 대문을 열고 우물가는 길을 쓸고 왔다. 이어서 아들은 물을 데워 사랑방에 가서 할아버지, 아버지의 세숫물을 떠다 놓은 다음 세수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랑방에 나가서 세배를 올렸다. 설날 아침이면 지손가에서 각자 집집마다 세배를 한 다음 오전 9시?10시경에 번남댁으로 모여서 세배를 하고, 함께 차례를 지냈다. 번남댁에서 음복을 한 다음 자기집으로 되돌아가서 차례를 지낼 필요가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비로소 차례를 지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하루를 번남댁에서 보냈다. 설을 지내고 나서 정월보름까지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놀았는데 주로 윷놀이를 했다. 이 때에도 먹거리 풍부하고 공간이 넓은 번남댁이 가장 널리 활용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주민들이 마을을 거의 다 떠나고 없어서, 그 옛날 무리를 지어 세배 다니던 풍습은 이제 볼 수 없어졌다. 설날이면 수십 명의 제관이 세배와 제사를 올리려 번남댁으로 몰려가는 모습도 사라진 것이다. 번남댁 뒤 높이 솟아 있는 봉우리는 일월산 지맥으로 원거리에서 봐도 주먹을 불끈 쥐어놓은 형태의 산세이다. 성황당은 번남댁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여 m이고, 집에서 ‘석천’이라는 우물까지의 거리 또한 200여 m이다. 그래서 성황당, 번남댁, 석천은 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구도를 이룬다. 그 봉우리 정상에는 유난히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있다. 1976년 안동댐 건설 전만 하여도 이곳에 땔감을 하러 갈 때면, 두 손을 모아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화평을 기원했던 ‘성황당’의 동신목이 자리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황당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려서 산야초만 무성한 상태이다. 안동댐 수몰 전까지는 주민들이 해마다 정월 열 나흗날 밤 이곳 성황당에서 당제를 올려 가정과 마을의 안위를 기원했다. 당주는 진성이씨와 타성 구별 없이 맡았으며, 대체로 진성이씨와 타성의 당주 비율은 2 : 1 정도라고 하니 가구수에 어느 정도 비례하였던 것이다. 성황제(동제, 당고사)를 올리기 보름 전(섣달그믐께)에 ‘성황님’이라 하던 서낭대를 마을로 모셔서 지신밟기를 하고 액운을 물리치는 의례를 행했다. 지신밟기를 할 때 가장 먼저 오는 집이 번남댁이었다. 당시만 하여도 번남댁의 가세가 마을을 압도하여 제수 비용을 번남댁에서 우선적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지신밟기를 하면서 걸립을 하기도 했지만, 제수비용 전액을 번남댁에서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황당이 있는 산도 예부터 현재까지 번남댁 소유인데다 너르기 때문에 성황님을 모시고 마을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번남댁을 찾았던 것이다. 종손과 종부는 초석을 펴놓고 床에다 쌀을 올리면 그 앞에 성황대를 세워놓고 정중히 큰 절을 올린 후 풍물패와 함께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통해 액운을 몰아낸다. 집안 한 바퀴를 돌아 본 ‘성황님’은 바로 집의 남쪽 산 밑 ‘석천’이라는 우물로 향한다. 우물 바닥은 돌로 울퉁불퉁한데, 성황대가 사람 손을 받치지 않는데도 신기하게 우물 중앙에 똑 바로 서 있었다. 그것은 성황님의 영력으로 믿었다. 이어서 마을 각 가구를 배회하며 지신밟기를 했다. 성황대를 잡고 선두에 선 사람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성황대를 잡은 사람이 가고자 하지만 성황님이 마음에 없으면 성황대가 앞으로나 뒤로 뉘어 버린다. 바로 그런 가구는 흉사나 가정에 불협화음이 많은 가구였다. 대개 보름 정도 성황대를 앞세우고 낮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밤에는 성황대를 마을의 당주 집에 모셔둔다. 이런 지신밟기를 하다가 정월 14일 밤에는 성황대를 모시고 성황당에 다시 반환하고 성황제를 올렸다. 대보름 새벽 2시경에 성황제를 마치면 당주집으로 가서 음복을 하고 대보름 날이 새면 의인마을 모든 집에 음복을 돌렸다. 이 때 번남댁에는 가장 많은 양으로, 가장 먼저 음복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황제를 통해 동민들의 마음을 서로 결속하는 데 번남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번남댁에서도 음력 2월 초하루 영등 할머니 내려오는 날이면 안동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손빔을 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삼신바가지’에는 첫 수확한 햇곡으로 갈아 넣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성주단지’도 모신 것 같은데 그 속에 넣은 곡식도 함께 갈았다고 한다. 수몰 이전까지는 해마다 봄철 부녀자들이 화전놀이를 성황당이 있던 산에 서 했다. 화전놀이를 크게 할 때는 도산서원에 가서 했다. 단오절에는 주민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궁궁이를 꽂고 그네를 탔다. 그네를 뛰는 곳은 번남댁 담밖에 위치한 ‘솔마당’이었다. 여기에 있는 소나무나 느티나무에 짚으로 꼰 그네를 매고 혼자서 뛰기도 하고, 쌍그네를 뛰기도 하였다. 번남댁은 건물이 웅장할 뿐만 아니라 임야, 전, 답 등도 넓었다. 마을의 집 주변과 번남댁이 위치해 있는 산골짜기를 가리키는 ‘번남골’ 전역은 물론, 안동 임동을 지나 영덕으로 가는 길목인 황장재 넘어서 바로 좌측 산골부터 영덕 시내 장옥을 이어 가는 도로에 이르기까지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선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이러한 가세를 유지 했던 과거에 번남댁은 마을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번남댁 옆과 뒤편은 고송과 참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옛날에는 과원이라 할 정도로 밤나무도 많았다. 이러한 고목나무 밑은 마을 주민들의 회의 장소로, 쉼터로 사용되어 왔다.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모내기 후에 지루한 논매기를 마치고, 마을의 일꾼들이 모여서 한바탕 잔치판을 벌인다. 이른바 음력 7월에 하는 풋굿(호미씻이: 草宴)인데 풋굿을 하던 곳이 번남댁 담 밖의 ‘솔마당’이었다. ‘솔마당’은 고송이 우거진 솔밭으로 번남댁 소유이다. 풋굿을 먹을 때는 진성 이씨와 타성(김씨, 신씨, 권씨, 조씨, 박씨 등)이 구분 없이 어울려서 놀았다고 한다. 이 때 집집마다 농주와 감주 그리고 각종 음식을 마련해와 마을 주민들이 즐겁게 나누어 먹고 하루를 놀았다. 당연히 농토가 가장 많았던 번남댁에서는 가장 많은 음식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제공하였다. 번남댁 역시 다른 사대부가처럼 가양주와 내림 음식이 있었다. 의인마을이 수몰될 때까지는 대표적인 가양주로 가루주가 전승되었다. 가루주(가루술)는 멥쌀을 불려 곱게 갈아 쌀가루를 만든 후 누룩, 엿기름을 넣어 만든 뽀얀 술이다.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아서 술인지 음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어서도 여인들도 먹었다. 