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황장엽 망명 비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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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도 내 조국, 남도 내 조국 내가 왜 미국으로 가?” |
이연길 북한민화협 회장, 망명 공작 입 열다 “황장엽씨 당초 미국행 권유에 정색하며 거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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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쯤베이징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비밀촬영을 한 이연길 회장(왼쪽)과 황장엽 비서.
1997년 2월12일 오전 10시5분경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망명,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황장엽(黃長燁·81) 전 조선노동당 국제비서. 대북공작사상 최대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황 전 비서의 망명 사건 이면에는 6·25전쟁 때 활약한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 세칭 ‘켈로’) 산하의 고트(Goat, 염소) 부대장이던 이연길(李淵吉·77)씨가 숨어 있다.
이씨는 현재 북한민주화협의회 회장과 이준(李儁) 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어 ‘이 회장’으로 불린다. 이 회장은 황 비서 망명이 있기 2년 전부터 황 비서와 깊은 대화를 나눠왔고, 영화감독처럼 황 비서의 망명을 조율해왔다. 이러한 그가 한편의 첩보영화 같은 황 비서 망명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황 전 비서와 이 회장은 지금도 자주 만난다. 황 전 비서는 기자와 한 전화 통화에서 “이연길 회장이 내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거의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나는 옛날 일을 이야기할 생각은 별로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북한의 민주화다”라고만 말했다. 기자는 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공작 책임자를 여러 경로를 통해 접촉해보려 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은 황장엽 비서 망명 공작과 관련한 주간동아의 공식 질문에 정보기관의 속성 때문인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편집자>
1997년 2월12일 중국 베이징. 시간은 오전 9시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 추위에 어깨를 움츠린 베이징 시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양구(朝陽區) 건국문외(建國門外)에 있는 북한대사관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초로의 한 신사가 내리더니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황장엽씨의 핵심 측근이자 그의 의형제인 여광무역 총사장 김덕홍씨였다.
황 비서의 수행원 따돌리고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직행
김덕홍씨는 전날 주중 북한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황 비서를 찾았다. 그리고 “재미교포 백영중씨가 보낸 사람이 저와 함께 있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에 대사관으로 갈 테니 저와 함께 그 사람을 만나신 뒤 평양에 들어가시지요”라고 했다. 황 비서 수행원들은 백씨를 황 비서에게 30만 달러를 전하기로 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물론 김덕홍씨가 황 비서를 북한대사관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게 이 회장이 꾸며낸 얘기였다.
주위의 공기는 더욱 긴장돼가는 것 같았다. 김씨가 황 비서를 북한대사관 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면 황 비서는 북한으로 곧 들어가야 한다. 초조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9시50분쯤 황 비서와 김덕홍씨가 문창준씨(가명) 등 두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북한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정문을 나선 황 비서는 몸을 돌려 문씨 쪽을 바라보며 뭔가를 지시했다. 망명 후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그때 문창준에게는 ‘공화국에 밀가루 3만t을 주겠다고 하는 재미 목사가 21세기 호텔에서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다니, 먼저 가서 접대하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문창준은 아무런 의심 없이 황 비서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문창준으로서는 김덕홍씨가 황 비서를 모시고 가서 백영중씨가 보낸 사람에게서 30만 달러를 받아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황씨 망명이 성공한 후 안기부는 “황씨가 북한에 가기 전 쇼핑을 해야 한다며 두 수행원을 따돌렸다”고 설명했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길에 멈춰서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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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경 베이징의 한 호텔 방에서 김덕홍씨(오른쪽)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이연길 회장.
그 순간 두 사람이 어디로 가자고 말할 것도 없이 택시는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를 향해 질주했다. 왜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따로 떨어져 있는 영사부로 달려갔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국제무역대하(大廈, 센터라는 뜻)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사부는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중국 공안이 경비를 맡고 있는 조양구 싼리툰(三里屯) 외교단지에 있었다.
