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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이중성
박완서
우리 60대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말이 우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세대도 없을 거라는 한탄이다. 비록 남북이 분단된 불완전한 평화이긴 하지만 근 반세기 가깝게 전쟁 없는 세상을 다리 뻗고 누리다보니, 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한창 좋은 나이를 중일전쟁 이차대전, 6'25남침 등 쉴새 없이 겪은 전쟁의 공포와 궁핍이 우리 세대만의 불공평한 불운처럼 느껴져서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한탄 속에는 일말의 자긍심 또한 내포돼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여름엔 쉰밥을 씻어먹고, 겨울이면 구들장 밑에 살인가스를 깔고 자도 윗목에서는 걸레가 어는 추위를 견딘 우리 세대로서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 만 불 시대의 풍요가 다 뉘 덕인 줄 아느냐?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견딘 내핍과, 초인적인 노동과, 지칠 줄 모르는 교육열 덕이라고 은근히 뽐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 그런지 우리 육십 대들은 할 말이 많다.
나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늦게 등단하게 된 이유를 물으면 오백 년은 산 것 같은 체험의 부피 때문에 쓰지 않을 수가 없었노라는 대답을 흔히 해왔다. 그건 궁핍과 풍요, 전쟁과 평화, 식민지 시대와 자주독립국가시대를 두루 경험한 우리 세대 공통의 시간 감각하고도 또 다른, 나만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조금도 과장 없는 진실이다.
농경시대의 수공업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나서 오늘날 천만 인구의 수도 서울 첨단의 아파트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나라는 개인을 스쳐간 문화의 부피가 나로서는 그렇게 버겁게 느껴진다는 얘기이다. 사실 내가 태어난 마을과 비슷한 이웃마을에서 태어나 우리 마을로 시집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우리 할머니의 육십 평생과 나의 육시 평생의 경험의 부피를 비교해 볼 때, 오백 년이라는 어림짐작도 과장은커녕 과소평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풍부하고 특별난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때로는 귀찮아하고 천대까지 받는다는 게 우리 세대의 자격지심이자 비애이다.
우리세대의 가장 큰 지부심은 가난을 극복한 주역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리 시대의 약점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아무리 공치사를 안 하려고 조심을 하느라고 하건 만도 워낙 가난의 기억이 우리 의식 속에 강력하게 늘어 붙어 있는지라 어느 틈에 그 티를 내고 만다. 그건 곧 구박을 자초한 결과를 가져온다.
자식들이 멀쩡한 가구나 가전제품을 바꾸는 걸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먹다 남은 음식을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다 버리는 걸 보면 천벌이 내릴 것 같아 기어코 한마디 하고 만다. 그래서 아들 며느리한테 구박을 받고 손자들은 아예 상대도 안하려 든다.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멋쟁이 며느리가 계절이 바뀔 때마도 한보따리씩 버리는 옷이 아까워서 몰래 집어다두었다가 파출부한테 선심을 썼더니, 파출부가 할머니한테 무시당하기 싫어 그만 다니겠다는 통고를 해왔다면서 서럽고 억울해서 울먹이며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댔지만 아마 집에서 며느리한테는 한마디도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사촌벌 되는 동갑내기 오라버니는 딸네 집에서 며칠 유하러 갔다가 딸이 식탁에서 아버지가 남긴 음식을 곧장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딸이 그 음식을 께적지근하게 여겨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고 나서 하룻밤도 안 자고 아들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며느리 역시 먹던 음식은 자식이 먹던 거건 부모가 먹던 거건 다시 상에 올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만 안 보는데서 그렇게 한다는 것만이 딸과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그 며느리 역시 시아버지 보는 앞에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대단한 시집살이처럼 일가친척한테 풍기고 다닌다는 걸 그 노인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며느리는 그 후 시아버지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한다고 했고 시아버니는 아직도 며느리로부터 봉양을 받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 세대가 받고 있는 효도라는 게 실은 이렇게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가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우리 육십 대는 소싯적에 거의 다 노부모를 모신 경험이 있고, 전쟁 중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노부모와 한 방을 쓰는, 기막힌 신혼시절을 겪은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하게 개인 생활이 보장된 아파트나 단독주택의 가장 인기 없는 방 한 칸을 내주기만 해도 효자소리를 듣는 자식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산다.