주로 여름에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지금도 문중에서 몇 사람의 할머니들이 빚을 수 있다. 청주(淸酒)는 쌀과 누룩으로 빚으며 용수를 술 단지 안에 넣고 그 안에 고인 것을 걸러 낸 맑은 술이다. 청주는 주로 제주나 접빈용으로 썼다. 번남댁에는 언제나 손님이 많았기 때문에 손님을 위한 음식, 넉넉한 제사음식을 손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수란, 명태보프름, 문어숙회, 송화다식, 송화다식, 시루떡, 경단, 조약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시루떡은 제사음식의 기본이 되는 떡이었다. 큰 시루에 떡을 쪄내는 기술이 번남댁에 대대로 전해왔었다. 번남댁 뒷산에 이르는 산기슭에는 남근석이 남아 있다. 남근의 형태로 된 남근석은 부녀자들이 아이 갖기를 빌던 곳이라고 한다. 번남댁과 의인파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번남가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이동순 등, 의인가에는 이집 등이 있다(상세한 인물 소개는 생략한다). 인물들이 많은 만큼 고서류(古書類매), 고문서류, 고서, 목가구 등 많은 유물과 전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특히 고서는 대구 가톨릭대학교에 목가구는 안동민속박물관에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 지금 의인마을에는 江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수월헌(水月軒) 이집(李集)이 지은 것이다. 그는 마을 동쪽 끝 절벽 위에 강정을 짓고 그 아래 큰 바위가 흩어진 강변과 그 주변을 관어암(觀漁巖), 조은대(釣銀臺), 백화단(百花壇),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지금의 강정은 수몰 이후 이건한 것이다. 8형제를 낳아 의인파를 형성시킨 수월헌 이집(李集)이 낙향하여 유유자적하고자 건립한 강정(江亭)은 수몰지로 인해 1975년 현 위치인 ‘솔마당’에 옮겨 보전되며, 애초 99간 기와집인 번남댁(樊南宅)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지방 문화재)가 되어 옛 터전에 남아 있다. 그에 반해서 교리댁(校理宅)은 안동민속촌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다례원이 되어 관광객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주고, 진보댁(眞寶宅)은 영남대학교의 민속원에 옮기어 의인정사(宜仁精舍)라는 당호를 얻어 후학들의 공부방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입지환경 번남댁이 있는 의인은 의촌리의 동쪽지역으로 도산서원 앞의 안동호를 건너서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의인은 애초 아름답고 운치있는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된 비운의 마을이 되어 버렸다. 거촌이던 의인마을의 저지대에 살던 대부분 주민들이 외지로 떠났고, 고지대에 살던 일부 주민들만이 지금의 의인마을에 남아서 살고 있다. 의촌리는 의인마을과 섬촌마을로 구성된다. 안동댐 수몰 전에는 의인마을과 섬촌마을에는 모두 120여 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진성이씨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섬촌마을이 별도로 성황제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별도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몰 전에 의인마을에는 모두 50여호가 살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진성이씨가 30여 호였고, 그 나머지는 타성이었다. 수몰 전 의촌리 120여 가구 가운데 40여 호가 고가옥이었다. 그러나 수몰 전, 애초의 자리에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고가옥은 번남댁 뿐이다. 안동댐 물이 만수위에 차더라도, 번남댁과는 물이 100m 정도 거리라 하여 이주하지 않은 것이다. 영남대학교 교정으로 옮긴 의인정사(宜仁精舍), 안동댐 아래 조성된 안동민속촌에 이건된 와가 등이 본래 의인마을에 있던 것이다. 의인마을은 안동댐 건설 후 섬이 아닌 섬이 되어서, 더더욱 고립되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정책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바로 이 고립된 소외지역에서 우뚝하게 남아 있는 고가가 번남댁이다. 의인은 태백산이 남으로 흘러 일월산에 우뚝하고 다시 북으로 가지를 뻗어 청량산의 곁가지를 친 다음 서쪽으로 내려와 앉아 야산을 이루고 남쪽은 부포를, 북쪽은 의인을 만들었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나가는 모양이어서 하회마을과 같이 풍수지리상으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 동쪽 끝에서 싹실골로 가는 길을 ‘배로’[船路]라 하고 마을 서쪽 강변에 돌을 모아 무덤같이 쌓았던 곳이 있었다. 또 마을 앞 들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확인된다. 마을 뒤 계곡의 지명이 “신씨 묘구멍”라고 전하는 곳이 있어 진성이씨가 들어오기 전에 신씨(申氏)들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의인마을 앞은 물이 사시사철 유유히 흐르며 각종 물고기가 놀고 뒷산은 높지 않게 수목은 우거져 기화요초가 저마다 철철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고즈넉하게 자리 잡아 평화롭게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수월헌(水月軒) 이집(李集)은 마을 동쪽 끝 절벽 위에 정자 강정(江亭)을 짓고 그 아래 큰 바위가 흩어진 강변과 그 주변을 관어암(觀漁巖), 조은대(釣銀臺), 백화단(百花壇),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퇴계선생과 청안 이병순(李秉淳: 行 淸安縣監, 1751-1818)은 일찍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드넓은 들판과 맑고 시원한 강물에 넘치는 좋은 경관을 간직한 의인은, 의인파가 입향 이래 320여년을 세거한 곳이었다. 안동댐의 축조로 물이 들면 만경창파이고 물이 빠지면 잡초가 우거지는 폐허가 되어 섬 아닌 섬으로 몇몇 집들이 산 아래로 옮겨져 있다. 의인과 의인 주변에서 정답게 부르던 신선바우, 가랑골, 호수골, 바른골, 도장골 등등 지명이 여럿 남아있다. 골과 산과 도랑은 변하지 않고 있지만 웅굴(우물)과 연지메(연자방아)는 묻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고색창연하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간 데 없고 그 터에는 방초만 우거졌으나, 강바닥의 마당 방구와 액바우는 그래도 물이 줄면 나타나니 놀던 바위를 다시 볼 수 있다.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서낭째 웅굴’(城隍峴泉)에 아직도 변함없이 맑은 물이 솟구쳐 오르고, 주민들이 삶을 의지하고 길흉화복을 빌었던 당집[城隍堂]이 폐허가 되어 쓰러지기 직전에 있다. 번남댁 뒷산이 일월산에서 이어지는 청량산 지맥에 자리하고 있다. 