10시5분쯤 택시가 영사부 앞에 도착하자, 황 비서와 김씨가 내려 영사부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있었다는 듯 남상욱 총영사가 굳게 닫힌 영사부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처럼 이 택시를 따라와 멈춰선 여러 대의 차량에서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의 사내들도 내려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한국 방송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 영사부로 망명했다’는 초대형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노동당 최고 지도부에 속한 인사가 망명한 것이다.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사이자 전도사인 그의 망명은 곧 북한을 이끌어온 주체사상의 망명이었다.
재미기업가의 ‘100만 달러 약속’ 메모 결정적 활용
그러나 황 비서의 망명이 간단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베이징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망명을 결행하기로 했으나 조총련 등이 황 비서를 삼엄하게 경호해 성공하지 못하기도 했다. 황 비서가 망명을 결행키로 한 것은 일본 방문을 위해 97년 1월28일 베이징에 나왔을 때였다. 이 회장은 이 사실을 곧 당시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공작 책임자 A씨에게 알려 일본에서의 망명 방법 등을 세워뒀다.
일본에서의 망명 실행 무대는 도쿄 게이오(京王)플라자 호텔이었다. 97년 2월4일 이 회장은 베이징에서 서울을 거쳐 도쿄로 날아가 게이오플라자 가까이에 있는 힐튼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 게이오플라자 로비로 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호텔 주변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손님으로 위장해 깔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총련 측도 수십명의 청년을 동원해 호텔 외각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KBS 등 다수의 한국 언론도 호텔에 몰려와 있었다.
조총련 측의 경비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북한에서 온 방문단이 일정이 있는 경우에만 게이오플라자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직감적으로 ‘황 비서의 탈출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잠시 후 황 비서가 로비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여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자, 황 비서는 가벼운 미소로 답례했다. 그러나 경호원에 둘러싸여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버렸다.
그 직후 이 회장은 황 비서의 수행원인 문씨를 만났다. 그때까지 이 회장은 문씨와 직접 대화한 적이 없었다. 문씨는 황 비서와 달리 이날 베이징에서 도쿄에 도착했는데, 그는 베이징을 출발하기 전 김덕홍씨에게서 “도쿄에 가면 ‘폴리(Paul Lee)’라고 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황 비서를 돕기 위해 와 있을 테니 잘 대접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폴리는 김덕홍씨와 약속한 이 회장의 가명이었다. 김씨의 소개 덕분이었는지 문씨는 이 회장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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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홍씨의 망명을 돕기 위해 김씨에게 가발을 씌워 찍어본 사진.
이 회장은 문씨를 호텔 내 부페식당으로 데리고 가 식사를 대접한 뒤 넌지시 2000달러가 든 봉투를 건넸다. 당시 북한의 암달러 시장에서는 100달러를 웬만한 사람의 1년 봉급보다 많은 돈으로 환전할 수 있었으므로, 문씨 처지에서 이 돈은 상상하기 힘든 큰돈이었다. 액수를 확인한 문씨는 손을 덜덜 떨었다. 이 회장은 “걱정하지 말고 집어넣어라. 나처럼 미국에 사는 사람에게는 큰돈도 아니다”며 안심시켰다.
감격한 문씨는 황 비서에게 인사하고 싶다는 이 회장을 데리고 47층에 있는 황 비서 방으로 갔다. 문씨와 함께 올라가니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황 비서를 만난 이 회장은 “지금 재미교포 백영중 선생께서 100만 달러를 전해드리기 위해 도쿄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이 호텔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곤란하니 힐튼호텔로 와달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황 비서는 이 말에 숨어 있는 뜻을 재빨리 간파한 듯 “암, 받아야지. 공화국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돈인데, 받아가야지”라며 큰소리로 화답했다.
백영중씨는 평남 성천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시민권을 딴 뒤 패코(PACO)란 회사를 설립해 성공한 기업인이다. 백씨는 95년 9월 황 비서의 초대로 북한을 방문해 황 비서가 마련해준 초대소(숙소)에서 97세 노모를 상봉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씨는 95년 9월20일자로 ‘노령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보내드리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황 비서에게 남겨놓았다.
