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9,13)
저와 함께 미사를 드렸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양식 ‘다 양식’을 할 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9,13참조)라고 덧붙여서 기도합니다. 그 까닭이란 어느 때부턴가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실존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저의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이 자비 안에서 과거와 똑같은 길이 아닌 참된 생명이 충만한 상태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2,14참조)이며, 직업은 세리(루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리는 본의 아니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으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의 자리가 아닌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삶을 살아 온 그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뜻밖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였고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그 근본적인 뜻을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 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 하느님 무상의 선물 앞에서 마태오는 이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지며,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9,11)라고 추궁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11,19;루7.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 경건자가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율법이 아닌 다른 길들은 참된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서지 않는 한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다, 하고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요 병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솔선해서 죄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함께 어울렸던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들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9,1213) 는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경건한 이들의 잘못은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대자대비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