일월산 지맥에 자리하면서 앞으로는 낙동강이 S자로 흐르고 식수로 사용했던 샘이 바로 집 남쪽 산자락 바위 밑에 자리하여 산과 물이 융합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현지조사 의견 번남댁은 퇴계 이황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 99칸이라는 규모가 대단히 큰 고택이다. 99칸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대 저택을 말하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오늘날에도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99칸 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99칸 집이었던 번남댁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특히 그 안팍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생활형태를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현재는 비록 99칸 건물은 아니지만 너른 집터와 다양한 건물을 통해 그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번남댁의 중요성을 요약해 본다. 첫째 비록 지금은 없어진 건물도 있지만, 애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사랑채가 두 채이고, 별당채까지 갖춘 고택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는 외부와의 교류가 증진되는 상황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더욱 강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을 보인다. 전형성이 더욱 강화된 내용은, 접빈객과 장유유서의 덕목을 더 엄정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채를 북쪽 사랑채와 남쪽 사랑채로 나눈 점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외부와의 교류가 중시되고 가족 구성원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랑채가 둘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비록 남쪽 사랑채와 별당채, 사당이 지금은 없지만, 현존하는 안채와 북쪽 사랑채, 행랑채만으로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요건을 잘 간직하고 가족원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의례가 고택 안에서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행해졌다는 점에서도 99간 사대부가의 생활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넷째 유교 이념에 앞장 선 종택이지만 성주와 삼신과 같은 가신(家神)을 섬겼다는 점은 민속문화와 유교문화의 공존현상을 찾아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대부라 할지라도 유교문화 정착 이전에 조상신에 대한 신격에 대한 신앙과 의례가 전승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섯째 안동에서 대표적인 퇴계 이황선생 문중(퇴계문중은 상계파, 의인파, 하계파로 나뉘어져 있다)의 지파 가운데서 의인파의 종택으로서 우수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기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섯째 안동댐 건립으로 번남댁 인근 전통가옥들은 철거과정을 겪었는데, 번남댁은 당시 주변 환경과 변화를 지켜본 건물로서 그 자리에 남아있으므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번남댁은 별도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인근 문화유산을 연계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 활용가치가 높다고 본다. 번남댁은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은 기간이 무척 오래되었다.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마을이 거의 소멸되어 사실상 이같은 저택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남댁은 살아있는 생활문화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다양한 건축물을 통해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현재 주손인 이동익씨가 거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번남고택의 미래가 우려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거주하기 위해서는 복원해야 할 부분도 있으리라 보는데 그 기준은 1973년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모습을 토대로 해야 할 것이다. 지정 당시처럼 70여간이 되더라도 번남댁은 ‘99간의 저택’이었다는 역사성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 지속되리라 본다. 안동댐 건설로 인해 번성하던 의인마을은 이제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마을이 되었다. 더구나 의인마을은 안동댐 건설 후 섬이 아닌 섬이 되어서, 더욱 고립되었으며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정책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번남댁은 의인마을의 많던 고가옥 중에서도 76년도 안동댐 건설 당시 자리를 옮기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는 유일한 고가이다. 그런 점에서도 번남댁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각별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재위원〉 1. 건축연혁 번남댁은 퇴계 이황의 둘째 손자 계열의 집으로 3대에 걸쳐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주손 이동익의 6대조인 樊庵 李同淳(1779∼1860, 호조참판)이 문과급제(순조 7년 : 1807) 후 고향으로 이주하기 위하여 내직에 있을 때 건립한 것이다. 북편 사랑채는 삼척도호부사를 지낸 아들 李彙溥(1809∼1869)가 아버지를 위해 영천 군수 재직 시(철종 4년 : 1853) 지어 받쳤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건물 중 남편 사랑채는 상주목사를 지낸 손자 左山 李晩胤(1834∼1906)이 1870년 경에 건립하였고, 별당?행랑채?방앗간채의 연대는 미상이다. 이렇듯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전체 99간 이었던 이 집의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안채?북편 사랑채?행랑채의 50간 정도는 유래와 건물의 구조양식으로 미루어보아 19세기 중후반 이전에 건립한 조선 후기 주택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번남댁이 자리 잡은 의촌리는 원래 의인?