황 비서는 96년 무렵 이 회장에게 이 편지를 건네주며 “이 돈을 받아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황 비서에게 ‘외화벌이’는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황 비서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이 회장은 편지를 받아넣으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는데, 황 비서가 도쿄에 올 때까지 전혀 백씨와 접촉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백씨의 편지를 황 비서 망명 소재로 유용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백씨는 기자와 한 국제전화 통화에서 “그 메모는 95년 9월 북한에서 노모를 만나고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써준 것이었다”면서 “그 후 그 돈을 북한에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 비서가 한국에 온 뒤 서너 번 만났을 때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어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한 것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쓴 것이었는데 그 메모가 평소 존경하는 황 비서 망명에 결정적인 구실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고 덧붙였다(17쪽 상자기사 참사).
당초 일본에서 거사 계획 … 지나친 경호탓 불발
그러나 이후로도 황 비서는 홀몸으로 호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자 도쿄에 와 있던 안기부 공작 책임자 A씨가 초조한 표정으로 이 회장을 찾았다. 그는 대뜸 “이 쪽지를 황 비서에게 전하고 서명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일본 총리와 외무장관, 경시청장 앞으로 ‘한국으로 망명하고자 하니 도와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일본어로 쓰여 있는 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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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 황장엽·김덕홍씨.
A씨는 “황 비서가 이 쪽지에 서명하면 이를 일본 측에 전달해 협조를 받아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이 북한을 의식해 오히려 황 비서를 북한으로 송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 회장은 쪽지를 안주머니에 구겨넣고 황 비서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드디어 시간은 흘러 2월10일이 되었다. 다음날이면 황 비서는 북한에 돌아가기 위해 도쿄를 떠나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 이 회장은 이렇게 된 이상 베이징에서 결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는 이 뜻을 황 비서에게 전하기 위해 백영중씨 명의로 ‘도쿄에서 돈을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못 드렸다. 무척 죄송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 황 비서님께 먼저 30만 달러를 전해드리게 할 테니, 꼭 받아서 공화국에 돌아가시기 바란다’라고 쓴 뒤 적당히 백씨의 서명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봉투에 넣은 뒤 뜯어보기 쉽게 살짝 봉한 후 문씨를 찾아 “미국에서 온 백 선생이 황 비서님께 전해달라는 편지입니다. 잘 전달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백씨를 알고 있는 데다 이미 이 회장에게 마음이 쏙 빼앗긴 문씨는 “염려 마십시오. 비서님께 전해드리고 5분 내에 말씀을 받아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한 뒤 사라졌다.
그러나 15분이 지나도 문씨는 내려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 회장 앞에 문씨가 다시 나타난 것은 20분이 지난 뒤였다. 문씨는 편지를 되돌려주면서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직접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씨가 편지를 읽어보고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느라 늦은 것 같았다. 이 회장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대로 결과적으로 이 회장의 이 기지는 베이징에서 황 비서와 김덕홍씨가 문씨 등 수행원을 따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된다.
이 회장은 문씨의 안내로 황 비서 방으로 가서 “미국의 백 선생이 전해주는 편지입니다. 보시고 한 말씀 해주시면 제가 전해드리지요”라고 말했다. 황 전 비서는 편지를 읽어보고 “잘 알겠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답했다.
2월11일 아침이 밝아왔다. 이 회장은 아침 일찍 게이오플라자 로비로 나가 황 비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로비로 내려온 황 비서는 이 회장을 보더니 반갑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정한 작별 인사를 하려는 듯 이 회장의 손을 부여잡더니, 재빨리 손가락 사이에 숨겨둔 작은 쪽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회장은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이를 감추고 느린 동작으로 정겨운 포옹을 하고는 황 비서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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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쪽지를 펼쳐보자 ‘베이징에서 나오겠소. 꼭 차를 준비해놓으시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황 비서는 자신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꼭’ 자에 굵게 동그라미를 치고, ‘차를 준비해놓으시오’ 밑에는 밑줄을 그어놓았다. 이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됐다”라고 환호했다.