더 기막힌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윗대처럼 경제적으로 전적으로 자식한테만 의존하지는 않으려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건만도 그런 열악한 지위를 감수한다는 사실이다 대가족제도의. 장단점과 돈의 중요함을 일찍부터 터득했을 뿐 아니라, 산업사회화가 생활의 여유와 함께 여권신장 핵가족화 등 노후를 위협하는 징후를 충분히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에, 퇴직금이나 자기 명의의 집 한 채 정도는 움켜쥐고 있는 게, 중산층 60대들이 그 윗대들과 다른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따로 나와 생활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자식하고 같이 사는 게 남 보기에 좋다는 순전히 외관상의 이유로 속으로 곯는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흔히 한국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할 때 내실보다는 체면을 중시하고, 내가 어떻게 느끼나 보다는 남이 어떻게 볼까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세대가 60대가 아닌가 싶다.
60대의 또 하나의 슬픈 특징은 자랑거리가 없는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하고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술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기에 태어났다. 특별히 의식 있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면 모를까, 보통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일본이 우리 조국인줄 알았다. 신사참배하면서 진심으로 일본이 승리하길 빌었고 궁성을 요배할 때는 가슴이 울렁거렸고, 미국과 영국은 사람의 탈을 쓴 귀축(鬼畜)인 줄 알았다.
우리의 할아버지대만 해도 조선왕조의 추억이 있고, 우리 아버지대는 3.1운동의 찬란한 긍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구전으로라도 우리에게 물려줄 엄두를 못 냈다.보통의 소심한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던 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걸 감히 상상도 못했고, 자식대라도 갈등 없이 일본화되어 일본 사람과 동등한 삶을 누리길 바랬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이북 어린이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걸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저럴 수 있나, 필시 살기 위한 연극일 거라고 비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일제를 격은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비인간적 독제체제가 국민을 외부와 고립시켜 길들이기로 작정을 하면, 인간을 얼마든지 바보나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는 걸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육십 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 60대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말이 우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세대도 없을 거라는 한탄이다. 비록 남북이 분단된 불완전한 평화이긴 하지만 근 반세기 가깝게 전쟁 없는 세상을 다리 뻗고 누리다보니, 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한창 좋은 나이를 중일전쟁 이차대전, 6'25남침 등 쉴 새 없이 겪은 전쟁의 공포와 궁핍이 우리 세대만의 불공평한 불운처럼 느껴져서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한탄 속에는 일말의 자긍심 또한 내포 돼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여름엔 쉰밥을 씻어먹고, 겨울이면 구들장 밑에 살인가스를 깔고 자도 윗목에서는 걸레가 어는 추위를 견딘 우리 세대로서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 만 불 시대의 풍요가 다 뉘 덕인 줄 아느냐?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견딘 내핍과, 초인적인 노동과, 지칠 줄 모르는 교육열 덕이라고 은근히 뽐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 그런지 우리 육십 대들은 할 말이 많다.
나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늦게 등단하게 된 이유를 물으면 오백 년은 산 것 같은 체험의 부피 때문에 쓰지 않을 수가 없었노라는 대답을 흔히 해왔다. 그건 궁핍과 풍요, 전쟁과 평화, 식민지 시대와 자주독립국가시대를 두루 경험한 우리 세대 공통의 시간 감각하고도 또 다른, 나만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조금도 과장 없는 진실이다.
농경시대의 수공업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나서 오늘날 천만 인구의 수도 서울 첨단의 아파트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나라는 개인을 스쳐간 문화의 부피가 나로서는 그렇게 버겁게 느껴진다는 얘기이다.
사실 내가 태어난 마을과 비슷한 이웃마을에서 태어나 우리 마을로 시집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우리 할머니의 육십 평생과 나의 육십 평생의 경험의 부피를 비교해 볼 때, 오백 년이라는 어림짐작도 과장은커녕 과소평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걸 보고 듣고 겪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풍부하고 특별난 경험에서 얻어진 지혜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때로는 귀찮아하고 천대까지 받는다는 게 우리 세대의 자격지심이자 비애이다.