섬촌마을과 두 마을 사이의 작은 샛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두 마을에 살았던 120여호가 거의 대부분 수몰되고 지금은 의인마을의 번남댁과 샛터마을의 일부 가옥만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몰전의 120여호 가운데 반 이상과 의인마을의 50여호 중 30여호가 진성이씨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사대부가는 번남댁이 유일하다. 번남댁은 나지막한 야산을 등지고 서향으로 앉아 있다. 옛 의인과 섬촌 마을의 가옥들이 들판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서측과 북측의 낙동강변 쪽은 모두 들판으로 바뀌었고, 동측과 남측으로는 옛 모습 그대로 야산이 둘러싸고 있다. 행랑채의 대문 앞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보면 들판 끝자락 강가에는 조선시대 별시를 행했던 시사단(경북 유형문화재 33호)이, 강 건너에는 도산서원의 건물들이 바라보인다. 의인마을은 태백산이 남으로 흘러 일월산에 우뚝하고 다시 북으로 가지를 뻗어 청량산의 곁가지를 친 다음 서쪽으로 내려와 앉아 야산을 이루고 남쪽은 부포를, 북쪽은 의인을 만들었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나가는 모양이어서 하회마을과 같이 풍수지리상으로 行舟形이라고 하여 마을 동쪽 끝에서 씩실골로 가는 길을 ‘배로’라고 한다. 퇴계는 의인리를 “태평하게 연기를 피우는 곳, 의인이라는 마을이라네 고기잡아 요역을 대신하니 배부르고 따뜻하네”라고 하였다. 이런 의인마을은 江居 可居地 명당으로 수몰로 가옥들이 사라졌을 뿐 옛날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잘 간직하고 있다. 번남댁은 명당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기에 안동댐 물이 만수위에 차더라도 물과 100m 정도 떨어져있어 이주하지 않고 의인마을의 옛 터에 홀연히 남아서 초점경관을 이루고 있다. 번남댁은 99간 이던 당시에는 안채?남쪽 사랑채?북쪽 사랑채?행랑채?별당?방앗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북쪽 사랑채?행랑채만 남아있다. 맨 앞에 놓인 ‘?’형 행랑채의 대문간을 들어서면 행랑마당 건너 좌측에는 ‘?’형 북쪽 사랑채가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는 안채와 안행랑채가 ‘튼口자’형을 이루며 놓여있다. 안채 남편에는 남쪽 사랑채와 방앗간채가 각각 앞뒤로 배치되어 있었고, 북쪽 사랑채 북편에는 별당이 있었다. 99간 건물 모두가 있었을 때는 ‘成자’형의 배치형태로 전국 어디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었다는 당시는 여느 사대부가와는 달리 궁궐과 같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사당이 없지만 원래 안행랑채와도 접한 남쪽 사랑채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독립된 건물의 일반적 사당과는 아주 상이한 것으로 번남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별도로 지어서 조상을 모시던 ‘亡者의 공간’(사당)을 후손들이 기거하는 ‘生者의 공간’(살림채)에 포함한 예는 조선조 고종 때의 신분제도와 服制 등에서 나타난 간소화 과정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채 뒤편의 동남쪽 언덕 위에 굴뚝이 우뚝 솟아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굴뚝은 별당과 행랑채를 제외한 안채와 사랑채 등의 6개 부엌을 한 통로로 아우르는 것으로 이 집 고유의 뛰어난 온돌구조의 과학적 기술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안채 부엌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신동아 1973년 3월호 田溶種 사진) 이러한 번남댁은 건물들이 모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옛 건물터와 함께 각기 영역을 구성한 담장이 거의 대부분 남아 있어 기능별로 다양하게 세분하고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내외공간 구분을 명확히 한 분리형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안채 북쪽의 뒷마당은 여성전용공간으로 독립성을 높인 점이 눈에 띈다.
2) 건 물 ?안채 및 안행랑채 안채는 튼口자형으로 앞쪽에 ‘ㄴ’형 안행랑채가 앉고 그 뒤에 ‘?’형 안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골방?찬방?부엌이, 우측에는 상방과 작은방?부엌이 안채 공간을 이루고 있다. 곳곳에 툇마루와 쪽마루를 설치하여 동선 편의를 도모하고 다락과 벽장 등의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마련하였다. 안방 뒤쪽에 비교적 큰 2칸 찬방이 안대청으로 1칸 돌출하게 한 모습은 흔치않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양측을 직절한 보아지를 끼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 홑처마 집이다. 안대청 상부가구는 5량 가로 4분변작 하였는데, 안대청과 양측 방 위쪽은 대량 위에 아주 낮은 동자주를 세워 종보?중도리와 주량작하고, 안대청의 중앙 위쪽은 종보 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 없이 중도리 장혀를 통 넣고 그 위의 중도리를 승두형 부재로 결구하였다. 종보 없이 가구한 수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키 낮은 동자주를 사용하고 종보 없이 상당히 높은 제형판대공을 세운 것은 4분변작을 하면서 3분변작처럼 삿갓 보꾹을 솟게하여 상승과 안정감을 더해 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방 앞 툇마루 서쪽 끝 벽장의 정교하고 섬세한 장식과 맞춤, 안방과 상방의 부엌 쪽 벽장의 통부재 까치발 등은 이 집의 높은 격조를 읽게 한다. 안행랑채는 행랑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 동쪽에는 곳간이, 남쪽으로는 봉당과 몸종방?광?헛간?옛 사당 공간이 차례로 놓여 있다. 안채로의 출입은 내외법에 따라 중문간을 들어서 안채가 직접 바라보이지 않도록 봉당을 거쳐 꺽어 드나들게 했다. 구조양식은 민도리형식의 3량 가로 대량 위에 동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고 홑처마 맞배지붕을 얹었다. ?북쪽 사랑채 북쪽 사랑채는 ‘?’형으로 서쪽으로부터 사랑마루?주인방?정지를 두고, 남쪽으로 꺾이면서 사랑찬방?손님방을 앉혔다. 사랑마루 앞의 툇마루는 손님방 앞을 지나 안채까지 이어지도록하여 동선의 편의를 도모하였는데, 주인방 동쪽 끝 칸 앞에서 안채까지는 문을 달고 판벽을 설치하여 은밀한 통로가 되게 꾸몄다. 사랑채에도 안채처럼 여러 곳에 다락과 벽장 등의 수납공간을 많이 마련하였다. 손님방의 툇마루 쪽에는 머름을 두고 굽널띠살과 미닫이 문의 이중 창호를 설치하였는데, 겨울철의 서북쪽 삭풍 때문인지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보아지는 안채보다 좀 더 고급스러운 모습으로, 외진주는 안팎을 각각 직?사절하고, 내진주는 안팎을 초각하였다. 사랑마루 상부가구는 5량 가로 4분변작 하였는데, 안대청처럼 대량 위에 동자주 없이 중도리 장혀를 통 넣었으나 종보를 걸고 중도리를 얹었다. 이 역시도 동자주를 사용하지 않고 상당히 높은 제형판대공을 세워 3분변작처럼 삿갓 보꾹을 솟게하여 상승과 안정감을 더해 주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판대공에는 소로 수장한 뜬장혀를 걸고 초각한 첨차형 부재를 끼웠다. 