이 회장은 곧바로 공항으로 달려가 황 비서보다 두 시간 먼저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때쯤 베이징에서는 안기부 공작관 C씨가 김덕홍씨를 상대로 강력히 망명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즉시 택시를 타고 두 사람이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이 회장이 말없이 황 비서의 쪽지를 김덕홍씨에게 내밀자, 김씨는 이를 읽고 나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하시겠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C씨도 “이번에 같이 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선생이 위험해집니다”라고 거들었다.
김씨는 곧 체념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쯤 황 비서가 탄 비행기가 베이징에 도착하고 있었다. 황 비서는 VIP이기 때문에 북한대사관 직원이 마중 나와 주중 북한대사관 안에 있는 숙소로 모셔갔다. 그 뒤를 따라 갖가지 형태로 위장한 안기부 공작관들이 주중 북한대사관 근처에 도착해 저녁 어스름처럼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김덕홍씨가 주중 북한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황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날 바로 북한대사관으로 들어가 황 비서를 데리고 나오면서 ‘망명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갈등이 망명 결심하게 된 계기
그렇다면 황 비서가 한국 망명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중 하나는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그와 김정일 간의 심각한 갈등 관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던 황 비서는 9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에서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평양 당국으로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황 비서는 모스크바종합대학 연설에 대해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나는 주체철학이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김정일에게도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얘기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박사를 받지 않았소. 그래서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마침 그곳에 가니 친구와 동포들이 자꾸 주체철학에 대해 묻기에 자세히 설명을 했지. 그런 문답은 보고하지 않는 게 상례인데 어찌되었는지 평양에 보고되면서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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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두어 달 뒤 노동신문이 화자(話者)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니는 자가 있다”고 비난하는 사설을 실었다. 비슷한 시기 인민군 신문인 국방일보도 비슷한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위험을 감지한 황 비서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김덕홍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97년 1월13일 김씨에게서 연락을 받고 베이징으로 날아간 이 회장은 김씨한테서 황 비서가 처한 상황을 듣게 됐다. 이 회장이 망명을 권유하자 김씨는 “1월28일 황 비서가 일본에서 열리는 주체사상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나온다. 그때 황 비서와 진지하게 논의해보자”며 황 비서의 일본 방문 일정이 적힌 일정표를 이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안기부 해외공작 책임자 “새벽에 산책 간다고 빠져나오라”
황 비서는 이 일정표대로 1월28일 베이징에 나왔다. 세 사람은 주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과거부터 그들이 만나오던 장소에서 만났다. 황비서는 수행원들을 다른 방에서 대기하게 했다. 황비서가 간략하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이번에 일 끝내고 북한으로 들어가시면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김 사장도 마찬가지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황비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내 생각도 그렇다. 이번 참에 망명을 결행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이 회장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곧 베이징 주중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시죠.”
이 회장은 평소 황 비서가 미국에 가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이 김정일 체제를 더 빨리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황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내가 왜 미국으로 가? 북도 내 조국이지만 남도 내 조국이다. 나는 남에 있는 조국에 가서 북에 있는 조국을 합쳐, 하나의 조국을 만드는 일에 힘쓰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으로 가라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이어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일본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며 구체적인 망명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 회장은 당시 안기부 해외공작 책임자 A씨가 때마침 베이징의 장성(長城)호텔에 체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회장은 아무래도 그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지금 베이징에 안기부의 해외공작 책임자가 와 있다. 그를 불러올 테니 상의해보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장성호텔로 가 A씨를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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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비서는 A씨에게 “일본에서 한국으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밝히고, “어떻게 행동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책임자는 “도쿄에 머무시는 호텔 주변에 우리 직원을 충분히 배치해놓겠습니다. 그 호텔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네댓 번 불을 켰다 끈 뒤 산책 간다고 하고 나오십시오. 그러면 우리 직원들이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라며 탈출 방안을 설명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속으로 웃었다. 2월 초면 길고 긴 밤이 이어지는 한겨울인데 누가 새벽 4시에 산책을 나가겠는가. A씨 설명대로 새벽 4시에 산책을 나가면 누가 봐도 수상히 여길 것이므로 조총련 청년들은 황 전 비서의 산책을 말리거나 그의 행동을 의심할 게 뻔했다.