우리세대의 가장 큰 자부심은 가난을 극복한 주역이라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리 시대의 약점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아무리 공치사를 안 하려고 조심을 하느라고 하건만도 워낙 가난의 기억이 우리 의식 속에 강력하게 늘어 붙어 있는지라 어느 틈에 그 티를 내고 만다.
그건 곧 구박을 자초한 결과를 가져온다.
자식들이 멀쩡한 가구나 가전제품을 바꾸는 걸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못하고, 먹다 남은 음식을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다 버리는 걸 보면 천벌이 내릴 것 같아 기어코 한마디 하고 만다. 그래서 아들 며느리한테 구박을 받고 손자들은 아예 상대도 안하려 든다.
내 친구 중의 하나는 멋쟁이 며느리가 계절이 바뀔 때마도 한 보따리씩 버리는 옷이 아까워서 몰래 집어다 두었다가 파출부한테 선심을 썼더니, 파출부가 할머니한테 무시당하기 싫어 그만 다니겠다는 통고를 해왔다면서, 서럽고 억울해서 울먹이며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댔지만,아마 집에서 며느리한테는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사촌뻘 되는 동갑내기 오라버니는 딸네 집에서 며칠 유하러 갔다가 딸이 식탁에서 아버지가 남긴 음식을 곧장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딸이 그 음식을 께적지근하게 여겨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하고 나서 하룻밤도 안 자고 아들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며느리 역시 먹던 음식은 자식이 먹던 거건 부모가 먹던 거건 다시 상에 올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만 안 보는데서 그렇게 한다는 것만이 딸과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그 며느리 역시 시아버지 보는 앞에서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대단한 시집살이처럼 일가친척한테 풍기고 다닌다는 걸 그 노인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며느리는 그 후 시아버지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한다고 했고, 시아버니는 아직도 며느리로부터 봉양을 받는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 세대가 받고 있는 효도라는 게 실은 이렇게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가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우리 육십 대는 소싯적에 거의 다 노부모를 모신 경험이 있고, 전쟁 중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노부모와 한방을 쓰는, 기막힌 신혼시절을 겪은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하게 개인 생활이 보장된 아파트나 단독주택의 가장 인기 없는 방 한 칸을 내주기만 해도 효자소리를 듣는 자식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산다.
더 기막힌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윗대처럼 경제적으로 전적으로 자식한테만 의존하지는 않으려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건만도 그런 열악한 지위를 감수한다는 사실이다
대가족제도의 장단점과 돈의 중요함을 일찍부터 터득했을 뿐 아니라, 산업사회화가 생활의 여유와 함께 여권신장 핵가족화 등 노후를 위협하는 징후를 충분히 눈치 채고 있었기 때문에퇴직금이나 자기 명의의 집 한 채 정도는 움켜쥐고 있는 게, 중산층 60대들이 그 윗대들과 다른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따로 나와 생활을 즐길 수도 있으련만 자식하고 같이 사는 게 남 보기에 좋다는 순전히 외관상의 이유로 속으로 곯는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흔히 한국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할 때 내실보다는 체면을 중시하고, 내가 어떻게 느끼나 보다는 남이 어떻게 볼까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세대가 60대가 아닌가 싶다.
60대의 또 하나의 슬픈 특징은 자랑거리가 없는 세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하고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술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기에 태어났다. 특별히 의식 있는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면 모를까, 보통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는 일본이 우리 조국인줄 알았다. 신사참배하면서 진심으로 일본이 승리하길 빌었고 궁성을 요배할 때는 가슴이 울렁거렸고, 미국과 영국은 사람의 탈을 쓴 귀축(鬼畜)인 줄 알았다.
우리의 할아버지대만 해도 조선왕조의 추억이 있고, 우리 아버지 대는 3.1운동의 찬란한 긍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구전으로라도 우리에게 물려줄 엄두를 못 냈다.