사랑마루 앞 4분합굽널 띠살 들어열개 문 위쪽에는 양측 교살 사이에 숫대살을 베푼 고창을 두었는데, 흔치 않은 살 문양이다. 북쪽 사랑채의 팔작지붕?보아지?뜬장혀?고창 등은 안채보다 상위인 사랑채 공간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다. ?행랑채 행랑채는 ‘?’형으로 좌로부터 고방?가마고방?고방?대문간?농사꾼안방?창고?외양간이 차례로 자리 잡고 꺾이면서 정지?농사꾼사랑방?통래문간?헛간?마구간이 동쪽으로 놓여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대문짝은 문간 중턱에 달았다. 구조양식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장혀수장 민도리형식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상부가구는 3량 가로 대량 위에 동자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3. 조사자 의견 번남댁은 퇴계 이황의 둘째 손자 계열의 집으로 3대에 걸쳐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19세기 중후반 이전에 지은 독특한 ‘成자’형태의 99간 사대부가로 당시 영남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집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50여간 정도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건물만 두고 보더라도 규모와 배치 및 평면형식 등이 안동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옛 건물터와 내외법과 기능별로 다양하게 세분한 영역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독립된 건물로 짓지 않고 조성한 사당, 안채의 모든 아궁이를 아우르는 통합 굴뚝, 안대청과 사랑마루의 상부가구 수법, 손님방과 사랑마루 고창의 창호형식, 안방과 상방의 벽장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격조 높은 수법이 돋보인다. 또한 19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주로 나타나는 수납공간?쪽마루?고창 등이 발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랑마루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툇마루 통로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한편, 번남댁은 江居 可居地인 ‘行舟形’ 명형국지의 의인마을 옛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대부가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초점 경관을 이루면서 강건너의 도산서원과 통경축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번남댁은 모든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의 주생활과 건축적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여러 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민속적으로 손색이 없으면 중요민속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단, 거주 관리한다는 조건이 있어야하며, 지정할 경우 명칭은 ‘안동 번남댁’이라 함이 타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문화재전문위원〉
1. 건축연혁 좌산 이만윤 공이 세운 집으로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하여 조선 고종 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99칸 규모의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 소실되었고, 1970년 이후에도 몇몇이 소실되어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 있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ㅁ자형 안채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굴뚝은 안채 뒤로 벽돌을 막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굴뚝 하나로 빠지도록 만들어 주목받고 있다. 조선 후기 주택으로 규모가 크고 구조가 특이해 좋은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2. 건축현황 1) 입지 및 배치 번남댁은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의인마을의 북쪽에 솟은 해발고도 234.1m산봉(山峰, 성황산의 줄기) 아래의 구릉 끝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번남댁은 물론 마을 내에 위치한 대부분의 반가는 서향(西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영지산(靈芝山)을 주산으로 하려는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이 영지산은 진성이씨의 중조로 추앙되는 퇴계 이황이 기거하며, 유유자적하던 산이기도 하다. 이황의 호(號)가 퇴계(退溪)외에도 영지산인(靈芝山人), 지산(芝山)으로 불린 것이 이를 잘 말하여 준다. 의인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북동-남서로 흘러가고 지금은 상당부분이 안동댐의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지만, 안동댐 축조 이전에는 낙동강변의 전답이 마을 앞(서쪽)에 펼쳐져 있어, 주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었다. 그리고 번남댁의 북쪽 가까운 곳에는 조림(造林)되어 관리되어오던 숲이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 상 우백호(右白虎)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지맥을 보완하는 조림은 강릉의 선교장 등 여러 반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번남댁의 배치는 ㅁ자형 안채의 왼쪽에 ㄷ자형 사랑채가 연접하여 있고, 그 앞에 ㄱ자형으로 꺾인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각 채가 연결되는 부분에는 담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각 채들 옆에는 그에 딸린 마당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특히 행랑채 주변의 마당들이 크고 다양한데, 이는 조선후기 부농형 반가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작업마당에 해당한다. 이를 볼 때, 번남댁은 반가와 부농형 주택의 건축특성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2) 건 물 사랑채 : 번남댁의 사랑채는 안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나누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안채의 북쪽에 위치한 북쪽사랑채뿐이다. 이 북쪽사랑채는 안채로부터 서쪽으로 연결된 부엌과 광(수장고)을 제외하고 나면 ㄱ자형인데, ㄱ자의 모서리에 있는 부엌을 기준으로 남쪽에 마루 1칸과 온돌방 2칸이 있고, 서쪽에 온돌방 2칸과 마루 2칸이 있다. 