설명을 마친 A씨는 방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황 비서에게 “저와 사진을 한 장 찍어주십시오”라고 했다. A씨가 데리고 온 직원을 시켜 사진을 찍은 뒤 빠져나가자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듣고만 있던 황 비서가 입을 열었다.
“○○놈! 아니, 한겨울 새벽 4시면 오밤중인데 산책을 나가는 놈이 어디 있나!”
황 비서의 생각도 이 회장과 같았던 것이다.
이때 김덕홍씨가 거사를 늦추자고 주장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나와 4월에 망명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결국 김씨에게서는 망명한다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황 비서의 일정표를 들고 서울로 들어왔다. 1월30일 일본에 들어가 교토(京都)와 나가노(長野)를 거쳐 도쿄로 올 예정인 황 비서 일정에 맞춰 2월4일 도쿄로 날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황 비서 망명은 도쿄가 아닌 베이징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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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기업가 백영중씨, 100만 달러 약속 왜 했나 “북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써준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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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중(사진)씨는 1999년 중앙 M&B에서 출간한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노모를 만난 과정을 자세히 밝혀놓으나 황 비서에게 왜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씨는 왜 이렇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을까.
94년 10월 제네바합의가 이뤄진 뒤 미국 클린턴 정부는 북한을 도와주기 위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주도로 미국 기업인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에서 어떤 사업을 할 수 있는지 검토하게 했다. 이에 따라 백영중씨를 포함한 12명의 미국 기업인이 95년 2월 북한을 방문했다.
평남 성천이 고향인 백씨는 6·25전쟁 중인 5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때문에 미국 NSC에서 북한행을 권유했을 때 가족을 만나는 것을 조건으로 참여했다. 미국 기업인 대표단을 맞은 것은 외교문제를 총괄하는 노동당 국제부였는데 당시 담당 비서가 바로 황장엽씨였다.
그러나 백씨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백씨가 분노를 표시하자, 황 비서는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나와 정중히 사과하며 “이번 회담을 통해 백 선생이 미국에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3개월 뒤 가족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그때 다시 방문해달라”고 했다.
백씨의 기억에 따르면 사과를 한 황 비서는 “여태까지 주체사상은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 후 백씨는 황씨가 왜 이렇게 위험한 말을 했는지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후 김일성 김정일 황장엽 등 세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정일이 ‘북남 문제는 내가 전담할 테니, 외국에서 먹을 것을 끌어오는 문제는 황 선생이 책임지시오’라고 했다. 이때 김일성은 가만히 듣고만 있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업무 분장이 이뤄졌다. 그러나 외국 원조는 더욱 줄어들었고 급기야 93년부터는 대기근으로 인해 300여만명이 굶어죽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노골적으로 황 비서의 무능을 질타했다. 황 비서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외국에서 물자와 돈을 끌어와야 할 처지로 몰린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주체이론의 창시자인 그를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이 아닌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을 재차 강조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갈등의 연장선에서 황 비서는 망명을 감행했다.”
95년 9월, 백씨는 황 비서의 초청장을 받고 다시 북한을 방문해 황 비서가 제공한 초대소에서 97세 노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이 방문이 끝나가던 날 황 비서 수행원이 백씨를 찾아와 이번에 만나지 못한 동생을 만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백씨가 깜짝 놀라며 당황해하자 그는 “김정일 위원장께 백 선생의 모든 것을 보고했다. 위원장께서는 백 선생이 (동생을 만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으로 믿고 계신데, 큰일 났다”라며 불안해했다.
백씨는 “나도 당황하고 그도 절절 매는 상황에서, 나는 ‘거짓말이 돼도 좋다면, 하나 써주겠다’고 제의했다. 그가 이를 받아들여 나는 황 비서 앞으로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메모(왼쪽 사진)를 써준 것이다. 그 글은 미국에서 내가 황 비서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고 북한에서 노모를 만나고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써준 메모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썼다는 얘기다.