보통의 소심한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던 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걸 감히 상상도 못했고, 자식 대라도 갈등 없이 일본화 되어 일본 사람과 동등한 삶을 누리길 바랬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이북 어린이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걸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저럴 수 있나, 필시 살기 위한 연극일 거라고 비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일제를 격은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비인간적 독제체제가 국민을 외부와 고립시켜 길들이기로 작정을 하면, 인간을 얼마든지 바보나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는 걸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육십 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일본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에게 희미한 희망이 되기 시작한 건 이차대전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부모들은 마침 징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우리를 전전긍긍 숨기기도 하고 시골로 피난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징병이나 징용을 피할 구멍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약 최 일선에 서게 된다고 해도 일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처음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희망과 용기가 생긴 탓도 있었지만, 그 무렵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방송수신기는 비로소 외국에 있는 독립운동세력의 존재를 확신시켜주었고, 그건 유언비어의 형식으로 조선사람 사이에 널리 유포됐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을까봐 쉬쉬 목소리를 죽여 가며 수근수근 이승만, 김구, 김일성 이름이 오르내렸다. 한치 앞을 못 내다보고 오로지 노예처럼 기기만 하던 백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기 시작했고, 그 아득한 미래의 지평에 영웅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들은 영웅들의 일화 중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는 게 김일성에 관한 거다.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몇 백리 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발치산 활동이 그렇게 과장되고 신비화된 거였다.
드디어 일본이 망하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승리가 가져다준 선물일 뿐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절대로 안 망할 줄 안 신국(神國)을 무너뜨린 눈부신 강자들이 우리의 조국 한허리를 직선으로 두부모 자르듯이 잘라놓아도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독립이란 당하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여야 하거늘, 우리는 한 게 너무 없었다. 귀국한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그나마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줬지만, 그들의 세력다툼도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열 살이 넘어서 스무 살이 다 되어 비로소 한글을 가갸거겨 부터 배우는 창피밖에 뽐낼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단은 국토에만 한한 게 아니었다. 부모자식간은 죽으나 사나 공동운명첸 줄 알았는데, 연합군이 국토를 갈라놓은 것처럼 연합군이 가져온 좌우의 이데올로기가 부모자식 사이까지 이간질시켰다.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인, 부모세대가 현실안주적이라면 자식 세대가 이상주의적이라는 평범한 세대차가 좌우의 대립이라는 사상적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주제에 무슨 투철한 사상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젊은 혈기로 우리가 안 가진 걸 원했다. 북쪽에 이상향이 있을 것 같았다. 북쪽이 단행한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친일파의 철저한 숙청이었다. 해방 후의 남쪽 정국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건 친일파가 여전히 거들먹거리며 요직을 차지하고, 일제의 충직한 개 노릇을 하던 악명 높은 형사가 빨갱이 잡아들이는 도사로 둔갑하여 경찰 간부가 돼 있다는 기막힌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느냐는 식의 편리하고 구역질나는 아량으로 오직 미군이 베푸는 밀가루와 캔디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삼팔선을 꾸역꾸역 넘어오는 북쪽 사람들의 이북정치에 대한 증언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월남민들은 다 지주나 친일파 계급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남북이 따로따로 독립을 하고 나서 6'25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회주의 체제에 호감을 가졌던 우리의 꿈은 산산이 깨졌다. 이상주의란 결국은 자유주의였던 것이다. 깨진 꿈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우리는 북으로도 끌려가고 남쪽에 남아 국군이 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마침내 빛나는 이십대가 돼 있었고, 우리가 떠다 밀리다시피 얼떨결에 주역으로 등장한 첫무대는 불행하게도 동족상잔이라는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잔인한 전쟁터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세대는 다시 우리 세대끼리 분열하여 좌우 남북으로 편을 갈라 필살의 총부리를 겨누었다.
내 졸업 앨범을 보면 한 반에 일 할 정도가 6.25때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여고졸업생이 그 정도니 남자들은 그 정도가 훨씬 더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어떤 이민족끼리도 그렇게 잔인하게 싸우진 못할 것이다. 내 핏줄한테 총을 겨누기 위해선 그 정도로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상은 전선에서 만 행해진 게 아니었다. 후방에서도 저놈은 빨갱이라는. 저놈은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간단하게 남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때 사람도 아니었다우, 라고밖에 그 당시에 대해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도 통일은 되지 않았다. 직선으로 그어졌던 삼팔선이 휴전선이라는 곡선으로 바뀐 게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였다. 그리고 나서 거칠 것 없는 이승만 독재, 반공이 국시가. 빨갱이로 모는 게 정적을 숙청하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 되어도 우리는 수굿이 할 말을 잃었다.