남쪽의 온돌방은 담으로 둘러싸인 뒷마당과 이어지고, 서쪽의 온돌방은 북쪽의 별당마당과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특히 동쪽의 뒷마당은 여러 개의 담으로 둘러싸인 내밀하고도 비밀스러운 마당인데, 이는 구례 운조루(雲鳥樓) 큰사랑채의 뒷마당과 유사하다. 사랑채의 내부 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가 있는데, 그 일부는 전면에 띠살문이 달려 있어 내밀한 궁중의 복도처럼 느껴지고, 이것은 안마당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서쪽 온돌방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마루 2칸이 있는데, 행랑마당에 비하여 약 1m정도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멀리 낙동강이 시야에 들어오는 등 루(樓)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감과 경관적 특성을 보여준다. 즉 사랑채의 남쪽방은 매우 폐쇄적이고, 이에 비하여 서쪽방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동(棟)의 사랑채에서 이처럼 상반되는 구성은 여느 반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실(消失)되고 없는 남쪽사랑채는 안채의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안채와 남쪽사랑채 사이에는 안채 영역과 나누는 담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사랑채와 행랑마당 사이에도 담이 있었다. 따라서 남쪽사랑마당은 담으로 위요되고 남쪽의 햇볕을 받던 양기(陽氣)가 충만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 남쪽사랑채의 영역이 위치함으로써 번남댁의 남쪽은 안채바깥마당, 남쪽사랑마당, 행랑옆마당 등 3개의 공간으로 나뉘게 되었다. 즉 대지의 가운데에 건물이 놓이고 그 주변으로 여러 외부공간들이 감싸는 구성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번남댁의 사랑채는 안채의 남쪽과 북쪽을 위요하여 안채를 더욱 내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안채 : 번남댁의 안채는 대지의 동쪽 상부에 위치하여 있다.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의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모습인데, 지금은 남쪽 사랑채가 소실되고 없기 때문에 튼ㅁ자형으로 보인다. 안채의 핵심 실(室)의 구성은 북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안방(2.5칸), 찬방(2칸), 안대청(4칸), 작은방(1.5칸), 마루(1칸), 상방(2칸) 등인데, 온돌보다 마루가 깔린 공간이 더 많은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안채와 북쪽사랑채 및 남쪽사랑채가 만나는 부분에는 부엌을 두어 서로 다른 영역이 어색하게 만나는 것을 완충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북쪽사랑채 모서리에 부엌을 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안채에 마루를 많이 두고, 안마당에 면한 부엌 주변에 다시 벽을 두지 않은 공간의 배치함으로써 좁고 긴 안마당을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채의 서쪽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는 안행랑은 대부분 판벽으로 구성하여 안채에 딸린 수장고 및 서비스 공간이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안대청의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찬방은 안방에 딸린 내고(內庫)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역시 부농형 반가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안채의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 등 4칸 이지만, 그 앞쪽 좌우에 마루가 각 1칸씩 붙어있어 정(丁)자 형의 6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ㄷ자형으로 꺾여 있는 안채의 각 방이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며, 안채 뒷마당 및 옆마당과도 원활히 연결된다. 한편, 각 방의 남쪽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를 두어 문을 별도로 달지 않았는데, 이는 북쪽 사랑채의 서쪽 방도 마찬가지 이다. 이러한 실(室)과 마당의 구성은 번남댁이 비록 가문과 풍수적 이유 때문에 동쪽에 솟은 산봉(山峰)에 기대어 서향(西向)하고 있지만, 주거의 실용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외부공간을 열어 햇볕 및 양기(陽氣)를 받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행랑채 : 번남댁의 행랑채는 대문이 있는 바깥행랑과 중문이 있는 안행랑으로 구분된다. 바깥행랑채는 솟을대문의 좌우에 광을 여러 칸 두었고, 온돌방과 부엌을 둔 청지기의 공간을 만들어 총괄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면, 토석담과 같은 벽을 만들어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정읍김동수씨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과 닮아있다. 조선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한 치안은 주택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번남댁 및 김동수씨가옥의 행랑채 외벽 구성은 그 결과로 이해된다. 바깥행랑채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꺾여 안행랑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행랑마당이 남-북으로 둘로 나뉘었다. 이렇게 행랑채는 그 고유한 기능도 있지만, 정침의 공간들을 나누는 요소, 즉 담의 역할도 겸한다.
주목할 만한 요소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번남댁에는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건물과 건축요소들이 있다. 북쪽사랑채 북쪽의 별당마당에 ㅁ자형의 별당이 있었다고 하며, 안채의 남서쪽에도 남쪽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채 주변의 마당을 위요(圍繞)하였던 담도 있었데, 지금은 상당부분 소실된 상태이다. 그리고 안채의 뒷마당 남동쪽 축대 근처에 집안의 모든 군불의 연기를 모아 한곳을 빼내던 굴뚝이 있었는데, 그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이 외에 안채 남쪽 바깥에 있던 방앗간, 북쪽사랑채 뒷마당에 붙어 있었던 내측(안변소)도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번남댁은 각각의 채[棟]들이 실(室)의 구성에 의하여 고유한 특성을 일부 보여주고는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여러 마당과 건물들이 서로 감싸고 겹(layer)을 이루던 내밀한 모습은 상당부분 와해되었다.