2003년 10월 황장엽씨는 망명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백씨는 황 전 비서를 초청한 수잔 솔티씨에게 1만 달러를 기부하고, 황 비서 일행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백씨는 황 비서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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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길 회장, 망명 성공 후폭풍 “나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업보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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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비서 망명 성공으로 이연길 회장은 ‘인생 9회말’에 장쾌한 홈런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이 홈런에 마음껏 환호하지 못했다. 그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무서운 후폭풍’이 강타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북한으로부터의 테러 위협이었다. 두 번째는 안기부 및 언론과의 심각한 갈등이었다. 언론은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추적했고, 안기부는 황씨 망명과 관련해 새로운 보도가 나올 때마다 그를 의심했다.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그는 한동안 외국에 나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를 좋아했던 한 순진한 사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심각한 자책감이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세 번째 후폭풍이다.
“황 비서 망명뿐만 아니라 그외 여러 명의 탈북자를 한국에 데려왔지만 나는 누구를 속이거나 사람 가슴에 못박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정직이 최고의 공작법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한 번, 아주 엄청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황 비서의 수행원 문창준씨의 경우다.”
문씨는 이 회장에 대해 좋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그러한 그를 상대로 끝까지 재미사업가로 행세했고, 마지막에는 단돈 2000달러로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 회장은 “세상을 살 만큼 산 내가 앞길이 창창한 사람의 인생을 단돈 2000달러에 사버렸다”면서 “지금도 선한 문창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회장의 입에서는 여러 번 “나는 평생 지을 수 없는 큰 업보를 쌓았다”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 | (끝) |
[황장엽 망명 비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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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넘나든 死線 “나는 영원한 KLO맨 |
”이연길 회장, 6·25전쟁 특수공작의 산증인 … 적진 침투해 정보 수집·납치 등 종횡무진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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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초도에서 기념촬영한 해상고트 대원.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연길 회장이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성공시킨 이연길 회장은 죽음의 문턱에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KLO 대장으로 숱한 위험을 넘나들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밀’로 남아 있는 KLO의 진실을 들춰내준다.
1927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원산의 용동소학교와 원산농업학교를 마치고 함남 홍원군 호현소학교 촉탁교사를 거쳐 수산업조합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 직후 원산에 상륙한 소련군은 ‘해방군’일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일본 여성을 강간하는가 하면, 길거리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리는 등 ‘점령군’ 행세를 했다.
16세 때 반일 청년 조직 가담 … 48년부터 대북 공작
이를 보다못한 원산의 반일 청년 조직 일심회(一心會) 단원들이 투쟁 대상을 일제에서 소련군으로 바꿨다. 이 회장은 16세 때(1943년) 두 살 많은 친형 이연복(李淵福)씨와 함께 일심회에 가담했다. 이후 이 회장 형제를 비롯한 일심회 단원들은 서울로 와 동북동지회를 만들어 반공 투쟁을 계속했다. 이 회장은 한편으로 학업에도 뜻을 두어 47년 9월 성균관대에 입학했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대동청년단에도 참여했다.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 직후 국방부 제4국이 만들어졌다. 제4국은 북한으로 공작원을 침투시켜 첩보를 수집하거나 유격투쟁을 벌이는 침투공작과 남쪽으로 침투한 간첩을 체포하는 방첩 등을 수행하는 ‘특무(特務·지금의 정보사와 기무사가 하는 일을 합쳐놓은 기능)’ 기능을 맡았다. 일제와 소련군 치하에서 지하투쟁 경험이 있는 이 회장 동지들은 4국의 공작원으로 참여해 소정의 훈련을 마친 후 49년 3월, 미국의 압력으로 4국이 해체될 때까지 원산으로 침투해 철도국 직원을 포섭하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6·25 전쟁(1950) 중에는 피난민들에게서, 진격해오는 북한군 정보를 빼내 USIS(주한 미대사관 홍보처)에 전달하는 일도 했다.
