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8 나(B)해 연중4주일
신명 18:15-20 / 1고린 8:1-13 / 마르 1:21-28
사랑을 얻기 위한 지식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몸을 세우고 이름을 드날린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유학의 경전인 효경(孝經)에서 나온 말입니다. 입신양명은 유학의 핵심가치 중 하나로서 한국인들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준 가치입니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입신양명을 통하여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인 이유가 아마도 입신양명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학문과 교육을 통해 지식을 얻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어 출세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를 위해 살다 보니, 경쟁이 점점 치열하게 되어 한국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경쟁이 심한 곳이 되었습니다. 또한 때때로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과 개인의 행복이 충돌할 때, 입신양명은 개인의 꿈과 소신을 포기하고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제약하는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 오늘날 한국사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입신양명에 대한 의미도 다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입신양명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치관임에는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입신양명이란 가치관이 한국교회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요?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맞불려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경우 등록교인이 약 50만명, 출석교인이 약 15만명일 정도로 단일교회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될 정도로 이른바 ‘입신양명’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선 하느님 아버지께 크게 효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효심이 깊은 한국의 목회자와 신도분들의 열심 덕분에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하여 많은 대형교회들이 생겨나서 한국과 세계 기독교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대한민국은 ‘입신양명’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나라입니다. 그 결과 우리 한국인들은 행복하고 평화로운가요?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왜 이리도 첨예한 갈등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상대방을 파괴하려는 마음과 행동이 증가할까요? 왜 한국교회는 다른 나라 교회와는 달리 유달리 교단분열이 심할까요?
오늘 들은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지식이 많고 그래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자들이 잊고 있던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십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반면에 이제 갓 입교한 신자는 아직 신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역량이 모잘랐습니다. 예컨대, 당시에는 신전에 바쳐진 고기 등을 제사가 끝난 뒤에 팔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사서 먹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토 교회는 이 고기를 사서 먹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식이 많은 신자들은 그 우상은 그 자체가 신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이 제작한 물건이니 그 앞에 있는 음식을 사서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제 막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은 그래도 신전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으면 간접적으로나마 우상숭배에 가담한 것이 아닌가 하고 꺼림칙하게 여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조소하고 무시하는 바람에 신앙공동체가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지식이 많은 신자들의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아직 신앙에 막 입문했거나 이교도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분별하는 역량이 부족한 신자들을 그저 얕잡아 보기 보다는 그들의 눈높이 맞춰서 자신의 주장을 잠시 보류하고, 그들과 같은 자리로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어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뛰어난 학자인 동시에, 겸손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지식과 사랑을 겸비한 인물인 것입니다.
사랑이 깃든 지식, 사랑이 깃든 가르침이 가져오는 놀라움은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 중에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아마도 당시 율법학자들의 천편일률적인 해석과 설명과는 다른 신선한 가르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악령 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예배 중에 발작을 일으키자, 예수님은 악령을 추방하시고 그 사람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 즉 쉬어야 하는 날이라서 아무것도 심지어 예배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러한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 관점에서 가르치셨고, 실제로 악령 들린 사람,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정신분열증과 같은 증세를 보인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처럼 기존의 지식인들인 율법학자들과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가르치시고 행동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실, 율법도 인간을 보다 더 사랑하기 위해 제정한 법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기반한 예수님의 지식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있는 새 교훈이다.’(마르 1:27)”라고 반응을 보이면서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에 쫙 퍼지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1독서 신명기를 보면, 하느님은 예언자를 세워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신명18: 18, 20)”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불림받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주님의 예언자로 세워졌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인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예언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내 자신의 지식, 내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 시대 회당에서 가르치던 율법학자처럼 아무런 변화 없고 늘 그렇고 그런 뻔한 가르침이 반복되는 예배가 되거나, 혹은 고린토 교회처럼 서로를 단죄하는 분열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신명기 저자가 지적하듯이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우리 각자가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될 지식은 참 사랑이 그 안에 깃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살릴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오직 나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구가 아니라, 나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1월28일 오늘은 우리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74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만큼 하느님에 대하여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려고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한 학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성서와 전통, 이성(理性)을 강조하는 성공회로서는 매우 중요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거나 그걸로 남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신부로서 수도자가 지녀야 할 겸손과 순명, 청빈의 덕을 열심히 실천한 분이셨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자 열망한 충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는 미사 중에 신비로운 체험을 하였는데, 그 후 연구와 집필활동을 멈추고 자주 하느님의 초월성을 향하여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지식과 기도를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주님은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엄청난 신비를 맛보게 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신비를 체험한 그는 하느님처럼 신비롭고 위대한 침묵에 잠겼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지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이지만, 진정한 지식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영원을 향해 갈 수 있는 지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지식이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온 지식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궁극에는 영원하신 하느님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성도분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