3. 조사자 의견 전기한 바와 같이 번남댁은 퇴계의 한 분파로 퇴계가 활동하고 머물렀던 영지산 및 도산(陶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선후기의 반가이다. 특히, 번남댁은 조선후기 부농형 반가, 동-서로 구릉이 뻗어 내린 의인마을의 지형적 상황, 퇴계가 활동한 영지산을 주산으로 하였던 가문의 상황 등을 반영하여 독특한 계획방법으로 풀어낸 주택으로 이해된다. 이는 조선후기라는 시대성과 안동의 지역성, 진성이씨 의인파 번남문중의 시작이라는 목적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불리한 지형과 향(向)을 극복하기 위한 실의 구성과 수법은 건축적으로 매우 우수하고 독특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줄 건물과 관련 건축요소들이 상당부분 소실(消失)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원형이 가지는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번남댁은 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는 현존하는 건축의 상태에 의한 평가로 보여 지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민속적 가치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별첨 2〉 경상북도지사 의견서
이 집은 순조 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현 소유자의 고조부인 이휘부(李彙溥, 1809~1869)의 선친(先親)인 번암(樊庵)이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을 위해 건립하였고 그의 아들 좌산(左山) 이만윤(李晩胤, 1834~1906)이 중건하였다고 함. 이 가옥은 원래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99칸이었던 것이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여칸 정도만 남아 있음. 평면구성은 성자(成字)를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좌산(左山)의 편액인 “번남” 2자가 전하는데 거기에는 “정사추구월상량(丁巳秋九月上樑)”이라 했으므로 1875년(철종 8)에 중건한 사실과 일치함. 'ㅁ'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ㅁ'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그 사이에 행랑채가 들어 서 있음. 원래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었으나 없어졌음. 굴뚝은 본채 후면에 전석으로 쌓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 나가게 되어 있음.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ㅁ'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하회 충효당이나 양진당처럼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원래는 몸채 남쪽 편에 4칸의 안사랑이 있었다고 하므로 현존하는 상방 정지 끝이 그 구지(舊址) 라면 몸채는 온전한 'ㅁ'자형을 이루게 됨. 몸채의 칸수는 5칸이며 안방머리 골방에 이어서 대청 쪽으로 돌출한 고방(찬방) 때문에 대청의 길이가 한 칸 축소되었으나 건너편(건너방자리)의 고방이 안방과 같은 2칸통의 긴 구조가 아니어서 대청의 칸수는 결국 6칸이 되는 셈임. 그러나 실제로는 상방 뒤로 연하는 대청 끝마루에 약간의 증폭이 있고 툇마루도 있어 대청의 전면은 상당히 넓어 보임. 안채의 끝머리에서 'ㄱ'자로 꺾어 연장된 바깥채는 사랑채의 전면에 이르는 줄행랑이며 기능은 고방, 행랑방, 마구간, 헛간 등임. 안방 부엌 뒤쪽으로 역시 'ㄱ'자로 꺾어 지은 사랑채 'ㄱ'자 전면에서 안채에 이르는 일정한 복도가 놓여 있다.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음.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번남댁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신청함. 〈별첨 3〉 안동시 학예연구원 의견(송승규)
□ 지정조사 개요 ㅇ 대상문화재 : 안동 번남댁(安東 樊南宅) ㅇ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108번지 ㅇ 조사일자 : 2008. 5. 30. ㅇ 건립연대 : 조선후기
□ 현 황 ㅇ 도산서원 건너편 마을에 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6.25당시 건물의 상당부분이 무너지고 없으나 그래도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무너진 건물지도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
□ 구조·형식·규모·형태 ㅇ ‘口’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 좌측에 역시 ‘口’자형의 사랑채가 이어지고 그 사이에 행랑채가 들어서 있으며 원래 좌측으로 안사랑채가 달려 있었으나 없어졌음. ㅇ 굴뚝은 본채 후면에 전석으로 쌓아 모든 아궁이의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음. ㅇ 영남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집이라 전할만큼 단순한 ‘口’자형 집의 격식을 벗어나 변화와 복합적 구성을 보는 집이라 하겠음. ㅇ 원래는 몸채 남쪽 편에 4칸의 안사랑이 있었다고 하므로 현존하는 상방 정지끝이 그 구지라면 몸채는 온전한 구자형을 이루게 됨. 몸채의 칸수는 5칸이며 안방머리 골방에 이어서 대청쪽으로 돌출한 고방(찬방?) 때문에 대청의 길이가 한칸 축소되었으나 건너편(건너방자리)의 고방이 안방과 같은 2칸통의 긴 구조가 아니어서 대청의 칸수는 결국 6칸이 되는 셈임. 그러나 실제로는 상방뒤로 연하는 대청 끝마루에 약간의 증폭이 있고 툇마루도 있어 대청의 전면은 상당히 넓어 보임. 안채의 끝머리에서 ‘ㄱ’자로 꺾어 연장된 바깥채는 사랑채의 전면에 이르는 줄행랑이며 기능은 고방, 행랑방, 마굿간, 헛간 등임. ㅇ 안방 부엌 뒤쪽으로 역시 ‘ㄱ’자로 꺾어지은 사랑채 ‘ㄱ’자 전면에서 안채에 이르는 일정한 복도가 놓여 있다. 사랑채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부엌, 마루방 등이 마련되어 있는데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각기 부엌을 가진 셈이고 작은사랑의 부엌은 안방 부엌과 연접되어 있어 이 집에서는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중복 설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음. ㅇ 부엌의 수는 행랑채의 것까지를 합하여 모두 7개나 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가내 동거세대 생활상 부분적으로나마 분화 된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함.
□ 작자·유래·전설 ㅇ 이 건물은 고종 연간에 지어진 가옥으로 창덕궁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다고 전함. ㅇ 99칸이었는데 6?25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은 50칸 정도만 남아있으며 평면구성은 성자를 이루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음. ㅇ 이 집의 창건자는 고종때 좌산이라고 전하며 그의 수적편액 “번남“ 二자가 전래함. 거기에는 ”丁巳秋九月上樑”이라 했으므로 대략 1875년(哲宗 8)의 정사일 가능성이 있음.