KLO는 우리말로 ‘주한연락처’로 불렸다. 49년 6월29일 한반도를 관할하는 미 극동군은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몇몇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모든 주한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한국과 군사 업무 협조를 위해 주한미대사관이 있는 서울 반도호텔 202호와 203호에 KLO를 남겨놓았다. KLO는 극소수의 미 군사고 문단을 통제하는 주한미군 사령부 구실과 함께 북한에서 발생하는 첩보를 수집하는 일도 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반전되자 유엔군사령부를 통제하는 미 극동군사령부는 대북첩보 수집을 강화했는데, 그로 인해 KLO 산하에 선·위스키·배저·파인애플·이글 등 갖가지 닉네임을 붙인 한국인 공작조직이 급조됐다. 미군은 이러한 공작조직의 대장을 ‘치프 에이전트(Chief Agent, 수석 공작원)’라고 불렀다. KLO는 치프 에이전트하고만 거래를 했다. 치프 에이전트가 유능하면 많은 공작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KLO는 더욱 많은 공작비와 보급품을 전달해주므로 이 조직은 금세 세력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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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의 해상고트 대원.맨 오른쪽이 이연길 회장.
유엔군이 북진을 거듭할 무렵 이연복씨는 서울로 올라와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신의주 앞바다에 있는 섬까지 돌아본 뒤 KLO 측에 서해 도서를 무대로 첩보를 수집하겠다고 제의했다. KLO가 이를 승인하자 그는 ‘코익(COIC)’이라는 켈로부대를 만들어 서해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동북동지회 멤버인 최규봉씨도 KLO와 접촉해 육상 침투를 주로 하는 ‘고트(Goat) 부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1·4후퇴 무렵 이연복씨는 부산으로 후퇴하며 코익을 해체하고 새로 ‘해상고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켈로 부대를 만들어, 51년 1월22일 이연길씨 등 17명의 대원과 함께 부산항에서 ‘지양호(地洋號)’라는 공작선을 타고 며칠 후 백령도로 들어갔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자(1·4후퇴), 미 극동군은 평시 조직 개념인 KLO를 FEC/LD(Far East Command Liaison Detachment in Korea,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파견대, 본부는 대구)라는 전시 조직으로 확대하며 이 부대에 8240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그 후 8250으로 변경). 그러나 많은 한국인은 이미 친숙해진 켈로 부대로 불렀다. 이때부터 8240부대는 대북 첩보부대 외에 유격전을 펼치는 한국인 유격부대도 운영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은 51년 중반 지금의 휴전선 부근을 중심으로 고착되기 시작했다. 양쪽이 참호를 깊이 파 진지전에 들어가자, 육상을 통한 침투는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해상 침투가 각광을 받았는데, 특히 서해는 평양 등 북한의 주요 도시로 바로 침투할 수 있는 데다 북한 지역에서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쉽게 빼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미군은 해상고트부대의 활동에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미군은 해상고트 부대를 위해 ‘스타키’라는 이름의 육군 대위를 고문관을 붙여주었다.
작전 중 수많은 전우 잃고 친형마저 52년 전사
100여명으로 세력을 키운 해상 고트부대는 백령도에 있던 본부를 북쪽에 있는 초도(황해도 송화군)로 옮기고 신의주 앞바다에 있는 수운도 대화도 등 10여개 섬에 별동대를 배치했다. 그런데 해상 고트부대는 미군을 위한 첩보 수집과 함께 한국 육군 대위 출신인 김종벽(金宗碧, 2003년 사망)씨 지휘 아래 적진에서 싸우고 있는 구월산 유격대를 지원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자 8240부대 측은 왜 고유의 임무를 하지 않느냐며 이연복씨를 대장에서 해임하고 이연길씨를 후임 대장에 임명했다(51년 7월). 이 무렵 미 극동군 산하의 미 5공군은 북한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별도로 대북 침투조직을 만들어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인 도널드 니콜라스에게 맡겼다. 니콜라스는 서울 안국동에 6006부대라는 대북 침투 공작부대를 만들었는데, 이연복씨는 여기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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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의 나이에 고트 부대장이 된 이연길씨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북한으로 물품을 나르던 중국 상선 4척을 나포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북한 공군 조종사인 문덕삼 소위를 생포해 미 공군에 넘겨주기도 했다.