어떻든 공산치하보다는 낫다는 걸 몸소 체험한 뒤였으므로, 그런 세상에 살아남은 우리는 결혼을 하고, 자식새끼를 놓아 식구를 불리고, 자식이라도 좋은 세상 보게 하려고 마소처럼 일해서 번 돈을 교육비에 아낌없이 부었다.
4. 19가 이승만 일인 독재에 종식을 고했지만 우리 세대는 부끄러운 목격자였을 뿐 주역은 아니었다. 삼일운동이 우리에게 빛나는 전설이었을 뿐 주역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역의 자리가 주어졌던 것은 오직 6.25전쟁밖에 없었다니,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세대인가. 4.19의 감동은 목격자 노릇만으로도 벅찬 것이었지만, 그 후에 목격한 좌절의 쓴 맛은, 학생운동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시각의 뿌리가 되었다
그 후에 등장한 군사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숨통을 운동권에 걸면서도 내 자식만은 거기 휩쓸리지 않기를 바랬다. 어느새 우리 세대는 대학생 자녀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자식을 붙들고 눈물겨운 설교를 하다가도 다음날 등교하는 자식의 등 뒤에다 대고는 정 데모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앞장은 서지 말아라, 맨 뒤에도 서지 말고 가운데쯤에서 얼쩡대라는 비열한절충안을 내놓곤 했다. 그건 곧 혁명에 대한 우리 세대의 본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른 자식들이 자라서 이제 제 자식을 거느리고, 제 자식 귀한 줄만 알지 부모는 쉰 밥 알듯 하면서, 일과 여가를 적당히 즐기는 한창 나이가 돼 있는 게, 우리 육십 대의 한심한, 그러나 아직은 동정 받고 싶지 않은 평균치의 처지이다.
일전에는 정년퇴직한 육십 대의 스승님을 단체로 모시고 일본여행을 다녀온 젊은이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스승님들은 평소 어찌나 반일감정이 철저한지 일본을 한 번도 일본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걸 못 봤다고 했다. 쪽발이 아니면 왜놈이라고 불렀고,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본말의 잔재에 대해서도 어찌나 민감한지 그 앞에서 함부로 말하기가 겁나는 철통같은 민족주의자들이어서 일본 여행을 권할 때도 적을 제압하려면 적을 알아야 된다는 식의 적대감을 부추겨서 겨우 성사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말이 통한다는 걸 안 그 스승님들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의기양양해져서 제각기 개인행동을 하려 들었다. 어느 날 밤에는 숙소에 한 명도 안 남고 다 외출을 했는데 일본인 동창을 만나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하긴 동창에 국경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까지는 좋은데 단체로 동창과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마련해서 거나하게 취하자 일본 노래에다 일본 군가까지 뽑는데, 그 향수어린 감개무량한 표정은 차마 못 봐 주겠더라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는 필요에 의해 배운 일본어지만 유창한데, 노인들이 하는 일본말은 오랜만에 쓰는 거라 옆에서 듣기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정도건만 어디서나 그걸 써먹지 못해 나서니 정말이지 민망해서 죽겠더라는 것이었다.
창피하더라도 이해해다오, 우리는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단다. 우리는 삼일운동 세대도 사일구 세대도 아니란다. 우리는 정통 육이오세대일 뿐. 그동안 너희들이 유창하게 하는 꼬부랑말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단 하 나 할 줄 아는 외국어를 그렇게라도 과시하고 싶었겠느냐, 그렇다고 그분들의 반일감정이 가짜라고 비웃지 마라, 우리세대의 운명적인 이중성일 뿐인 것을.
우리는 기꺼이 현재 너희들이 누리는 부의 밑거름이 됐으면서도, 돈의 중요성과 함께 돈의 가치의 부정적인 면을 함께 꿰뚫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겠느냐?
그것만은 인정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