□ 조사자 의견 ㅇ 이 건물은 안동에서 가장 큰 집중의 하나로, 조선 고종(高宗) 대에 창덕궁을 모방하여 지어진 가옥으로 전함. ㅇ ‘ㅁ’자형 구조를 이룬 본채와 왼쪽에 ‘ㅁ’자형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행랑채가 있으며, 원래 왼쪽으로 안사랑채가 있었으나 없어졌음. ㅇ 본채 뒤쪽에 굴뚝을 쌓아서 연기가 이 하나의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등 다양한 공간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음. ㅇ 또한 이 집은 최소한 3대가 동거할 수 있는 구조와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큰 사랑, 작은사랑) 각각 부엌을 두었다. ㅇ 이렇듯 규모와 형태면에서 독특하고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부자집의 삶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이 건물을 “경상북도 민속자료”에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승격하여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됨.
〈별첨 4〉 지정조사 용역자 의견(안동대 교수 정연상, 배영동)
□ 지정조사 용역개요 ㅇ 용역기간 : 2009.7.30 ~ 2009.10.27. ㅇ 참여연구진 - 전통건축분야 : 책임연구원 ㅇㅇㅇ - 생활 및 민속분야 : 연구원 ㅇㅇㅇ
□ 조사자 의견 ㅇ 번남댁은 퇴계 이황 선생의 둘째 손자 계열에서 이어진 집으로서, 대단히 규모가 큰 고택으로 현재 사람이 살지 않지만,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집임. 1) 소실건물을 포함하면 안동지방에 유일하게 사랑채가 두 채이고, 별당채까지 갖춘 고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큼. 이는 외부와의 교류가 증진되는 상황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더욱 강하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음. 2) 남녀유별, 장유유서, 조상숭배, 접빈객의 유교적 덕목을 잘 수행하도록 가옥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확인됨. 3) 안동지방 사대부 가옥의 전형성이 강화된 내용은 접빈객과 장유유서의 덕목을 더 엄정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채를 북쪽사랑채와 남쪽사랑채로 나눈 점을 들 수 있음. 아마도 외부와 교류가 중시되고 가족구성원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랑채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닌가 함. 4) 비록 지금은 남쪽사랑채와 별당채, 사당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 현존하는 안채와 북쪽사랑채, 행랑채만으로도 안동지방 사대부가의 요건을 잘 간직하고 있음. 5) 가족원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접빈객과 봉제사 의례가 종택 안에서 일정한 질서를 갖고 행해졌음. 6) 20세기까지도 성주, 삼신과 같은 家神을 모셨는 바, 이는 사대부가라 할지라도 유교문화 정착 이전에 조상신에 해당하는 신격에 대한 신앙과 의례가 전승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큼. 7) 안동에서 대표적인 퇴계 이황 선생 문중의 지파 가운데서 의인파의 종택으로서 대대로 우뚝한 인물이 배출되고, 전적, 고문서, 유물 등이 상당수 보존(기증 포함)되어 왔으므로 조선조 말기 종택의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함. 8) 안동댐 건립으로 번남댁 인근 전통가옥들은 철거 과정을 겪었는데 이 고택은 당시의 주변 환경 및 사회 변화를 지켜본 건물로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므로 중요한 가치가 있음. 번남댁은 별도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인근 문화유산을 연계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 활용 가치가 높음.
21.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허가 신청사항 처리 보고
가. 보고사항
나. 처리내용
다. 의결사항 ㅇ 원안접수
22. 문화재 현상변경허용기준 합리적 조정 추진계획 보고
가. 보고사항
나. 보고사유 ㅇ 문화재 주변 현상변경허용기준의 합리적 조정방안 마련을 위한 추진계획을 보고하는 사항임 - 보존정책과 총괄
다. 보고내용 (1) 추진배경 ㅇ 문화재 주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의 계획적 보존?관리 및 행정의 투명성?예측가능성 제고를 위하여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마련?시행 - ‘10년까지 1,599건 완료(사적 486, 국보·보물 628, 천기·명승 338, 중민 147) ㅇ 합리적 규제 및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하여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운용 시 제기되는 미비점 개선 필요 - 문화재의 주변 현황과 지형이 고려되지 않은 획일적 구역 조정 - 두 개 이상 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중첩으로 행위제한 상이 - 문화재별 허용기준상 행위제한 내용의 불일치 해소 - 경미한 현상변경 행위 등에 대한 시·도 위임사항 등 관련규정 검토 등 (2) 추진방향 ㅇ 문화재 특성, 지형, 주변현황을 고려한 신축적인 구역조정 ㅇ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중첩지대의 허용기준 일원화 ㅇ 보존지역의 구역별 행위제한 내용 통일화 및 허용기준의 표준화 (3) 추진경과 ㅇ ‘99이전 : 문화재외곽 100m 현상변경 허가지역으로 규제(건축법) - 국민의 정부『규제완화 정책』에 의거 폐기(1999년) ㅇ '00년 : 문화재 주변 경관 보호를 위하여 영향검토구역 확대(100→500m) ㅇ '06. 9월 :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마련지침 제정 ㅇ '08~'10년 :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제정 1,599건 ㅇ '10. 2월 : 문화재보호법 전부개정(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신설) ㅇ '10. 11월 :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마련지침 개정 - 문화재 특성, 주변 환경, 지형 등을 고려하여 허용기준 작성 ㅇ '11. 2월 :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합리적 조정 추진계획 수립 ㅇ 허용기준 합리적 조정방안 T·F 구성 및 운영 : ‘11.2.8/4.7 (4) 추진계획 ㅇ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조정안 마련 및 관계규정 검토(6월~10월) ㅇ 문화재위원회 심의 및 관보고시(12월)
라. 의결사항 ㅇ 원안접수 |
출처: 태평연화의인지촌 원문보기 글쓴이: 시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