성공 뒤에는 가슴 아픈 희생도 적지 않았다. 웅도에 나가 있던 별동대 전원이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했는가 하면 적진으로 침투한 후 소식이 끊어진 대원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 6006부대에 몸담고 있던 형 이연복씨도 압록강 하류의 수운도 근해로 침투했다가 중국군 함정에 발각돼 기총소사를 받고 전사했다(52년 6월). 해상 고트부대의 활약이 커지자 8240부대는 최규봉씨가 이끌던 고트 부대를 리바이벌 부대로 개칭하게 해, 해상 고트부대와 구별할 수 있게 했다(52년 9월).
53년 7월 전쟁이 끝나자 미 극동군은 고트 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리하여 고트대는 초도 수운도 등 서해상의 수많은 섬을 포기하고 백령도로 내려왔다. 그 얼마 뒤 미 극동군은 KLO부대 해산을 결정해 그는 대원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나는 50여년 전 이북으로 침투시킨 우리 대원이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북한을 기웃거리고 있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북한 사람을 구하고 또 구할 것이다. 나는 영원한 KLO 맨이다”라고 말했다.
KLO & 북파공작원 보상법 모법 정신 훼손한 시행령 ‘KLO와 4局 출신은 보상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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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시절 5·18주민주화 운동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자,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은 “민주화보다 안보가 우선이다. 우리의 희생 위에 민주화의 싹이 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당히 받아야 할 돈도 떼어먹혔다”며 강력한 시위를 벌였다. 실제로 북파공작원 운영부대는 이들에게 “공작을 마치고 돌아오면 공작금을 주겠다”고 해놓고, 북한으로 침투했다 사망하면 이 돈은 물론이고 보상금마저 그 가족에게 주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사망이나 실종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들의 거센 시위 앞에 정부는 답변이 궁색해졌다. 결국 2004년 1월 ‘특수임무 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률’과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 7월 발효되었다. 이 두 법 2조 2항에는 공통적으로 ‘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 8월15일부터 1994년 12월31일 사이 특수임무(북파공작)에 종사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2004년 12월18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이 법 시행령에는 ‘51년 3월부터 특수임무에 종사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고 돼 있었다.
북파공작원 보상 법 등이 만들어질 때 이 회장을 비롯한 KLO 출신 인사들은 그들에 대한 보상도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국회와 정부는 미군이 아닌 한국군에 고용된 사람에 대해서만 보상하는 쪽으로 법을 만들었다. 여기서 이 회장은 실망했으나, ‘48년 8월15일 이후’라는 법 조항에 주목해 국방부 제4국의 공작원으로 활동한 것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만든 시행령은 이 기대마저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 회장의 말이다.
“프랑스가 나치 치하에 있을 때 레지스탕스는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에 적극 협조했다. 그러한 레지스탕스에 대해 드골 정부는 어떻게 대우했는가. 조국이 무너져내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국군이 아닌 미군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배제할 수 있는가. 또 우리는 국방부 4국에 고용돼 대북투쟁을 벌였는데, 하위법인 시행령은 상위법의 정신을 훼손하며 우리를 배제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 회장은 “보상금이 왜 필요한가”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고향을 되찾겠다는 일념과 내 부하였다는 이유로 사지에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혈혈단신으로 월남했기에 이 땅(한국)에는 그들을 기려줄 사람조차 없다. 나는 살 만큼 산 사람으로, 그들이 이 나라를 위해 애쓰다 돌아갔다는 흔적을 남겨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북파공작원 보상법이 만들어졌다기에 보상금이 나오면 그 일을 해야지 했는데, 헛물만 켜고 말았다. 다 헛일이다. 내가 좋아서 반공투쟁에 앞장섰듯이, 내 부하를 위한 일도 내 힘으로 준비해야겠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